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분탕질과 전두환의 등극의 함수관계

 

1980년 2월 24일 전두환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과 이학봉 대공처장에게

 

“김대중을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해 달라”

 

는 지시를 내렸다. 이학봉은 나중에 검찰 조사에서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전 장군은 김대중씨가 곧 사면 복권될 예정인데 김대중에게 정치를 재개하면서 사회 소란 행위를 하지 말고 시국안정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 만난다고 했습니다.

제가「김영삼, 김종필 총재도 만날 것이냐」고 물었더니

소요사태를 일으킬 우려가 있는 김대중만 만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김대중만 만나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면서 반대했습니다. 권정달 정보처장도 제 의견에 동조하여 전 장군은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고 저와 권정달 처장만 나가게 한 것입니다.

이학봉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대중 계의 이용희 의원에게 말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2월 26일 김대중과 권정달 이학봉은 보안사령부 安家에서 1시간 30분 정도 회동했다.

 

이학봉은 전두환의 불참을 사과하고 김대중의 대중경제론과 동경 납치 사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학봉은 김대중에게 사면복권 후 사회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했으나 김은 거절했다.

 

그럼에도 그 직후, 정부 각료들은 모두 김대중의 사면 복권에 반대했으나 전두환의 요구에 따라 사면복권이 확정되었다(전두환이 김대중을 사면․복권시키면 정치를 재개하면서 사회혼란을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를 하면서도, 사면복권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결과를 볼 때 김대중이 야권을 분열시키고 장외정치활동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빌미로 군부 집권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김대중의 활동을 살펴보면 느끼겠지만 대개는 상대방의 집권이나 재집권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전두환은 1987년에도 김대중을 사면 복권시켜 야권분열을 재차 유도하였다).

1980년 2월 29일 최규하 정부는 김대중을 포함한 6백87명을 3월 1일자로 복권시켰다.

이중 학생이 373명이었다. 김대중과 함께 윤보선 전 대통령, 정일형 전 국회의원 등 정치인 22명, 지학순 주교, 함세웅 신부, 문익환 목사 등 종교인 42명, 백낙청, 이영희, 김동길 교수 등 교직자 24명, 언론인 9명, 기타 217명이었다(김대중은 사면복권이 안되었을 경우 1976년 명동사건의 판결에 따라 1981년 3월 10일까지 정치를 재개할 수 없었다).

김대중의 복권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의 대통령 되기 경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전두환 일당이 예상하고 바라던 일이었다. 전두환도 3월 1일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였다. 복권되자마자 김대중이 한 것은 김영삼 총재에 대한 비난이었다.

 

3월 1일 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톡스 기자와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이날의 인터뷰를 뉴욕 타임즈는 3월 2일자로 보도했다.

“어제 복권된 반정부 지도자 김대중은 오늘(3월 1일) 김영삼이 그들 공동의 적인 박정희 대통령이 지난해 10월에 암살된 이후 신민당을 효율적으로 이끌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신민당의 김영삼 계보는 이에 즉각 반격을 내놓았다. 임시대변인 정재원 의원은 “김 총재의 헌신적인 민주화 투쟁으로 인해 김대중씨를 풀어준 공로에 대해선 일체의 언급을 않고 비난부터 시작한 것은 대통령 후보에만 집착하고 있는 저의로밖엔 볼 수 없다”고 공개 비난 성명을 냈다.

 

3월 6일 김영삼과 김대중은 남산에 있는 외교구락부에서 만났다.

오찬을 겸해 두 시간여 밀실회담을 한 후 “우리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민주회복이 더 시급한 문제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기 위해 범야세력의 대동단결에 노력하기로 했다”고 합의문을 발표했다(이 회담에서 김대중은 신민당에 입당한 바 없는 만큼 앞으로 재야인사들과 함께 협의한 후 정치적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주장을 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1979년 5월 30일 총재로 선출된 직후 윤보선과 김대중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은 본인들로부터 승낙을 받아 발표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이것을 부인하고 입당한 적이 없다는 해괴한 주장을 했다).

1980년 3월 6일 충정부대장 회의에서「소요대비태세 훈련강화 및 출동태세유지」가 시달되었다(전두환 일당은 1980년 이른 봄부터 충정부대를 점검하면서 시위진압에 대비해 갔다). 한국군은 박 정권 시절부터「충정계획」이란 수도권 소요진압작전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다. 이 진압작전에 투입될 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 특전사령부의 1․3․7․9 공수여단, 수도권의 20․26․30사단으로 지정돼 있었고 이들을 충정부대라 칭했다.

복권되자마자 김대중은 즉시 비서실, 기획실, 정책연구실 등을 두어 요직을 인선했다.

비서실장은 예춘호, 비서실 차장에 박종률, 기획실장에 김상현, 정책연구실장에 이문영, 대변인에 정대철, 부대변인에 이협을 임명했다. 또한 김대중은 신민당 의원에 대한 개별 포섭과 함께 재야인사를 중심으로 민주헌정동지회(회장 김종완, 79년 중반 발족. 1980년 1월 예춘호 김윤식 김종완 3인을 대표지도위원으로 조직 개편. 김대중계의 지방 조직을 되살리는 작업을 전담), 한국정치문화연구소(회장 김상현, 김상현이 주로 청년 정치지망생을 규합하여 80년 3월 조직), 민주연합청년동지회(회장 김홍일,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주로 학생운동 출신자를 중심으로 80년 3월 조직) 등 자신의 사조직을 전국적으로 구성해 나갔다.

신민당내의 세력 판도도 확연히 드러났다.

우선 의원 수에 있어서 당권파인 김영삼계와 비당권파인 김대중계는 팽팽하게 맞섰다. 스스로 중도임을 자청한 고흥문(高興門) 국회부의장 등 12명의 향배가 주목을 끌었다. 3월 12일 고흥문 국회부의장은 후보단일화를 위해 김대중 집을 찾았다. 아무도 배석하지 못하게 한 뒤 둘만이 마주 앉았다. 다음은 고흥문 씨의 대화 내용 술회이다.

고흥문 : 현재의 정국은 캄캄한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어두움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이같은 어두움을 해결하는 길은 없겠는가?

김대중 : 민주적인 방법으로 국민이 원하는 야권후보를 하루 속히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흥문 : 당연하다. 그것만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태양과 같은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난번(71년 대통령 선거)에 당신이 야당 단일후보로 나가서 차점으로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김총재가 나가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야권의 단일 후보로 김총재를 내보내는 것이 의의가 있는 것 같다.

김대중 :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JP에 맞서 이길 만한 사람이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출마해서 경쟁을 하다가 보면 판세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되지 않겠는가?

고흥문 : 어떻게 판세를 비교한다는 것인가? 또 판세가 드러나면 어떻게 한다는 얘기인가?

김대중 : 집회나 유세 때 군중들이 얼마나 모여들고, 또 그들의 반응이 어떤지를 저쪽과 비교해 보면 된다. 그렇게 하다가 판세가 드러나면 선거 직전에 한쪽이 다른 한쪽 후보의 손을 들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고흥문 : 그것이 어떻게 믿을 만한 척도가 된다는 것인가? 군중이란 으레껏 동원도 되는 것인데…

김대중 : 그렇지 않다. 충분히 비교될 수 있다.

고흥문 : 지금 여기저기서 당신을 중심으로 신당을 만든다는 소문이 많다. 창당해 버리거나 혹은 조직이 짜여지면 지구당위원장들의 입장도 있고 해서 후보를 사퇴할 수가 없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후회하게 된다.

김대중 :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仁之(고흥문의 호)의 뜻은 충분히 알겠다.

2~3일 뒤 고흥문 국회부의장은 김영삼을 방문했다. 김대중을 만난 사실은 말하지 않고 대화했다. 고흥문씨의 회고.

고흥문 : 저쪽에서 끝까지 새당을 만들 작정인 모양인데 큰일이다. 야당이 이번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다.

김영삼 : 그래서 내가 김대중씨에게 (신민당에) 들어와서 표로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고 하고 있지 않나?

고흥문 : 저쪽에서 입당을 포기하고 굳이 새당을 만든다면 당신이 대권도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김영삼 : (침묵)

고흥문 :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부인에게도 상의하지 말고 대권포기각서를 써서 갖고 있으라. 나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 눈물을 머금고 써야 한다.

김영삼 : 내가 만약 후보를 포기한다면 김대중씨가 JP를 이긴다는 보장이 있는가?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고흥문 : 그것은 얘기하지 말라. 일단 야당이 하나가 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김영삼 : 그래서 내가 김대중씨한테 당에 들어와서 우선 야권을 단일화시킨 뒤에 후보문제를 결정하자는 것 아닌가.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도 그렇게 해서 김대중씨가 후보로 나선 것 아닌가?

고흥문씨는 이후 후보 단일화 설득을 포기했다.

 

3월 14일 최규하는 새 헌법의 정부 형태로 대통령 중심제와 의원 내각제의 절충형태인 이원집정부제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시사하여 권좌에 머무르고 싶은 의사를 표현했다(이원 집정부제에서는 전두환에게 실권이 있더라도 명목적으로나마 대통령직 유지가 가능했다).

최규하 과도정부에서 전두환에 맞서 헌정을 수호하고, 무난히 민간 정부로 넘어가게 하기 위해 노력한 이는 신현확 국무총리였다. 확고한 소신이 있는 그는 내각을 장악하고 최규하 정부가 제 목소리를 내도록 노력했다. 이 때문에 80년 봄 이른바 안개정국에서는 이름뿐인 대통령인 최규하를 제치고 정부의 실력자인 신현확과 군의 실세인 전두환이 공모하여 집권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80년 5월의 대학생 가두시위에서 “전두환, 신현확 물러가라”는 구호는 빠지지 않았다.

3월 17일 김대중은 “崔정권은 강권정치를 다시 연출하려 하고 있다”며 최초로 과도정부를 비난했다.

3월 24일 김대중은 버나드 크리셔《뉴스위크》지 동경특파원과 인터뷰를 했다.

- 지금 김대중씨는 대학 캠퍼스 같은 곳에서 집회를 갖고 대중연설을 행할 수 있습니까?

『아마 지금으로 봐서는 내가 어떤 정책집회를 하고 싶더라도 첫째 장소를 빌리기가 어려울 것이고 집회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허가를 해 줄 것인지가 회의적입니다. 도무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아까 언론 통제 얘기에서 나온 바와 같이 어려울 것이라고 봅니다.』

- 학생들이 당신을 캠퍼스로 초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계엄령이 해제된 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계엄령 하에서 정치 활동은 특히 장외집회를 통한 정치 활동은 어느 나라나 제한하는 법이다. 이것을 김대중은 자신에 대한 정치탄압이라 몰아붙이고 있다.

이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야당 분열을 매우 우려하는 것 같으나 행동은 달랐다. 또한 전두환 일당은 김대중의 장외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조장했다. 이에 김대중은 강연을 통한 정치활동에 나섰다.

 

3월 26일 YWCA 강당에서「민족혼과 더불어」라는 제목으로 연설, 첫출발을 하였다. 강당을 가득 채우고 본관 2~4층 복도는 물론 마당까지 흘러넘친 9천여 청중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상기된 모습으로 등장한 김대중은 1시간 40분 동안 떠들었다(이 연설은 나중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에서 증거물로 제출됐다). 강연 내용을 보면 일종의 선거 유세라 할 수 있다. 김대중의 활동을 관찰하면 늘 이런 식으로 사전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방조하면서 잘도 이용하는 세력도 있어 왔다. 김대중은 이 강연이 성공적이라 자평하고 그 내용을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이러한 가운데 야당후보 단일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윤보선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그의 견해를 밝혔다.

時局혼미는 政治日程 不確實에서

地域對決하면 큰悲劇…候補는 반드시 單一化돼야

-무엇보다 지역감정이 유발된다면 큰일입니다.

『인물보다도 지역을 따져서 道와 道가 대결하는 선거가 된다면 큰 비극이지요. 南北으로 갈린 것도 천추의 恨인데 다시 東西로 편을 가른다는 것은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지역감정해소를 위해서도 野黨후보는 반드시 單一化가 돼야하고 또 單一化 경쟁에서 양보한 쪽은 勝者를 자기 일처럼 성심성의껏 도와야만 지역감정을 해소시킬수 있어요. 옛날에는 두 사람이 出馬했다가 인기가 없으면 한사람이 그만두고 합칠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좀 달라요. 지역대립 때문에 어느 한쪽이 그만두기는 퍽 어려워 질 겁니다.』

『5․16이후 내가 겪은 일과 내 처신에 대해서는 훗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외다. 그러나 두 차례 대통령에 출마해서 내가 당하고 느낀 選擧는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에 참다운 민주주의가 정착하려면 공정하고 명랑한 선거분위기부터 이룩해야 해요. 野黨이 둘로 갈라서서 반쪽 반쪽이 나가서 다퉈보시오. 散票는 말할 것도 없고… 政權交替를 하려면 民主勢力은 어떻게든 하나로 뭉쳐야 돼요.』

<南仲九기자>

(동아일보 1980년 3월 31일자)

윤보선 전 대통령의 우려는 1987년에 현실이 되었다. 민족적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지금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는 1987년에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며 야당 단일화 중재를 거부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재야 그룹은 70년대 유신시기 중 끊임없이 반유신 투쟁을 벌여 왔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으로서 재야의 구심역할을 해왔다.

그는 80년 들어 야당의 후보 단일화에 노력해왔으며 김영삼과 김대중도 윤 전 대통령의 지지를 얻으려 애써왔었다. 그러나 윤보선 전 대통령은 뚜렷이 어느 편도 들지 않았었다. 윤 전 대통령의 개인적 인연은 김영삼과 가까웠고(舊 민주당 시절 같은 구파, 김대중은 장면 계보), 70년대 활동은 김대중계와 노선을 같이 했었다. 윤 전대통령이 김영삼 총재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김대중의 신민당 입당 거부 선언 때문이었다.

4월 1일 양일동 통일당 총재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4월 4일 김영삼-김대중 회담이 있었다.

4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3金씨와의 對話』시리즈 3번째 편으로 김대중의 인터뷰가 실렸다. 다음은 내용의 일부이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둘째 세째입니다. 국민과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6․25때 공산당으로부터 나를 살려줬고 71년 선거 때 위장자동차 사고에서 나를 살렸고 73년 피납 때 바다에서 살려줬는데 그것은 내가 언젠가는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온 이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이웃사랑 곧 社會救援에 있다는 것이며 그같은 신앙을 그의 政治觀으로 연결시킨다.

『이 나라에 민주주의만 꽃피울 수 있다면 우리 국민에게 自由와 正義가 회복돼서 또 다시 눈물과 한숨과 비통한 생활만 없다면 나는 무엇이 되건 상관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그의 이같은 信仰은 지난 73년 8월 8일 日本에서 납치돼 오고 난 뒤 더욱 굳어졌다는 얘기다.

-「大權」을 바로 눈앞에 두고 어느 한쪽이 선뜻 양보하기란 어려울 것 같은데….

『후보단일화의 성공을 위해 金총재와 나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金총재와 나 그리고 신민당지구당위원장들이 정치력을 발휘해서 해결하겠다고만 하면 약간의 方案도 갖고 있어요. 그것은 兩側의 共存原則에 입각한 것입니다.』

4월 6일 하오 5시 안국동의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윤보선과 김대중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윤 전 대통령은 거의 일방적으로 김대중을 설득하고 나섰다.

 

내일 신민당이 중앙 상임위 회의를 한다고 하니 나도 나갈 테니 金의원도 같이 나가서 金泳三과 함께 단결된 모습을 보여 줍시다. 우리가 이렇게 나오면 유신 잔당들도 더 이상 맥을 추지 못하고 선거를 앞당기게 될 것 아니겠소. 나도 신민당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유신 체제 아래서 朴씨의 유신 독재에 협력한 책임은 면할 길 없어. 못된 자들이 더러 있기도 했었으나 金泳三 총재 같은 사람은 마지막에 와서 朴씨와 잘 싸워주지 않았나.

윤보선 전 대통령은 자신과 김대중이 박정희를 상대로 각각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를 회상하며 군부독재와 싸우는 데는 절대적인 단결이 필요하다고 길게 설명했다.

김대중은 한동안 듣고만 있다가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김대중이 선생님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구나 라고 놀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공화당이 망한 이상 신민당이 정권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입당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만 재야의 동지들과 함께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金총재는 중앙상임위원회의 영입을 100명으로 한정하고, 그것도 자기가 선정하는 사람들로 채우고 소수만 저에게 배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다시 설득했다.

내가 金총재를 불러 100명 증원을 당규로서 확정해 놓도록 하겠소. 또 그 100명은 반체제하던 사람과 재야인사를 우선적으로 선임토록 말할 테니 그 점은 염려 말아요. 그렇지 않겠다면 민주 세력의 분열책임은 金泳三이 져야 돼.

윤 전 대통령은 분명히 말한 뒤 “내일 하오에 함께 당사로 나가자”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예, 알겠습니다.”

 

김대중은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절을 꾸벅하고 물러 나왔다. 김대중은 趙鍾昊 비서를 바라보며 “해위(海葦 : 윤보선 전 대통령의 호) 선생께서는 성자같은 말씀만 하신다. 당내 조직을 너무나 모르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미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 포기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김영삼과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산이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월 7일 김대중계 의원들은 아침 일찍 김대중 비서들인 권노갑, 설훈으로부터 호출령을 받았다. 오전 8시경 현역 신민당 의원 20여 명과 원외 중진인사 30여 명이 동교동 응접실을 메웠다. 김대중은 입당포기 의사를 밝혔다.

우리는 5일의 신민당 정무회의 결과를 보고 신민당이 재야인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는 판단을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입당교섭을 포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통령 후보를 투표 없이 결정하겠다면서 왜 재야 사람들은 받아들이는 숫자를 제한해야 하는가. 유신체제와 싸워 온 재야인사를 신민당이 무슨 자격으로 어떻게 심사하겠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정치경험이 없는 재야인사를 가볍게 보고 경계하는 신민당의 자세로 보아 입당해서 정치생활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됐다.

이어 김대중은 “정당 차원의 활동에 대해서는 당분간 일체 참가하지 않고 오직 민주회복을 위한 노력에 전심전력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김대중의 신민당 입당 포기 성명은 상오 10시 라디오 뉴스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이날 오후 라디오 뉴스를 듣고 이 소식을 안 윤보선 전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다음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비서였던 이한두(李瀚斗) 씨의 증언이다.

海葦는 장충단 공원의 양일동 총재 장례식장에서 김영삼 총재, 김대중씨,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하오 1시 가까이 돼서야 안국동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해위가 불러 서재로 들어갔더니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뭐, 이것이 사실이야?”

 

해위는 평소와는 달리 크게 흥분하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비서 尹起大씨가 안타까운 듯이 설명했다.

 

“사실입니다. 아침 일찍 동교동으로 불러서 모두 무슨 일인가 하고 갔더니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일부 인사들이 그러면 안된다고 말렸다는데 더 이상 말하지 말라며 미리 준비했던 성명서를 돌렸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오늘 하오에 나와 함께 신민당대회(중앙상무위원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단 말이야.”

 

해위는 전날(4월 6일) 가졌던 김대중씨와의 밀담 사실을 얘기했다. 윤기대씨가 거듭 동교동의 ‘상오 상황’을 설명하자 해위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金군 집에 전화를 해.”

 

“金군이라면 누구를….”

 

어리둥절한 조종호 비서가 되물었다.

 

“김대중 말이야.”

 

해위의 신경질적인 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동교동쪽에선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연락뿐이었다.

 

“다시 전화를 해. 김군이 이리로 오든지, 아니면 내가 간다고 해.”

 

하오 5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신민당의 중앙상무위 회의도 이미 끝나가고 있는 시각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동교동 김군의 집으로 가야겠어. 차를 대기시켜.”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해위가 벌떡 일어섰다.

 

“집에도 없다는데 가서 뭐합니까? 연락을 해주겠다고 했으니 기다리시지요.”

 

나와 조종호․윤기대씨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한참 후 동교동의 비서실차장인 金載偉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대중씨가 밖에 있어 연락이 늦었답니다. 김씨가 오늘은 머리도 아프고 심경도 복잡하고 하니 4~5일쯤 후에 안국동으로 찾아뵙겠답니다.”

 

조비서의 전언에 해위는 눈을 감아 버렸다.

4월 10일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국민연합 상임집행위원회가 열렸다. 김대중이 신민당 입당 불가를 발표한지 사흘만이었다. 윤보선과 김대중 공동의장이 주재했고 문익환․함세웅․김승훈․계훈제․고은․이문영․예춘호 씨등 7명의 상임집행위원과 김윤식․김종완씨 등 헌정동지회 인사, 서남동․이우정 교수 등 13명이 참석했다.

다음은 예춘호씨의 회고이다.

4월 10일 저녁 6시 국민연합 관계자 10여 명이 안국동을 방문했다. 김대중씨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씨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김씨는 “신민당에서 나와야겠다. 앞으로 재야 쪽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김씨의 그 같은 이유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海葦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으로서 김대중씨의 입당포기 선언은 조급한 결정이며 따라서 공식적으로 이를 수용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튿날인 4월 11일 아침, 조간신문을 받아든 윤보선 전 대통령은 또 한번 깜짝 놀랐다. “국민연합의 집행위원 13명은 어젯밤 안국동 尹潽善 전 대통령 집에서 모임을 갖고 金大中씨의 신민당 결별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는 기사가 게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의 언론플레이였다.

 

윤 전 대통령은 즉각 신민당 기자실로 연락, 기자회견을 갖겠다고 알렸다. 윤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김대중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김대중씨가 신민당에 있을 때는(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된 79년 5월 30일의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된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대통령후보감이 두 명이어서 이를 단일화하려고 노력했으나 이제 김씨가 신민당에서 나왔으니 단일화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됐다”

 

면서 김대중 비토를 분명히 선언했다. 윤 전대통령은 나아가서 “정당은 집권이 목표이지만 국민연합은 국민계몽단체”라고 하면서 “김씨가 신당을 만들어서 정당 활동을 하겠다면 국민연합을 떠나서 해야 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날 오후 文益煥 목사가 안국동을 방문했다. 문 목사는 이날 大田문화회관에서 가톨릭농민회 주최의 김대중 강연회에 김대중과 동행했다가 윤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문익환 목사에게 “문 목사는 교회나 학교로 돌아가세요. 이제 종교인은 교회로, 교수는 강단으로 돌아가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두시지요”라고 자신의 지론(持論)을 폈다.

신민당에 입당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김대중은「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한 재야의 유력인사들과 접촉을 강화하면서 신당 창당을 모색했다.

 

김대중은 국민연합의 규약을 개정, 종전의 3인 공동 의장단 중심으로 운영하던 것을 중앙상임위원회 중심제로 바꾸고 중앙상임위원회 위원장에 문익환 목사, 부위원장에 고은 씨와 함세웅 신부를 선임토록 했다. 이제 국민연합은 김대중의 사조직으로 전락한 것이다. 또한 집권을 대비한 자체조직으로 ‘한국 민주제도 연구소’를 4월 16일 발족하는 등 4월 중순부터 선전․조직․정책 분야를 망라한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 민주제도 연구소란 기존의 김대중 방계조직인 한국 정치문화연구소․민주헌정동지회․민주연합 청년동지회 등을 통합하여 인맥을 보강하되 정책개발에 치중한 집권전략 지휘본부 역할을 담당할 조직이었다. 신민당의 김대중 계 의원들도 신민당사 근처의 가든 호텔에서 거의 매일 모임을 가졌다.

4월 11일 김대중은 한국 가톨릭농민회 주최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농어민 대회에 참석, 「민주주의와 농민의 권리」란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다음은 중앙일보 보도 내용이다.

安保를 執權者가 逆用하면 國民 不滿 터진다

金大中씨 大田 연설

【大田=韓南圭기자】金大中전신민당 대통령후보는 11일『安保가 집권자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으로 전락할 때 국민들의 불만이 촉발되어 제2 越南, 제2「캄보디아」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金씨는 復權후 처음으로 지방강연에 나서 이날 하오 2시 농민회가 大田「가톨릭」문화회관에서 주최한「민주農政실현을 위한 전국농민대회」에 참석,「민주주의와 농민의 권리」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김씨는 이날 신민당 入黨포기선언등 정당차원의 문제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民主化문제를 거론 ▲대통령중심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이며 ▲정치범의 석방 및 復權을 실현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金씨는『美지상군이 한반도에 남아있는 한 金日成의 南侵은 없을 것으로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하고『농민들이 잘살고 인간답게 생활하고 싶으면 모든 일에 앞서 민주政府를 수립하는데 제1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장내에 1천명, 장외에 약 3천명의 청중이 모인 이날 대회에는 국민연합공동의장인 咸錫憲씨와 金哲 統社黨 고문, 신민당의 芮春浩․李龍熙․申相佑․韓英洙, 統一黨의 金顯秀의원등도 참석했으며 초청을 받은 金泳三총재는 不參했다.

(1980년 4월 12일자 중앙일보)

4월 11일을 시발로, 김대중은 본격적으로 대중연설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신학대학 개교 40주년 기념 강연회(4월 16일), 동국대학교 학생회 주최 초청 강연회(4월 18일), 안양성당 강연(4월 20일), 관훈클럽 초청강연(4월 25일), 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의거 48주년 기념 강연(4월 29일), 정읍의 동학제 강연(5월 11일) 등에 참석하여 수천, 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다.

한국 가톨릭 농민회 주최 연설에서 드러나듯이 김대중은 ‘군부 출현의 불가능’을 확신하고 있었다. 12․12사태 자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에 대해 김대중의 전위조직이던 민주헌정 동지회의 金鍾完 이사장(나중에 14대 국회의원을 지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당시 우리 모임은 주로 외신을 들여와 이를 번역해서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 장성 그룹의 신군부가 한국의 실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으며 그들이 재집권할지 모른다”는 요지의 외신 보도가 자주 들어왔다. 그때마다 東橋洞을 방문해서 우려를 얘기했다. 東橋洞측 대답은 그러나 “한국군 작전권은 미국이 갖고 있으니 군부의 재집권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며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12․12사태마저도 “미국측 묵인이 없이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특히 “9사단 전투병력을 움직인 것은 여러 곳에서 합의된 사안일 것”이라며 12․12사태 자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東橋洞측은 미국을 단단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이 증언에서 김대중이 계엄령아래서도 초청 강연을 빙자한 정치활동을 활발히 한 이유가 잘 드러난다. 그러한 선동 활동은 군의 정치 개입구실이 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다. 위의 증언에 대해 김대중은 상반된 말을 한다(너무 짧았던 80년 서울의 봄 참조).

 

사회 혼란을 집권의 빌미로 노리고 있는 전두환 일당에게 김대중의 장외연설 행각은 바라던 바였다. 80년 봄 학내시위로 출발한 대학생시위는 언제 가두로 진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4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대학은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이슈로 내걸었다.

학내시위로 국한시키며 자제하던 대학생들은 4월 10일부터 산발적으로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다.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최근의 내외정세에 관한 대통령 담화문」을 통해『내외정세가 어려운 때에 사회일부에서 국민단합을 저해하는 언동을 하는가 하면 학원가에서 군사교육을 거부하는 등 사회질서가 소란해지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고 했다.

“勉學 해치는 學園소란은 유감”

崔大統領 최근 內外정세에 관한 談話발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80년이 되자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기 위해 노력했다. 막대한 정보부 예산을 정권창출에 쓰기 위해서였다. 신현확 국무총리는 최규하에게 전의 요구를 거부하도록 여러 차례 권했으나 임명권자인 대통령 최규하는 전두환이 자신을 미는 줄로 알고 수용하지 않았다.

최규하는 전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해 보안사령관직과 겸임하게 하였다.

현역 군인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서리(署理)’라는 꼬리를 달았다. 전두환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치에 관심이 없다’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함으로서 공직 서열상 부총리급으로 격상되어 국방부장관보다 서열이 올라갔다.

戒嚴令 해제위한 對備策

日紙들, 全部長서리任命 크게 보도

【東京15일合同】日本의「요미우리」(讀賣)「아사히」(朝日)「마이니찌」(每日)등 전 주요일간지들은 全斗煥보안사령관이 中央情報部長서리에 임명된 사실을 모두 외신면「톱」또는 중「톱」으로 크게 보도하면서 全장군이 軍전반을 비롯 국내외정보․치안 등 민간부문에 관해서도 실권을 장악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日本신문들은 또 全장군의 중앙정보부장서리 취임은 韓國정부당국이 戒嚴令을 곧 해제하려는데 대한 대비책이라고도 분석했다.

(1980년 4월 15일자 중앙일보)

1979년 12월의 쿠데타직후부터 한국의 실질적 권력자는 전두환이라고 해외언론들은 보도해왔다. 전두환이 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으로 부임하자 국내 언론도 외신을 인용해 전두환의 위상을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전두환이 원하는 짓만 하고 돌아 다녔다. 야당 분열, 장외 유세 등. 김대중은 또한 軍部와 접촉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4월에 들어 박종규를 통해 접촉하려 했으나 실패했었다.

 

신민당과 결별한 김대중의 다음 전략은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었으며, 5월에 들어 가시화되었다.

김대중이 이 시점에서 강행한 위험한 모험은 대학을 강연 장소로 택한 점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대학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가짐으로서 계엄령으로 유지되던 불안한 정국의 뇌관을 건드렸다. 이것은 전두환을 두목으로 하는 신군부에게는 좋은 명분을 주었다. 연설의 예를 들어본다.

민주 민권세력의 구심점은 유신 7년 동안 온갖 박해를 받고도 굴하지 않고 싸워온 재야인사들로, 한국신학대학이나, 서울대학이나, 고려대학이나, 여러 대학에서 싸운 이러한 동지들이라고 나는 이 자리에서 단언할 수 있습니다.

(80년 4월 16일 한신대에서「하나가 되자-도덕정치의 구현」이라는 제목으로 연설)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과격하다고 하는 게 신문에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과격합니다. 악에 대해서 나는 과격합니다. 국민을 괴롭힌 자에 대해서 과격합니다. 자유를 짓밟고 정의를 유린한 자에 대해서 과격합니다. 이 나라를 반통일로 끌고 가는 자에 대해서 철저히 과격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고, 국민을 위하고, 자유와 정의와 통일의 길로 가는 사람에게 나는 그 앞에서는 양보다 순하고 온순하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80년 4월 18일 동국대에서「4․19 혁명과 민족통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

이런 보도도 있었다.

사무실 解約에 法的 투쟁

金大中씨는 25일 저녁「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寬勳「클럽」초청으로 열리는 연설과 토론을 위한 원고를 작성하느라 23日엔 自宅에 들어오지 않고「호텔」에서 숙박.

金씨는 東國大 연설이 演題밖의 정치발언이라는 일부 학생들의 항의를 받고 측근을 보내 해명을 하면서 청중들에 의해 입은 학교기물과 나무 등의 피해를 보상키로 했다.

한편 중도금까지 지불한 사무실계약이 건물주인 南光土建에 의해 뚜렸한 이유없이 해약통고된 데 대해 김씨측은 李宅敦의원을 통해 법정투쟁까지 하기로 했다.

(1980년 4월 24일자 중앙일보)

4월 21일 발생한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탄광사태는 민주화보다는 안정이라는 명분을 전두환에 제공해 주었다. 사북 탄광 광원 3천5백 명이 蜂起하여 이 지역을 4일간 장악하였다. 이 와중에 진압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광부와 경찰관을 합쳐 70여명이 부상했다. 정부는 11공수여단을 투입하여 공권력을 회복시키려 하였으나 4일 만에 사태가 수습되어 실제로 투입하지는 않았다. 곧이어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궐기했다.

4월 25일 김대중은 관훈클럽 초청연설에서「80년대의 좌표」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0․26 사태는 결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10․26 사태는 민중이 주체였던 동학농민혁명, 민족이 주체였던 3․1독립운동, 민주학생이 주최였던 4․19 혁명을 총괄적으로 계승한 민중․민족․민주의 국민적 의지의 집약적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자유․정의․통일을 거부해온 반민중․반민족․반민주 세력에 대한 국민적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관훈 클럽 초청 연설을 마친 다음에 김대중은 “개헌과 정치발전 일정이 분명해지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겠다”고 말한 다음 그 시기에 대해서는 “나는 정치를 20~30년 한 프로이기 때문에 정치 일정이 잡혀진 뒤 신당을 해도 충분하다”고 말해 ‘신당’ 창당 의지를 드러냈다.

4월 25일 노동청은 1980년에 들어서 노사분규가 79년의 7배인 719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4월 29일 김대중은 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의거 48주 강연에서「國民聯合」이 民主化촉진 全國民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김영삼 총재와 정반대의 주장이었다.

“過政길면 安定해친다” 金新民총재

[儒城=韓南圭 기자] 金永三 신민당총재는 29일『누적된 모순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政治안정문제와 경제․사회적 문제들은 過渡정부로서는 감당해갈 수 없으므로 過渡기간이 길면 국민의 고통이 연장되고 새 政府의 과제가 어려워진다』고 말하고『과도정부는 새정부 수립을 앞당기기 위한 政治日程을 지체없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金총재는 忠武公․尹奉吉의사․고 柳珍山씨 등의 祠堂과 묘소를 참배한후 儒城숙소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이미 否定당한 세력이 二元執政府制나 中選擧區制로 정치적 명맥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 망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공화당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5월초에 국회가 개회되도록 협조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金총재는 최근 金大中씨가 신민당의 時局觀을 비판하고 在野新黨의 창당가능성을 시사한데 대해『그의 발언에 대해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이 당시 계엄당국은 김대중의 활동에 대해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단속하려 했으나 법 적용이 애매한 면이 있어 포기했다.

4월 29일 전두환은 기자회견을 했다.

▲최근 전개되고 있는 國內정세, 특히 學園문제와 정치인들의 언동을 어떻게 보는지.

-본인에게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기 때문에 자식을 갖고있는 모든 평범한 부모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다를바 없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너무 억눌려 있었다는 느낌을 가진 일부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는 심정이나 기분을 모르는 바 아니나 대다수 학생들은 면학에 열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은 학원의 민주화, 학원의 자율화를 찬성하나 이와 같은 물결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흘러가야지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에 의해서 대다수 선량한 학생들이 피해를 보고 면학분위기가 혼탁해지거나 정부의 정당한 방침과 법지시 사항을 어긴다면 국민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양식을 발휘하여 내일에 있어서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우리 국민 모두가 진정으로 학생들을 아껴주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줘야 된다고 생각하며, 또 그들이 일부 몰지각한 정치세력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도록 보살펴 줘야한다. 본인은 정치경험이 없으므로 잘 모르겠으나 정치인이라면 자기의 소신이나 철학이나 정책을 국민 앞에 밝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난국을 직시하지 못하고 사회를 혼란시키며 국민을 선동하는 언동을 하는 것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국민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금번 東原炭鑛 鑛夫난동사건과 관련, 勞使問題를 어떻게 보는지.

-불행한 사고다. 물론 低賃金下에서 고생하는 광부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나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해결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70년대 고도성장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국제적으로 상대적 저임금 하에서 땀흘린 노동자들의 공로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勞使분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조정되어야 할 것이며 이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국가이익이라는 차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행정당국, 고용주 및 노조간부 모두가 각자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믿는다.

▲非常戒嚴해제시기는.

-나도 非常戒嚴이 하루 속히 해제되기를 희망하나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계엄이 언제 해제되느냐는 내 권한을 벗어난 것이므로 내가 언제라고 시기를 전망할 수 없다. 나자신도 대단히 답답하게 생각한다.

(1980년 4월 30일자 중앙일보)

4월 29일에는 全軍 주요지휘관 회의도 열렸다.

회의 후 과격한 학원소요와 노사분쟁에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2일부터 유신잔당 퇴진, 계엄해제, 정부주도개헌 중단,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신민당에서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대중 계보의원들이 당의 공식행사를 기피하고 신민당 입당 포기를 선언한 김대중의 여러 가지 행사 나들이에 계속 따라갔다. 이에 김영삼 총재를 중심으로 한 주류는 징계를 하려 했다. 5월 1일 신민당 당기 위원회는 박영록 부총재, 노승환 훈련원장, 정대철 정책심의위 부위원장, 김영배 부총무 등 4명의 ‘김대중 수행의원’을 해당행위자로 고발했다. 또한 13명에게 경고서한을 보냈다. 芮春浩 千命基 李龍熙 高在淸 李必善 崔成石 趙世衡 金元基 李震淵 朴炳涍 許京萬 金承穆 의원과 趙淵夏 정무위원이었다. 경고 내용은 ‘공개 사과를 하지 않을 경우 당에서 추방’이었다. 이들은 즉각 반발하여 5월 2일 국회에서 별도의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당권파가 징계문제를 강행할 경우 별도의 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즉 징계하면 탈당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5월 3일 국민연합은 학원사태의 해결을 위해 계엄령을 조속히 해제하고 개헌과 총선실시를 촉구했다.

學園사태 解決위해 民主化日程 밝혀야

國民聯合 주장

「民主主義와 民族統一을 위한 國民聯合」(共同議長 尹潽善 金大中 咸錫憲)은 3일 상오 성명을 발표,『최근의 學園사태는 舊體制를 청산하기 위한 불가피한 현상이며 維新殘滓세력의 집권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학생들의 정당한 抗拒』라 주장하고『학원사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過渡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改憲과 總選이 조속히 실시되도록 民主化日程을 분명히 밝혀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또 이밖의 해결책으로▲정부주도의 二元執政制나 中選擧區制改憲구상을 포기하고▲政治犯의 석방 復權▲言論의 자유가 보장되고 부당한 검열과 보도관제는 철폐되어야하고▲학생군사훈련과 병영집체훈련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아울러 주장했다.

(1980년 5월 3일자 서울신문)

이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 헌법개정 특별위원회에 출석하여, 이원집정부제는 제의도 없다고 언명했다.

5월 6일 김대중 계 신민당 의원 25명은 동교동 김대중 집에 모여 이른바 ‘시국에 관한 신민당의원 간담회’ 결성을 발표했다. 이는 본격적으로 김대중 신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와 관련해 李宅敦의원은『학생들에게 불행이 닥치기 전에 우리가 문제를 맡아 院內투쟁등을 벌이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金씨에게는『危機感이 도는 時局의 적극적 대처』이외에도 간담회구성이 불가피한 몇 가지 당면한 다른 속사정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金씨 수행원들에게 黨權派가 懲戒위협을 가하는데 대해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는 비당권파의 士氣를 높이고 金총재측에 대해서도「實力대항」의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간담회」로 이를 과시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1980년 5월 7일자 중앙일보)

5월 7일 국민연합은『갈수록 노골화되어가는 유신잔당의 독재연장 책동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어떻게 민주화가 가능한가. 단호한 민중의 결단으로 이들을 철저히 분쇄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족사의 결전장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단호한 시민적 행동을 통한 합류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는 요지의「제 1차 민주화 촉진 선언문」을 발표했다(이 선언문은 나중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에서 계엄사령부에 의해 증거물로 제출).

이날 외국어대생들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교문을 나서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5월 8일 강원도에 있는 특전사의 11공수여단이 서울의 강동구 거여동으로, 5월 10일 13공수여단이 김포에 있는 1공수여단으로 이동, 시위진압훈련을 하면서 출동 대기태세에 들어갔다. 5월 9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계엄령 해제․임시회의 즉각 소집․정부의 개헌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5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은 석유를 얻기 위해 중동(中東)으로 떠났다(군에서는 유병현 합참의장이 수행). 이날 여․야는 총무회담을 갖고 계엄령 해제요구에 합의했다. 이날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서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를 만났다. 이 회동의 내용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5월 11일 신현확 국무총리는 사회가 안정되면 계엄 해제한다고 언명하였다.

 

5월 12일 공화당과 신민당이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했다.

전두환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5월 12일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국회가 열리면 계엄해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두환으로서는 무장해제와 다름없는 이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한편 철야농성 중이던 대학 캠퍼스는 모두 농성을 풀고 귀가했다. 전두환 일당은 당황했다. 혼란이 일어나야만 전면등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계엄군의 투입을 미리 준비해둔 전두환 일당은 경찰에 최루탄 공급을 중단했다. 또한 이날 전두환은 비상국무회의를 소집, 중앙정보부 담당 국장으로부터『일본 방위청으로부터 북괴 특수 8군단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보고를 하게 하고는 5월 남침설을 유포했다(「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북한 남침설 분석」참조).

 

5월 12일 오후 5시 김대중은 북악 파크호텔에서 국민연합 주요 관계자들을 소집해서 시국전반에 관해 논의했다.

심명보 위원 : 증인께서는 그 자리에서 장기표 심재권씨로부터 5월 11일․12일 서울대학교 학생회관에서 전국 26개 대학생 대표 45명이 회동한 사실과 이 학생 대표들이 앞으로 잠정적으로 교내시위만을 한다 휴교령을 발표할 시에는 단호히 투쟁을 전개한다 계엄령 해제와 정치일정의 명백한 발표를 요구한다고 결의한 내용을 보고받으셨으며 그리고 16일 다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생대표들이 회동하여 새로운 투쟁방법을 협의하기로 했으며 앞으로 학원시위가 확산될 전망이다 라는 등의 보고를 받거나 들으신 기억이 있으십니까?

김대중 : 그대로 정확히 기억은 없지만 대개 그런 얘기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명보 위원 : 그 자리에서 증인은 과도정부의 실권을 잡고 있는 유신잔당들이 민주화에 역행 계속 집권음모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반독재 민주회복을 실현하는 데 그 목적이 있겠지만 궁국적으로는 우리 민주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다고 말하면서 이들 두 사람에게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명문대학의 동정을 살펴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김대중 : 그런 기억은 없는데요.

(1988년 11월 18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증언)

5월 12일 밤 10시 30분경 주한미군 순찰대는 비무장지대 공동관리구역 남방에서「정체불명의 군인들」과 소규모 총격전을 벌였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국방부의 휴전선 총격전 발표는 정국에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은 13일 전두환을 만나『남침이 임박했다는 징조는 없다』고 잘라 말하고는 미국 정부에『전두환 장군이 남침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5월 13일 오전 김대중은 기자들에게 ‘민주화 촉진국민운동’을 발족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民主化國民運動」결성 추진”

金大中씨 밝혀 新民入黨문제 논의할 때 아니다

金大中씨는 13일 상오『北韓共産주의자들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南韓에 대해 무력에 의한 野慾성취의 음모가 절대 없기를 엄중히 요구․경고한다』고 말했다. 金씨는 이날東橋洞 자택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말하고 金永三 신민당총재가 최근 기자회견에서 밝힌 兩金씨 면담 및 金씨 入黨권유문제에 대해『지금은 대통령후보문제나 入黨문제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 민주화 촉진에 전념할 때』라고 말하고『오히려 신민당 지도부가 시국을 옳게인식하여 民主化촉진국민운동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제의한다』고 말했다.

新民黨의 鄭在原 임시대변인은 13일 金大中씨의 신민당 비판에 대해 성명을 내고『개인적인 정치이해에만 집착하여 입으로는 민주세력의 단합과 民主化국민연합戰線 등을 주장하면서도 30년간의 투쟁을 벌인 신민당을「5개월 투쟁」운운으로 매도하는 처사는 누구를 도와주자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鄭대변인은 유례없이 격렬한 표현을 구사해『金씨는 자신이 유리할 때는 同志的 우의를 내세워 入黨의사를 밝히고 불리할 때는 하루아침에 동지를 배반하는 不道德한 背理를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80년 5월 13일자 중앙일보)

5월 7일 이후 투쟁양식을 가두시위로 바꾼 서울의 남녀 대학생들은 5월 13,14,15일 3일 연속으로 시내를 누비며 ‘계엄철폐’ ‘전두환 퇴진‘ 등의 구호를 외쳤다.

5월 13일 서울 시내 6개 대학 2천 5백여 명이 광화문 일대에서 ‘계엄 철폐’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5월 14일 전국 37개 대학교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 가두시위를 결의하자 전두환은 오전 8시 50분 시위진압본부를 개설하고 군 투입지시를 내렸다. 이미 육군 계엄확대 조치, 정치적 비상조치 필요성 등이 브리핑된 뒤였다. 이날 특전사의 1, 3, 5, 9, 11, 13공수여단에 출동준비령이 내려졌다.

5월 15일 10만 명의 대학생들은 서울역 앞까지 진출하여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 10만여 명의 대학생들은 서울역 앞까지 진출, 시청 앞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날 오후 6시 10분쯤, 정체불명의 20대 청년 3명이 학생대열에서 뛰어나와 시내버스에 올라가 20여명의 승객과 운전사를 강제로 몰아내고 버스를 탈취했다. 그들은 버스를 몰아 △ 도큐 호텔까지 올라갔다가 차를 돌려 △ 서울역 쪽으로 향해 일렬로 서 있던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 남대문을 반 바퀴 돌아 △ 역시 서울역 방향을 향해 일렬로 서 있던 기동 경찰관들을 덮쳤다. 이 바람에 전경 1명이 숨지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5일 밤 고려대에 모인 24개 대학교 학생 대표들은 가두시위를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15일 밤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방문으로 부재중이라 申鉉碻 국무총리가 학생들의 自制를 당부하고 정치일정을 앞당기겠다는 내용으로 時局에 관한 談話를 발표했다.

5월 16일 전국 59개 대학 총학생회장단도 이화여대에서 회의를 열고 비상계엄을 5월 22일까지 해제하고, 현 과도정부는 민주적 정부에게 연내 정권을 이양하고 정치일정을 5월22일까지 명백히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국민연합은「제 2차 민주화 촉진 선언문」을 발표했다.『5월 7일 제 1차 선언에서 요구한 사항에 대해 5월 19일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할 것』을 요구하고『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5월 22일 정오를 기해 대정부 투쟁에 돌입 할 것』을 선언했다. 국민연합의 이러한 주장이 계엄법 위반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이런 성명이 나오게 된 경위에 대해 김대중은 먼 훗날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4일 그날에는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다. 문익환(文益煥), 이문영(李文永), 예춘호, 이해동(李海東) 씨 등 재야 민주 세력의 지도자들이 나를 찾아와 성명서를 내보이며 서명을 요청했다. 이미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은 서명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명서 끝의 ‘우리의 요구’를 보니 참으로 가공할 내용이었다. 그중 첫 번째가 ‘군은 무장을 해제하고 병영을 나와라’하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국군에게 전선을 포기하라는 얘기였다. 물론 당사자들은 계엄군이나 후방부대를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문서는 그냥 ‘군’으로 돼 있을 뿐이었다. 비상계엄 중에 이런 성명을 내면 ‘즉결 처분’을 당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강력하게 반대하여 세 시간 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원안을 버리게 했다. 대신 ‘계엄령의 즉시 해제’ 와 ‘신현확(申鉉碻), 전두환의 퇴진’으로 압축해서 성명을 새로 썼다. 훗날 나는 나를 담당한 수사관으로부터 그 일과 관련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만약 그 성명을 원안대로 냈더라면, 아마 당신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부족했을 거요.”

(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235~236에서)

이 모든 단체행동 등이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일어났다. 전두환이 바라던 일이었다.

전두환은 5월로 들어서면서 ’충정부대‘를 대도시 주변에 배치하여 시위 진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완료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위기를 느낀 김대중은 5월 16일 아침 김영삼에게 급히 연락, 동교동 집에서 회동한 뒤 시국수습 6개항을 제시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비상계엄령의 즉각 해제, 모든 정치범의 석방과 사면․복권 단행, 정부주도하의 개헌포기, 정치일정의 연내 완결 등을 주장하고, 학생들에게는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해줄 것”을 요망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민주화요구가 가두시위의 형태로 증폭되어 사회혼란이 조성되기를 기다리던 전두환 일당은 칼을 뽑았다.

 

최규하 대통령은 예정을 하루 앞당겨 16일 밤 10시 5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밤 11시부터 청와대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부장관, 김종환 내무부장관,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모여 심야대책회의를 했다.

 

5월 17일 오전, 국회는 임시국회를 5월 20일 소집한다고 공고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30분 사이 국방부회의실에서 전두환의 지시로 비상 全軍 주요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유병현 합참의장, 이희성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윤자중 공군참모총장, 김종곤 해군참모총장,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윤성민 1군 사령관, 진종채 2군 사령관, 유학성 3군 사령관 등 군단장급 지휘관들, 최성택 합참본부 2국장, 육군․해군․공군 사관학교교장 등 44명이었다. 전두환은 이 시간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계엄 확대안, 국회해산과 비상기구 설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최성택 합참본부 2국장은 ‘현재의 국가적 위기상황과 북괴의 동향을 비롯한 제반 국제정세’에 대해 브리핑했다. 브리핑을 마치면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사전에 철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어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 전국적으로 확대할 것 ▲각급 학교에 휴교조치를 내릴 것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로서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를 설치할 것 등이 중요한 내용이었다.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결과를 요약하면『사회적 혼란을 막고 북괴의 오판을 막기 위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군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보안사 요원들이 회의장 주변에 배치되었고 정호용, 노태우 등 전두환 일당들이 회의를 주도하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끌어졌다. 회의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결의 사항 문항이 없는 백지에 서명을 했다. 결의 내용을 임의로 넣을 수 있는 백지위임장이었다(자료집의「全軍 주요 지휘관 회의록」참조).

 

회의가 끝나자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총리 공관을 찾아가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군의 결의를 보고하고 시국수습안으로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해산안 결재를 요구했다.

신현확 총리는 주영복과 이희성을 대동하여 청와대에 갔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주영복, 이희성은 시국수습안 결재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중 전국비상계엄안건만을 국무회의에 회부하도록 지시했다.

수도경비 사령관 노태우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끝나고 귀대하자마자 수경사 헌병단과 30 경비단에 지시하여 중앙청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통신을 두절시켰다.

오후 9시 40분 중앙청 회의실에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에서 전국비상계엄안이 의결되었고 이날 자정을 기해 계엄령 확대가 선포되었다. 이에 따라 비상계엄에 제주도가 포함되었다.

이전까지의 계엄령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이었다. 제주도가 계엄령하에 들어가는 것과 안 들어가는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당시의 계엄법에 따르면 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될 경우 내각의 기능은 정지하고 모든 정부 업무는 대통령→계엄 사령관 라인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합법적인 軍政을 당시의 계엄법은 규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이 바라던 국회해산안과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 설치 안건은 신현확 국무총리의 반대로 5․17조치에 포함되지 않았다.

 

17일 자정을 기해 발표된 비상계엄확대조치에 따라 정치활동 중지, 대학 휴교조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포고령 10호가 발표되었다. 이 포고령은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결재 없이 전두환이 임의로 작성 발표한 것이다.

 

계엄확대조치로 전두환은 표면에 등장했다.

 

계엄확대조치에 동원된 군 병력은 특전사, 20사단, 해병사단 등 2만 5천여 명이었다. 이들은 31개 주요 대학과 136개 보안목표에 진주하였다. 곧 이어 김종필 공화당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대중 등 이른바 대권을 넘보던 3김씨와 그 세력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있었다. 김종필 총재는 부정축재 혐의로 김대중은 내란음모협의로 검거되고 김영삼 총재는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인다. 12․12 쿠데타 세력의 권력 장악을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5월 17일 밤 김대중은 무장계엄군에 의해 체포됐다. 김대중과 함께 예춘호 의원, 문익환 목사, 김동길 교수, 인명진 목사, 고은 시인, 이영희 교수 등 재야인사들도 소요선동혐의로 연행됐다. 5월 18일 새벽 1시 45분 전두환의 지시로 수도군단 33사단 101연대는 국회의사당을 봉쇄했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도 같은 날 계엄 사령부에 연행되었다.

5월 18일 아침부터 광주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5월 13, 14, 15일 사흘에 걸쳐 반정부시위가 최고조에 달하다가 16일에 접어들면서 자제하는 기미가 보였다. 반면 광주에서는 16일 오히려 데모가 가열, 3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횃불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5월 19일 다시 성토대회를 갖기로 했다.

 

비상계엄확대와 김대중의 연행소식이 전해지면서 학생 시민들이 동요, 다시 시위를 시작했다. 비상계엄 해제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공수부대가 잔혹하게 유혈진압 하였다.

전북 금마지역에 주둔 중이던 7공수여단은 이미 5월 14일부터 출동준비 중이었다. 7공수여단의 32대대는 대전 충남대로, 31대대는 전주의 전북대로, 33 및 35대대는 광주의 전남대로 진주하라는 명령이 5월 17일 떨어졌다. 33, 35대대 병력 680여명은 전국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발표되기 전인 17일 밤 10시 37분 금마를 떠나 18일 새벽 1시 10분 전남대에 도착했다. 그리고 처참한 시위진압이 시작되었다.(사태가 심각해지면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모두 5,000명으로 늘어났다.)

5월 20일 오전 9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상도동 자택에서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강력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려 했다. 이에 무장한 수도경비 사령부 병력 30여 명이 오전 8시경 집 주위를 에워싸 김영삼 총재의 가택연금이 시작되었다. 같은 날 오전 9시 경 수도군단 33사단 101 연대가 임시국회에 등원하려는 국회의원들을 무력으로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황낙주 신민당 원내총무는 총검에 귀를 다쳤다.

이날 신현확 총리와 내각은 총사퇴했다.

 

5월 22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사건’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대중과 그 추종분자들이 소위 국민연합을 전위세력으로 하여 각 대학의 복학생들을 포섭, 학원소요를 폭력화하고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 혁명사태를 유발, 현 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하려고 했음이 드러났다”고 단정함으로써 내란음모를 기정사실로 굳혔다.

1980년 봄 김대중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외국 외교관들은 비교적 객관적인 관찰자라 할 수 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1982년 7월 뉴욕 타임즈에 보낸 서한에서 김대중의 활동이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지적했다.

Although national security interests properly dominated our actions during the turmoil of 1979-1980, most informed Koreans, including opposition elements, appreciated the role the U.S. played in trying, initially, to achieve a more broadly based government in Seoul and, later, to counter political repression.

These efforts were constrained by our lack of overwhelming influence in Korean domestic affairs and by the fact that we were dealing with sovereign authorities, not colonial subjects. Nor were we helped by the impatience of certain dissident elements, whose lack of restraint played a tragic role in the political crackdown of May 17, 1980.

[1979-1980년 사이의 혼란기에서 우리의 행동은 국가 안보 문제를 가장 중시하여 취해졌던 것이나, 야당 인사들을 포함해서 정보에 밝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이 초기에는 한국에서 좀 더 폭넓은 기반을 둔 정부를 세우려 노력했고, 나중에는 정치 탄압을 막으려는 역할을 한 것에 고맙게 여겼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은 한국 국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압도적인 영향력이 없었고 식민지 백성이 아닌 주권국가의 정부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한계가 있었다. 또한 어떤 반정부 인사들의 조급함도 -이들의 자제력 부족이 1980년 5월 17일의 정치적 숙청에 비극적 역할을 했다 -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을 추진력이 강하다고 인정하였지만 “절대 믿을 수 없고 ……양심도 없고 …… 잔인하고 …… 거짓말을 서슴치 않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김대중에 대한 평은 “사람의 모습에 짐승의 마음을 가졌다”라고 하여 더 나빴다.

다음은 1980년 보안사령부 정보처장을 지냈던 韓鎔源 씨가 1995년 12월 21일 2차 검찰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의 일부이다. 한용원 씨는 전두환 일당의 정권 찬탈을 인정하여 유죄 입증에 큰 역할을 하였다.

-진술인은 광주사태의 발생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釜馬사태가 金永三씨의 제명에서 비롯되었듯이 5․17 조치에 따른 金大中씨의 연행이 광주사태를 악화시킨 것입니다. 광주사태가 부마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 심화된 것은 金大中 추종세력들이 대거 광주로 잠입해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등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자극했습니다. 광주의 학생․시민들이 계엄확대 조치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은 계엄령하의 시위는 불법이며, 초동 단계의 진압이 상책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저항과 진압이 가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수특전부대의 과잉진압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공수특전부대가 과잉진압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교육과 교리의 소산일 뿐 특별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위야 어떻든 공수특전부대는 과잉진압으로 시민들의 엄청난 저항을 불러 일으켜 도청진압작전 수행시에는 일반 군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불명예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全장군의 新軍部가 정권 부담을 우려해 자위권 발동을 최대한 억제하는 바람에 많은 인적 피해까지 당하는 손실을 입었던 것입니다.』

-당시 계엄사에서 돈 5백만 원을 전남대 복학생 鄭東年에게 제공해 전남대와 조선대 추종세력을 조종․선동한 혐의로 金大中씨를 기소했는데 金大中씨가 광주사태나 광주소요를 배후에서 조종․선동한 것이 사실인가요.

『돈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광주사태 당시 전라남도를 관할하는 505 보안부대장이었던 이재우(李在于) 씨가 1995년 1월 20일 검찰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의 일부이다.

-7공수여단이 광주에 투입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판단하기로는 광주지역 소요진압을 위해 투입된 것으로 압니다. 공수부대의 투입은 전국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19일에 유언비어가 나돌지 않았나요.

『1980년 5월 19일까지는 별다른 유언비어가 파악된 바 없었고, 5월 20일 경부터 상당수의 유언비어가 나타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0일에도 지역대책협의회가 열렸나요.

『예, 주로 유언비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됐습니다.』

-주로 어떤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고, 그에 대해 어떤 대책이나 조치를 했는가요.

『戰敎司 부사령관 金基錫 소장이 민간인 기관장들에게「공수부대원에게 술을 먹여 진압작전에 투입시켰다. 임산부를 발로 차서 낙태를 시켰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여학생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는데 그에 대해 해명을 하기 위해 낙태된 임산부, 유방을 도려낸 여학생이 있는지 신고를 해 달라」고 했고, 다른 유언비어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해 주고 진상을 밝혀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님을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고소․고발인들은 보안부대 등에서 광주시민들을 격화시키기 위해 그와 같은 유언비어를 조작, 유포했다는데 어떤가요.

『저로서는 유언비어를 조작할 이유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시위 참여를 유도하고, 정부를 비난하고 저항하기 위해 시위를 이용하려는 측에서 조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광주사태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당시 중앙의 新軍部 등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광주사태를 직접 겪은 본인으로서는 그런 사태를 사전 계획하에 만들어 냈다고는 상상할 수 없으므로 그런 주장은 수긍할 수 없습니다』

-고소․고발인들은 당시 광주 진압군의 지휘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어떤가요.

『제 생각으로는 정예부대인 공수부대를 향토사단인 31사단에서 형식상 배속받았으나 실제 부대를 장악해 작전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즉 31사단은 향토사단으로서 참모진 구성이나 열악한 통신수단 등으로 보아 부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고 부대 능력도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공수부대의 지휘는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여지고, 실제 제대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은 1079~80년 보안사 핵심인사중의 하나였던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검찰 조사에서 광주사태가 일어난 원인을 나름대로 설명한 부분이다. 권정달은 검찰조사에서 전두환을 유죄로 몰아넣는 진술을 했다.

『저는 광주사태에 직접 관여한 사실은 없습니다. 하지만 광주사태가 시국수습방안의 일환으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직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시국수습방안과 광주사태의 관련성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980년 5월 17일까지 시국상황은 비상계엄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격화되어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국수습방안을 실행에 옮겨 지역계엄이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 등 新軍部 핵심세력들이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발과 저항이 예상됐습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저항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계엄군 투입계획 등이 시국수습방안의 수립 및 그 준비단계에서부터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주도하에 황영시 참모차장, 정호용 특전 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장성들 사이에 이미 수립되거나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시위 초동단계에서부터 강경진압 등 위력과시를 해 시위군중을 위축시킴으로써 시위 확산과 격렬화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을 그 기본방침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비상계엄 전국확대후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는 서울, 광주지역 등에는 주로 공수여단으로 편성된 진압부대 투입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는 곧 시위진압 과정에서「과감히 타격하라, 끝까지 추적 검거하라, 분할 점령하라」는 공수여단의 시위진압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의 주도하에 진압병력 투입 및 그 강경진압 방침이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5월 18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리 광주지역으로 이동해 있던 공수여단 병력이 시위진압에 즉각 투입되어 원래 예정되어 있던 방침대로 위력과시를 위한 강경진압 작전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공수여단 병력에 의한 과잉, 과격진압은 충분히 예상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며, 이 과정에서 광주사태가 악화일로를 걷게 됨으로써 무수한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컨대 광주사태의 근본원인은 공수여단이라는 과격한 부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해 강경진압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던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진압에 투입된 공수여단 병력들은 이런 정치적 의도를 전혀 모르는 채 상부 명령에 복종했던 것에 불과하므로 그들 또한 광주사태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釜馬사태 당시 저는 부산지역 보안부대장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부마사태의 진압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시위 초동단계에서 군병력이 바로 투입되지 않아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됐습니다. 그 후 3공수여단과 해병 1사단 1개연대 병력을 투입해 강경진압함으로써 시위를 평정했습니다. 부마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 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동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경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반성론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 교훈이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이후 발생 예상되는 시위 진압작전의 기본 방침을 신군부 핵심세력들이「공수부대에 의한 초기 강경진압」으로 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5월 24일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5월 27일 전두환 정권의 모태가 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 설치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날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 관련 사망자 1백 70명, 부상자 3백 30명, 연행자 1천 7백 40명이라고 발표했다.

6월 18일 계엄 사령부는 김종필 등 권력형 부정 축재자 수사 발표를 했다.

6월 24일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밝혔다.

7월 2일 계엄사령부는 김종필, 이후락 등 10명을 석방하였다.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이른바「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7월 22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김영삼씨 정치 생명은 끝났다. 광주 사망자는 189명”이라고 기자회견에서 말했다(김영삼과 광주 사망자가 무슨 상관인지 아리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