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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제동원에 대한 증언


1993년 첫 번째 증언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 못 신고 이게 뭐냐, 애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 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라고 했다. 당시 내 옷차림새는 헐벗고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분순이랑 강가에 가서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웬 노인과 일본 남자가 보였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니까 남자가 우리쪽으로 내려왔다. 노인은 곧 가버리고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무서워서 분순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다.

 경주에 가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앞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산비탈에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어서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까 도라지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이틀밤인가를 지냈는데 또 여자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자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깨진 유리 차창 저편에 우리집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생각이 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옷보퉁이를 밀치며 이거 안 가질테니 집에 보내 달라고 하며 계속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 날을 간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기보단 분순이 엄마한테 팔아넘겨졌다거나 이쁜 옷에 호기심이 발동해 따라나서게 되었다... 

뭐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는 내용이다. 



2004년 증언


대구 고성동에서 16살까지 살았고, 1943년 어느 여름 16살때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는 모자를 쓴 일본군인이 

동네언니 4명들과 함께 우리를 강제로 끌고갔다.

어디로가는지 왜 데려가는지도 몰랐다.

창문이 없는 기차에 우리를 태웠는데, 가지않겠다고 하니 죠센징이라고 하면서 구둣발로 밟고 때렸다. 

집에가겠다고 하니 또 때리더라. 너무 많이 맞아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

일본 군인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들을 끌고갔다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2006년 증언


열 다섯살이던 1942년 경 집에서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갔다. 

이젠 또 자다가 끌려가시고..



2014년 증언


15살이 되던 해 어느날 일본 군인이 '이리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서워서 도망갔는데 또 다른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기차를 타고 대만의 한 일본군 부대로 끌려갔다.


얘기가 오락가락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사실 이부분은 혼동이 되어선 안되는 중요한 내용이다. 


물론 성폭행 후의 극심한 트라우마로 기억이 오락가락 할 수 있다지만 


이런식의 사실과 다른 이야기나 모순이 생긴다면 어물쩡 넘길 것이 아니라 왜 저런 모순이 생겼는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인데


그 부분에 대한 검증은 전혀 없다. 


더구나 기억상 혼동이라 보기도 어려운 점이, 93년 증언에서는 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40대 남성이라 지칭할 정도로 구체성이 강한데 


이 증언을 몽땅 무시하고 오락가락 한다는 것은 증언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하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귀국 후의 삶에 대한 증언 역시 일관되지 못한다.

 


2. 귀국 후 삶에 대한 증언


93년 증언


대만에서 2년동안 있다 귀국 뒤 술집종업원, 가정부 등 밑바닥 생활을 떠돌다가 

가족들의 끈질긴 권유로 지난 87년 60살의 나이로 8남매를 둔 75세 노인의 후처로 들어갔다. 

때늦었지만 면사포도 써보고 혼인신고도 처음이고 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5년동안 살면서 돌아온 것은 치매걸린 남편의 행패와 폭력, 가족들의 냉대 뿐으로 

지난 3월 위자료 한푼 못받고 이혼하고 말았다.

귀국후 궂은 일을 전전하시다 75세 노인의 후처로 들어갔다가 이혼을 하셨다고..


99년 증언


일제 당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야학에서 한문 등을 배웠으나 43년 16세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대만에서 고생하다가 

해방 이듬해인 4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결혼을 하지않고 보험회사 등에 다니며 홀로 지내다 

92년 일본군 정신대 피해자로 신고한 뒤 매주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가하고 지역 피해 할머니를 만나고 있다.

갑자기 보험회사가 튀어나오고 75세 노인이야기는 사라졌다.



3. 도와준 일본 장교에 대한 증언


98년 증언


16살때 일본군 막사에 들어가지 않으려다 두들겨맞고 초주검이 되어있는데, 21살된 이 장교가 데려가 보살펴줘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장교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죽으러 간다"며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대만에 가서 이름도 모르는 장교였지만 인형에 '하세가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나머지 인형에는 '무명씨'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영혼결혼식을 치뤄줬다.


이름모르는 장교였지만 '하세가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일본 군인의 영혼결혼식을 치뤄주었다고.


2015년 증언


당시 17살이었는데 가미카제 부대 안에 있는 위안소에 끌려가 어린 일본군인을 만났다. 

그 군인은 위안소에서 맞고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나에게 도움을 주고 '도시꼬'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98년 일본에서 날 도와준 군인의 이름이 '하야까와 기꾸쇼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야까와는 어느날 저녁 하야까와는 어느 날 저녁 이용수 할머니에게 "내일 죽으러 가야 된다"고 하면서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하야까와는 "도시꼬, 너의 부모별도 있고 나의 부모별도 있어. 내가 내일 죽으면 별이 하나 떨어질 거야"라고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하야까와는 다음날 보이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1945년 5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었다고 한다. 

갑자기 진짜 이름이 생기고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98년도에 어떤 경위로 알게되었는지는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않는다.

하세가와에서 하야가와가 나왔다고하면 나 의심병걸린건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