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인민봉기 지도총책은 김중린이었다!!
1980년 5.18 광주인민봉기 지도총책은 김중린
특수부대 교란공작 현장지도책은 문제심
<<김중린은 누구인가>>
30년 대남공작 경력의 자타공인 최고 베테랑
1924년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인
1936년
김성숙(金星淑)이 결성한
조선민족해방동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8·15광복 이후인
1948년
조선노동당 평안북도위원회
부장이
되었다.
1959년
2월
북한적십자회
상무위원
자격으로
재일교포북송에
주도적으로
활동하였으며,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69년
조선노동당
비서국
비서(남한
담당)에
임명되었으나
1975년
10월
사업
실패에
대한
문책을
받고
물러나
1976년
9월
비교적
한직인
남조선문제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다가
1979년
11월
다시
등용되어
조선노동당
비서국
비서(남한
당당)
및
통일전선부장,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위원이
되었다.
1982년
4월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나,
1986년
2월
비서국
비서에서
해임되어
같은
해
8월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으로
밀려났다.
1988년
11월
비서국
근로단체
담당
비서,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자격심사위원회
위원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북한의 김중린 노동당 중앙위 비서가 2010.4.28일 사망했다. 조선중앙통신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당 중앙위 비서인 김중린이 심근경색으로 28일 8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고 밝혔다.
1923년 평안북도 벽동군(현재 자강도 우시군)에서 태어난 그는
1969년 대남담당 당 비서에 임명돼 1972년 5월 평양에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비밀협상을 갖기도 했다.
1978년에는 당 통일전선부장을 겸했고 1988년 대남담당 비서를 거쳐 1990년 이후 근로단체담당 당 비서를 맡아왔다. 북한은 그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강성산 총리 사위 탈북교수 강명도 충격 증언내용>>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
김일성은 5.18 광주인민봉기를 계기로 전면남침을 결행하려고 했고 인민군도 만반의 준비태세를 완비했다고 보고했다.
통일전선부장 대남담당 지도총책인 김중린이 일주일 정도의 시간여유를 달라.
부산, 대구,
대전 등 주요도시로 무장봉기를 확산시킬 자신있다.
그때가 전면남침의 결정적 시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하여 무장봉기 확산공작을 재가받았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효율적인 전국으로의 봉기확산저지와 광주봉기 진압으로 김일성의 무력남침기회는 사라졌다.
김중린은 책임을 지고 숙청되어 3개월 정도 혁명화구역으로 내려갔다 복귀했다.
김중린을 완전 숙청하지 못한 것은
30여년 대남공작경력의 자타공인 최고 베테랑이었기 때문이다.
통혁당의 핵심인물 김질락의 옥중수기에도 김중린을 만난 부분이 나온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양명산의 자금지원문제로 적발되었으며 진보당은 북에서 조직한 합법정당(중간정당) 공작이라는 증언이 나온다.
결론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 전면남침을 위한 폭동공작이었다.
김중린이 자신했던 전국 동시다발 무장봉기책동 실패로 남침기회가 사라졌다.
후덜덜!! 아오 ㅅㅂ!! 전두환 장군만세!! 계엄군 만세!! 국군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