
근대 이후로도 수많은 실종사건이 있어왔지만, 전 세계의 화제가 정도의 유명인사 실종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이번에 소개할 사건은 1960년대 미국을 뒤흔든, 아마 어쩌면 해당 decade에서 가장 유명한 실종사건일 것이다.
바로 Michael C. Rockefeller(위 사진) 실종사건이다.
(1900년대 이후로 이에 비견할 만한 실종사건으로는 지미 호파 실종사건이나 호주 총리 실종사건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파장이 컸던 사건이다.)
일단 마이클 록펠러의 ㅎㄷㄷ한 스펙부터 살펴보자.
'록펠러'라는 성,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그 유명한 석유재벌 록펠러 가문의 4대손이 바로 마이클이었다.
록펠러 가문은 근대 이후 한정으로 인플레이션을 고려했을 때 최고 갑부 1위로 꼽힌다.
(거품빨인 로스차일드는 제발 좀 빼자)
마이클의 아버지인 넬슨 록펠러는 마이클의 실종 당시 뉴욕 주지사였고, 훗날 제랄드 포드 행정부의 부통령이 된다.

(이 사람이 바로 넬슨 록펠러.)
마이클 록펠러는 넬슨 록펠러의 막내아들로서 어렸을 때 부터 영재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이때부터 보헤미안의 싹수가 보였다고 한다.
엄청난 거물 집안의 도련님이라는 자신의 처지와는 반대로 돈, 물질 이런 것에 초연한 이상주의자의 면모가 매우 강했다고 함.
어쨋든 돈빨+영재빨로 마이클은 ㅅㅌㅊ의 인생 가도를 달린다.
하버드를 가볍게 수석졸업한 마이클은 6개월간 군에서 복무하기도 하고,
피바디 뮤지엄 발굴팀과 함께 아프리카 여행을 하며 고고학 발굴에 힘을 쏟아, 상당한 성과를 얻는다.
이를 통해 마이클 록펠러는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명성을 쌓게 되고, 이는 후술할 뉴기니 탐험으로 이어진다.

만약 실종되지 않고, 생존했다면 인디아나 존스 실사판을 찍고 있었을지도 모를 이 젊은 고고학자의 인생은 뉴기니에서 종점을 고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의 성공으로 마이클 록펠러는 뉴기니 섬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도 뉴기니 섬하면 개오지의 느낌이 강하지만, 196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서양인들의 눈에 뉴기니 섬은 지금 우리가 화성을 보는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이었다.
뉴기니 섬은 미개한 민족들만 사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나름 수천년이라는 세월동안 농작물을 자급자족해온 섬이고, 외부와의 교류가 철저히 차단되온만큼 민족학적 혈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이클 록펠러는 그런 점에 주목하여 뉴기니행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피바디 뮤지엄 발굴팀과 다시 한번 탐험을 개시했다.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다니 족과의 짧은 조우를 뒤로 하고,
마이클 록펠러는 현지 가이드 2명과 네덜란드인 인류학자 1명의 최소 인원만 동행한 채 네덜란드 령 뉴기니의 남부로 향한다.
여기서 마이클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강의 중간에 암초가 많고, 또 폭포가 많은 뉴기니의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카누를 선택했다.
결국 1961년 11월 17일,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던 이들의 카누가 전복된다.
현지 가이드 2인이 먼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헤엄을 쳤다. 이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기다리다 지친 마이클 록펠러는 내가 직접 나서겠다며 역시 헤엄을 쳤다. 그는 그 뒤로 영영 사라졌다.
유일하게 발견된 것은 끝까지 카누에 매달려서 버티던 네덜란드인 인류학자인 르네 바싱이었는데,
그는 훗날 진술에서 마이클이 육지에 발을 딛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이로서 익사설, 혹은 악어에게 잡아먹혔다는 설은 사그라들었지만, 바싱의 진술이 워낙 오락가락했던 관계로 석연치 않았다.
뉴욕 주지사의 아들이자 대재벌 록펠러 가문의 일족, 게다가 전도 유망한 젊은 고고학자의 실종이라는 사건은 곧 대서특필되었고,
이윽고 바싱의 증언을 토대로 수색작업이 개시되었다.
정부에서 파견된 수색팀 이외에, 마이클의 아버지 넬슨은 록펠러 가문의 돈빨을 총동원해, 어마어마한 인력과 돈을 투자하여 수색작업을 벌였다. (이는 네덜란드가 점령 초기 뉴기니 남부에서 벌였던 국가적 탐사작업의 수준을 넘어선 엄청난 규모였다.)
오죽하면 강바닥, 숲바닥 전체를 긁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마이클 록펠러는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수색팀은 서둘러 사망으로 '추정'하고 사인은 익사로 '추정'하여 발표해 버린다. 당시 네덜란드의 뉴기니 지배에 대한 불안한 정국이 확산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 정부는 수색에 비협조적이었고, 수색은 서둘러 종결되고 만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 심지어 수색팀 조차도 익사라 믿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사인은 바로 '식인종에 의한 피식' 이었다.

그 이유는 마이클 록펠러 일행이 탐험한 지역 (Asmat)이 식인종이 쩔어주게 창궐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958년에는 순찰중이던 네덜란드 경찰이 잡아 먹히기도 했다.
유독 Asmat 지역의 부족들은 백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는데, 그들은 백인을 일종의 사악한 마법사(Sorcerer)로 인식하여, 그들을 잡아먹음으로서 마력을 흡수한다고 생각했다. 훗날 해석으로는 백인들이 사용한 총을 마법의 일종으로 여긴 것이라 보고 있다.
수색이 어영부영 종료되었지만, 이쯤에서 포기할 록펠러 가문이 아니었다.
마이클의 어머니인 메리 록펠러는 여러명의 사립탐정을 고용했고, 그들을 뉴기니 정글로 파견했다. 마이클의 생사 여부를 입증할 증거품을 가져오라면서.
물론 막대한 보상도 함께였다.
결국 수년 뒤 마이클 록펠러의 옷이 발견된다.
MCR이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는 식인종들이 발견되었고, 정황상 식인에 의한 피살이 확실해 졌지만
문제는 끝끝내 마이클 록펠러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가설에 의하면 익명의 사립탐정이 마이클의 어머니인 메리 록펠러에게 3점의 유골을 전달했고, 메리는 25만 달러를 지불했다고도 하나 록펠러 가문은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한다.)
이에 혹자는 이상주의자던 마이클 록펠러가 현지 문명에 동화되어 버린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뉴기니 섬에는 마이클 록펠러와 관련된 물건을 찾으러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를 들어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마이클 록펠러는 스스로 고고학의 한 분야가 되었다고도 한다.
한창 때는 사람들이 얼마나 들쑤셔 놨으면, 뉴기니의 부족 중에는 수통이나 라이터에 MCR 약자를 새긴 물건을 만들어 파는 곳까지 있을 정도다.)
마이클 록펠러의 행방은 2013년인 현재까지도 묘연하다.
일게이들을 위한 3줄 요약
1. 마이클 록펠러라는 가문빨+영재빨의 고고학자가 있었다.
2. 뉴기니 탐험중 실종되었는데 식인종에 의한 피살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3. 아직까지도 종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