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링크 가보닌깐.. 중학생이 봉사가로 갔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더라.
뭐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지만.. 어린 학생이 죽었고.. 저 중학생밖에 안되는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위해서
반국가행동에 동조했다는게 말이나되겟냐? 100% 선동당했지..
이번에 광우병폭동때 너내 자식들이 선동당해서 나갔다가 경찰한태 제압당해서 사망했어도
그 폭동자체가 나쁘닌깐 국가를 원망 안할 자신있냐?
부끄러움을 모르는것들은 짐슴이라길래..
최소한 자발적으로 판단할수있고 지적 사고를 할수있는 20대이상의 성인남성들이 국가를 내란하기위한
계엄군을 사살했던 쓰레기섹기가 죽었구나 생각해서
링크눌러보니.. 저 중학생이 총탄에 마저 사망했더구나..
시스템클럽들은 일베에서 그냥 패드립친다고 하나.. 진짜 짐승으로 보고있는것이냐?
우리보고 저 어린애보고 폭도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잘뒤졌고 국가에서 보상받는것은 부합리하며
너희들 폭도들은 부끄러움이 없다고 외치라고 지금 그러는거냐?
뉴스 일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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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http://news.donga.com/3/all/20130525/55396966/1
1980년 5월 21일, 송 씨는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족들의 건강을 빌기 위해 광주 동구 서남동(당시 구시청
사거리) 집에서 절로 가던 중 이웃주민을 만났다.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들이 모여 밥도 못 먹으며 군인
들과 밤새 싸우고 있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고 송 씨는 “내가 데모는 못하지만 그런 일은 해
야지”라며 성금 1000원을 낸 뒤 함께 모금을 했다. 십시일반으로 모은 성금 10만 원으로 동네슈퍼에서
빵과 우유, 찐계란 등을 샀다. 그러고는 전남도청으로 가 ‘독재타도’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있던 시
민들에게 빵 등을 나눠줬다.
송 씨는 한 시민이 대치하던 계엄군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도 밥을 못 먹고 있을 텐데 먹을 것을 갖다 주
자”는 말을 듣고 찐계란 여러 판을 건넸다. 남동생 같았기 때문이다. 계엄군은 “고맙다”며 허겁지겁 계
란을 먹었다.
송 씨는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가슴 아픈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귀가했다. 그런데 집에 오니
아들(김완봉 군·당시 15세·광주 무등중 3년)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은 엄마의 귀가가 늦어지자 엄마를 찾
으러 집을 나간 것이었다.
그날 저녁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던 송 씨는 이웃주민들로부터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아 숨진 사람 가운
데 머리가 짧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밤새 시내 병원들
을 찾아 헤맨 송 씨는 22일 오전 광주 적십자병원 영안실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고 바로 실신했다. 아들
은 엄마와 길이 엇갈려 도청 앞까지 갔다가 계엄군의 집단발포 때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6·25전쟁 당시
북한에서 홀로 내려와 결혼을 한 송 씨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남매를 키웠다. 우등생이었던 외동
아들은 그에게 삶의 등불과 같았다.
송 씨는 먼저 떠난 아들을 8일 동안 묻지 못했다. 당시 안장할 장소도 없었고 군과 대치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5월 29일 망월동 묘역에 아들을 안장하는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졌다. 그가 오열하는 모습은
이날 망월동 묘역에서 취재하던 나경택 씨(5·18 당시 전남매일 사진부 차장)의 렌즈에 담겼다.
시스템 클럽 사이비우파 노땅들에게 전한다.
우리가 말하는 폭도는 북한을 찬양하는 빨갱이섹기들이지..
선동당한 우리국민까지 다죽이자는게 아니다. 너낸 그들까지 죽이자고 하고있다.
우리는 짐승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