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장군, 한국의 패튼이라 불렸던 박정인 장군.

그의 일대기를 짤막하게 나열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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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율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두뇌를 지닌 지장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박정인 장군. 해방이 되고난 후 함흥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반공사건에 연루되면서 월남을 하게 된다.

육사 6기생으로 소위에 임관하여, 한국전쟁 당시에는 육본 작전장교(대위)로 전쟁에 참여했다.

낙동강벨트 방어전 당시 6사단 작전장교로 있으면서 성공적인 방어를 해냄과 동시에 북한군 연대들을 후퇴시켜버린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육사 동기들 중에서도 당시 180이 넘는 체구의 상당한 강골을 자랑했음은 물론이지만, 본업인 작전병과에서의 활약 또한 두드러졌다.



2. 절대로 적에게 굴복하지 않는 강장

낙동강벨트 방어전 이후 그는 소령으로 진급하나, 압록강 지역까지 북진하는 도중 불행하게도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당시 상황은 중공군에 포위된 1개 연대를 구출해내기 위한 구출작전이었으나, 중공군이 넘치는 병력과 기동력을 앞세워서 후방을 차단하는 바람에 사방의 포위를 뚫을 수 없었다. 연대는 거의 분해되고 연대장마저 전사했던 최악의 상황.


그러나 절대 북한군에게 정보를 넘겨줄 수 없다는 각오로 탈출을 감행하나 결국 붙잡혀버렸다. 그러나 압송 도중 그에 굴하지 않고 또다시 탈출을 감행.

동료들과 함께 박정인 장군이 가까스로 본대로 복귀했던 당시 환경은 영하 40도에 가까운 극한의 환경과 360km가 넘는 거리였다. 

또한 그는 탈출하는 과정에서도 작전장교로써의 감각을 살려 곳곳에 산재한 북한군 기지와 병참라인 정보를 획득해서 싸그리 폭격시켜버림. 

당시 폭격된 곳은 북한군 주요 거점들 중 하나이자 군수창이 있던 원산 지역으로써, 연합군 북진의 기회를 제공해주는데도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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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사단의 전설을 만든 장군

이후 승승장구한 박정인장군은 3사단장으로 발령을 받는데, 강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처럼 이 때 이후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3사단이 만들어진다.

철저한 대비태세와 전투력, 그리고 확실한 주적관을 무엇보다 강조했던 박정인 장군의 대략적인 명령들은 이렇다.


- 전장병 상시 철모착용 (언제나 전투태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 총기보관대 자물쇠 죄다 없애버림 (전시에 언제나 총을 들고 뛰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 총검술방향, 화장실, 장병막사, 포배치 전부 북쪽으로 돌려버림 (부모형제를 향해 총칼을 향하지 마라!)

- 영내 구타, 도박, 외상술 금지 (군기는 언제나 철저하게 유지하라!)

- 경례구호는 '백골'로 통일 (3사단 경례구호인 백골은 이때 확립됨)


원래가 북에서 월남한 반공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출신들이 주류였던 백골단은 사기, 전투태세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강군이었고, 

여기에 박정인 장군의 지휘력과 사상이 더해지자 3사단은 더욱 더 강한 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3사단 18연대는 진백골이라 불리며, 현재까지도 한국전쟁 당시 단 한번의 패배도 없던 무패의 부대임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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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한군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 용장

그가 연대장을 맡고 있던 때, 당시 군기는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은 심심하면 군사분계선을 넘어왔고, 아군은 그들과 때로 어울려 놀거나 담배나 술을 교환하기도 했다고.

박정인 당시 연대장은 과감하게 부대 내 기강을 바로잡고, 특공소대를 조직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인민군을 싸그리 생포해 버렸다.

인민군이 항의를 하며 협박을 해오자 그는 '전차대 1개 연대가 있으니 한번 내려와 봐라!'라 일갈했고, 인민군은 더이상 저항치 못하고 후퇴했다.


당시 그는 중대장들을 향해 흐트러진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대대장의 총과 무기는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라고 준 것이다! 적의 손가락이 넘어오면 손가락을 자르고, 발가락이 넘어오면 발가락을 잘라라!

그것이 대한민국이 당신을 무장시킨 유일한 이유다! 차후 우리 지역에 넘어오는 적들은 즉각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아라!"


이런 정신자세를 높게 평가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장군 진급 후 친히 찾아가 공로를 치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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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물러서지 않는 장군, 그러나..

그렇게 군사적 대치 중이던 어느날, 북한군이 DMZ주변 아군들에게 무단으로 기습총격을 가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아군은 표지판 보수작업 하고 오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 


이 보고를 듣자마자 박정인 사단장은 인민군에게 더이상 사격하지 말 것을 확성기로 권고하지만, 인민군 측에서는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정인 장군은 즉시 보복타격을 감행한다.

부상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연막탄을 뿌림과 동시에 정찰기를 띄운 후 155미리 곡사포 등 수단가능한 전투력을 총동원해서 적 진지를 통째로 날려버림.

거기에다가 전 사단 내 차량을 다 끌고와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군사분계선 근처까지 돌진시켰고, 이에 기겁한 김일성은 전군 동원령까지 내렸었다 한다.


이때 운지한 북한군의 숫자는 36명. 아군의 피해는 부상자 4명이었다.

이 전투는 휴전 이후 첫 전투였고, 그 뒤로 3사단지역에서의 도발은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또한 이를 계기로 당시부터 지금도 북한군은 3사단 백골부대를 마치 호성성님 대하듯 오줌을 지린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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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일에 휴전상황 내 책임론이 대두되었고, 박정인장군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홀연히 군문을 떠나버린다.

3사단을 떠나면서 박정인 장군은 어떤 변명도, 후회의 말도 남기지 않았다. 


'북진통일의 성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사단장직을 떠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병들은 나의 뜻을 받들어 선봉사단과 북진통일의 임무를 기필코 완수하기를 당부하며, 전 백골사단 장병들의 무운장수를 빈다.'


전 장병들은 그의 퇴임을 눈물로 보냈고, 그의 수행부관은 당시 맥아더 사령관의 계급이었던 5성장군의 칭호인 왕별이 새겨진 성판을 선물했다.




6. 군을 떠난 후에도 변하지 않는 애국충정

군을 떠난 뒤에도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그는 자신이 연대장일 때 대대장 직위에 있었던 장태완 장군을 만나게 된다.

당시 재향군인회를 발족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정인장군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인맥으로 적극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

양으로 음으로 재향군인회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현재 재향군인회는 육해공 전군 전역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유가족지원, 사회봉사활동 등의 수많은 일을 하고 있다.

재향군인회 산하 기업 중 잘 알려진 것은 재향군인회상조와 중앙고속이 있다.


참고로 장태완 장군은 전장군의 12.12사태를 마지막까지 막으려 분투했던 수경사령관으로써, MBC 제 5공화국에서 김기현씨가 열연했던 그분이다. 

야이 반란군놈의 새끼야!!!

몇년 전 안타깝게 별세하셨고, 최근에는 그의 부인 되시는 분께서도 고인을 향한 그리움에 투신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잠시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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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90을 향해가는 노구임에도 국방기록물편찬사업, 각종 기념사업회 등 많은 분야에서 현역들을 능가하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그는 나라를 위한 사명으로 아들과 손자 모두 육군사관학교를 보냈고, 지금은 3대가 국방에 힘쓰는 병역 명문가의 시조이기도 하다.

맨 왼쪽이 박정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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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평도 사건 이후 박정인 장군은 군 지휘부에게 일갈했다.

"군 지휘부는 상황과 상부 눈치만 봐서는 안된다. 지휘관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전에는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한다!"


그의 일갈이 무색하지 않게 되어서였을까, 현 국방장관인 김관진 장관 또한 같은 자세로 국토 수호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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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을 마치며 

진짜 평화를 유지해 주는 건 가혹한 환경에서 차가운 냉대를 받아도 묵묵히 그 자리에 있는 훌륭한 군인들이다.

이런 입으로만 평화를 일삼는 정상배들이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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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게이들이든 유입종자든 정말 최전선에서 대한민국을 지켜왔고, 또 지켜가고 있는 이분들에게 잠깐이나마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정인 장군과 김관진 장관님의 건강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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