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단초를 제공한 3총사(김재규-김계원-정승화)
김재규-김계원-정승화 세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들이었다. 그런데 김재규는 자기의 계획에 두 사람이 동조할 것을 믿고, 역모를 계획, 실행을 하였고 김계원과 정승화는 김재규의 역모에 동조하였다. 만일 김계원과 중정요원인 김정섭, 박선홍, 박흥주 세 사람 중 누군가가 김재규의 [역모정보]를 대통령이나 경호실장에게 알렸더라면 박 대통령의 시해사건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역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 이 칼럼을 쓰기 위해서 지만원 박사님의 역작인 <12.12와 5.18> 상권을 다시 한 번 펼쳐보았다. 아래에 요점만 발췌했다.(제1장~2장)
1. 10.26 당시의 상황
1) 김재규 중앙정보부장(1925년생)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삽교호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후 4시, 경호실장 차지철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전화를 했다.
차지철- "오늘 저녁 6시, 각하께서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을 하실 것이니 준비를 해주시오. 참석인원은 김계원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그리고 나요."
차지철로부터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바로 오늘"이라는 생각에 즉시 평소에 공을 들여온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후 4시 15분이 었다.
김재규- "정 총장, 오늘 저녁 좀 만났으면 하오. 궁정동 안가 알지요? 18시 30분까지 궁정동 본관으로 좀 와 주시오."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곧바로 궁정동 안가로 가서 김계원 비서실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김 비서실장은 5시 40분경에야 나타났다. 김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 실장-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야."
김 부장- "형님, 오늘 저녁 이놈을 해치우겠습니다. 뒷일은 형님이 책임져 주시오."
이에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해줬다. 두 사람은 평소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눈엣가시로 여겨왔었다.
6시 05분, 박 대통령과 차지철이 현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만찬 방으로 안내됐다.
대통령 : "오늘 가보니 삽교천 공기는 좋고 공해도 없는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이야. 오늘 삽교천 준공식 광경을 왜 KBS TV에 보도하지 않지? 정보부장, 신민당 상황은 어떻소?"
김재규 : "공화당 발표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 내겠다고 한 친구들이 다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정(운갑) 대행체제의 출범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주류가 강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
차지철 : "그까짓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
7시 뉴스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김재규는 정승화가 와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만찬장을 빠져나와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50m 가량 떨어진 본관(김재규 집무실) 1층 식당 문을 열었다. 정승화는 오후 6시 35분에 안가 별채에 도착하여 중앙정보부 2차장보 김정섭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김재규- "정총장, 미안하오. 내가 저쪽 행사를 마치고 올 터이니 두 분이 식사를 하고 계시오."
그리고 2층 집무실로 올라가 숨겨두었던 권총을 소지하고 내려왔다. 박선호(예비역 해병대령)와 박흥주(현역 육군대령/육사 18기)가 뒤를 따랐다.
김재규- "박 실장, 본관에 육군 총장과 2차장보가 와있다. 오늘 해치운다.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해라! 자네들 각오가 돼 있겠지?"
박선호- "각오가 돼 있습니다."
박흥주- "예"
박선호- "각하도 하실겁니까?"
김재규- "응"
박선호- "오늘은 좋지 않습니다. 경호관이 7명이나 됩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재규- "안 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돼. 나는 지금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 똑똑한 놈 세 놈만 골라다 해치워!"
박선호-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김재규- "알았네."
식사 후 여흥이 시작됐다. 먼저 심수봉(명지대 재학중)이 '그 때 그 사람과 두만강'을 부르고 바통을 차 실장에게 넘겼다. 차지철은 '도라지'를 부른 후 신재순(한양대 재학중)을 지명했다. 7시 35분이었다. 연회장에서 심부름을 하던 남효주가 들어와 "부장님, 전화입니다." 하고 암호를 전했다. 김재규가 박선호가 있는 부속실로 들어가니 박선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 "준비되었는가?"
박선호- "완료됐습니다."
7시 38분, 김재규가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신재순이 심수봉의 기타반주로 '사랑해'를 부르고 있었고, 대통령은 신재순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김재규가 들어와 앉자마자 김계원을 향해 "각하를 똑바로 모시시오!" 하고 툭 친후, 차지철을 쏘아보았다. "각하, 이 따위 버러자 같은 새끼를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하면서 차지철의 팔뚝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이에 놀란 대통령은 "무엇들 하는 짓이야!" 하고 나무랐지만, 김재규는 그런 대통령의 가슴을 향해 권총을 쏘아 버렸다. 7시 40분이었다. 식당에 들어간지 1시간 35분만에 대통령이 총을 맞은 것이다. 김재규는 가슴에 이어 머리에 확인사살까지 하였다. 이에 대통령은 "나는 괜찮다."는 말을 끝으로 63년의 복잡한 세상사를 마감했다.
#거사에 동원된 중정요원들
김정섭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사살된 경호요원들
차지철(경호실장),정인형(경호처장), 안재송(경호부처장), 김용태(대통령 운전기사), 김용섭, 박상범, 이정오(식당 종업원), 김용남(식당 운전기사) 등 8명 중에서 박상범 경호원만 유일하게 기사회생 했다.
2) 김계원 비서실장(1923년생)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계원은 나이는 정승화보다 3살 위이지만 이미 10년 전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사람이다. 주지하디시피 김 실장은 김재규가 "형님, 내가 해치울테니 뒷일을 부탁하오." 했을 때, "여보, 그게 무슨소리요?"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해준 사람이다. 여기엔 '차지철만이 아니라 박 대통령까지도 해치우겠다는 의도'에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 "각하를 똑바로 모시시오" 하면서 김계원을 툭 친 이유는 "아까 내가 말한대로 시행할 것이니 밖으로 나가 밖의 일을 도우라"는 신호였던 것이다.
김재규-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유지하십시오."
김계원- "뭐라고 하지?"
김재규-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던지 적당히 하십시오."
김계원- "하여튼 알았오."
19시 50분경 현관 앞에 대기한 김재규 차에 뒷줄 좌측에는 김정섭, 중앙에는 정승화 우측에는 김재규 그리고 운전석 옆에는 비서인 박흥주 대령이 타자 차가 출발하였다.
김재규가 궁정동을 떠난 후 김계원은 김재규가 시킨대로 뒤처리를 했다. 그는 대통령 시체를 보안사 영내에 있는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옮기고, 당직군위관에게 대통령 용태를 물어 '사망' 했음을 확인한 후 곧바로 청와대로 돌아와 비상소집을 했다. 최규하 국무총리, 장관들, 경호원들이 그 대상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입니다. 각하께서 유고이십니다. 속히 청와대로 와 주십시오."
"당시 박 대통령이 차고 있던 시계는 평범한 제품이었고, 넥타이핀은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헤어져 있어 대통령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대통령 서거 당시 담당 군의관이었던 정규형 대위의 증언)
김계원 비서실장의 비상소집에 따라 고관들이 속속 도착했다. 8시 40분, 최규하 국무총리가 나오자 김계원은 다른 사람들을 부속실로 보낸 후 총리에게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만찬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다가 김재규가 잘못 쏜 총에 각하가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최규하 총리는 바로 이 시각에 박 대통령과 차지철이 함께 김재규의 총에 사살됐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같은 시각인 오후 8시 40분, 경호실 차장 이재전 중장이 비서실장실로 달려왔다. 김계원은 이 차장에게 차디찬 음성으로 말했다.
"각하가 유고다. 지구병원에 모셔놓고 오는 길이다. 차지철 실장은 부대를 지휘할 처지가 아니다. 경호실장 직무를 대행하라.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마라. 경거망동 하지 마라. 경호실 병력 출동을 금한다."
이는 "나도 관련돼 있으니 너는 더 이상 알려하지 말고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이었다. 여기까지의 행위로 인해 김계원은 10월 29일 구속됐고, 12월 20일 계엄보통 군법회의에서 김재규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날 재판장은 사형선고를 일곱 번이나 내렸다. 죄명은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 종사 미수죄였다. 그러나 며칠 뒤 김계원의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2년 5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는 경호실 병력의 출동을 금지시켜 진실을 밝히는 것을 방해했고,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이다. 또한 그는 쿠데타나 혁명에서나 취할 수 있는 계엄령 선포를 주장한 것이다. 당시 청와대에서 김계원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김계원이 쿠데타의 중심축에 서 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3) 정승화 육군참모총장(1926년)
당시 정승화는 현역 육군참모총장이었다.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경호실 병력 출동금지"를 지시한 것은 김계원만 취한 조치가 아니었다. 8시 5분경에 육군 B-2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 역시 거의 같은 시각에 이재전에 게 전화를 걸어 경호병력 출동을 금지시킨 것이다. 김계원과 정승화는 서로 공모한 사이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공모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것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사람들의 상황조치 수준이었다. 두 사람이 똑같은 사람에게 취한 조치가 똑같다면 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을까? 김재규가 있었던 것이다.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밖에 달리 해석되지 않는다.
2. 차 속에서(7시 50분부터 8시 05분까지)
7시 50분, 안가의 정문을 빠져나온 차는 남산에 있는 중정으로 가기 위해 적선동, 중앙청, 세종로를 통과했다. 차안에서 정승화가 "무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김재규는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대통령임을 표시하면서 바른손 인지로 X자를 그리면서 서거하셨다"고 표시했다.
정승화 :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김재규 : 보안유지를 해야 합니다. 적이 알면 큰일입니다.
정승화 : 외부의 침입입니까?
김재규 : 나도 모르겠습니다.
정승화 :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겠지요?
김재규 : 김일성이가 알면 큰일 납니다. 보안을 유지해야 됩니다. 계엄을 빨리 선포해야 합니다. 계엄을 선포하면 어떤 부대를 뺄 수 있습니까?
정승화 : 계엄을 빨리 선포해야 합니다. 동원될 수 있는 부대는 20사단, 30사단, 9공수여단이 동원될 수 있습니다.
김재규 : 앞으로 총장께서는 계엄사령관으로 이 나라의 운명을 걸머진 중대한 임무를 맞게 되었습니다. 총장의 양어깨에 국가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잘해 주셔야겠습니다.
위 두 사람의 대화 속에 중요한 의미가 내포돼 있다. 첫째는 대통령의 죽음을 묻는 질문에 김재규는 긍정 대신 동문서답을 했다. 둘째는 김재규의 동문서답에서 정승화는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낯간지럽게 "외부침입이냐"고 되물었다. 셋째는 두 사람 모두 계엄을 선포해야 할 비상시국임을 합장했다. 넷째는 병력 동원 문제를 상의했고. 다섯째는 김재규 자신이 이미 군 통수권자인양 착각하고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의 직무에 맡긴 것이다.
3. 김재규는 왜 대통령을 시해했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직접적인 이유는 소요사태 수습에 대한 그의 무능함이 노출되어 있는데다 본인 및 형제들의 비위가 대통령에게 노출되어 곧 있을 인사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차지철로부터는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도 대통령이 차지철을 편애하고 있는 점 등의 감정적 차원에서 비롯되었다.
4. 김재규의 계획이 실패한 이유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보안유지를 위하여 단독으로 구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조시대 이래 2인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선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만 골몰히 구상했습니다. 그 내용은 대통령을 시해한 후 우선은 참석하는 김계원 실장에게는 보안을 유지시키고 그를 현장목격자요 동조자로 확보하고 현장 부근에 군 실력자를 유인 대기시켜 놓고 거사 직후 본인이 거사 목적과 의도를 설득 또는 협박하여 끌어들이고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계엄사령관을 조종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서서히 군사혁명위원회로 전환시켜 국민혁명으로 이끌려고 하였습니다."(11월 17일 진술에서-)
11월 8일, 김재규는 이학봉에게 구체적인 '3단계 혁명계획'을 실토했다.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 주도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학봉 : 왜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저지르셨습니까?
김재규 : 내 원대한 꿈이 앞섰다.
이학봉 : 부장님은 박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인정도 받고 빛이 나는 것이지 박 대통령이 돌아기시면 부장님의 입지도 동시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까?
김재규 : 모두가 나에게 절절 매고 따르기에 거사 후에도 계속 그렇게 하리라 생각했다.
이학봉 : 이번 거사에 동원될 부대는 어느 부대였습니까?
김재규 : 정승화가 내편이라 그런 건 염려하지 않았다.
이학봉 : 대통령을 시해하려면 누구를 시키던지 하시지 왜 부장님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셨습니까? 부장님이 직접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중에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으시려구요?
김재규 : 나의 심복인 안전국장 김근수를 시키면 내가 직접 하지 않은 것으로 다 처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 결정적인 순간에 김계원의 배반이 있었다.
"다 된 밥에 김계원이 배신을 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배신하지 않고 나의 뜻을 받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육본 벙커에서 정승화는 부대출동 등 중요한 상황처리를 했다. 국방장관이 와있는데도 정승화는 나에게는 보고 및 의논을 하면서도 국방장관을 돌려놓았다. 이는 국방장관은 안중에도 없고, 나를 받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일 정승화가 말을 안 들었으면 쏘아 죽였을 것이다."(김재규의 진술에서-)
세 사람 중에 상대적으로 조직이 약했던 김계원은 정승화의 배후세력(지지기반)이 없는 것을 눈치채고, 곧바로 배신을 한 것이다. 그래서 김재규는 1,2단계까지만 성공을 하고, 실패를 하게 된 것이다.
(2) 2성 장군 전두환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보안사가 시해소식을 들은 것은 사건 발생 40분 후인 오후 8시 20분이었다. 이상연 대령의 보고를 받고 전두환은 즉시 보안사 중요 간부들을 비상소집했다. 그 다음 보고가 전두환에게 들어왔다. "노재현 장관이 보안사령관을 찾고 있습니다. 정승화 총장이 각군 수뇌부를 B-2벙커로 소집하고 있습니다."
오후 9시경, 전두환이 B-2벙커에 도착했다.
전두환- "대통령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노재현- "대통령이 서거했다. 자세한 건 모른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발 빠르게 육본 보안대 사무실에 임시 지휘본부를 차리고 사태 파악에 나섰다. 11시 40분, 노재현 국방장관은 전두환에게 "각하가 서거했다. 김재규를 체포하라!" 이렇게 지시했다. 반면 11시 50분에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국방장관실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있다. 헌병이 체포하면 인계받아 보안사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 이렇게 지시했다. 노재현은 '김재규가 대통령을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반면, 정승화는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실 대상'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10월 26일 밤, 김재규는 김진기 헌병감의 협조하에 당시 보안사 보안처 군사정보과장을 맡고 있던 오일랑 중령(갑종155기)에 의해서 연행됐다.
5.정승화 연행 계획
12월 6일, 전두환은 정승화의 연행일을 12월 12일로 정했다. 이에 이학봉 수사국장(중령)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12월 8일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한편 정승화에 대한 연행 계획은 이렇게 작성되었다.
1) 대통령 보고 시점에서 정확히 30분만에 연행조를 총장공관에 보낸다.
2) 연행조는 우경윤 합수부 수사2국장, 허삼수 합수부 조정통제국장 및 7명의 합수부 수사관으로 한다.
3) 총장공관에는 1개 분대 규모의 헌병이 특별경계를 하고 있고 외곽에는 50여 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주하기 때문에 수사관을 보호하고 통과로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합수부에 배속돼 있던 33헌병대 병력 60여 명을 활용학 것 등이었다.
12월 12일 아침 9시 반, 전두환은 부관인 황진하 소령에게 지시하여 대통령에 보고할 시간을 잡으라 하였고, 그는 비서실과 절충한 결과 오후 6시 30분으로 잡았다. 이에 따라 정승화 연행시간은 7시로 정해졌다.
연행 과정에서 정승화는 대인답지 않게 소리를 지르고 저항하여 그의 부하 여럿이 다치고 숨졌다.
6. 결 론
1) "가담을 거절하면 반역으로 몰려 살아남기 어렵고, 성공하면 출세의 혜택이 있을 것이다"(박흥주의 진술에서-) 바로 이 마음이 김계원의 마음이었을 것이고, 정승화의 마음이었을 것이고, 최규하의 마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이미 알아차렸을 국무위원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2. 김재규에게 북한의 '사주'를 의심해 본다.
김재규는 1979년 12월 26일, 형님-아우로 지내는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과 평소 동향인으로 공들여 온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자신의 거사에 동조할 우청룡, 좌청룡으로 여기고 자신의 심복인 김정섭 2차장보를 안가에 미리 대기시켜 정승화를 접대케 하고 거사를 자행했다. 그렇다면 단지 이 두 사람과 자신의 부하들이 자신의 거사에 동조하리라는 믿음만 가지고 이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북한이 남침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박정희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도 몇 차례의 공작 시도가 있지 않았는가? 해방 이후 남한의 크고작은 모든 소요에 북한이 개입하였거늘 하물며 이처럼 큰 거사에 저들의 개입을 의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만에 하나 간첩이 접선하여 박 대통령의 시해를 사주하였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충분한 반대급부를 담보로 제시했을 것이다. 아래에 저들의 도발 역사를 밝힌다.
1) 지금 상황은 10.26 당시보다 몇백 배 더 심각해
(1) 수십 만 고정간첩들과 종북, 좌익들이 포진해 있다.
(2) 60여 명의 서울광수들(걸어다니는 핵폭탄)이 꽈리를 틀고 있다.
(3) 10여 명의 내국인 광수들이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 포진해 있다.
(4) 뿐만 아니라 저들은 남한 곳곳에 지하를 요새화해놓고, 김정은의 공격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5) 그래서 저들이 연일 청와대 공격 엄포를 하고있는 것이다.
2) 相從 못할 金氏 王祖
2016.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