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장애인수용소 냄새 풍겨서 미안허다.
나역시 얼굴부근에 화상을 입은(정확히는 얼굴과 목의 경계부분이긴 하지만) 20대 중반의 일베충임.
그 자살하려고 매일을 울었다던 게이의 글을 보고나니 마음이 참 와닿았고,
또 내가 어렸을때부터 겪었던 일들도 새록새록 생각이 나서 내 썰도 잠시 풀어보도록 할게.
아참! 세줄요약 빠뜨렸다. 쓰다보니 씹스압이라 선세줄요약 갈게.
1. 돌 갓 지난 응애응애 애기 때 어머니의 실수로 전신의 40% 화상 입음.
2. 80년대 하얀거탑급 의느님들 덕택에 살아남. 그리고 부분적 흉터 남음.
3. 20년 넘도록 계속되는 어머님의 죄책감은 현재진행형.
앞에 글쓴이와 나에게 다른점이 있다면 바로 사고를 입은 '시기'야.
그 글쓴이는 학창시절에 사고를 겪었고
나는 갓 돌이 되었을 무렵 아기일때 화상을 입었지.
사고를 입게 된 경위는 내가 애기였을 당시
어느 평온했던 날의 오후, 장소는 우리집 안방.
어머니께서 그당시 집안일 하느라 바쁘셨는지
부엌에서 빨래를 삶던 물이 담긴 양은대야를
애기였던 내가 자고 있는줄도 모르고(하필이면 ㅋㅋ) 그 옆에 잠깐 놔두셨는데
잠에서 깬 내가 데굴데굴 구르다가 그 대야에 퐁당 빠져 반신욕을 해버린거지.
대야에 담긴 팔팔끓었던 물은 내 조그마했던 아기몸집을 두번 목욕시키고도 남았을 양이었는데
어쨌든 나는 그 물을 뒤집어쓰고 얼굴 왼편과 어깨 가슴 등 부분이 노릇노릇하게 웰던으로 구어졌지.
대략 전신의 40퍼센트에 3도화상을 입었고 병원에서 죽다가 살아났대.
어머니께선 통구이가 되어 몸부림치는 나를 안고 실성한 사람처럼 숨이넘어가도록 울면서
이대목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고(우리집안 3대가 진성 서울종자인데 불행중 다행인지 목동병원 바로 옆에 살고 있었음)
그당시 80년대에 화상치료에 관한 권위있는 교수들이 총출동하여 내 수술에 참여했다고 들었어 ㄷㄷ;;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수술실 밖에서 내가 수술받던 장면을 잠시 목격하셨는데
의사들이 내 조그마한 몸집의 피부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순식간에 긁어서 벗겨냈대.
(응급수술은 신속함이 요구되니 어쩔 수 없지. 의사들이 내 피부를 때수건 같은걸로 박박 문질렀다고 하는데 너무 끔찍했대.)
내가 고통에 발버둥치던 그 모습을 보고 몇번씩이나 까무라치고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미안해서 하염없이 매일매일을 구석에 숨죽이고 앉아 울었다고 하셨어.
20년이 훨씬 넘도록 그때의 사고가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잊을래야 잊을수없을만큼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고 하셔.
그런데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당시 80년대 의느님들께선 나으 응딩이스킨을 섬세하고도 거친 봉합스킬로 온몸에 치덕치덕했어.
그러니까 흉터를 없앴다기보다는 원래의 피부를 늘어뜨리고 연결하는 작업을 반복, 또 반복하여
흉터의 크기를 줄일수있는만큼 최대한도로 줄인 것.
결론은 아직도 전신에 몇군데 10센티 크기의 타원형 화상자국이 남아있고 얼굴과 목경계에 응딩이스킨이 남아있다는거야.
그래도 화상으로 온몸이 뒤덮인 것보다는 미관상 훨씬 나은거라고 항상 생각해.
어머니와 반대로,
나에겐 그때의 수술에 관한 끔찍한 기억과 트라우마가 기억속에 남았느냐?
당연히 업ㅂ어
애기였을때인지라 내가 수술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지도 모르고.
살다보니 내가 남들에겐 없는 흉터를 갖고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거지.
그걸 깨닫게 된 시기는 대략 국민... 아니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항상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모든 친구들이 물었지 '너 목에 왜 그래?'
길가다 처음보는 어른들도 물었지 '어쩌다가 다쳤니?'
조금 아는 어른들은 또 이렇게 물었지 '험하게 다친것보니 이녀석 장난꾸러기였구나?'
나는 하루 평균 10번꼴(사실 이것도 적어)로 이 질문들을 들으며 초,중,고 생활을 했어.
하루에 10번이면 한달이면 300번이니깐 1년이면 3600번.
학창시절 12년동안만 총 43200번을 들었지. 절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해.
성인이 되고나서 43200번의 비슷한 질문들을 받아온 나는
그 질문에 가장 불편하고 어색함 없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지.
나는 오히려 상대방이 왜 흉터가 생겼나고 물어보고는 싶은데,
궁금함을 참고 애써 말을 삼키는 모습을 볼때마다 더 조급함이 느껴져.
그런 경우엔 내가 먼저 친한척 말을걸지.
"어렸을 때 크게 다친 적이 있는데요. 정말 죽을뻔했어요.
다행히 상처만 남고 살아남았는데 이 상처 보이시죠? 이 수술자국이 없었으면 저랑 이렇게 마주보고 얘기도 못해요^^"
그리고 대놓고 왜 흉터가 생겼냐고 물어보는 사람들한테는 살짝 웃으면서
"아 이거요? 옛날에 수술받은 자국인데 사람 많아도 저 찾기 쉬울걸요? ㅎㅎ"
그런데 만약 내가 대답할 때 살짝 얼굴을 찡그리거나 더듬기라도하면
상대방은 '아 내가 괜한 질문을 했구나.'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괜히 없던 불편함만 서로에게 생기게 돼.
뜬금없이 오묘한 거리감이 드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게 나는 너무나 싫었어.
그래서 나는 내 흉터에 대하여 물을때마다 절대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고 애써왔고,
그런 습관이 들다보니까 이젠 그런 질문을 대놓고 들어도 진짜로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어. 저절로 여유로운 대답이 술술 나왔지.
다만 학창시절때는 사춘기다보니 아무래도 이성을 대할때 흉터 때문에 자신감이 떨어지기 마련이었어.
솔직히 가까이서 보면 내가 거울을 봐도 좀 징그럽거든.
그래 이씨발 ㅋㅋ 말 나온 김에 인증한번 때려주지.
사진으론 밝기 높여도 좀 희미하게 보이는데 실제로 보면 훨씬 더 울퉁불퉁하고 붉그스름해서 티가 확 난다.
암튼 스무살때부턴 이러한것들도 나름의 대처방법이 생겨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
가령 소개팅 때나 미팅, 혹은 마음에드는 여자한테 다가갈 때 내 흉터에 관해 물어보면 능청스럽게
"제가 애기였을때 큰 화상을 입었는데 허준 13대 제자 만나서 살아남았어요. 그분이 물려주신 칼자국이에요."
대충 이런식으로 대답해.
내가 대답하기 전에 보통 여자들은 실례된 질문이 아닐까 조금 초조해하다가도 내 이런 대답을 들으면
조금 안도하면서 살짝 키득키득 웃거나 오히려 더 궁금해하고 눈을 초롱초롱 뜨면서 경청하는 자세로 바뀌거든.
그러면 나는 또 이렇게 말을 잇지.
"싸우면 나쁜흉터구요 저는 착한흉터에요. 솔직히 칼자국 잘어울리죠."
이런식~
그러면 알듯모를듯한 긴장감과 불편함은 눈녹듯 사라지고,
대부분 여자들은 더이상 내 흉터에 시선을 두지 않아. 그제서야 내 장난을 받아쳐주기 시작하지 ㅋㅋ
그러니까 최대한 '나'라는 사람에게 집중하도록, 그리고 편안한 대화가 이루어지게끔 유도하려 노력을 해.
이토록 자신감 넘치는 지금의 내모습이지만
어렸을때 화상자국 때문에 멘붕한 에피소드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희는 모를게야 ㅠㅠ
내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멘붕사건을 하나 얘기해줄게.
초등학교 5학년때였어.
그당시 여자담임선생님이 있었는데 나이는 30대초반? 다른 담임들에 비해 젊은편이었고 또 미인상이었어.
하지만 성격이 죶같은 김치년이었지.
최XX 라고... 아직도 그 이름 석자를 똑똑히 기억해.
내 기억으론 미술시간인가? 크리스마스 전전날 서로에게 전해줄 카드같은걸 만들고 있는데
그때 내 짝궁이 어떤 죶같이 시커먼 여자애였어. 매일 나한테 장난 존나 걸고 시비까고 좀 성격 드러운 초딩여자애였는데
얘가 그날따라 날 존나 이유없이 꼬집고 시비를 트는거야. 생리를 일찍시작한건지 씨.발ㄴ이.
내가 카드를 가위로 오리고 있었는데 이 ㅁㅊ뇬이 존나세게 꼬집어서 아파갖고 팔을 비트는바람에 카드를 잘못 오려서 망가졌거든.
그래서 내가 빡쳐서 '아이씨X' 하면서 가위를 살짝 들었지. 당연히 겁만 주려고, 더 지랄좀 못하게 씨발!
그랬더니 이썅뇬이 "선생님! 얘가 가위로 막 저 찌를려 그래요 꺅꺅!" 이질알을 떠는거야.
물론 겁에 질려서 그런게 아니라 장난식으로 깔깔 웃으면서.
갑자기 담임년이 그 외침을 듣고 내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오더라?
그러자 반아이들 전부 숨을 죽이고 시선을 모았고
그때 그년의 표정이 씨발... 전설의고향에 나오는 미망인요괴를 보는듯했어.
나는 그 표정이 진짜 너무 무서워서 팬티에 지릴뻔했지.
원래 미술시간에는 책상을 서로 맞대고 모아서 모듬으로 만들고 수업을 받았는데
내 모듬에 있던 개객끼들 서로 책상을 들고 물러나서 담임년이 내 앞으로 오게 친절히 길을 터주드라고.
담임년은 내앞에오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책을 내 책상에 '쾅' 소리 나도록 내치는거야. '탕'도 아니고 '쾅!' 소리 날정도로.
난 오줌뿐 아니라 똥까지 지릴뻔했지. 그러더니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소리를 꽥 지르더라구.
"너 이새끼 미친새끼 아니야 이거?! 신경질나게하네 이새끼가?!"
그뇬이 그때 그렇게 빡쳤던 것은 남친한테 차여서였는지 생리가 터져서였는지 아니면 가위 혐오증이 있어서였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재빨리 변명을 해야 될 것 같아 겁에 질려 말을 더듬거렸지.
"얘.. 얘가요 얘가 먼저..."
그순간 불이 번쩍 하더니 내 고개가 휙 제껴지며 뺨이 얼얼하더라구. 정통으로 싸대기를 쳐맞았지.
나는 존나게 아파서 뺨을 쥔채로 눈물이 나오려고 했어.
그런데 이어서 그뇬이 말하길.
"야이 얼겅이 새끼야."
그러더라. 나는 갑자기 뭔소린가 멍하니 있는데
"니 모가지 얼겅얼겅거리잖아 이 화상자국 얼겅이 새끼야. 어휴 진짜 징그러워서 꼴도 보기 싫으네."
원래 이 얘길 안들었으면 서러워서 엎드려 울라 그랬거든?
근데 이상하게 눈물이 쏙 들어가고 진짜 생애 처음 느껴보는 수치스러움과 증오감이 동시에 들더라.
내 잠재된 분노 게이지가 폭발하여 순간 드래곤볼 속에 나오는 초사이어인 되는 느낌이 이런거구나 싶었어.
나는 진짜 웬만해선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스스로 관대하다고 생각해오고 있는데
그때만큼은 두 눈에 독기가 품어졌고 처음으로 진짜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 라는 생각만 수없이 되뇌여졌어.
물론 그럴 깡은 없었음 헤헤
아무튼 그때 이후로 내 별명은 '얼겅이'가 되었고
처음엔 그냥 얼겅이 소리 듣고도 모른척하다가
초딩 6학년때 어떤새끼가 등뒤에서 툭 치면서 고개돌리면 손가락으로 볼찌르는 장난치면서 '얼겅아' 이러는 바람에
제대로 폭발해서 선빵과 동시에 비토벨포트 불꽃펀치 날리듯 죽빵을 미친듯이 갈겼는데,
얼굴 감싸쥐고 숙인채 코피 뚝뚝 흘리던 그새끼 보고 제정신이 딱 돌아오는게야...
주변에 애들 표정보면서 스스로 깜짝 놀랬지. 내가 이렇게 포악했나? 하면서 말야.
그뒤로는 얼겅이 라는 별명이 완벽하게 자취를 감춰서 다행이긴 했어.
지금 생각하면 그놈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솔직히 그때 때리길 잘했다는 생각은 해.
만약 요즘 초딩들이 내가 겪었던 그 담임뇬을 똑같이 만났더라면
핸드폰 동영상 찍고 인터넷에 올리고 부모님한테 꼰지르고 교육청에 찌르고 그 담임을 사회에서 아주 매장시킬 수도 있겠다 싶어.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내 스스로도 멘탈이 대단했던게,
나는 그때 그 담임뇬한테 싸대기 쳐맞고 얼겅이 소리 듣고 집으로 와서도
활짝 웃으며 어머니가 주는 저녁밥을 먹었지. 그 얘기 들으면 어머니가 속상해 할까봐 ㅋㅋ
내가 어렸을적 어머니의 모습은 참 미인이셨어(탤런트 김희애 많이 닮으심 ㅋㅋ)
그리고 '착하고 순진했다' 라는 표현이 가장 먼저 떠올라.
얼마나 착하셨냐면 그당시엔 우리 동네에 집집마다 구걸하러 출첵하는 그지들이 좀 많았는데
다른집은 다 문전박대하는데 그지들이 우리집 올때마다 어머니께선 꼭 천원짜리 한장씩 꼭 주고 보냈어.
참 답답시러웠제 ㅜㅜ 착한게 아니라 영악하지 못하셨다 해야하나?
암튼 상냥하시고 남의 얘길 잘 들어주는 그런 분이셨음.
헌데 좀 2% 부족한 구석이 있으셔서 ^^;; 깜빡깜빡 잘 잊어버리고 실수가 많으셨어.
(그래서 애기가 자는데 그 옆에 뜨거운물 담긴 대야를 겁도 없이 놓아두는 실수를 범하셧제 ㅜㅜ)
더군다나 스물이라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셨고, 스물 한 살에 나를 낳으셔서 주부생활을 일찍 하시는 바람에
집안일이 서툴러서 많이 힘들어 하셨던걸로 기억해.
물론 시집살이는 아니구. 할아버지 할머니는 따로 사셨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거든.
차라리 시집살이라도 하면 집안일에 관한 여러방법들을 코치 받기라도 할텐데
아버지께서 일나가시고 집안에 어머니와 애기였던 나 단둘이 있으면 어머니께선 정말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하고 막막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신혼생활을 하다가 찾아온 나의 사고가 어머니께선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었던거야.
내가 애기때 사고를 겪은 후, 어머니께선 일년 동안을 나를 바라보며 울면서 잠들었고
항상 그로인한 죄책감 때문인지 나를 유치원, 초등학교 보내는 것도 어려워하실 정도로 나와 떨어져 있으면 항상 불안증상을 나타내시곤 했어.
4살차 나는 친동생이 하나 있는데 걔는 초등학교다닐때부터 어딜 싸돌아 다녀도 걱정 안하시지만
나는 지금 20대 중반인데도 매일같이 전화하고 안부를 물으실 정도다 ㅋㅋ
어쨌든 초등학교 1학년때인가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내 목을 가리키며
'엄마 나 여기 왜이런거야?' 하고 물었던 것이 기억나네.
어머니께선 상냥한 목소리로 '응^^ 그건 엄마가 우리 XX(내이름) 애기때 잘못을 해서~'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붉어진 눈주변이 파르르 떨리시다가.
'친구들한테는 엄마가 실수를 해서 뜨거운 물에 데였다고 얘기를 하면 돼. 알겠지?'
라고 하셨지.
그 뒤로도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오면 어머니 앞에서 내 목을 가리키면서 '나 이것좀 없어졌으면 좋겠어. 짜증나...'
하고 투정을 부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남자니까 괜찮아~ 나중에 엄마가 수술해줄게 알았지? ^^' 하시고
부엌에 서서 설거지하는 척 하시며 몰래 울고 그러셨어.
나는 그때 어머니에 대한 원망보다는 어머니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너무 들어서,
초등학교 3학년때인가 4학년때 이후론 집에서 흉터얘기는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어.
어머니가 우는 걸 보기 싫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우는 건 그때뿐만이 아닌게 문제였지 ㅋㅋ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도 중학교를 다닐때도 고등학교를 다닐때도
내가 잠이 들면 가끔씩 새벽에 나몰래 내방문을 슬그머니 열고 들어오시곤 했지.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아서 내 목을 쓰다듬으며 소리없이 울고 나가셨어.
그렇게 자다가 뜬금포로 엄마 훌쩍거리는 소리에 잠이 깰때면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는 훼이크고,
엄마가 하도 측은해서 나도 자는척하며 눈물 흘리는 바람에 베게가 축축해지곤 했는데
고등학교 때부턴 엄마 훌쩍거리는 소리에 깨면
"엄마 참 또 그런다." 하고 한번 안아드리고 그랬지.
지금은 사회인인지라 어머니와 따로 살기에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흐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됐어.
그러나 또 나 없는데서 가끔또 혼자 속상해하고 그러시는건 아닌지.
내가 보기엔 어머니의 죄책감은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평생동안을
어머니 주위에 맴돌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우리 어머니가 갖고 계신 나에 대한 기억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드리긴 어려울 것 같아.
요즘 이 못난 아들이 바빠서 한달에 한두번 꼴로 어머니를 만나는데
그때마다 가장 많은 시간 동안 손을 잡아드리고 안아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물론 거동이 불편하시다거나 그러신건 아니야 ㅋㅋ
운전감각은 웬만한 아저씨한테 안뒤질 정도로 좋으시고 여러가지 운동 잘하시고
그 자부심 높은 동안 외모 유지하신다고 피부관리 받기 좋아하시고 ㅋㅋ 건망증 심하신건 여전.
단지 어머니를 마주할때 최대한 내 피부를 맞대려 하는 이유는
당신이 다치게 한 아들이 사실은 당신 품에서 건강하게 숨쉬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완벽한 치유는 아니더라도 이러한 증명들이 항암제와 같은 효과가 있다면
나는 지나치다 못해 고귀한 어머니의 사랑을
평생동안 다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성팔이 ㅁㅈㅎ 달게 받는다 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