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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7월 15일,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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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을 그린 조선역해전도 朝鮮役海戰圖>






이순신이 지휘하던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6일 간의 쫓고 쫓기는 접전에서  너무도 무기력하게 야습과 기습을 허용하던


조선 수군은 마침내 칠천량에서 마침내 100척이 넘는 판옥선과 3척의 거북선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육지에서 도주하다가 일본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






18일 새벽 , 변홍달에게 수군의 대패 소식과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사를 들은 이순신은 통곡했다.


7년 간을 그와 함께 동거동락 하며 지내던 전우들과 병사들이 떼로 죽었다.


임진년의 전란 동안 그가 목숨을 다하여 키웠던 조선의 수군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가혹한 고신拷訊으로 찢겨진 몸의 고통보다 차가운 바다 속에서 외롭게 죽어간 장졸들에 대한 아픔이 더 컸다.


이미 3달 전 어머니를 잃었고, 그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던 아들의 울음은 더욱 차갑고 깊었다.








오전 10시에 권율이 찾아왔고 이순신은 내가 직접 남해안 연안으로 내려가 수습하겠노라고 했다.


이순신은 송대립ㆍ유황 등과 길을 떠나 흩어진 장졸들과 혹시라도 살아 남았을 배를 수습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미 7월에 전주성 8월에 남원성이 적에게 떨어졌다. 사실상 전라남도는 무주공산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왜적이 출몰해 습격할 지 모르는 상황.


이순신과 일행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리뛰고 저리뛰며 민심을 다스리며 흩어진 병사와 병장기, 전선을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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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

이순신은 8.3일 선조에게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수한다는 교지를 받는다.





전라남도의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였다. 가는 곳마다 민심은 흉흉하고 피난민들로 넘쳐났고


보이는 군사라고는 후줄근한 몰골의 패잔병들 뿐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전령이 들고 오는 소식은 오늘은 또 어느 성이 무너졌노라 하고 알려왔다.


병마사란 작자들은 싸우지도 않고 모조리 도망갔으며 창고에는 군량미와 병장기가 쌓여있었다.


소수의 의병들과 승병들이 이순신에게 도움이 되고자 합류했다.


가혹한 고신으로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이순신은 밤마다 토사 곽란에 시달렸다. 고통 속에 밤을 새는 날이 많았다.






8월 15일, 선전관이 임금의 교지를 가져왔다. 수군의 형세가 몹시 고단하고 위태로우니 육군에 합세하여 싸우란 소리였다.


이순신은 당장 불가不可의 뜻을 적은 장게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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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사옵니다>







임진년부터 5,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넘보지 못한 것은 오직 수군이 그 길을 막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오니 죽기로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전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만번 다행으로 여기는 바, 곧바로 호서를 거쳐 한강에 들이닥칠 것이니 이는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다하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감히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8월 18일 경상 우수사 배설이 칠천량에서 이끌고 도망쳤던 전선 12척을 수습했고 이때 간신히 수군의 기색을 갖추었다.


전장에서 도망쳤다 하나 그나마 배설이 티끌만한 전선이라도 보존했기에 싸움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설은 이순신을 따라다니는 내내 두려워 벌벌 떨었다. 그 꼴이 매우 보기 싫었던 이순신은 그를 어르고 달래고 그의 이방을 잡아다가 곤장도 치고


장수 된 자가 어찌 적 앞에서 도망치려 하냐고 호통 쳤지만 싸움이 목전에 다다른 9월 2일, 배설은 도주한다. 이후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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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설.>





이순신은 전선을 수습하고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본영을 옮겨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8월 26일, 탐망꾼 임준영이 "적병이 이진에 이르렀다" 고 보고했다.


9월 7일, 탐망군관 임중형이 "적선 쉰 다섯 척 가운데 열 세 척이 어란 앞바다에 이르렀다. 아군을 격멸키 위해 움직임이 틀림없다." 고 보고했다.


적의 기도는 명백해졌다. 우수영에 진을 친 조선 수군을 격멸하고 적성세력을 소탕한 뒤 남해는 물론 서해의 제해권을 손아귀에 넣을 생각이었다.


일본수군은 전라남도 곳곳에서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는 일본육군과 호응하여 하삼도의 육지와 바다를 통제하고


장기적으로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성을 직접 타격할 수도 있었다.


반드시 막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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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협>

이 좁은 협로를 통과하면 곧바로 서해바다였다.





일본수군은 하삼도 남쪽, 남해바다에서 서해로 통하는 길목인 명량해협을 돌파하고자 했다.


이순신이 건재했던 임진년 때라면 어떻게든 뻔히 보이는 기동로를 피하고 우회했을테지만 지금 이순신에게 남은 전력은 고작 12척,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성난 파도와 같은 군세로 밀고 들어가 모조리 깨어 부수고, 쓸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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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조선수군을 격멸하기 위해 몰려든 일본수군의 총 수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나 최소 이백여척은 충분히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구루지마 미치후사来島通総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실제 전투 참전 여부 불명) 등 사료에서 확인되는 다이묘들의 휘하 병력은


최소 7000명 이상으로 전선 수에서도, 병력 수에서도 압도적으로 조선군의 열세였다.


특히 선봉장을 맡은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일찍이 형인 구루지마 미치유키를 당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잃은 원한이 있었으며


그 자신 또한 세토 내해에서 활동하던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이라는 전통있는 해적집단의 우두머리였다.


히데요시의 해적금지령에 의해 이요 수군으로 편입되었을 뿐.


그런 만큼 그의 휘하 병사들은 모두 날래고 사나웠다. 선상 백병전에서 적병의 머리를 취하는데 도가 튼 강병들이었다.






9월 14일,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미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9월 15일,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과 장병들을 모두 불러 모아 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 라고 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형국을 두고 한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은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지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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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이른 아침,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초탐선으로부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이 몰려온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순신은 함대를 출진시켰다.


지금도 그 거센 물살로 조류발전소가 세워져 있는 울돌목, 명량해협에서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이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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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은 전선 13척을 앞에 세우고 뒤에는 조금이라도 성세를 과장하기 위해 끌어모은 피난선 100여척이 대기했다>





조선수군의 전선의 수는 기함을 포함하여 고작 13척, 진법이라고 해봐야 펼칠 수 있는 진법은 일자진 밖에 없었다.


기함에 일자진으로 기동할 것을 명하는 깃발이 걸렸고 함대는 종렬진으로 나아가던 진형을 반전하여 일자진을 펼쳤다.


그리고, 좁은 해협 탓에 안택선의 기동이 제한되었던 탓에 세키부네를 주력으로 삼은 일본 수군의 전투함 133척이 해협을 가득 메우며 전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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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주력전선 세키부네, 기동력은 빠르지만 판옥선보다 선체가 낮고 선체의 강도가 약했다.>




오전 9시 경, 유속은 일본군에게 유리했다. 일본 수군의 세키부네들은 때마침 밀물이 세차게 몰려와 상류로부터 조수를 타고 파도처럼 쳐내려왔다.


그 세력이 마치 산이 찍어 내려누르는 듯 했다. 그나마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조선수군은 아연실색했다.


너무 많았다. 눈 앞에 보이는 적선은 좁은 해협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모조리 메웠다.


바다나 협곡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로지 적선만 눈에 들어왔다.





두려움에 떨던 휘하 장수들은 어느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명량의 물살은 힘껏 노를 저어 가로 지르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다.


전투의지가 상실 된 전선들은 차츰차츰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이순신이 탄 기함, 대장선만이 홀로 외로이 나아가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아득히 먼 곳까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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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추>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그를 "만호감도 못되는 인물"이라 혹평했다.

이후 후손들이 행적을 적은 현무공실기에서 그가 검풍으로 왜선 수백척을 격멸했다고 판타지 소설을 싸질러놨다.






이순신은 초조해졌다. 당장이라도 배를 돌려 엄히 군령을 내리고 싶었으나 이미 적선이 지척에 다다랐는데


대장선이 꽁무니를 뺀다면 적이 기세등등하여 물살을 타고 내려와 단숨에 아군의 전열을 깨부수고 명량해협을 돌파할 것.


그렇게 되면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수군은 끝없이 밀려 들어오는 일본수군에게 넓은 바다에서 포위되어 죽어갈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순신은 돌격명령을 내렸다.


133척의 적 선단에, 단 1척의 대장선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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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이 사정거리에 잡히자 대장선이 일제히 상갑판에 배치 된 지자포와 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쏘았다.


일차적으로 진입한 적선 10여척이 포화를 무릅쓰고 대장선에게 달려들었다. 당시 일본수군에게는 총통을 자체제작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화포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수입해다 썼다. 해전의 교리 자체도 화포 전력을 경시했기에 화력으로만 보자면 판옥선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조총과 화살을 마주 쏘며 이순신의 상선과 일본수군이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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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과도 같은 포화를 뚫고 대장선에 다다랐지만 막상 일본 수군이 자랑하는 선상 백병전을 펼치기에는 판옥선은 너무 높았고 세키부네는 너무 낮았다.


이항복은 판옥선을 가리켜 “마치 하나의 성곽과 같도다” 라고 평했다.




기존의 갑판위에 1층의 상갑판을 하나 더 올린 판옥선은 갈고리를 걸고 접근을 해도 막상 넘어가려면 


천상 아래에서 기어올라 갈 수 밖에 없었고 조선군은 기어 오르려 애를 쓰는 일본군을 내려다보며 위에서 창과 낫으로 내려찍고 화살과 돌, 총통을 쏟아 부었다.


그 맹렬한 기세에 일본군도 감히 갑판 위로 침범하지 못했고 초반의 기선제압에 성공했으나


아직도 몇 겹이나 되는 일본 전선들이 대장선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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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세에 질린 상선의 장졸들이 겁 먹은 기색을 보이자 이순신은


“적이 설사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맞서지 못할 것이다.” 라며 사기를 드높였다.




그리고 대장선 혼자 고군분투 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후방의 전선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호각을 불러 초요기를 올렸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가만있던 전선들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항의 배가 제일 먼저 상선을 돕기 위해 다가왔다.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다다르자 이순신은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네가 살 성 싶으냐?




라고 꾸짖자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진했다.


다시 김응함의 배를 돌아보며




너는 중군장으로서 대장을 구하지 않은 죄, 참형으로 다스릴 것이나 지금 형세가 다급하므로 우선 용감히 싸워 공을 세우라!




라고 하니 김응함의 배 또한 용맹히 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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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은 거친 물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물살을 타고 쳐내려오는 적선들을 맞아 힘겹게 밀어냈다>




전투는 격해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을 노리고 달려든 선봉 10여척은 대부분이 대파되고 격침되어 전투능력을 상실했고


후방의 대기하고 있던 세키부네들이 잇달아 전장에 가세했다.


오전 정오, 물살은 차츰차츰 약해지고 있었다. 산이 쳐 내려오는 기세로 달려들던 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다.



선봉에 서서 용맹히 싸우던 안위의 배에 적선 여러 척이 달라붙었다. 안위는 힘겹게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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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 세척이 달라붙어 적병들이 안위의 배에 서로 먼저 올라가려 기어올랐고 안위의 배는 중과부적으로 매우 위태로웠다.


적병이 하나하나 도선에 성공하자 겁 먹은 격군들 일곱명이 바다로 뛰어내렸다.


배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이순신은 돌격 명령을 내렸다. 대장선이 안위의 배에 들러붙은 적선을 들이받았다.


판옥선의 단단한 선체 돌진에 세키부네는 견디지 못했고 적선 3척이 충파 공격와 화포에 일거에 대파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아직까지 후방에서 형세를 지켜보던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합세하여 적을 거세게 몰아쳤다.



그리고 이 때, 이순신의 배에 타고 있던 항왜降倭 준사 俊沙가 바다 위에 떠다니는 시체 중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유독 무늬있는 붉은 옷을 입은


장수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잠시 살펴보던 준사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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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왜 무사 준사>




"장군!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지마 미치후사)입니다! 마다시의 시체입니다!"





이순신은 곧바로 갈고리로 시체를 끌어올렸다. 준사는 펄쩍 뛰며 마다시가 맞노라 했다.


평소 적의 수급을 탐하지 않던 이순신이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구루지마의 시체를 토막내어 목을 잘라 배 위에 효수했다.




구루지마의 머리는 일본군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고 곧바로 사기의 저하로 이어졌다.



기세를 잡은 조선군은 더욱 거세게 적을 휘몰아쳤다. 화포를 쏘아대고 화살과 돌무더기, 낫을 쉴새없이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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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의 선봉을 분쇄하고 예기를 꺾었을 무렵, 물살이 바뀌기 시작헀다.





오후 1시경, 드디어 물살의 방향이 일본군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바뀐 물살에 일본군 전선은 당황하며 황급히 전열을 제대로 갖추려 했지만 거센 물살에 키의 조정이 먹통이었고


조총을 제대로  조준조차 하기 어려웠다.


좁은 해협에 너무 많은 전선을 밀집시켰던 일본군은 전열이 뒤엉키고 소용돌이에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이순신은 곧장 전 전선에 돌격명령을 내렸다. 북이 쉴새없이 쳐지고 깃발이 올라갔다.


화포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황소처럼 나아간 판옥선들은 현자포, 지자포를 갈겨대며 거대한 송곳과 같이 일본군 전열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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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게 밀려들어오는 조선수군에 일본군 전열은 갈기갈기 찢겨졌고 후방에 대기하던 도도 다카도라가 부상당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파견한 군감 모리 다카마사가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다.


사실상 군단의 본대까지 조선수군에 의해 유린당한 것이다.




전투는 오후 5시경까지 계속되었고 처참히 부서진 일본수군은 더 이상 버텨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 퇴각하기 시작했다.


명량의 바다는 찢겨진 수군의 전선들과 나무파편, 시체, 아직까지 살아남아 울부짖는 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적선 30여척을 격파할 동안 조선수군은 단 1척의 전선도 잃지 않았다.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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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승리에 울돌목 기슭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백성들이 울면서 환호했다.


기뻐 날뛰며 끌어안는 병사들의 환호성 속에서 이순신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훗날 난중일기에 기록하기를


그는 이 날의 승리가 실로 천행이었다고 말했다.






5시경, 물살의 방향이 다시 조선군에게 역류로 뒤바뀔 때 쯤, 이순신의 함대는 후방의 당사도까지 후퇴했다.


전투에서 이겼다고는 하나, 이미 전주와 남원성이 적에게 떨어진 형국이라 육지와 가까운 우수영에 들어앉고서는 도저히 함대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10월까지 서해바다 고군산도로 후퇴했고 이 시점에서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전선들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고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가 명량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전란이 끝날 때까지 숨어있었으리라.





명량에서의 패배로 일본수군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여겼던 조선수군의 건재함을 확인했고 


지난 임진년 7년동안 당해왔던 이순신에 대한 공포가 다시 되살아났다.


서해바다를 완전히 장악하여 육지와의 공동전선으로 충청도와 경기도까지 진격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은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이후 한반도 남부지대에 왜성들을 쌓으며 기존의 점령한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만 했다.


단 한번의 전투로 일본군의 작전전략이 극단적 수세로 뒤바뀌었고 


일방적인 진격과 보급으로 파죽지세의 북상진군이 될 수 있었던 파국을 막았다.



그야말로 정유재란 자체의 판도를 뒤바꾼 전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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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수군은 지속적인 재정비와 보급을 거쳐 임진년의 위세보다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세를 회복하는데 성공했고


이순신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며 임진왜란 7년전쟁의 끝까지 함께 했다.



















3줄요약


1. 갓


2. 순


3.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