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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산길을 오르는 국군 육공트럭 행렬)

 

안케패스 전투는 1972년 4월 11일부터 4월 26일까지 맹호부대(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월맹군 3사단12연대간에 안케패스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합니다.

베트남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1번도로에서 갈라져 나와 베트남의 항구도시 퀴논에서

캄보디아 국경지대까지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도로가 19번 도로입니다.

19번 도로는 내륙지방의 플레이쿠에 주둔하고 있던 월남군 제 2군단의

유일한 보급로로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습니다.


안케패스는 이 19번 도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산등성이 입니다.

해발 500미터 내외의 산악지대에 정글이 얽혀있는 지형이며

이곳을 장악하면 당연히 19번 도로가 끊겨 내륙의 월남군이 고립될 것입니다.

안케패스에는 여러 개의 고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곳이 638고지로써

여기서 안케패스 일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안케패스 전투의

시발점이자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전장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원래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1970년 미군들이 철수함에 따라

맹호부대 수도사단 기갑연대 예하 1중대가 인수받아 수비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1중대는 638고지 부근의 완만한 구릉에 기지를 설치하고

안케패스의 안전통행을 감시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중대기지보다 높은 638고지에 기지를 설치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장차 화근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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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는 1972년 3월말

월맹군의 "춘계 대공세"의 일환으로서

월맹군이 이곳을 공격목표로 삼은 것입니다.

1972년 4월11일 새벽, 1중대 기지에

분대규모의 베트콩들이 출몰하여

습격을 가해왔으며 그 날 오전에

플레이쿠로 가던 화물트럭 한대가


안케패스 도로상에서 폭파되자 1중대가 638고지에 적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그 곳을 수색 매복함으로써 안케패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전투는 중대규모로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매복수색이 의외로 강력한 저항을 받아 중도에서 돌아오게 되고

다음날 19번 도로상의 교량 및 도로 몇군데가 추가로 차단되었으며

중대기지 역시 82미리 박격포와 B-40 적탄통 75미리 무반동총 공격을 받자

당시 기갑연대장은 적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수색중대와 1대대 3중대를 안케패스에 투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전투는 중대규모에서 대대급의 작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적의 규모를 불과 중대급으로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판하에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을 고유의 건제를 유지하지 않고 혼성편성하여

(1대대 3중대, 2대대 6중대, 3대대 10중대, 11중대를 1대대장이 지휘하는 짬뽕부대)

순차적으로 적진에 분산투입함으로써 아군의 피해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심지어는 주월 야전사 부사령관과 사단장이 1중대 기지를 순시하는 도중에

82미리 박격포 공격을 받아 부랴부랴 헬리콥터를 타고 사단사령부로 돌아가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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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작전지역 부비트랩에 걸려죽은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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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국군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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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도 당시 수도사단 정보처는 적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투개시 5일동안 포로는 물론이고 적의 시체조차 습득하지 못했으므로

적의 규모나 상대의 부대소속조차도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월남군 22사단 47연대가 정보를 입수하여 월맹군 제 3사단 12연대라는 첩보를

제공하였는데 사단이나 연대에서는 이 통보를 과장된 허위정보로 치부해버립니다.


거듭된 공격과 공중폭격, 포병사격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안케패스 차단으로 인해 보급이 차단된 월남군 제 2군단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마침내 작전은 연대급으로 확대됩니다.

작전은 강력한 화력지원하에서 극히 치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월맹군의 화력도 만만치 않아서 82미리 박격포나 75미리 무반동총으로 인한 아군의

피해도 많았으며 그들의 엄격한 사격군기 라던지 갈증과 배고픔을 견디며

전투를 수행하는 인내심은 주목할만한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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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당시 씨레이션이라는 전투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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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작전기간 내내 아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마침내는 사단장이

돌파구를 열지 못하면 해당 지휘관을 지휘조치하겠다는 경고까지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치열한 격전 끝에 마침내 아군은 안케패스 주변의 주요 고지와 거점을

점령하였고 맹호 기갑연대 제3대대가 잔적 소탕을 실시하는 가운데

APC 네 대가 안케패스를 지나 적의 저항을 받지 않으면서 연대 전술지휘소가 있는

'빈케'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19번도로 개통을 확인하고

16일간에 걸친 맹호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월맹군 3사단 12연대 및 지방 베트콩들간에

벌어진 안케패스 전투는 끝나게 됩니다.


안케패스 전투는 주월 한국군이 실시하였던 모든 단일 전투 가운데

최대의 인명피해를 기록한 전투이자 가장 치열한 격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으로서는 병력의 혼합편성, 단조로운 공격패턴, 적 규모(월맹 정규군 1개연대

규모)를 오판하고 병력을 집중운용 하지 않은 점 등이 있습니다.


전과 : 적사살 705명, 개인화기 70정. 공용화기 13문

손실 : 전사 75명, 부상 10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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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케패스 전투 승리로 월남 19번도로를 달리는 아군 육공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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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월남전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