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이었다. . . 5.18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다가 군법회의에 넘겨진 기동타격대원 30명은 이렇다. 윤석루(20)-자개공, 이재호(33)-회사원, 이재춘(20)-방위병, 양기남(19)-샤시공, 임성택(17)-양복공, 구성회(16)-양화공, 오정호(33)-식당종업원, 박승렬(20)-레코드사, 박명국(18)-양화공, 김상규(19)-전파사, 박영수(18)-도자기공, 안성옥(19)-목공, 김두전(19)-재수생, 정광호(20)-타일공, 염동유(23)-다방, 이성주(18)-차량조수, 김공휴(19)-나전칠기공, 남승우(19)-삿슈공, 도준식(23)-식당종업원, 남영관(18)-농업, 박홍식(21)-목공, 김기광(18)-고3, 박인수(21)-노동, 김여수(20)-용접공, 나일성(18)-가구공, 김태찬(19)-석공, 김행남(16)-노동, 김재귀(16)-고2, 영용섭(19)-나전칠기공, 장승희(19)-양화공. .”
구성회(16)-양화공
박명국(18)-양화공
장승희(19)-양화공
양화공이란 구두 만드는 공돌이를 말한다. 맞춤구두 이런게 아니라 기계대신 구두를 조립하는 공돌이다.
예전엔 구두가 귀했으나 수제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대량의 양화공이 필요했고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져버린 직종이다.
지금에야 직업에 귀천이 없고 어느직종이든 장인! 달인! 칭호를 받을 수 있지만...
1980년 당시 대한민국에서의 양화공이란 직업의 위치는 어느정도 였을까?
그래서 "양화공" 네이버 검색을 해봤는데 허허 참.....
검색하자마자 첫페이지 부터...살인...방화...파업...해고...뭐 이런게 나오노.....
더 중요한걸 알려줄까?
저기 내가 밑줄쳐놓은 기사들은 자그마치 1930년대 기사들이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930~40년당시라면 구두가 꽤나 귀했을 시기였을텐데 그때 부터 벌써 밑바닥이었노? ㅋㅋㅋㅋㅋㅋ
더우기 그아래 지식빽과를 보니 이런게 있더군
무산자동맹회 1922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운동단체
회원은 언론기관과 청년단체·노동운동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태반이 동경(東京) 고학생출신이어서 조선고학생동우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초 노동자들의 지지 속에서 활동을 하였는바, 이는 1922년 12월 22일 개최한 제1차강연회에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인파인 1,500여 청중이 참석하였고, 그 가운데 양화공(洋靴工)만도 무려 200여명에 달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 날 강연회에서 김한이 ‘기아에 빈(瀕)한 양화직공’, 소림양화점(小林洋靴店) 직공 김동원(金東源)이 ‘양화공의 생활실태’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는데, 모두 격렬한 어조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빨갱이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오늘날 직업으로 치면 아마도.................
염전노예? 정도되는거 같다.
오늘날 직업으로 비유하기가 힘든게 오늘날엔 이런 일들을 죄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고 있거든...
정리해보면
1. 1980년 광주에선
2. 16~17살 먹은 아새끼들이
3. 탈취한 총기를 휘두르며 기동타격대 놀이를 했단다.
4. 그들의 직업은 "양화공"이고
5. 오늘날로 치면 외국인 노동자들 정도 되는거다.
한줄요약들어간다.
PS : 이짤 합성인줄 아는게이들이 있던데 ㅇㅂ는 팩트만을 말하는거 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