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법원에서 판결이 났다. 그러나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 국가간 감정을 최대한 제외하고 팩트 위주로 어떻게 한일합정이 체결되었고 왜 이렇게 일이 꼬여버렸는지 적어본다.
우선 한일협정 이전에 한국의 건국 상황을 자세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한일청구권협정에서 한국은 '전승국으로서 전쟁배상'을 받은 게 아니라 '국가 분리에 따라 서로의 재산을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미국은 1947년 SCAPIN 1757호를 통해 한국을 특별 상태국으로 정의하였다. 즉 일제의 편에 서서 싸운 추축 부역국으로 분류한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승만 정부는 이와 대조적으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이전 1949년 대일배상 요구조서에서부터 연합국의 입장을 주장했지만 당연히 미국의 입장은 번복되지 않았다. 일례로 식민지이자 동시에 연합국 지위를 인정받은 인도의 경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처절하게 싸운 대가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패전국인 일제의 세력을 쪼개기 위해 독립시켜놓은 한국에 승전국 지위를 인정하는 것은 인도와 같은 국가의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만약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당초 계획했던 임시정부 독립군 창군과 조선 탈환을 시도했다면 실리는 둘째치더라도 당위 면에서 전후 처리에서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수 있으나, 임시정부는 내분으로 티격태격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기회를 놓쳤다. 또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한 광복군도 사실상 중국 국민당 하에 중국 장교들이 지휘해 당위성이 떨어졌다.
(중일전쟁 80주년 추모하는 중국군)
게다가 피해의 규모만 놓고 보더라도 조선은 많게는 수백만의 국민이 학살당하고 국토가 유린당한 중국을 비롯한 전쟁 피해국들보다는 작은 피해를 입었다.
전자는 말살, 후자는 합병이 목적이니 당연하다. 조선은 오히려 일제와 함께 연합국에 총부리를 겨눴던 추축 부역국이었다. 물론 한국인 입장에서야 억울할 수 있지만 당장 총 맞는 사람들이 이것까지 생각하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도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한국인은 일본군복을 입고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침략의 협력자였다"라 발언하였다. 또한 대다수 조선인 전범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처형되었고 대다수 국가들이 한국인 전범들을 국제재판소에 기소했다. 이 상황에서는 한국 또한 피해자임을 외교적으로 강하게 어필하여 오해를 풀어야 했지만 하필 6.25 전쟁으로 나라가 뒤집어져 버려 기회를 놓쳐버렸다.
625로 인해 국내상황이 ㅁㅈㅎ되면서 샌프란시스코 협정에는 준비조차 하지 못한다.
때문에 한·일 간의 전후처리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14조에 규정한 전쟁배상(war reparation)의 범주가 아니라, 4조가 예정한 식민 독립에 따른 재산관계의 정리, 국제법상의 용어로는 국가승계(state succession)의 범주에서 처리되었다.
2조에 의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 모든 부속도서를 돌려받았으며, 4조에 의해 한국은 일본이 한국에 남기고 간 재산을 불하받았으며,
9조 및 12조에 의해 일본은 한국 혹은 다자간의 호혜성 협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임할 의무가 발생하였다. 이는 21조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에 배상할 의무는 발생하지 않았다. 애초에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라는 개념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박정희 정권 이전부터 식민지배 배상 자체는 논의가 되고 있었는데,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의무는 만국공법에도 없다고 배상을 일관되게 거부하였다.
(일제시대 당시 댐 건설 장면)
오히려 일본은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에 남겨놓고 간 사유재산과 인프라에 대한 역청구권을 주장했는데, 이는 GHQ(미국 연합군최고사령부)가 추산하기로는 당시 약 6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즉 일제시대 때 건설한 수도시설, 기관시설, 철도, 건물, 공장 등 가치를 고려해 연합군도 60억 불이라는 가치를 산정하였으니, 서로 배상을 외치는 상황에서 외교가 단절된 한일 양국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1957년, 청구권과 역청구권을 통틀어 한일 양국이 동등하게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자는 큰 틀의 합의를 내놓았을 뿐 배상금의 규모에 이견이 있어 합의는 결렬되었다.
그러던 와중 5.16 군사혁명에 성공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협정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그 당시 상황으로써 경제개발 등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가 매우 시급하였고, 이에 따라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문제는 이를 실행할 자금이 없다는 점이었다.
포스코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계은행이 한국의 기간산업에 채산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당장 자금 조달에 빨간불이 켜졌고, 그렇다고 시간이 해결해줄 수도 없었던 점이 당시의 한국은 말 그대로 사람을 갖다 파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만한 외화를 확보할 수단이 전무했다. 결국 포스코 설립을 추진하던 과정에서 박정희의 신임을 받던 박태준이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금을 유용하여 기간산업을 개발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아 협상이 재개된다.
그리고 이 상황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한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한 아시아 지역 경제 블록의 형성을 기획하고 있었으며, 일본, 대한민국, 대만 간의 외교적 관계를 정상화하고 장기적으로는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소련 및 중국 공산진영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 효과적으로 압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미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동아시아 각국이 동맹 관계에 들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미국은 한일 간에 강화조약을 통해 6.25 전쟁으로 본격화된 냉전에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를 견제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일본은 미국의 강한 압박에 당시 외환보유고의 약 50%에 달하는 금액을 토해내야 했고 일본도 그 여파로 극심한 외환 부족에 시달렸다.
이렇듯 그 당시 한일협정 금액은 엄청난 액수였다.
1960년대~2010년대의 달러화 인플레이션은 약 750% 수준이므로 현재 기준으로는 60억 달러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외환보유고가 3천억 달러대를 향하는 2010년대 대한민국에서도 정부가 60억 달러 수준의 일방적인 이익을 보면 이는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될 엄청난 규모다.
그런데 한국 경제의 인플레이션과 경제규모가 당시에 비해 750%만 성장하지 않았으며, 당시 대내외 신용도도 바닥이라 차관을 발행할 수도 없었으므로 당시 한국 경제에 있어 8억 달러는 현재 가치로 60억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엄청난 가치였다.
이는 현재 가치로 추산하는게 쉽지 않으나, 당시 국가예산이 850억 원이었으므로 약 2년치 국가예산이 들어온 셈이며, 원화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적어도 수십조 원에서 크게는 수백조 원의 가치가 있었다 판단할 수 있다.
원화 인플레이션이 2018년 기준 약 41배임을 고려한 수치다. 여기에 더해 당시 한국에서는 외화를 벌어올 기간산업이 전무했던지라 파독 광부 및 간호사, 월남 파병 등 인적자원을 수출하여 외환보유고를 확보하는 각종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의 노동을 인년으로 환산하면 이를 통해서도 최대 수백조 원의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자금을 어디에다 썼는지, 그 뒤로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2편에서 밝히도록 하겠음.
봐줘서 고맙다
3줄요약
1. 당시 한일청구권 문제는 역청구권도 있을만큼 문제가 복잡했다.
2.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후 미국에게 어필하게 되고, 한미일 공조를 위해 미국은 일본을 압박한다.
3. 일본도 결국 엄청난 액수인 외환보유고 절반을 한국에게 신용없이 지급하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