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참 한국을 후끈하게 했던 '후소사 교과서' 기억 하는 게이들 있냐?


근데 그 후소사 교과서 말여~ 사실 학교 채용률 1% 도 안되는 좆 마이너한 교과서임.


그럼 일본 학생들은 대개 멀 보고 공부하냐는 의문이 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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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본 고교생들 30% 정도는 야마카와 출판사라는 출판사의 교과서를 보고 공부해.


이 야마카와 출판사 교과서는 전체 고교의 약 30%, 이른바 진학고교라 불리우는 곳에선 90%라는 ㅆㅅㅌㅊ 채용률을 자랑하지.


왜 이런 경이로운 채용률을 가지고 있느냐? 바로 이 출판사에서 교과서 집필하는 선생(대학교수)들이 센터시험(일본의 대학시험중 하나) 문제도 만들거든


당연히 대학 진학이 목표인 고교생이 많은 학교에선 이걸 볼수 밖에 없는거 ㅋㅋㅋ


아무튼 일베 보니까 역사 교과서 기술에 대해 후끈한데, 나도 이걸 한권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 적힌 한일합방에 대한 기사를 번역해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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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좀 많이 떨렸네. 실제로 함 보고 싶으면 일본 여행 갔을때 큰 서점 가서 하나 사라. 800엔 정도면 삼.


여하간 번역 한거 올림.


러일전후의 국제관계

러일전쟁 후의 일본은 전쟁 승리로 얻은 대륙진출거점의 확보에 힘썼다. 먼저 1905(메이 38), 미국과 비공식적으로 가쓰라-테프트 협약을 맺고, 영국과는 영일동맹협약을 개정( 2)하여, 양국에게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승인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배경으로써 일본은 동년중에 2 한일협약 맺고,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한성에 한국의 외교를 통할하는 통감부를 두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 황제 고종은, 1907(메이지 40)년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2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항의하였지만, 열국에게 무시당했다(헤이그 밀사사건). 일본은 사건을 계기로 한국황제 고종을 퇴위시키고, 계속하여 3 한일협약을 맺고 한국의 내정권을 손에 넣고, 더욱히 한국군을 해산시켰다. 이때까지도 식민지화에 저항하여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운동은 해산당한 한국군의 ()병사들의 참가를 통해 본격화하였다. 일본정부는, 1909(메이지42)년에 군대를 증파하여 의병운동을 진압했지만, 도중에 전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두에서 한국의 민족운동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정부는 헌병대를 상주시키는 등의 준비를 하고 1910(메이지43)년에 한국병합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여(한국병합), 한성을 경성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통치기관으로써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초대총독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상을 임명하였다. 조선총독은 당초 현역군인으로 제한되어, 경찰의 요직은 일본의 헌병이 겸임하였다.

 총독부는 지세부과의 기초인 토지의 측량, 소유권의 확인을 조선전토에 실시하였지만(토지조사사업), 그때 소유권이 불명확 등의 이유로 광대한 농지, 산림이 접수되어, 일부는 동양척식회사나 일본인 지주에 불하되었다…(하략)

 

 

러일전쟁중의 1904(메이지37)년에 맺은 1 한일조약에선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외교고문을 한국정부에 두어, 중요한 외교안건은 사전에 일본정부와 협의 하는것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많은 조선농민이 토지를 빼앗겨 곤궁에 빠져, 일부는 일을 찾으러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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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몇가지 문제가 될만한 표현이나 생략이 있지만 생각보다 중립적으로 기술 되었어. 


해외 교과서 기술을 보면서 느끼는건데, 정말 한국 국사 교과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일단 먼저 국사편찬위원회라는 정부 산하 조직이 독점적으로 출판하고 있는 것도 있고,


최신 연구 결과를 그다지 반영 못하고 있는거 같아. 


여하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일본 교과서가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후소샤 교과서 같은 기술이 다가 아니란 소리야


그걸 알아줬음 좋겠어


3줄 요약


1. 3줄 요약한다고 알아 먹겠냐?

2. 그냥 글 전부 읽어라

3. 근데 좆초중딩들은 써놔도 먼소린지 모르겠지? 가서 씻고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