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든 충청이든 경상이든 각 지방의 대표 독립운동가라는 게 적어도 몇명 씩은 있다. 유관순, 김좌진을 낳은 충청은 물론이고, 서울은 이봉창, 이범석, 지청천, 경기는 조소앙, 여운형, 경상은 김규식, 김원봉, 신돌석, 이육사, 이상화 등등 수 많은 독립투사들이 있다.

 

근데 전라도는 알만한 독립운동가가 단 한 명도 없다. 전라도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출생 즉시 본가인 논산으로 가 버린 후 다시는 전라도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서재필을 제외하면 전라도와 관련 있는 이름있는 독립운동가는 단 한 명도 없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친일파는 정말 많다. 삼양그룹 창업주 김연수, 일제 순사 금호아시아나 창업주 박인천, 악질 친일 시인 서정주, 소설가 채만식, 그것도 모자라 을사오적 이지용까지 낳은 동네

토요타 다이쥬, 신기남의 아버지 시게미쓰 구니오, 식산회사 서기의 자식 정동영,

친일 명가 고부 군수 조병갑의 증손녀인 전 청와대 홍보수석 조기숙 등등.

전라도가 지지하는 민주당의 지도부라는 게 모조리 친일의 찌꺼기들.

 

그 중에 저 신기남의 아버지 중광국웅(重光國雄; 시게미쓰 구니오).

그가 헌병 훈련소에 들어가서 적은 훈련병 일기가 하도 감동적으로 친일적이다 보니 당시 삼천리라는 잡지 신년호에까지 게재되었다.

 

삼천리 제13권 제1호(1941년 1월 1일)

 

 

"나는 전라북도 촌에서 낳습니다. 소화 십삼년에 사범학교를 마치고 전라남도 화순 청풍 소학교에서 선생노릇을 하다가, 지난 팔월에 영광스런 입소가 허가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선생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을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얕은 데로 흘으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 의레이 할 일입니다.

 

그렇게 당연한 것을 칭찬한다든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면 내가 지원병이 늦게 된 것을 꾸지람하는 이가 없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반도동포의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내선일체가 되는데 가장 먼저 할 것은 지원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반도 동포들이여! 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요. 누구든지 좋습니다. 부자집 자제가 맨 먼청 들어오시오. 괴로움이나 의심이나 또한 나의 이 감격을 한가지로 난호지 않으시렵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북 남원 출신 신기남의 아버지는 일본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 으레이 할 일이며, <자신이 지원병이 늦게 된 것을 꾸지람하는 이가 없음을 심히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고>, 이는 반도 동포의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영광스런 입소가 허가된 감격을 함께 난호지(나누지) 않겠느냐고 힘주어 역설한다.

 

신기남은 처음에는 지 아버지가 일본 헌병이었다는 사실이 나오자 펄쩍 뛰며 가만 있지 않겠다고 했다. 대단히 뻔뻔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나 분명한 친일의 자료가 있고, 게다가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선생 노릇을 하다가 자발적으로 헌병 훈련소로 입소했으며, 무엇보다 해방 당시의 남북한 친일청산의 기준에 의하더라도 일반 장교와는 전혀 다르게 헌병이란 직책만으로 당연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었던 신기남의 아버지 중광국웅이나 김희선의 아버지 만주특무(고등경찰)를 친일인명사전에서 빼려 했던 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박정희는 친일파로 당연히 분류하겠다고 나선 점이다.

정의를 운운하는 것들이 편파성의 극치를 보여 주었던 사건이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산하기관이며 그 지도급 인사들이 모조리 박정희에 억하심정을 가진 인물들임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는 일이다.

 

연구소 소장 임헌영은 박정희 정권 시절 1974년과 1979년 2차에 걸쳐 투옥된 경력이 있고 10년 전인 1998년에야 복권된 인물이다. 박정희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다.

이사장 김병상은 1977년 유신헌법 철폐 기도회 사건 때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인천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대책위원장 역할을 하며 노동운동과 박정희 반대운동을 했다.

명예 이사장 이돈명은 1974년 4월의 민청학련 사건 이후 반 박정희운동을 하면서 1970, 80년대 인권운동을 하고 한울회, 전민학련, 전민노련 사건 등에서 변호사로 활약했었다. 그는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의 변호사까지 맡았던 사람이다.

 

박정희를 평가하겠다는 그들의 면면은 한결같이 이러하다.

 

구체적인 반민족 행위가 전혀 없었으며 해방 당시에는 전혀 친일파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박정희를 어거지로 친일파에 끼워 넣으려는 양심불량의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