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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 1탄] 신장의야망 창조pk로 보는 임진왜란 참전 유명 일본장수 http://www.ilbe.com/4916431071

[일본역사 2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일본을 통일 시켰을까? http://www.ilbe.com/4916849321

[일본역사 3탄] 일본 전국시대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http://www.ilbe.com/4923020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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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山)

"병법은 적을 속여 세우고 이익에 따라 움직이며, 병력을 나누기도 하고 합치기도 함으로써 변화를 꾀한다.

그러므로 군사를 움직일 때는 질풍처럼 날쌔게 하고, 나아가지 않을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있고, 적을 치고 빼앗을 때는 불이 번지듯이 맹렬하게 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때는 산처럼 묵직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 <손자-군쟁(軍爭)>

 

일본 최강의 기마부대라 일컬어지는 부대를 이끈 가이(甲斐)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일본전국시대 천하3인(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대의 난적이었던 그의 일생을 풍림화산(2007)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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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겐은 1521년 11월 3일 가이를 다스리더던 다이묘,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적자로 세키수이지 성(積翠寺城; 현 요가이산성(要害山城))에서 태어났다.

가이는 현재 일본의 야마나시현(山梨県)으로,  75%가 산지이며 후지산, 미나미 알프스 등 해발 2,000미터를 넘는 산악지대에 둘러쌓여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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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겐의 어렸을적 이름은 가쓰치요(勝千代)이며, 1536년 정월 관례를 치룬 이후에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의 글자 한자를 받아

다케다 하루노부(晴信)라, 개명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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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이국은 스루가,토토미 2국을 다스리던 이마가와 가문, 사가미 1국을 다스리던 호죠 가문 과 투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특히나 이마가와가는 당시 가장 천하통일에 가깝다고 여겨지던 막강한 실력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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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다이묘들은 상락(上洛 - 천하통일을 위해 병사를 이끌고 천황이 있는 교토로 진출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귀족가문들은 실권은 이미 지방 다이묘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지하여 가문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 계산이 맞아 떨어져, 귀족가문과 혈연을 맺어 주변 유력 가문보다 정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부토라는 아들 하루노부와 귀족가문의 딸

산조노가타와 혼례을 맺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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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국을 통일시키고, 전술 및 전투에도 능했다고 알려진 노부토라.

그는 이상하리만큼 적자 하루노부를 홀대하고, 차남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를 편애하였다.

1541년 1월 노부시게가 관례를 올릴 때, 노부토라는 노부시게에게 먹단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이는 노부시게에게 가문을 물려준다는 암묵적인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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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21살이던 신겐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움직이기로 한다.

아버지가 스루가의 초청을 받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찾아 넓히고 있었다.

결국 자국내 유력한 영주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信方), 아마리 도라야스(甘利虎泰) 등으로 부터 옹립되어 가이에 돌아오는 아버지의 출입을 막았고,

노부토라는 스루가로 추방 당하게 된다.

아버지를 추방 할 때, 백성들이 두손을 올리고 환영했다는 이야기를 유추해 볼 때, 노부토라는 정치가로서의 수완이 부족했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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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하루노부의 동생 노부시게는, 자신이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음에도 형을 도와 아버지의 추방을 돕고, 평생을 형을 위해 싸웠다고 전해진다.

오와리를 통일하기 위해 동생과 피를 흘려야 했던 노부나가와 다르게, 이들의 형제애는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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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이의 옆에는 스와(諏訪)를 다스리던,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란 인물이 있었다. 노부토라는 그에게 자신의 딸 네네(하루노부의 여동생)을 보내,

혼인을 맺게 하였는데, 노부토라가 추방 당했다는 소식에 요리시게는 시나노 다이묘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와 손을 잡고, 하루노부에게 반기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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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곧 격퇴 되고, 다음해 1542년 6월 하루노부는 거꾸로 스와를 공격해, 요리시게의 아들 토라우마루 의 후견인이 되어주고, 훗날 스와의 가문을

잇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요리시게를 할복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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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루노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토라우마루는 출가시켜 스님이 되게 하여 스루가에 보내버린다.

그리고 요리시게와 그의 첫번째 부인 사이에서 얻은 딸 유우히메 와 혼례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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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 하루노부는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시나노 지방의 나가쿠보 성 오이 사다타카 를 공격. 이외 시나노 지방의 유력 세력이었던 타카토 요리쓰구, 후지사와 요리치카 의 가문도 멸문을 시켜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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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년 6월. 신겐가법(甲州法度之次第)를 제정한다. 가이국의 영주, 백성들이 지켜야할 법도를 제정한 법률로,

주군 자신도 정해진 법률에는 따라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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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시가((志賀)성의 성주 가사하라 기요시게(笠原清繁)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와 함께 하루노부에 대항하나,

오타이하라 전투(小田井原の戦い)에서 대승리를 거둔다. 이때 하루노부는 기타 시나노의 영주들에게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들의 최후를 보여주기 위해,

3천여명의 적병을 모두 학살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시나노 평정은 어렵게 된다.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를 필두로 지방영주들이 크게 반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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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 2월. 하루노부는 시나노 북부 세력을 자랑하는 요시키요와 우에다하라(上田原)에서 격돌한다.

병력이 우세 했음에도 하루노부군은  패했으며, 이때 중신 이타가키 노부카타아마리 도랴야스 등 많은 장병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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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7월. 하루노부는 다시 요시키요를 공격한다. 그러나 도이시 성(砥石城)에서 농성을 택한 요시키요에게 도이시쿠즈레(砥石崩れ)라 전해질정도로,

대패하였고 천명 이상의 장병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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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 4월.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의 책략으로 결국 도이시 성을 함락. 여러 영주들이 줄줄이 다케다군에 항복을 하자, 요시키요는 자신의 본성인

가츠라오 성(葛尾城)을 버리고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 우에스기 겐신)에게 의지한다. 이로서 하루노부는 북 시나노를 제외한 대부분을 평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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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 가게토라. 그는 훗날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며, 비사문천(毘沙門天)의 화신이자, 에치고(越後)의 용 이라 불리었다.

본래 어린시절 절에서 스님이 되어 지내다가, 형이 부하의 손에 죽자, 형을 대신하여 토벌 한 뒤 19살에 에치고의 다이묘가 되었고, 

그 뒤 에치고 이외의 영토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루노부 최고의 숙적이자 라이벌 관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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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4년. 다케다 신겐은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어 낸다. 바로 다케다-이마가와-호죠의삼국동맹 이었다.

이는  나가오 가문과 대치하고 있던 다케다-호죠 가문 / 오다 가문이 다스리던 오와리를 공략하여 교토에 진출하기 원하는 이마가와 가문.

그들의 목표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하루노부의 적남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딸 레이쇼인과 혼례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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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년 2월. 하루노부는 출가를 하였고, 법명을 신겐(信玄)으로 칭한다. 다이묘를 유지한채 출가를 하였다는 건, 속세의 번뇌를 모두 벗어버리고 오직

백성들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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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노부는 1553~1564년에 5차례에 걸쳐서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북시나노의 지배권 쟁탈전을 위해 가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를 벌인다.

대부분 실질적인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 중, 1561년 벌어진 제 4차 전투인 '하치만바라 전투'(八幡原の戦い) 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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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가와, 치쿠마가와을 건너 사이죠산(妻女山)에 진을 친 우에스기 겐신(13,000명).

당시 가이즈성을 지키던 고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에게 출진 소식을 들은 다케다 신겐도 군대(18,000명)를 이끌고 출발.

서쪽의 차우스산(茶臼山)에 진을 편다.  

 

이때 다케다 군에 채택된 전략이 딱따구리전법(啄木鳥戦法). 군대를 별동대와 본진의 둘로 나누어 대규모로 편성된 별동대가 사이죠산을 공격하면,

우에스기군은 어쩔 수 없이 산을 내려올 수 밖에 없고, 이때 평야에 매복하던 본진이 맞서 싸우는 협공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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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에 따라 짙은 안개를 틈자 고사카 마사노부바바 노부하루가 이끄는 12,000명의 별동대가 사이죠산을 향했고,

신겐은 남은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치만바라에 포진하였다.

(고사카 마사노부는 다케다 신겐과 동성애 관계였다는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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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가이즈성의 밥짓는 연기를 보고 적의 전략을 간파한 겐신은 일체의 소리를 죽인 채 야음을 틈타 몰래 산을 내려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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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신은 맹장 가키자키 가게이에(柿崎景家)를 선봉에 세워,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군사를 배치해 공격하는 차현진(車懸りの陣)으로 공격하자,

허를 찔린 신겐군은 학익진으로 대응하나 중과부적으로 거의 괴멸상태까지 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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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전 중에 겐신이 흐트러진 신겐의 본진으로 쳐들어 왔다고 하는데, 이 장면은 겐신이 장면은 겐신이 쇼기(床机)라고 불리는 군탁(軍卓)에 앉아있는 신겐을

칼로 내려치려 하고 신겐이 이를 군바이(軍配)라는 부채로 막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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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괴멸직전에 몰렸던 다케다군은 별동대가 뒤늦게 도착하여 반격하였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남긴채 결국 물러나갔다고 한다.

(우에스기군 3,000여명, 다케다군 4,000여명 전사. 다케다 군-다케다 노부시게,야마모토 간스케,모로즈미 도라사다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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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년 5월.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교토를 진출하기 위해, 오와리의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25,0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공격한다.

하지만..호우가 몰아치는 새벽. 야습을 가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바로 오케하자마(桶狭間)의 전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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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하자마의 전투 이후, 쇠퇴하는 이마가와 가문을 점령하기 위해, 신겐은 움직인다.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한 적자 요시노부(폐적)와 그의 스승

오부 도라마사(할복) 을 처리한 이후, 이마가와 가문과의 동맹을 파기한다. 1570년 7월 스루가를 침공하여, 완전히 평정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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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다케다 신겐, 초록색 - 동맹군)

이 시기에 다케다가의 영토는 가이 일국 외 시나노,스루가,고즈케 서부,도토미,미카와,히다,엣추 일부까지 약 120만석에 달한다.

여기서 '석'이란 일년에 얻는 쌀 가마의 숫자로서 1만석일 경우 약 250여명의 병사를 조달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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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 10월 3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의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하기 위해 2만2천명의 군을 이끌고 노부나가의 동맹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를 치기 위해 하마마쓰(浜松)성 으로 향한다. 1만1천여명의 군을 이끌었던 이에야스는 농성을 하려 하였으나, 적이 성을 무시하고 진격하자 성을 나와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공격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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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많은 병력차와 함께 신겐의 전술 앞에 대패하고, 도쿠가와 군은 패주한다. 이에야스는 도주할 때 공포에 질려 말 위에서 변을 봤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에 도착하자 마자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화폭에 담으라고 명령한 뒤, 늘 이 그림을 소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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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어 1573년. 이제 교토로 진격하기 위해 남아 있는 적은 노부나가 뿐. 그러나 병에 걸린 이후 지병이 악화되어 진격을 돌연 멈춘다.

이후 별진전이 없자 4월 초순에 가이로 철퇴를 결의하는 데, 이때 돌아오는 도중 시나노국 고마바(駒場)에서 병사한다. 향년 53세.

 

백성들에게는 누구보다 자비로왔던 영주 였지만, 천하통일을 위해 누구보다 비정한 삶을 살았던 다케다 신겐.

그는 이렇게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눈을 감게 되었다.

그가 과연 10여년만 더 살았더라면, 천하3인(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 3줄 요약 >

1. 최강의 기마부대를 보유한 가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

2. 그러나 의외로 전투에서 많이 졌다.

3.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천하통일도 꿈만은 아니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