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란 연애의 무덤이란 말을 쉽게들 한다.
물론 연애에는 자고로 긴장이 필요한 법, 서로에 대한 적절한 환상이 지속돼야 사랑도 재미가 있다.
그렇다면 결혼이란 건 대체 무엇을 주는가?
스스로의 가정을 구성하는 재생산적 기능에 앞서, 결혼은 두 인간이 운명의 길을 같이 할 수 있는 성스러운 결속이 되어준다.
그런데 잠깐, 두 남녀의 사랑에 왜 너와 내가 아니라 환상이라는 제 3자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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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라는 것은, 남녀가 둘이 함께하는 것이기 이전에 개인적인 경험이다.
인간은 파트너가보다도 우선 자신의 판타지와 성교한다.
남자의 섹스에 있어서 여자는 종속적이고, 여자의 섹스에 있어서 남자 또한 부분적 물체다.
그런데 결혼이, 환상이 끝나는 종착점이, 이 불균형에 제동을 건다.
이제 남녀는 서로를 하나의 인간으로써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남자는 부분만으로 여자를 어떻게 종속시킬 것이며, 여자는 부분에게 어떻게 흡수될 것인가.
오해되는 바와 다르게, 섹슈얼리티는 오직 육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곳의 현실이 관념 속 세상에 받아 적히듯이, 섹슈얼리티도 결국은 육체의 경험이 어떻게 말로 표현 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때문에 판타지와 섹슈얼리티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큐브릭의 마지막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은 이 점에 대해 아주 정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데뷔작 Fear and Desire로부터 시작된 실존주의의 긴 여정은, 마지막으로 남녀의 사랑과 가족에 내려앉으며 종지부를 찍는다.
큐브릭이 자신의 영화속 인물들이 처하게 만들었던 상황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빌 과 앨리스 부부의 상황은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줄 수 있다.
허나 여유있게 사는 이들이라고 고뇌가 없으랴. 영화는 생사의 고민을 떠나서 좀 더 삶과 가까운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어떤 전작보다도, 더 낙관적인 해답을 쥐어준다.
영화는 앨리스의 새하얀 알몸을 비추며 시작한다.
허나 이는 전신이 아닌 뒷모습, 우리는 그녀의 전부가 아닌, 오직 부분만을 바라볼 수 있다.
숨막히는 아름다움에 에로틱한 긴장이 흐르려는 찰나, 씬이 넘어간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안경을 낀 채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있는 앨리스의 모습.
급작스레 현미경화 된 현실에 환상은 깨어진다.
이 장면은 일종의 충격 요법같다.
관객들에게 판타지를 심어주더니, 다음 순간 오줌을 닦아내는 앨리스를 여과없이 비춰내서 그 실체와 대면하게 한다.
허나 이 장면이 주는 불편함에 주의하라.
큐브릭이 그의 영화인생을 통틀어 우리에게 해온 일이 바로 이것이다.
- 무던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
일상과 비일상이 기묘하게 뒤섞이는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빌과 앨리스 부부의 성 역할이다.
가정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남편으로의 역할은, 파티장 씬에서 사회적 역할로 확장된다.
이들은 같이 있을때는 부부라는 정체성으로 행동하지만, 흩어짐과 동시에 다시 남자와 여자의 역할로 분할된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이자, 누구의 부인, 누구의 남편이 아닌 남자와 여자가 되어 가정의 결속을 도전 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상반적으로 드러나는 이들의 진정성이다.
표면상으로 유혹적인 신사와 춤을 추는 앨리스는 보다 적극적여 보이지만, 아름다운 모델 둘을 옆에 낀 빌은 소극적으로 상황을 넘기는 것 같다.
허나 속단하지 마라. 앨리스는 남자를 깨끗하게 거절하지만, 빌은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빌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항상 회색 부분에서 살아온 인간이다.
그날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돌아왔지만, 앨리스는 극단적 로맨티시스트로 인해 결혼관이 송두리째 뒤흔들린다.
현실로 돌아온 부부가 일과를 마치고 대마를 나눠피우면서 벌어지는, 자칫 소모적으로 보이는 언쟁은
남자와 여자의 판타지가 어긋나는 마찰음이요, 사랑의 진실을 대면하는 인간 내면의 균열음이다.
빌에게 있어 가정의 신뢰란 칸트적 도덕률이다. 지켜야 하기에 지키는 것.
빌의 관점이 나약하다는 소리가 아니다.
빌은 어쩌면 결혼을 다루는 모든 전통적인 관념을 대표한다.
그에게 정조관념은 결혼의 도덕 의무다.
그럼 그에게, 정조라는 것은 현재적인 성 욕망을 거세해야지만 달성 가능한 것인가?
사랑은 금욕으로 달성되는가?
물론 이 명제는 모순적이다.
빌이 애초에 간단히 대답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욕망의 존재를 제대로 인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빌은 육체를 진찰하는 의사이면서, 여자의 섹슈얼리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예측불가능한 여성의 판타지 앞에 남성의 섹슈얼리티란 항상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
앨리스의 고백은, 빌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사이비 종교 집회인지, 단체 성교 모임인지 모를 다음의 공간은 빌의 욕망과 판타지를 탐구하는 여정 중 가장 초현실적인 공간이다.
이 장면은 지극히 육체적인다.
가면과 망토로 모습을 감추자, 아이덴티티는 사라지고 쾌락의 도구로써 육체만이 남는다.
성적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장면은 아이러닉하게도, 판타지가 제거된 섹스로써 섹스 자체에 대한 완전한 몰입을 보여준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 섹스는, 결혼한 배우자에 대한 부정이나 배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허나 외부의 존재 빌 하포드는 이속에 낄 수 없다.
이 집단의 자유는 외부인의 침입을 배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fidelo, 또다른 의미의 결혼적 정조관념이다.
이물질로써 제거될뻔 한 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의 희생으로 풀려난다.
빌을 감싸는 이 여인의 희생은, 생명을 품는 임신의 희생과도 같다.
집으로 돌아온 빌에게 꿈의 내용을 고백하는 장면이 파랗게 섬뜩하다.
판타지가 실현(꿈속에서)됐음에도 불구하고, 앨리스의 꿈 이야기는 악몽적이다.
대범하고 변태적인 판타지는 꿈에서 끔찍하게 구체화 되며 현실 속 앨리스를 경계한다.
판타지의 쇠락에서도 앨리스가 또다시 빌을 앞서는 한편, 이 장면은
빌이 전날 길에서 만난 여자가 에이즈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룸메이트에게 전해듣는 장면과도 겹쳐진다.
길에서 마주치는 남자가 종교모임에 있던 남자인건 아닐까 빌은 두려움에 빠진다.
판타지는 현실에 존재하기에 너무도 위험하다.
그럼 우리는 어찌해야하나.
나중에, 자신이 파티장에서 진찰한 모델 이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장면 때문에, 우리는 한가지 방향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빌이 ‘모른 체’ 넘어가줘서, 여자는 죽어버렸다.
그리고 신변에 눈감고 있어서, 미행당하고 입막음당하고 운명을 통제당한다.
그만의 여정인 줄 알았던 판타지는 조작된 것이었다.
영화는, 앨리스와 빌이 서로의 욕구(부부 상호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 관계맺는 환상)를 인정하기로 하면서 마무리된다.
이 부부의 솔직한 고백과 인정은 결혼을 파괴하지 않고, 결속을 더 강화시킨다.
실존적 문제에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인생은 거대한 운명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거짓된 질서를 무관심하게 넘겨버리는 것은 진정으로 깨어있는 삶이 아니다.
인간적 불완전함과 나약함이 이들로 하여금 눈을 크게 뜨고 내면의 존재를 직시하지는 못하게 하더라도,
큐브릭의 마지막 영화는 이를 질끈 감아 넘겨 다음 순간을 살아내자고 제안한다.
어렵게 안쓰려고 해도 생각을 글자 몇개에 담으려니까 저런 무거운 단어들이 걸린다ㅜ
미안타 그냥 민주화 줘라ㅜㅜ
그나저나 이것도 에너지가 엄청 소모되는 듯 벌써 두 번 오류났음 에휴 ㅠ
읽어주는 애들 노무노무 고맙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