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재생 아니다. 클릭하고 읽자ㅋ)








시리즈


[정보/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1탄. 조선의 군편제와 군사력

http://www.ilbe.com/1856638141


[정보/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 2-1탄. 명나라의 행정제도와 경제,재정,조세제도

http://www.ilbe.com/1871293859







외전 


[정보/BGM] 포방부의 정신적, 육체적 스승인

동아시아 화력덕후 조선의 화포를 알아보자

http://www.ilbe.com/1866916083



















조선 전기 동아시아의 군사력을 시리즈로 쓰고 있는 게이야.



이번편은 명나라의 군 전략를 분석하여 당시 명나라의 전력이 어느정도였는지 가늠하는 글이 될거야ㅇㅇ

이 글은 명의 군사전략을 알아보고 난 뒤 다음글은 명나라 전기 군사편제와 제도를 알아볼까해

또한 스압이므로 중간쯤에서 중,후반기의 북방정책 부분은 넘어가도 되고 밑에 결론글과 7줄만 봐도 되ㅇㅇ



이것 또한 교양레포트로 쓰던거에 중국쪽 논문을 뒤져서 쓴 글이야.

쓰다보니 너무 길어지게 되었어; 아마 내생각엔 1탄 조선의 군편제보다 더 길수도 있을거같아;

이점은 양해를 부탁할께ㅇㅇ;;


다 밀게이들과 함께 좀더 수준높은 전쟁사를 공유하고자 하는 내 마음이니 너무길어서 ㅁㅈㅎ를 줘도 달게 받으마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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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건국 후 군사방어의 핵심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한 북변(北邊)의 방어였는데, 홍무(洪武) 주원장 시기 몽골세력은 대도(大都)에서는 퇴각하였지만 여전히 권토중래를 할려고했으며 홍무제(洪武帝)는 내부적 정치와 제도개혁 이외에 변방의 안정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알고 있었기에 북변의 우환을 근절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몽골 정벌을 시도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소제를 설립하고 군사적 요충지를 번왕(藩王)에게 분봉해 주어 공신들의 반란을 방지하고 방어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예상하였어ㅇㅇ


 


명 태조 (明 太祖)는 서달(徐達)을 대장군(大將軍), 상우춘(常遇春)을 부장군(副將軍)으로 삼고 원군(元軍)에 대한 토벌명령을 하달하고, 원 순제(元 順帝)는 명군의 공격을 받고서 대도를 포기하고 상도 개평부쪽으로 도주하게되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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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0년대 중국 세력도 / 인터넷에 지도가 없길래 발퀼로 제작했다. 그림판 실력 ㅍㅌㅊ? )




허나, 원(元)은 아직 광대한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지역 및 운남(雲南) 지역 등을 지배하고있었어.


그러한 이유 때문에 태조(太祖)는 서달과 상우춘 등에게 산서(山西)로의 진공을 명하여 요충지 태원(太原)을 공략하는 등 몽골 정벌전은 태조연간의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원(元)에 대한 정벌이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해ㅇㅇ 


  


몽골의 왕보보 王保保(擴廓帖木兒, 즉 코케테무르) 역시 명나라의 군사적 힘이 아직 미치지 못하던 감숙(甘肅) 일대를 기반으로 재기를 시도할려고 하였으나, 서달군(徐達軍)이 산서에서 방향을 바꾸어 감숙으로 들어오자 코케테무르는 훨씬 북쪽의 카라코룸을 향해 이동하였고, 이문충(李文忠)은 흥화興和(張家? 북쪽)로부터 상도 개평부(開平)으로 방향을 돌려 원 순제(元 順帝)를 추적하고자 하였어. 


  


결국 명군의 추적을 피해 도망하던 중에 원 순제는 한 많은 삶을 떠나고, 상도 개평부와 응창부가 함락당함으로써 그 아들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 (Ayushiridara,토구스테무르(천원제))가 뒤를 이으며 추격을 피해 북쪽으로 도망치게되. 


  


이러한 추격전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1372년때 서달의 카라코룸 진격등에서 명의 군대 역시 상당한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홍무제는 군사를 가볍게 움직여 몽골지역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과 그들의 본거지를 섬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였어.



   


하지만 결국 명이 북원을 섬멸하게 되는데 2가지의 주요한 이유가 있어.


하나는 1387년의 만주에일어난 대기근으로인하여 남만주지역에 20만대군을 거느린 나하추(納哈出)가 明에 투항함으로써 칸의 권위가 실추되는데 북원北元은 당시에 명과의 전쟁상태로써 명과의 교역이 금지되어있는 상태였기에 극도의 생필품 부족에 시달린 몽골은 만주로부터 생필품 지원을 받을수 없게 되었으므로 대칸의 권위를 실추시키기에 충분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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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원제, 토구스테무르 )



또 다른의 주요한원인은 명이 북원에게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되는 사건인데, 명의 홍무제가 1380년에 남옥(藍玉)을 대장군으로 봉하여 10만~15만 가량의 군대를 남옥에게 주어 당시 토구스테무르(天元帝)가 생필품조차 구하기 힘들정도로 아주 척박했던 몽골보다는 '그나마' 나은 편이어서 만주쪽 나하추(納哈出)등의 원의 분봉왕(分封王)들의 지원을 얻기위해 천도한 동쪽 몽골에 위치했던 북원(北元)의 수도였던 '부이르누르'를 1388년에 초토화시켜 북원이란 정치체를 붕괴시키고 '7만'에 달하는 몽골인들을 포로로 끌고가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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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유목 귀족 및 몽골제후들의 지속적인 명에 대한 투항, 정치체의 결여로 인한 몽골제후들의 분열로 일어난 몽골초원에서의 제후들과 유목귀족들과의 내전이 초래됨으로써 북방의 위협은 많이 사라지게 되었고, 원(元)의 중국에 대한 정통성 클레임을 거는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명明의 북방 정책의 변화가 일어나게되는데 공세보다는 확보한 영역을 지키는 수세적 방어 곧 방어선의 수축으로 전환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되.


  






이러한 명초 공세(攻勢)에서 수세(守勢)로의 전환은 견고한 방어선과 그곳을 지키는 군사력을 필요로 하였기에 무엇보다 변방 군사에게 공급할 군량 문제가 시급하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정비를 진행하면서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구상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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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18년(1385) 명 태조는 둔(屯)의 기초가 있어야 충분한 군사를 유지할 수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일이 없으면 경작을, 일이 발생하면 전투에, 3분(3分)은 방어에, 7분(7分)은 경작으로라는 둔전 계획을 수립하게되.


  


이것은 곧 변방에 방어거점을 정해 놓고 자체적으로 군량과 군수품을 공급하며 지속적으로 변경을 방비하겠다는 시도로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겠지?


  


그러나, 이러한 홍무제의 방어적 태도는 영락시기(永樂時期)에 이르자 변화되는데 영락제(永樂帝)는 한편으로 홍무제의 축성 정책을 계승하면서 북경천도(北京遷都)를 시도함으로써 북변(北邊) 방어(防禦)의 중요한 전략적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 이러한 변화점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사례는 영락제가 영락(永樂) 19년(1421) 정월 천도를 단행하여 경사(京師)로 만든것과 영락(永樂) 6년(1408) 이미 영락제(永樂帝)는 북경을 비롯한 몽골지역 등을 순행할 준비를 하였다는 사실뿐 아니라 조계이도( ‘肇啓二都’)라고 표현함으로써 양경제(兩京制)를 구상하였다는것 등이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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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永樂帝)의 북경천도로써 구변(九邊)의 방어선은 근접한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훨씬 빠르게 후방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체제로 전환할 수 있게되었으나 명 중ㆍ후기 빠르게 성장하는 몽골과는 반대로 명나라 변방의 군사력과 사기, 군량 등 군사방어에 필요한 군비상황과 조건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북경의 안전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고, 북경은 후방의 경제적 지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강남 지방 에 기근, 홍수 같은 자연재해, 전염병 등 재해의 발생을 고려한다면 유사시 북변의 식량공급에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는 등의 안좋은점도 있었다고 생각해. 


  


또한 북경천도를 준비하면서 5차례의 몽골 정벌(親征)이 시도되어 변경에 투자되는 군비가 증가하였고 군량을 보급해야 하는 지역 역시 南京과 北京 그리고 북변의 중진 등 여러 곳으로 분산됨으로써 이전보다 더 많은 군비의 소비를 필요로 하였고, 변방의 식량을 해결하기위한 둔전제등도 명 중,후기때에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변방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한 둔전은 점차 생산력의 감소 등 그 중,후기로 갈수록 자급자족의 한계와 폐해가 나타났기 때문이야. 


  










영락제 즉위 이후 영락제는 번왕들이 북변에 임명되었던 번왕(藩王)들은 삭번정책(削藩政策)으로써 제거의 대상으로 삼는데


건문 4년(1402) 선부(宣府)를 지키던 녹왕(谷王)은 호광(湖廣)의 장사(長沙)로, 영락원년 1403년에는 영왕(寧王)을 강서 남창(江西 南昌)으로 보내 버리는 등 번왕들의 권력을 모조리 몰수하게되는데 이는 중앙집권의 강화에 일조는 하였지만 반면에 중앙정부의 통제를 안받으면 안되었기에 변방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대응을 못하게 됨으로써 변방의 방어력강화에 도움이 되지못했어.


  


더욱 큰 문제는 영락연간 당시의 영락제가 찬탈을 통해 황제가 된 이후 장성 북쪽의 대령도사(大寧都司) 지역을 포기함으로써 방어선이 축소되고 대령(大寧) 등 방치된 넓은 지역에 몽골 세력의 진출하면서 새로운 위기가 시작되는 단서를 만든것인데 이로써 장성지대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하던 올량합(兀良哈) 3위(3衛)는 명의 통제에서 벗어나 오히려 몽골의 통제를 받는 상황이 되었고 하투(河套:오르도스) 등의 지역도 결과적으로 방어선 바깥이 되면서 明이 방치하는 '버려진'지역이 되.






하투(河套).jpg

( 연한갈색+갈색으로 칠해진 곳이 하투(河套) )

  




결국, 영락제의 찬탈과정에서 일어난 이러한 사건들에 관계되어서 몽골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동몽골(韃靼, 타타르)과 서몽골(瓦刺, 오이라트)은 명나라의 특별한 방해 없이 점차 하투(河套) 지역 등 장성지대로 남하할 수 있게되었고 요동(遼東) 북부에 널리 분포하던 올량합 3부(兀良哈 3衛) 역시 요하(遼河)의 중심부 요하투(遼河套) 지역으로 점차 남천하여 요동도사(遼東都司) 북부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게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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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측 지도이기 때문에 요동 북쪽인 북만주은 무시해ㅇㅇ  짱깨들의 대뇌망상이 포함된 지도야ㅇㅇ )  





즉, 경사의 좌측은 요동(遼東)이 담당하였고, 우측은 선부 대동(宣府ㆍ大同)이, 경사의 중앙은 고북구(古北口), 대령(大寧), 거용(居庸) 등이 방어하고 있었지만 대령부사(大寧都司) 지역이 방치됨으로써 당시 고북구(古北口), 대령(大寧), 거용(居庸) 등은 몽골세력을 직접 마주하는 일촉즉발의 지역이 되어버려.



 




영락제는 대령부사(大寧都司) 지역을 방치하였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방어선이 축소된 만큼 북변방어 시설을 강화해 나가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5차례의 몽골 친정을 시도하였고 특히 분열된 몽골의 상황을 이용하여 타타르와 오이라트의 갈등을 이용하여 이이제이 ‘以夷制夷’ 방법을 아주 젖절하게 사용해


영락연간(永樂年間) 동쪽에서는 타타르, 서쪽에서는 오이라트가 흥기하여 주도권을 놓고 쟁탈을 벌이고 있었는데, 당시 타타르에서는 구이리치 칸(鬼力赤 汗)을 이어 울제이 테무르額勒錐特木爾(本雅失里[본야실리], 1379~1412)가 카라코룸에서 칸 위에 즉위하게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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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제이 테무르 (本雅失里)





이 시기 영락제는 울제이 테무르(額勒錐特木爾)에 대한 회유책을 진행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으나 울제이 테무르가 명의 사신을 죽임으로서 명의 몽골정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게되는 사건이지. 결국 이사건으로 인한 여파로써 영락 7년(1409) 7월 구복(丘福)을 선두로 총 10만의 대군이 몽골정벌을 목표로 출발하게되는데 출발 1개월 후 명군은 초원에서 대패함으로써 친정(親征)을 결심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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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친정은 영락 8년(1410) 2월 50만의 병력이 동원되었는데 울제이테무르는 명의 압도적인 병력과의 정면전을 피하기위하여 도주함으로써 1차 친정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실질적으로 명군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돌아오던 중 개평(開平)에 관성(關城)을 축조하고 그 주위에 몇 개의 돈대(墩臺)를 설치하는 정도였어. 


  


2년 후 타타르의 울제이테무르(額勒錐特木爾)는 오이라트의 마흐무드(馬哈木)에게 살해되고 그 휘하의 아루타이(阿魯台)가 明에 귀부하러 옴으로써 명은 그에게 화영왕(和寧王)의 칭호를 수여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계속 성장세에 있던 오이라트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명이 오이라트를 대상으로 제 2차 친정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ㅇㅇ



  


영락 12년(1414) 3월 50만 대군이 정비되고 이번에는 투라河(울란바타르 부근)에서 마흐무드를 생포하고자 하였으나 마흐무드 역시 명군과의 압도적인 병력차가 나기에 정면전을 피하여 추적으로부터 사막으로 도망하여 명군은 막대한 군량만 소비하고 큰 소득 없이 8월에 귀환하게되. 


  


영락 14년(1416)에 오이라트의 마흐무드(馬哈木)가 사망하고 수령이 교체됨으로써 초원에 일시 평화가 찾아오고 영락제는 두 차례 친정을 시도한 후 홍무제가 몽골정벌을 뒤로하고 강화하려던 방어선 축조의 필요를 재 확인 하게 되지.



즉, 영락제 역시 몽골본토를 직접 친정한다는 것에 회의를느끼고 있었다고 보여. 그것에 대한 몇가지 이유가있는데



이전의 한 당과 같은 한족 왕조때의 유목민과 다르게 당의 기미지배를 거치고 정복왕조의 발현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좀더 세련된 기술을 갖추고 행정력이 강화되어 흉노와 돌궐때의 연맹적 성격에서 국가적 성격이 강해지고 칸의 권력이 강해짐으로써 통합성이 강해지는 결과를 낳아 회유책이나 분열을 획책하는 방법이 통하기가 어려워졌고 근거지를 버리고 도망하는 식으로 추적하는 방식도 통하지않았기에 나름대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어



사막화.jpg



또한, 이전에는 반농 반목이 가능했던 약간의 내몽골 남부일대와 오르도스조차 사막화가 진행되어 몽골으로부터 거둘수있는 이익은 커녕 유지비로 인한 손해만 많이 들었던것도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보여. 




  


남방 장성의 변장(邊墻).jpg



사료를 분석해 보면 제 1차 친정으로부터 귀환하면서 개평(開平)의 방어를 강화하였고 그 3년 후에 산서 일대에 봉수대 등 적군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높이 15m에 이르는 시설물과 3미터 높이의 변장(邊墻) 등을 강화하는 명령을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영락 13년(1415)에는 북경 방어의 최후 거점인 거용관(居庸關) 근처에 요새를 축조하고 병사 10명을 배치하였으며 영락 16년(1418)에는 대동(大同) 일대의 방어시설을 강화하는 등의 작업을 하였어. 




  


이것은 홍무제가 강조하던 방어선 구축의 생각에 준거하였던 것인데, 아래의 明史의 기록 역시 영락제가 방어선 구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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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지의 煙墩(봉수대)은 할 수만 있다면 높게 만들었으며, 윗부분에 5개월분의 식량, 연료, 그리고 무기류를 보관하도록 하고 가까운 곳에는 우물을 팠다. 주위를 둘러친 墻(흙벽)은 연돈과 같이 높게 하여 바깥을 조망하도록 하였으므로 모두 하나로 보였다.…永樂帝는 변경 방어에 노력하여 선부(宣府)로부터 서쪽 산서(山西)에 이르기까지 변경을 따라 담과 해자(壕)를 만들고 봉후(烽堠)로써 점점이 연결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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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정벌을 피한 오이라트는 마흐무드 이후 그 아들 에센(脫歡)이 즉위하였으며, 명으로부터 순영왕(順寧王)의 칭호를 받고 명과의 관계를 통해 타타르를 견제하면서 몽골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하였고, 여기에 타타르의 오이라다이(阿魯臺)가 반발하여 또 다시 반명(反明)의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영락 19년(1421) 제 3차 친정을 시도하는 계기가 마련되.


  


그러나 호부상서 하원길(夏原吉) 등 많은 관료들의 반대가 있었는데 반대파인 하원길, 형부상서 오중(吳中)은 면직된 후에 하옥되었고, 병부상서 방빈(方賓)은 형벌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3차 친정은 그 출발부터 문제가 발생하게되.


시작부터 영 좋지 않았던 3차 친정은 북경에서 1,000km 가까운 후룬노이르 부근까지 추격했지만 결국은 타타르의 오이라다이를 잡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퇴각해


  




마지막 5차의 친정 역시 실패함으로써 몽골 친정은 막대한 군대와 군비의 소모에 비해 소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이제 영락제는 귀환의 정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1424년 6월 본토로 군사를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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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부터 왕이 이적의 화(禍)에 대처할 때 이들을 축출할 뿐 추적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북방민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오랑캐를 찾는 것은 한 알의 곡식을 대해(大海)에서 찾는 것 같으니 더 이상 추적할 필요가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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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홍무제는 북변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시설을 강화하였고 영락제 역시 홍무제의 변방 방어시설 수축을 계승하였어. 


그러나 영락제는 다른 한편 홍무제를 뛰어 넘는 적극적인 친정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는 과도한 재정지출과 군사력의 약화 등으로 이후 명의 변경정책을 곤경에 처하게 하였을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타타르와 오이라트에게 반명(反明) 감정을 심어주는 등 명의 북변정책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상황을 발생시키지.






大寧都司.jpg


(산서성과 섬서성 위쪽이 바로 대령부사(大寧都司))





 더구나 대령부사(大寧都司)의 방치 등 방어선 축소는 이후 몽골족이 명의 변경을 대대적으로 침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줘.



중요한 것은 명초 방어선이 토목의변(土木의 變) 이후에 나타나는 연결된 성벽의 구축이 아니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에 성보와 돈대 등의 방어시설을 축조하는데 집중되었다는 것이야. 



이러한 명초기 점‘点’ 중심의 방어선 구축은 토목의 변 이후 나타나는 연결된 선 ‘線’ 곧 성벽 중심의 방어선에 비해 그 방어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 후 발생한 토목의변은 영락제의 몽골 친정의 실패와 방어선 구축의 구조적 문제가 가져 온 명초(明初) 북변방어정책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어. 


 


 


 








북방정벌에서 서역정벌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서역에 대한 군사활동과 서역국가들과의 관계등에 대해서 짤막하게 논급해볼께.


 


사실, 서역정벌에 앞서 중앙아시아의 대체적인 몰락을 말해야 될거 같은데 원(元) 중후기쯤되면 실크로드와 서역의 중요성이 쇠퇴해가고 남송대 바닷길을 통한 무역의 성장으로써 서역을 통한 동서 무역으로 먹고 살던 오아시스 국가들이 대부분 몰락하게 되. 


하지만, 서역 무역이 완전히 죽은것은 아니였고 명초 영락제의 서역 정벌이후 15세기때 일시적으로 부흥하게 되고, 명,중후반때 다시 쇠퇴기를 거치고 준가르의 멸망과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의 여러 소규모 칸국들의 대대적인 정벌에 나서기전까지는 중소규모 무역정도는 행해지고 있었다고 생각해ㅇㅇ


 


정화의 대함대.jpg



영락제는 찬탈을 통해서 즉위하였기에 정통성이란 측면이 필요하였기에 많은 외국사신을 유치하고 대외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의 귀결이 정화의 원정이라든가 여기서 논하고자하는 서역정벌등이라고 할수있겠어. 그리하여 영락제는 무역 교류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에게 접촉 및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지.





 

서역.png




영락 2년(1404), 영락제는 대대적인 투르판 정벌을 결심하고 감숙(甘肃)에서 상당한 군사를 보내어 동투르키스탄 일대를 정벌토록 해. 그 결과로써 전략적 요충지인 하미(哈密)를 정복하고 번속(藩屬)으로 삼는데 성공하고 하미로부터 400km 가량떨어진곳에 돈대(墩臺)와 토성(土城)을 세움으로써 간단한 군사거점을 마련했어.  투르판지대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과의 무역을 한당이후로 송에서 끊겼던것을 다시 개척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영락 4년(1406), 명에서 하미를 정벌한 이후 티무르에게 멸망하고 남은 잔존세력인 동차가타이칸국의 당시 통치자 였던키즈르 호자(Khizr Khoja) 에게 비단을 하사하고, 다음년에 동차가타이 측에서 그에 대한 답례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는것을 보아 당시 명의 서역에 대한 진출이나 조공무역의 횟수가 상당 했음을 알 수있어. 그 이외에도 1408년 명나라 궁정에서 불교 승려가 이끄는 투르판의 외교 사절단을 맞아들인다는 기록도 본다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동투르키스탄일대의 소국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거라 생각되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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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지 유적)




또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약 46번의 사절단이 이기간 동안에 명을 방문하였고 서역(西域)에서 오는 사절단은 2-3천 명 정도의 규모였고, 6-9개월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영락제 이후에 수차례 명을 방문했던 호탄과 카라코지(Караходжи)의 사절단에 관한 기록이 1424년 이후에는 明史에 없는것으로 보아 영락제때 명의 서역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 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고 보여지는데 게이들의 생각은 어떠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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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여겨 살펴볼수 있는 사건은 티무르제국의 티무르 사망이후의 계승자인 샤루크(Shāhrukh Mīrzā)에 의해 영락연간 대규모의 사절단이 1419년-1422년에 걸쳐 보내져  명을 형식적인 상전으로 모셨다는 것.


이것은 선덕연간(宣德年間) 까지 이어지는 조공인데, 영락연간때 이루어진 서역개척의 중요성과 적어도 토목의변이 일어나기전인 인선의 치(仁宣之治)라고 불리는 선덕제(宣德帝)때까지는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당시의 최강국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내 주장을 증명해 줄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되지않을까 해.




















사실 여기까지만 해서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자료를 찾다보니 방대한 양의 자료가 쏟아져 나와서 급히 번역하고 내 생각을 붙여보았어ㅇㅇ

딱 여기까지가 조선 전기에 해당되는 명나라 군의 모습이야.


명나라 중,후반에 왜 명나라 군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다시 스크롤을 내리며 읽어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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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제 宣德帝 )





영락제 사후 뒤를 이었던 홍희제(洪熙帝)가 단명함으로써 황위는 선덕제(宣德帝)가 이어받게되. 




張家口 堡.jpg



선덕연간(宣德年間) 북변방어는 홍무~영락연간(洪武~永樂年間) 부분적으로 진행되던 방어시설의 수축에 힘이 집중되었고 개평(開平)을 방어하기 위하여 선덕 원년(宣德 元年)(1426)에 그 북방 독석(獨石)에 주위 6km에 이르는 보(堡)가, 그리고 4년 후에는 장가구(張家口)에 주위 2km의 견고한 보(堡)의 방어시설이 수축되.


  


烽燧臺.jpg



또한 봉수대를 북경 북쪽으로부터 발해만(渤海灣)에 이르기까지 확대하여 설치하였으며 이후 대동(大同)과 산서(山西) 일대에도 확대 수축되었고 이러한 방어시설의 수축은 정통제 초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고 섬서 감숙(陝西,甘肅) 지방으로도 확대되었다고 볼수있어. 영락제의 5차례 친정 시도 이후 명나라는 더욱 내향적이고 수세적 방어 전략으로 전환하면서 성보(城堡)와 돈대(墩臺) 중심의 방어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지.


  


선덕연간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부분은 하투(河套)에 해당하는 영하(寧夏)와 유림(楡林) 등 섬서(陝西) 일대가 조금씩 약탈당하여 그 대책으로써 보와 돈대가 축조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야. 


그리고 북경의 북쪽과 산서에도 방어선 증설이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장성 지대의 상황은 요동에도 그 영향을 주어 정통 7년(1442) 이후 산해관~개원~봉황성(山海關~開原~鳳凰城)을 방어하는 시설물이 축조되었으며 성화연간(成化年間)에 정비되어 점차 요동변장(遼東邊墻)으로 형성되는 기초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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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방어시설이 한창 수축되던 선덕 10년(1435)에 선덕제는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차기 황제가 될 태자인 주기진은 아직 9세의 어린 나이로 내각에서 황제의 일을 대신하여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틈을 이용해 환관 왕진(王振)이 전권을 잡고 휘두르기 시작하게되. 당시 북방에서는 오이라트부 토곤(脫歡)의 아들 에센(也先)이 주변 부족을 규합하고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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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진 王振 )



에센은 규정된 사절의 수를 자의적으로 대폭 증원시키고 조공(朝貢)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였는데 명은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였어. 에센은 정통 14년(1449) 2월 명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조공을 위해 3,500명 규모의 사절을 일방적으로 보내왔고 명은 에센의 자율적 사절파견과 무리한 경제적 요구에 대해 일보의 양보도 하지 않음으로서 갈등의 국면을 야기하게 되. 


  


그 해 가을 7월 에센은 명의 변방의 방어력이 취약한 지점을 파악하면서 군사 행동을 개시하게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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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이 4개의 부대로 나누어져 일제히 남하하자 명나라의 참장 오호(吳浩), 서렬후 송영(宋瑛), 무진백 주면(朱冕) 등이 이끄는 명의 변경수비대는 기존에 수축된 방어시설을 거점으로 응전하나 예상대로 명의 방어망은 힘없이 무너졌고 명군의 대부분은 궤멸하고 장군들이 전사함으로써 군사 요충지 대동(大同)이 쉽게 함락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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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의 위치 )

  



이러한 상황은 변경의 위기이기도 하였지만 수도 북경(北京)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위험 신호이기도 하였어. 


당시 전권을 휘두르던 환관 왕진은 황제에게 친정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결국 어린 정통제(正統帝)는 ‘親征’을 선포하고 관료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5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북경을 출발해.


  









아래서부턴 중빠,중꿔,조선족들은 읽으면 혈압이 올라 뇌졸중이 올수 있는 내용이므로 건너뛰던지 읽고 쓰러지던지 맘대로 해라ㅋㅋㅋㅋㅋ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굴욕 중 하나인 토목의 변에 대해 쓴 내용임ㅇㅇ (3대 굴욕이 있는데 토목의 변,정강의 변,영가의 난 임ㅇㅇ)






------------------------------------------------------------절취선----------------------------------------------------------------------------




친정군이 회래(懷來)의 북쪽 토목보(土木堡)에 도착한 것은 대동(大同)을 출발한 후 11일째였는데,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그 이동의 움직임이 느렸고 그 피로도 심하였어. 더구나 나이도 어리고 전쟁에 능하지 못하던 정통제의 피로가 심하여 토목보에 일단 머물러야 했고 추격해 온 에센군이 근처에 있었지만 50만 대군을 쉽게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 전략적으로 보자면 토목보는 원래 거용관(居庸關)의 전선에 설치된 소규모 작은 성 곧 보(堡)에 불과하였으며 많은 병사와 전마들이 마실만한 수원(水源)과 대군을 보호할만한 방어 시설이 부족한곳 이였어. 환관 곽경이 이런점 때문에 왕진에게 알려 퇴각하자고 하자 결국 왕진은 승낙하고 퇴각하기 시작해. 


(환관이라고 해서 왕진이 군사적 재능이 없다고 향간에 알려져 있지만 나름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게 후대에 들어서 밝혀지는데.... 결과는..뭐...)





토목의 변.jpg




왕진은 토목보에서 큰 판단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원래대로라면 넓고 빠른길인 고향 울주를 거치고 갈려했으나 50만이란 대군에 의해 자기 고향의 농작물에 피해가 입을껄 염려하여 다른길을 선택하게되는데 이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말아. 


에센은 명군의 끝쪽부터 공격을 시작하였으며 오이라트군의 조직적인 공격으로 명군은 대패하게되고 황제 호위부대인 금의위와 어림군 사령관인 공순후,오극충(吳克忠)등이 오이라트와 맞아 싸우다가 전부 전사하고 여타 장수들도 4만 군사를 이끌고 뒤돌아 왔다가 모두 패하게 되.  





정통제는 나머지 친위군(親衛兵)에 둘러싸여 포위망을 돌파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친정의 가장 큰 책임자인 왕진은 토목보에서 전사하고 정통제는 포로가 되어 에센에 의해 몽골지역으로 연행됨으로써 토목의 변(土木의 變)은 막을 내리게되고 그 이후에는 모두 알다시피 에센은 정통제를 앞세워 무혈항복을 시키려고 하였지만 이미 명나라 수뇌부의 교통정리가 마무리 된 상태라 '정통제 갸가 누구요? 우리 대명의 황제는 경태제랑께!?' 라고 맞 받아쳐버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음속 깊은 빡침을 느낀 에센이 북경으로 쳐들어가게 되지만 우겸(于謙)이 약 1만개의 화기와 정병 22만을 북경으로 긴급히 소집하여 에센군을 대패시켜. 결론적으로, 명은 황제를 잃어버림으로서 변경의 위기의식을 느끼며 새로운 방어 전략을 모색해야만 단계로 접어들게되. 


 

풀려난 정통제는 아우인 경태제(景泰帝)에게 황위를 내놓으라고 했지만 순순히 물러나면 자기 목이 날라가는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였기에 경태제는 쌩까버렸어ㅇㅇ 


결국 토목의 변(土木의 變)으로 인해 정통성에 흠이간 정통제(...)는 아닥하고 얌전하게 있게되. 경태제 치세에는 병부상서 우겸(于謙)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정권의 안정화 사업에 힘을 다하였어. 전국에 감세 조치를 시행하고 황하(黃河)를 준설하여 황안(河岸)을 보호하는 한편 중앙군에 해당하는 경영(京營)을 재편성하여 수도방어체제를 재점검하면서 북변방어체제를 재구축해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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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문관 雁門關 )


토목의 변을 경험했던 대동(大同)의 남쪽 안문관(雁門關)에 돌담과 참호를 포함하는 요새를 설치하여 몽골군의 재침에 대비하였고, 또한 거용관(居庸關) 서쪽 산간 중요 지역에도 견고한 성보를 축조해. 그리고 계속해서 거용관, 산해관, 자형관 (居庸關, 山海關, 紫荊關) 등 수도방어를 위해 필요한 중요 거점의 방어시설을 신속히 강화하지. 



  




1450년 자형관(紫荊關)의 남쪽에 이미 50개의 보와 방어에 필요한 토벽과 참호를 축조하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 견고한 방어벽을 형성하였으며 자형관과 안문관(雁門關) 그리고 그 주변을 내실 있게 하고자 하는 계획은 이후 서북부의 황하연안의 편두관(偏頭關)으로 연결되. 방어시설물의 확충으로 산서(山西)에는 내장성(內長城)과 외장성(外長城)의 2중의 장성 방어선을 형성하기도 하였고 당시 선부(宣府) 북쪽 전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고, 기록되어 있어




外長城.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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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에 설치한 변장과 돈대는 虜를 방어하기 위한 것인데. 최근 오이라트는 사신을 파견할때 정해진 관소를 통하지 않고 담을 헐고 들어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수비하는 자는 이것에 대처하기에는 힘들며 이것으로 방어가 될 수 없습니다. 야호령관(野狐嶺關)과 신개구(新開口) 사이에 관소(關所)를 설치하고 사신은 이곳으로 출입시켜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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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파악할수 있는 바는 명이 정해준 정식 조공로를 이용하지 않고 명이 토목의 변 전후에 설치한 방어시설 곧 담(토벽)을 역시 쉽게 무너뜨리며 넘어오고 있었으며 명은 오이라트의 군대와 그것을 방어하기위해 계속 방어시설을 증가시키고 있다는것이야.


이외에도 돈대(墩臺) 등 부속 시설을 병행하여 설치하고 그 사이 필요한 곳에는 성벽을 수축한다고 하는 명 측의 방어선 구축 경영이 시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


 




토목의 변은 명이 새로운 위기감을 느끼고 대대적으로 방어시설을 정비하는 등 방어 전략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 토목의 변은 기존의 방어선을 9변 체제로 고정시키고 방어 구역을 나누는 분지수어(分之守御)의 전략으로 전환하는 중대 사건이였다고 볼 수 있을거같아. 


  


동생인 경태제가 죽고 복위(復位)된 천순제(天順帝=정통제)의 뒤를 이어 성화제(成化帝)가 즉위할 즈음에도 북경, 산서, 요동, 섬서 (北京, 山西, 遼東, 陝西) 지방이 약탈당하는 상황이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이것은 여전히 명이 토목의 변 이후 지속적으로 방어시설을 중축하고 보수하였지만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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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오이라트의 에센 이후 타타르의 다얀(達延) 칸이 나타나 오이라트를 제압하여 몽골부족을 통합하였고 그 세력이 이미 명의 북변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어. 특히 에센이 피살되고 타타르의 발래(孛來), 모리해(毛里孩) 등이 권력을 잡자 그 세력은 하투 지역으로도 확대되었지. 


  


하투  지역은 성화 8년(1472) 이전 몽골족이 출현하면서 기존의 방어시설들이 모두 사라져서 성, 보, 병사, 군마, 봉화, 돈대가 '전무한' 상태에 놓여 있었어. 더구나 하투를 구성하는 중진 등에는 사막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둔전 등이 불가능하였고 군량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 점령당하면 그 회복이 어려웠어. 


  


하투 동부를 방어하는 중진은 영하(寧夏), 서부는 유림(楡林) 그리고 그 중심부는 연경(延慶)이였어. 명은 곧 하투 동쪽 유림위(楡林衛)를 연수진(延綏鎭)으로, 영하위(寧夏衛)를 영하진(寧夏鎭)으로 승격시키면서 몽골방어를 대비하며 대대적으로 방어진을 정비하였고 특히 연경(延慶)은 지리적으로 평지가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정통(正統)초기 몽골이 황하(黃河)를 건너 침입할 때 약탈이 용이한 지역으로 여러 차례 의견이 제기 되었어.


연경은 연안(延安)과 경양(慶陽)을 합친 것으로 연수(延綏)라고도 불렀으며 서쪽의 영하, 동쪽의 유림에 비해 방어시설이 견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타타르 등의 세력이 황하를 넘어 쉽게 침입하면서 그들의 거주 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었지. 


  


타타르는 천순 원년인 1457년에 영하 등을, 천순 2년(1458)에 양주凉州(現 감숙 무위시 : 甘肅 武威市)와 연수를, 천순 3년(1459)에는 2만의 병력으로 안변보 安邊堡(現 섬서성 정변현 :  陝西省 定邊縣) 등을 약탈한 적이 있었고 천순 5년(1461)에도 타타르의 실력자 발래가 직접 기병을 이끌고 하투로 들어와 약탈하였으며, 천순 6년(1462)에는 하투 지역을 서로 차지하려는 내부 갈등 속에서 모리해는 발래가 소왕자(小王子)로 세웠던 마가고아길사(馬可古兒吉思)를 죽이고 묵난(冒蘭)을 새로운 소왕자로 세우는 등 내부의 권력투쟁을 야기하였어.


발래는 몽골 합나진부(哈喇嗔部)의 수령으로 초기에는 에센의 휘하에서 평장(平章)을 지냈어. 그러나 에센이 그부하 아자지원(阿刺知院)에 의해 살해되었고 발래 역시 아자지원(阿刺知院)을 살해하였으며 에센에 의해 제거된 탈탈하화(脫脫不花)의 아들 마가고아길사가 소왕자가 됨으로써 발래자신은 자칭 태사(太師)가 되. 


  兀良哈 3衛.jpg



( 올랑합 3위는 현재의 동북3성 )






이러한 구도 속에서 타타르는 서쪽으로는 오이라트를 동쪽으로는 올량합 3위 (兀良哈 3衛)를 공략하면서 남쪽 하투 등 명의 변경으로도 진출하고자 하였어. 



延安府.png

( 연안부의 위치 )



타타르 세력이 하투 동부에 걸쳐있는 연수 지방을 침공하고 하투에 오래 머무르면서 명나라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은 성화 6년(1470) 경이야. 이 시기를 전후하여 300미터의 폭을 가진 황하의 결빙을 이용하여 하투를 지나 남쪽으로 들어오던 타타르가 이미 그 세력을 키워 명나라의 방어선을 넘어 연안부(延安府) 부근을 심각하게 약탈하였으며 또한 300명에 달하는 병사와 거주민이 살해되고 소와 양 4만 필이 약탈되는 등 많은 피해가 속출하였어. 


  


연수의 방어벽이 쉽게 무너지면 그 남쪽에 해당하는 섬서관중(陝西關中) 의 방어선이 무너질 수 있고, 나아가 중원이 쉽게 몽골에게 점령당할수도 있었기 때문에 연수를 비롯한 하투 지역의 방어는 대동이나 선부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하였다고 볼수있어. 이 시기 타타르의 침입로에 주둔하며 보(堡)를 지키던 명나라 수비병은 그 기동력과 위력에 압도되어 싸움도 해보지도 못하고 그 침입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지.


  

燒荒.JPG

( 소강(燒荒) )



이러한 상황으로 보자면 정통연간(正統年間)을 전후하여 명나라가 중요한 보(堡)와 돈대 등 방어시설을 수축하였지만 역시 몽골을 방어하는 근본적인 방책이 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에도 타타르의 하투 침입은 1472~1490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어. 명 조정은 이들의 약탈을 막기 위해 하투지역으로 진출하여 초원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소강(燒荒) 정책을 시도하기도 하고 대규모 군사를 파견하여 하투 지역을 회복해 보려고 하였지만 모두 궁극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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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투 지역 방어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을 때 여자준(余子俊)이 연수 지방 순무(巡撫)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하투를 구변(九邊)과 연결시키면서 구변의 장성 벽을 빈틈이 없는 일선(一線)으로 연결시키는 혁신적인 방안을 제안해. 여자준 이전에도 긴 변장을 수축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나 다양한 찬반의 갈등 속에서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어. 성화 2년(1466) 병부낭중 양거(楊琚)는 편두관(偏頭關) 부근에서 영하 흑산 寧夏 黑山(現 영하 평나현 寧夏 平羅縣 북쪽 75리 지점으로 황하 서쪽에 해당함)에 이르는 길이 700여 리의 변장(邊墻)을 축조할 것을 주청하였고, 병부상서인 왕부(王復) 역시 방어선을 따라 다양한 연결된 시설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시행되지 못하였어. 


  


여자준 이 제안한 일선의 벽으로서의 변장이 형성되기 전에는 명의 군사가 하투지역으로 들어가 그 지역을 수색하여 규모가 작은 몽골 부락을 찾아내어 그들을 축출하였으므로 군사의 활용에 비효과적이고 더구나 몽골 대군이 운집하였을 때에는 하투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풀이됨으로서 몽골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가 없었어.


  


花馬池 堡.jpg


( 現 화마강의 보 )




여자준은 이전의 경험과 경력을 바탕으로 우선 하투의 상황을 분석하였고 마침내 성화 7년 여자준은 일선으로 연결된 변장을 축조할 것을 여러 차례 상주하였고 동시에 하투 지역내 진정보(鎭靖堡), 정변영(定邊營), 화마강(花馬池) 일대의 보들을 이전하여 하투의 사막지대와 분리시키고 새로운 요새지로 이전할 것을 주청해. 또한 유림진을 유림위(楡林衛)로 승격시키고 연수진의 치소(治所)로 삼고자 하였고 성화 9년(1473) 마침내 그가 올린 상소가 설득력을 가지면서 연결된 벽으로 방어거점을 연결시키는 변장 수축의 대공사를 시행하라는 허락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는 여러 차례의 상소에서 하투 지역은 지리적인 특성상 대군을 파견할 경우 사막 등 군사가 움직이기 어려운 척박한지대가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어서 유목민과 같이 신속하게 이동을 할 수 없으며 군량 공급 또한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투에서의 전법은 공전 (攻戰)보다 방수 (防守)의 방법이 훨씬 쉽고 효과적임을 지속적으로 제안해. 


  


이러한 제안의 결과 성화 10년(1474) 유림산 북쪽 변장을 완성하였는데, 동쪽 청수영(淸水營) 부근에서 편두관(偏頭關) 안문관(雁門關) 영무관(寧武關) 등의 관성(關城) 등을 연결시키며 서쪽 영하 화마강에 이르는 동서 1773 리에 이르는 긴 성벽과 돈대 등이 건축되고 연수진은 이전의 시설에 비해 견고하면서 연결된 성벽에 의해 보호받는 군사 중진이 되ㅇㅇ 



  


이후 산서(山西) 지방의 요충지이자 토목의 변  발생지역인 대동 주변에도 292km의 일선의 변장이 축조되. ‘일선의 벽’을 형성하기 위해 가능한 경우 산을 깎아서 벽을 만들었고 평지에는 황토를 다지는 판축과 해자 등으로 성벽을 구성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토목의 변 이전에는 관성, 돈대, 보 등이 선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이제 모든 성보와 변방의 시설들 사이의 성벽을 선으로 연결시키면서 성과 성 사이의 빈틈을 없애면서 이전보다 방어력을 강화할 수 있는 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야.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은 이때의 모습이야ㅇㅇ



또한, 일선으로 연결된 성벽 수축 이후 몽골 세력이 하투에 해당하는 연수,영하,섬서 지역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현저히 줄고 대신 선부나 요동에서 몽골의 출현 기록이 증가하는 것은 여자준이 일선의 변장을 수축한 이후 북방민이 방어가 허술한 동쪽으로 침공대상 지역을 옮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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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 동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요동 역시 선으로 연결되는 요동변장(遼東邊墻)이 수축되는 계기가 마련 되었는데, 일선의 변장 수축 이후 소규모의 침입에 대해서는 변장에 안전하게 주둔하고 있던 군사를 동원하여 추격전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이것은 성벽이 견고해짐으로서 방어력 이외에 공격력도 강화되었음을 의미해.

  




여자준은 이후 병부상서와 호부상서를 거쳐 북부 변경인 대동 선부를 총괄하는 총독이 되어 다시 장성 방어의 중추적 임무를 담당하였어. 이 때 여자준은 편두관에서 동쪽 대동 선부를 경과하는 길이 약 740km 정도의 연결된 변장을 쌓고자 하였으나 공사를 실제 감독하는 선부진의 무장들이 과중한 부역 등을 이유로 반론을 제기하여 대사업은 성공할 수 없었고 대동과 선부의 서쪽 장성을 연결하려는 그의 시도는 좌절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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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그의 공법은 이후에도 활용되어 성화 23년(1487) 대동에 122km의 변장이 완성되었으며 영하에서도 평노성(平虜城)의 주변에, 고원진(固原鎭)의 정노(靖虜)와 난주(蘭州) 주변에도 일선의 변장이 수축됨으로써 여자준의 제안으로 시작된 성벽 축조공법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갔어.


  


홍치연간(弘治年間)(1488~1505)에도 산서 편두관과 황하 연안부에 약 80킬로미터의 성벽이, 선부 주변에서 편두관까지 380킬로미터의 변장이 쌓아졌으며, 조금 늦은 홍치 15년(1502)에는 고원진(固原鎭) 동쪽 요양(饒陽)으로부터 서쪽으로 170km까지 연결되는 변장이, 계진(薊鎭)에서도 산해관으로부터 모전욕(慕田峪) 사이에 80킬로미터의 변장이 수축되었고 이러한 성벽이 축조되는 과정을 종합해 보면 확실히 여자준(余子俊)이 성벽 축조를 시도한 이후 일선의 성벽이 북방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않盧?



  


정덕연간(正德年間)(1506~1521)에 총제(總制) 양일청 (楊一淸)에 의해,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도 총제 왕경에 의해 성벽이 수축되었는데, 이 시기 성벽의 수축 역시 ‘연결된 성벽’의 축조를 의미하였고 고려황제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20)에 들어가면 이러한 움직임이 요동에도 영향을 주어 요동의 방어선을‘一線’으로서의 연결하는 대략 800km 가까운 요동번장이 나타나. 

(만력연간에 축조된 요동번장은 임진왜란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어ㅇㅇ 임진왜란으로 득본 여진을 방비하기 위함이였거든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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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산해관에서 가욕관(嘉峪關)에 이르는 장성에 대해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시도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장성 라인에 병사가 거할 공간이 있는 공심적대(空心敵臺)가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고 유림진과 영하진 역시 돈후 104곳 요새 59곳이 증축되는 등 방어선을 역량을 강화시켜 


  


그러나 여자준의 제안 이후 형성된 일선의 성벽은 변방 군사들이 위소제도의 폐단으로 도망하면서 변방을 지킬만한 군사가 감소하는 등의 폐해로 방치되거나 보수되지 못하여 붕괴하기도 하였다고 보여지며 가정연간(嘉靖年間)에 하투 지역 성벽에 대한 보고를 분석해 보면 이미 성벽의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는 내용도 나타나고 있는걸 보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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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파괴되어가는 성벽에 대해 시급히 수축하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대부분 실현될 수 없었어. 이미 정덕 연간(正德 元年)(1506) 보신(輔臣) 양일청 (楊一淸)은 연수정변영(延綏定邊營)의 석노지石澇池 (現 섬서성 정변현 백우산陝西省 定邊縣 白于山 남쪽)에서 서쪽 영하 횡성(寧夏 橫城)까지 대대적으로 변장을 보수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권력을 잡은 환관 유근(劉瑾) 등의 반대로 파직되고 요구한 400리 중 40리 만 겨우 보수되는 등 여자준의 시대만큼 변장은 관리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겠어ㅇㅇ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명나라는 토목의 변이라는 대사건을 겪으며 명초에 볼 수 없었던 일선의 성벽을 축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였지만 만력 3대정(萬曆 3大征)으로 인한 재정의 고갈, 군사의 피폐, 정치적 부패와 환관의 횡포, 변방 군기의 해이와 위소병의 도망, 둔전 생산량의 감소, 12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중국산 말의 질적 하락으로써 전마 확보의 실패와 밀매의 성행 등 명 후기로 갈수록 장성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내부적 모순들이 발생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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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시 棄市 형벌 )





가정연간 세종(嘉靖年間 世宗)은 병부시랑 증선(曾銑)을 섬서 3변의 총 책임자로 파견하게 되. 증선은 우선 정변영(定邊營)에서 황보천(黃甫川)에 이르는 1500여 리의 변장수축을 계획하며 하투의 몽골세력을 축출할 방도를 모색하였으나 증선은 환관 엄숭(嚴嵩)의 권력에 밀려서 기시(棄市)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고 하투의 회복에 동의했던 하음(夏言) 역시 죽음으로 끝을 맺으며 명은 이제 모래위에 지은 성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게되. 


  


하투의 회복에 노력한 두 관리가 죽던 해 타타르 세력을 통합한 알탄(俺答) 칸은 다시 침략을 시도하였고 다음 해 유림 등의 하투와 대동 등을 다시 대대적으로 약탈당하는 경술의변(庚戌之變)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연수진(延綏鎭)의 내지로 들어온 몽골에게 남녀 5000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가축과 수 백만석의 양식이 약탈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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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탄칸 俺答汗 )




그리고 나서 그 이후에는 몽골과 평화적 관계를 맺게되고 북방에 일시적 평화가 찾아오게 되는데 알탄칸에게 순의왕(順義王) 이란 칭호를 하사하고 몽골의 요구에 어느정도 응하며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타타르의 칸들이 명과의 교역으로써 칸의 권력과 재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일수 있었으므로 명에 대한 부족들의 약탈을 통제하게 됨으로써 명의 변경은 안정되었다고 할수 있겠어. 


  

















홍무~영락연간때 수차례 복속시켰던 여진(女眞)이 토목의 변을 전후하여 다시 일어나게되는것에 대해서 약간 언급해볼께ㅇㅇ 이제 거의 다왔어ㅋ





장성 지대에서 변장이 한창 축조되던 시기 동쪽 요동에서는 새로운 세력 곧 여진족이 부상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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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역시 토목의 변 이후 요동도사(遼東都司)와 조선(朝鮮)의 변경을 더욱 심각하게 약탈하는 특징을 보여주었고 특히 명의 칙서(勅書)와 위인(衛印)을 확보한 여진인들은 입공자(入貢者) 수를 나날이 증가시켜 많은 이익을 가져가고자 하였지. 


  


이에 대해 명나라는 입공을 제한하고 마시(馬市)를 폐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압력을 가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성장세에 있던 여진을 더욱 자극함으로써 약탈을 정당화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줘. 성화 2년(1466) 1년 동안 건주(建州)와 해서(海西) 여진은 97차례나 요동을 침입 하여 10만의 인구를 약탈하거나 살육을 하는 패기를 보여주는데 결국 여진의 빠른 성장은 몽골의 위협과 더불어 요동도사가 기존의 방어선을 연결된 성벽 곧 요동변장이라는 강력한 방어시설로 대체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요동변장의 3구역 중 우선 요서변장(遼西邊墻)의 수축은 산해관 북쪽 60리 지점의 추자산 오 명구(錐子山 吾 名口)에서 시작되었으며, 동으로 백토창(白土廠)( 現 흑산 백창진 : 黑山 白廠鎭)에 이르기까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어.


  



실제 공사 시작은 왕고(王翶)에 의해 정통 7년(1442)에 시작되었어. 


요서지방은 동 몽골(韃靼:타타르)과 올량합(兀良哈)의 남천(南遷)으로 경태연간(景泰年間)(1450~1457) 이미 올량합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몽골의 위협은 요서변장을 수축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 요서변장은 37개의 성보(城堡)와 505개의 돈대(墩臺)로 구성되어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요하투 변장 지역은 M자 형의 요동 방어선 중 오목하게 들어간 지역으로 요동변장 중 가장먼저 설치되었는데 그 이유는 요하투 지역은 비교적 지세가 평탄하고 험산이 없었으며, 대부분의 하천 역시 수심이 낮고 겨울에는 기온이 낮아 쉽게 동결되어 가장 약탈당하기 쉬운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이러한 지리적인 특징으로 명 초기부터 요하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몽골 올량합세력은 중기부터 점차 이 지역으로 조금씩 남하하면서 요동을 크게 위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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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변장은 정통제 시기 여진 건주부(女眞 建州部) 등이 남하하여 파저강(婆猪江)(渾江)과 소자하(蘇子河)(渾河 상류)지역까지 들어오자 북쪽의 개원(開原)을 시작으로 봉황성(鳳凰城)을 연결시키면서 축조되었으나 요동변장 역시 축조된 후 장성지대와 마찬가지로 그 기능에 있어서 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하였던걸로 보여져. 왜냐하면 험준한 요동의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요동변장이 형성되었지만 요동의 방어를 약화시키는 또 다른 다양한 원인들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수 있어.


  


그 주요한 원인으로 하투 지역과 마찬가지로 요동에서도 위소병(衛所兵)의 이탈, 둔전경영의 실패, 둔전인구의 도망, 반란, 변강의 기강 해이, 방어선의 비효율적 운영 등이 나타났기 때문이지. 또한 요동변장 역시 장성 지대와 마찬가지로 그 방어선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인구가 희소하던 요동의 군사력으로는 긴 방어선을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어. 


  


북쪽에서의 위협이 강도를 더할수록 방어선을 축소하여 방어력을 강화시키자는 건의도 있었지만 이미 요동도사의 내부 모순이 심화되어 역시 불가능하였으며 많지 않은 요동의 인구는 넓은 지역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고, 방어해야할 지역은 넓었기 때문에 변장수축을 통해 방어선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대규모의 침입을 방어하기에는 견고하지 못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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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부의 수령이었던 누르하치(努爾哈赤)는 만력연간(萬曆年間) 여진을 통일하여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명을 공격하였고 결국 후금(後金)이 7대한(七大恨)을 내걸고 남하를 시작하자, 명은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 16만이 궤멸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되. 이후 여진은 심양(瀋陽)으로 거점을 옮기고 산해관을 경계로 명과 최후의 대치국면으로 접어들게되고 요동변장의 서쪽 끝 산해관은 역대 어떤왕조의 어느 성보다고 견고하고 규모가 큰 요동의 관성(關城)이었으나 명의 장수 오삼계(吳三桂)가 잠긴 성문을 스스로 열어줌으로써 하투와 요동의 성벽들은 그 역할을 못하게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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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삼계(吳三桂)가 투항할 때 데리고 간 60만 대군과 청군의 깃발이 북경에 들이 닥침으로써 명은 남명으로써 하나의 구심점이 없어 즉, 당시 내부적 혼란과 제대로 된 왕이 없었던 불운이 겹쳤기에 중원의 노른자위를 가지고도 지리멸렬하다가 1662년까지 청에게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에는 멸망하게 되.

















































이로서 명 건국서 부터 멸망까지의 대 북방정책에 대해서 써봤어. 너무 긴 글이다보니 결론과 7줄 요약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지을께








명대 가장 중요한 대외적인 문제는 북변의 몽골 세력을 방어하는 것이었고 몽골세력을 방어하기위해 명나라는 건국 이후 구변(九邊)을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선을 형성해 나갔다고 보여. 홍무제 초기 명나라는 북원을 축출하기 위해 장성을 넘어 추격전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추적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군대를 함부로 움직여 초원으로 들어가 몽골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전략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ㅇㅇ


  


이러한 경험을 통해 명나라는 점차 확보한 영역을 지키는 방어선 형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몽골족의 추적을 포기하는 대신 성보(城堡) 중심의 방어체계를 형성하는데 주력하게되. 


  


영락연간에는 장성 북쪽의 대령부사를 내지로 옮겨오는 등 관할하기 힘든 지역이 방치됨으로써 전체적으로 명나라의 북변 방어선이 축소되었고 이로써 구변의 북쪽 지역은 점차 몽골세력의 거주지역이 되.


  


영락연간 방어선이 축소됨으로써 동부의 동승(東勝),흥화(興和) 등이 내지로 이전됨으로써 실제 서부의 하투 지역도 방어선 외곽지역이 되면서 명이 더 이상 방어시설을 수축할 수 없는 지역이 되고 요동 역시 영락연간에 설치한 누르간도사(奴兒干都司) 등이 도사(都司)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결국 요동도사에 편입됨으로써 요동(遼東(의 방어선 역시 요동도사(遼東都司)에 국한되는 특징을 보여주게되. 


  


북변 중 하투 지역은 만곡하는 황하 남쪽 지역으로 그 범위가 매우 넓었고 요충지 섬서 3변과 접하여 매우 중요하였다고 보여. 명나라의 방어선의 축소되면서 하투에는 점차 많은 몽골 부락이 형성되었고 정통연간에 오이라트의 에센은 대동(大同)을 차지하고 정통제(正統帝)을 포로로 잡음으로써 명은 변방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토목의 변 이후 하투는 몽골의 성장으로 명초(明初)때 방치되어 몽골족에게 개방된 지역이 되었으며 때문에 오이라트가 남하하여 약탈하는 중요 대상지역이 되. 


  


명나라 건국 이래 변방 및 내지에 가장 큰 위기의식을 낳은 토목의 변을 계기로 하투는 대대적으로 약탈당하는 지역이 되었고 명은 하투 지역의 중요성과 방어력의 한계를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하투를 방어할 효율적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우선 점차 증가하고 있는 몽골족이 하투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차단하고,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몽골의 침입을 방어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게 되


  


명은 여자준을 하투 지역에 파견하였으며 그는 현지조사와 노력 끝에 하투에 대군을 파견하여 그들과 정면 대항하는 것은 큰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명초와는 다른 방어선 구축 곧 일선(一線)으로 연결된 장성 수축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방어력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변방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

 


  


토목의 변 이전 변방의 방어시설은 성보 돈대 등이 중심이 되었고 성보와 성보 사이에 일선으로 연결되는 방어벽이 없었어. 이 때문에 기동성이 있는 북방 민족이 침투할 수 있는공간이 여전히 많았으며 이는 곧 방어력의 약화와 한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으며 많은 군사력을 필요로 하게되ㅇㅇ 


  


그러나 이제 토목의 변과 대대적으로 약탈당한 하투지역의 피해를 통해 위기의식을 경험하면서 선(線)으로 연결된 높은 성벽이 각 지점의 성보(城堡)들과 조화를 이루며 방어선을 형성함으로써 이 성벽을 넘지 않고는 명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없는 새로운 방어 전략이 시도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어. 


  


곧 성벽을 종래와 같이 보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벽을 연결시켜 성벽 그 자체를 방어의 중심이 두었던 성보와 돈대라고 하는 점‘点’을 각지에 설치하고 그곳에 대량의 군사를 배치한다는 생각을 전환하여, 성벽이라는 선‘線’을 요충지 점点과 상호 결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시킴으로써 배치되는 병력 수를 줄이는 등 효율적 방어를 운영함으로써 장성 축조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


  


연결 된 높은 벽, 즉 변장(장성벽)을 주체로 한 기법은 하투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이로써 구변의 장성이 일선으로 연결되기 시작하였으며, 요동 역시 이러한 영향으로 구조상 장성처럼 견고하지는 못하였지만 800km에 달하는 요동변장을 ‘일선’으로 연결시키고자 하였어.


그러나 만력연간 3대정(萬曆年間 3大征)으로 인한 재정의 고갈, 군사의 피폐, 정치적 부패와 환관의 횡포, 변방군기의 해이와 위소병의 도망, 둔전생산량의 감소, 전마 확보의 실패와 밀매의 성행, 장거정 개혁의 실패 등 명 후기로 갈수록 내부적인 모순이 극대화되면서 장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상황들이 발생하게 되

  


또한 장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허물어진 곳을 회복하는데 많은 인력과 물력이 필요하자 이를 포기하고 하투 등에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완전히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회복하자는 강경한 논의가 다시 반복되기도 하였다고 볼수있어


  


결과적으로 명나라는 멸망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토목의 변과 하투의 위기 이후 수축된 일선의 성벽은 명나라 멸망 이전까지 어느 정도 그 방어력에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명 후기에 이르자 변방을 불안정하게 하는 원인은 성벽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곳에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는데 즉 성을 지키는 군사력은 이미 전투력에서 몽골과 여진을 능가할 수 없었어. 군사력의 약화, 군기의 문란, 위소병(衛所兵)의 이탈, 병변(兵變) 등 군사들이 그 역할을 못함으로써 오히려 방어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는것이지.


  


하지만 이들 명나라의 군사력에 비해 적이 침투할 수 있는 군사 중진은 여전히 견고한 곳이 많았고 누르하치를 퇴각시킨 영원성 과 산해관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어. 명 후기 여진의 수차례 공격에도 산해관 등은 견고한 벽을 견고한 측면이 있었고 산해관은 역대 어느 성보다도 견고한 관성이었으며 이러한 성들이 구변의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었어.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명의 장수 오삼계가 굳게 잠긴 성문을 여진에게 열어줌으로써 하투와 요동 등 명대 9변의 장성은 그 역할에 종말을 고하고 말아. 


방어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연결된 견고한 성벽 이외에 그것을 지키는 군사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명대 북변정책의 한계와 명나라의 멸망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구만. 




















1. 명나라의 초기 군사제도는 오호도독부와 금위군 북변 사령부로 크게 3개의 편제로 나뉘었어ㅇㅇ


2. 명나라의 초기 군사전략은 요격전략으로서 매번 무리한 정벌을 단행하여 국가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만들었어


3. 토목의 변으로 인해 정통제가 포로로 잡히면서 명나라 수뇌부들은 기존 군 전략을 바꾸게 되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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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원과의 대결에서 군사전략이 요격이 중심이 된 공격형 전략에서 변장전술 즉, 장성 신,증축을 통한 방어형 전략으로 바뀌게 되ㅇㅇ


5. 이러한 방어형 전략은 기존 요격이 중심이 된 공격형 전략보다는 위험성이 낮았지만 결국 또 다른 군비증강의 요인이 되 명 말기 재정붕괴를 초래해


6. 악화된 재정 상태로 인해 행정능력이 떨어지면서 군사전략에 중대한 차질이 생기면서 요동방어에 헛점이 보이게 되ㅇㅇ


7. 이러한 헛점을 파고든 후금이 명을 무너트리면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게되ㅇㅇ




















사실 명의 멸망은 참 시기와 운이 명나라에게 안따라주었지 않나라고 많이 생각해.

만력초기때 장거정이 몇 가지 문제점의 개혁을 하자 다시 명이 회복해지는 것등을 보면 3대정 이후 숭정제 초기까지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던거 같아. 


이자성의 난은 사실상 거의 진압되었지만 청의 압박으로 다시 커진 사례였고 이 조차도 당때의 절도사들의 자립이라든가, 민족적인 반란으로 바뀐 홍건적의난과같은 나라를 뒤엎을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어. 또한 당시 명대에 10대 상방(十大商)이 생길정도로 부와 생산력이 높았으며 신기영(神機營) 이란 화기로만 이루어진 군대가 영락연간때 약 7만~9만 정도로 조직했을 정도로 화기에도 관심이 많았던 중국왕조였기에 이처럼 허무하게 멸망했다는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야.





다음편에는 영락제 제위 당시 명군의 군사편제와 군사력에 대해 쓸께. 지금까지 읽어줘서 고맙다 게이들아ㅋ 




 












참고 논문,자료 



盧基植, 後金時期 滿洲와 蒙古關係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9.

 明景宗實錄 卷191, 景泰 元年 4月 乙亥.

王天順, 河套史, 人民出版社, 2006, pp.345~346.

明景宗實錄 卷209, 景泰 2年 10月 壬辰.

魏煥, 九邊考 卷7 「楡林鎭」

魏煥, 九邊考 卷1 「鎭守通考」

王天順 p.340.

王天順 p.349.

魏煥, 九邊考 卷1 「鎭守通考」

王天順, p.350.

王天順 p.341.

明史 卷911, 「邊防」

霍冀, 九邊圖說「延綏鎭圖說」

明史 卷 178, 「余子俊傳」

明憲宗實錄 卷108, 成化 8年 9月 乙亥.

魏煥, 九邊考 卷1 「鎭守通考」

明英宗實錄 卷10, 天順 8年 10月 乙巳.

朝鮮王朝實錄 卷100, 中宗 38年 正月 丁未.

魏煥, 九邊考 卷1 「鎭守通」

皇明從信錄 卷18.

魏煥, 九邊考卷7 「楡林鎭」

明史 卷 911 「兵志」 二.

嘉靖寧夏新志 卷1 「寧夏總鎭」

王天順 p.355.

明英宗實錄 卷16 

叢佩遠, 「明代遼東邊墻」, 東北地方史硏究, 遼寧省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1985年 第1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