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게이들? 글의 제목에서도 보다시피 지금부터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西晉)에 대해 연재글을 써볼까 해.
내가 워낙 역사에 관심많은데다 특히 중국의 서진사에 대해 흥미가 가서 여러모로 파고 공부해 봤더니 꽤나 골때리는 왕조였다는 거지. 하지만 서진은 비교적 중국사에서도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않는 위진 남북조 시대인 탓도 있어서인지 <삼국지> 의 유명세 덕분에 유명해진 바로 앞시대, 즉 삼국시대는 다들 빠삭하지만 그에 비해 바로 뒷시대인 서진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것 같아.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시황의 진(秦), 고조 유방의 한(漢)에 이어 타이틀은 중국의 세번째 통일왕조인데 고작 50년 남짓 밖에 못갔고 그 몰락과정이 꽤나 흥미로워서 이렇게 연재 뻘글을 쓰게 되었네. (물론 앞선 은, 주 시대는 제외하고 말이지)
뭐 관심없는 게이들은 그닥 흥미를 못느끼겠지만 혹시나 좀 역사에 관심있는 게이들은 그냥 이런 나라도 있었구나 하는 마인드로 가볍게 읽어줬으면 해. 참고로 좀 길게 쓸 생각이야.
게이들도 잘 아는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위촉오 삼국도 아닌 사마씨의 진(晉)이었다.
<삼국지> 읽어본 게이들도 알다시피 이 사마씨는 위(魏)의 신하였어.
사마의
줄기차게 북벌해온 촉(蜀)을 연이어 막아내어 공신이 된 사마의를 필두로 하는
사마씨는 위나라의 조씨 황족들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하지.
사마소
그리고 사마의의 뒤를 이은 두아들들인 사마사, 사마소는 과거 조비가
후한(後漢)의 헌제를 겁박하여 황위를 찬탈했던 것처럼 똑같이 위(魏)의 마지막 황제
원제(元帝) 조환을 겁박했고 사마소는 기어코 진왕(晉王)의 자리에 올라 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리고 서기 265년, 그 아들인 사마염이 위(魏)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元帝) 조환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양위를 받아 비로소 진(晉) 제국을 건국하게 돼.
연호는 태시(太始). 즉 거대한 시작이란 뜻이다. 사마염의 야망과 포부가 느껴지는 연호라 할 수 있겠는데,
그도 그럴게 게이들도 알다시피 진나라는 삼국 중 최강국이었던 위나라를 그대로 계승했고, 더불어
과거 촉(蜀)까지 아우른 직후였어.
후한 13주 중 10개 주를 장악하고 있었고 반면에 삼국 중 유일하게 남은
오나라는 고작 3개 남짓 한 주로 버티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하지.
후한 13주 전도
위 지도를 참고하면서 읽으면 더 도움이 될거야. 오나라는 양주(楊州), 형주(荊州), 교주(交州) 이 3개 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그나마도 당시엔 죄다 변방이었다. 반면 진나라는 계란 노른자 땅인 중원, 더욱이 북방과 과거 촉의 영토였던
익주를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국력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이었어.
셋 중 하나가 없어지니 남은 둘은 필연적으로 대치하게 되는데, 진과 오가 그랬어.
국력도 빵빵하고 마침 나라도 새로 열었겠다, 자신감 충만해진 진나라 내부에서도 오정론(吳征論)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오정론' 한자 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오나라를 정벌하자' 라는 주장이다.

<삼국지11>에서의 양호와 사마주
사마염도 이에 호응하여 오 정벌 준비에 착수해. 삼국지를 읽어본 게이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양호나
사마의의 9남, 사마주를 각각 오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형주(荊州),양주(揚州) 전선으로 보내어 일임하게 한다.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잘 모르는 게이들은 위 지도를 참고해서 읽으면 돼)
이렇듯 개국 초부터 통일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던 진나라였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착착 진행되어가던 통일사업에 제동이 걸리게 돼.
바로 서기 270년, 양주(凉州)에서 발발한 '독발수기능의 난' 때문이었어.
한자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여기서 양주(凉州)는 위에서 말한 양주(揚州)와는 행정구역이 다른 서북쪽 지방이야.
(이것도 위의 지도를 참고하면서 읽으면 되겠어)
더 쉽게 말하자면 게이들도 익히 아는 마등이나 마초가
근거지로 삼았던 서량 일대가 양주(凉州)라고 하면 더 이해가 쉬울려나?
독발수기능
독발수기능(禿發樹機能)은 이름에서도 오랑캐 냄새가 물씬 풍기듯이 선비족의 수령이었어.
독발수기능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란의 규모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여.
선비족을 비롯한 당시 중국 서쪽 변방에 살던 강(羌), 저(低)족과 같은 소수민족들은 물론
현지 호족들까지 포섭해서 양주를 휩쓸고 있었어.
<삼국지11>에서의 호열
반란이 일어났으니 진압해야겠지? 당시 서쪽변방을 담당하던 진나라의 무장은
진주자사(秦州刺史) 호열이란 인물이었어. 뭐 삼국지11 해본 게이들이라면 한번 쯤은 봤을법한 무장이지.
게임에서는 그냥 저냥 후반기 쩌리 무장으로 나오지만..
진(晉) 왕조 전국지도
이 지도는 통일 진나라의 전국지도지만 지금 쓰는 글의 배경이 되는 서기 270년 무렵에도
당시 중국의 서쪽에는 양주(凉州), 진주(秦州)가 설치되어 있었다. 위에 '凉' 이랑 '秦' 글자가 보일거야.
즉, 호열은 진주라는 행정구역의 자사(刺史), 즉 장관이었다.
진나라 조정에서는 호열에게 진압을 명하지만, 웬걸? 토벌나간 진나라 군대는 박살나고
호열 본인은 아예 전사해버리기까지 한다.
그냥 일개 오랑캐의 반란으로만 치부하고 호열이 잘 알아서 진압하겠거니 하고
별다른 신경 안쓰고 주적 오(吳)와의 대결에만 몰두해있던 진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그도 그랬을게 호열은 양주출신으로, 현지의 사정에 누구보다 밝은지라
현지의 이민족 경영도 손쉽게 할 것인데다 과거 촉(蜀) 정벌전에서의 활약도 인정받아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어느정도 평가 받고 있던 터였는데 그렇게 한방싸움으로 덜컥 패사해버리니 놀랐던 거지.
사마량
사실 호열이 패사하고 전투에서 그렇게 처참한 꼴을 당한데에는 진나라 군부의 병크가 한몫했었다.
당시 서쪽변방을 관할하던 도독은 사마량.
사마씨 성씨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사마량은 사마씨 성 가진 황족이었다.
(황족도 어디 떨거지 방계황족이 아니라 사마의의 4남)
수세에 몰린 호열은 사마량에게 구원요청을 했었는데, 이에 사마량이 구원군으로 보낸게 '유기' 라는 장수였어.
그런데 이 유기라는 작자가 무슨 똥배짱인지 하라는 구원은 안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말그대로 '관망' 만 하더라는거지.
제 딴에는 전황을 좀 더 살핀다나 뭐라나.
결국 호열은 그렇게 패사했던 거고 이 한차례 싸움으로 진 왕조의 서쪽변경 일대는 한순간에 이민족의 놀이터로 전락해버린다.
결국, 패전의 책임을 물어 관련된 이들이 처벌받게 되는데, 부하의 병크때문에 어찌보면 억울한 사마량은 파직,
유기는 파직당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예 머리가 달아나버렸고, 호열이야 뭐..
물론, 제아무리 병크로 점철된 진나라 조정이라해서 제국의 서방이 이민족들에게 유린당하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시 진압군을 조직해서 토벌하게 했는데, 이번에는 '석감' 이란 이를 총사령관으로,
그리고 게이들도 제법 알고 있을 '두예' 를 부관삼아 딸려보내게 돼.
<삼국지11>에서의 두예
게이들도 알다시피 두예로 말할 것 같으면 훗날 오 정벌전에서 지대한 공을 세우는 명장이야.
하지만 이렇듯 우수한 인재도 병신을 상관으로 두면 그 빛을 발하지 못하는 법인가봐.
왜냐면 '석감' 은 무능한 인물이었거든.
훗날 명장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름값답게 두예는 현재 상황으로는
독발수기능의 반란군과 교전해봤자 승리할 확률이 희박하다고 여겼어.
그도그럴게 지금 독발수기능은 한차례 싸움으로 승리를 거두어 기세등등했고
설상가상으로 아군의 보급로는 불안불안했거든.
그래서 두예는 석감에게 이듬해 봄까지 재정비하고 다시 오자고 진언했지만
석감은 이를 무시하고 되려 두예를 항명죄로 탄핵해버리기에 이르고..
석감은 보기좋게 패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271년, 독발수기능은 나아가 옹주(癕州)까지 유린하고 태수 견홍은 난전 도중 전사해.
(옹주라는 곳도 행정구역이야 위 지도에도 나와있어)
<삼국지11>에서의 견홍 열전
(자꾸 삼국지11 자료 들고와서 미안;;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아서..)
위에서 보다시피 '변경에서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고 되어있는데 바로 독발수기능과의 싸움을 말해.
즉, 서기 270년 가을무렵에 발발한 독발수기능의 난은 이듬해까지 이어지며 계속해서 진 왕조의 서쪽 변방을 어지럽히고 있었던 거지.
다음편에 연이어 쓸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