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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 1탄] 신장의야망 창조pk로 보는 임진왜란 참전 유명 일본장수 http://www.ilbe.com/4916431071

[일본역사 2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일본을 통일 시켰을까? http://www.ilbe.com/4916849321

[일본역사 3탄] 일본 전국시대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http://www.ilbe.com/4923020697

[일본역사 4탄] 일본 최강의 기마부대 다케다 신겐에 대해서 알아보자. http://www.ilbe.com/4938073045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에도막부 제 1대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였다.

이후 일본은 250년 동안 쇄국 정책을 펼치며 커다란 전쟁없이, 막부 체제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영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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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계는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었으며, 산업화에 성공한 국가들은 전세계를 식민지화 하고 있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뻗고 있던 양대세력은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에 홍콩을 이양받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영국

영국으로 독립한 후, 남북전쟁을 거쳐 태평양 전체를 지배하에 두려했던 미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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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6월 3일. 미지의 4척의 검은함대가 일본 에도만의 우라가항에 당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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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함선을 이끄는 자는 바로 미국 해군 사령관 페리 제독 이었다.  

페리는 우라가에 내항하여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함과 동시에 "쇄국(鎖國)정책을 폐하고, 개국(開國)정책을 시행해라" 라고 막부를 위협하였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에 다시 찾아 올테니 답변을 달라고 하며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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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의 막부 지배 체계는 일왕(텐노)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고, 정이대장군(쇼군)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쇼군이 직접 정치 1선에 나서서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은 드물고, 수많은 영주중에서 우두머리를  즉 가중(가로)을 선정하여 

가로로 선정받은 이가 중요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양이(攘夷) 냐? 개국(開國)이냐? 250년간의 쇄국정책의 존망의 선택 결정권자는 아베 마사히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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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사항에 있어서 막부 역사상 처음으로 고산케( 도쿠가와 일가인 오와리( ·기슈(·미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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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해 양이론을 펼치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체포하기 시작해서 다음해 까지 100여명의 인사를 대량 숙청한다.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

 

사쿠라다문의 변(5화-0).jpg 사쿠라다문의 변(5화).jpg

 

1860년3월3일. 교토의 사쿠라다문 앞에서 에도막부의 대로인 이이나오스케가 암살 당한다.

사쿠라다문밖의난(桜田門外の変) 

이는 고메이 텐노의 칙허를 받지 않은 채 독단으로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안세이대옥을 일으킨 나오스케에 대해 분노한,

미토번의 낭인무사들이 중심이 되어서, 습격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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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부터 일본 정치의 중심지는 에도(동경)에서 교토로 옮겨진다.

고메이 텐노가 양이론을 펼치자, 존왕양이(尊王攘夷)론 을 주창하는 유력 다이묘 세력들이 교토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영향력을 행사한 두 곳은 쵸슈번(36만석)사츠마번(77만석) 이었다.

막부세력은 존왕양이파를 억제하고, 텐노를 영향권안에 두기 위해 교토를 중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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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로 쵸슈번와 사츠마번은 200여년전 전국시대 당시, 서국의 강국이었다.

쵸슈번 - 모리테루모토 시기에 120만석(실질적 영향권은 200만석)인 서국의 강자였다.

사츠마번 - 시마즈 요시히사 시기에 250만석이었고, 히데요시의 침략전까지 큐슈를 일시 통일한 강자였다.

 

쵸슈번은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편에 섰다는 이유로 120만석->36만석으로 강등당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사츠마번은 히데요시의 큐슈정벌 당시, 항복하여 250만석->56만석(이후 최대 77만석까지 됨)으로 강등 당하였고,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영토가 강등되지는 않았지만 중앙정치에서 멀어진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두 곳 모두 막부 초기 부터 막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주지하고 일본 근대사를 이해하면 더 재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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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12월24일.  

존왕양이파들이 교토에서 활기를 펼치자, 막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쇼군 가문의 친척뻘인 아이즈(会津)번의 다이묘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

를 교토수호직에 임명한다. 감기로 자주 앓아누었을 만큼 병약체질이었던 가타모리는 가신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중임을 떠맡게 된다.

 

처음 교토수호직에 임명되었을 때, 존왕양이파와의 대화로 조정을 시도하여 막부의 불만을 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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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63년 2월 23일.

목상효수사건.

무로마치 막부(1336~1573)의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아시카가 요시아키라,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목상을 훼손하고 목을 강에 버린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에도막부의 쇼군들도 이와 같이 처단할 것이라는 뜻으로, 이후 카타모리는 신선조의 전신인 로시구미를 조직하여 교토의 치안유지를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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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8월 15일.

사쓰에이 전쟁.

사츠마와 영국이 벌였던 전쟁.

1862년 나마무기라는 마을에서 사츠마 다이묘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행렬에 난입한 말탄 영국인을 '무례'하다는 이유로 살해.

영국은 10만 파운드의 배상금 지불을 요구했으나, 사츠마번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13명 전사/50명 부상 , 사츠마번은 5명 사망/18명 부상.

사상자는 사츠마번이 적었지만 가고시마 성과 도시내의 민가가 불타는 등 대규모 화재가 일어났다.

이 전투로 인해, 사츠마 번은 서양 기술의 우수성을 깨닫고 양이에서 개화중심으로 입장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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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왕양이를 주장했던 사츠마는 공무합체(公武合体論)론 으로 입장을 바꾼다.

이는 막부와 텐노가 서로 힘을 합쳐, 개국과 동시에 개혁을 해야한다는 의견이었다.

이때, 존왕양이를 주장한 쵸슈번의 과격한 행동에 환멸을 느낀 텐노는 사츠마-막부와 손을 잡게 되었다.

1863년 8월 18일.

결국 교토에 살고 있는 수십명을 제외한 나머지 쵸슈번의 인사들의 교토 출입을 금지 시킨다.

쵸슈번은 교토에 몰래 잠입하여,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세력들과 동조하며, 개국인사들에 대한 암살 및 방화를 일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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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7월 8일.

이케다야(池田屋)사건.

교토의 이케다야라는 여관에서 교토의 수비를 담당하던 치안 유지 조직인 신선조가 잠복해 있던 쵸슈번의 존왕양이파를 습격한다.

당시 신선조를 이끈 인물은  콘도 이사미(近藤勇) 로,  신선조에 의해서 쵸슈번의 수 많은 대표급 인사들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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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7월19일.

금문의변(禁門の変)

당시 신선조를 비호해 주었던 세력은 아이즈번이었다.

이케다야 사건으로 많은 동료를 잃은 쵸슈의 존왕양이파는 아이즈번 다이묘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를 척결하고 막부로 부터 천황을 되찾고자 하였다.

후쿠하라 에치고를 총대장 삼고 3,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교토로 진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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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슈번의 분노의 진격에 아이즈번과 막부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그 순간 사츠마의 병력이 도착하여, 막부의 편에 서 쵸슈번을 공격한다.

결국 패배한 쵸슈번은 교토에서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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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7월20일~8월14일.

1863년 9월5일~6일.

시모노세키전쟁(下関戦争)

 

1863년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미국함선을 포격 공격한게 원인으로,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은 초슈번과 전쟁을 펼치게 된다.

서양열강 4개국은 72명의 사상자와 함선 2척을 파손의 피해를 입었지만 쵸슈번 해안의 전포대를 점거하였다.

양이의 중심지였던 쵸슈번은 이 전쟁을 거치면서 서양열강의 우세한 무력을 통렬하게 실감하고 양이노선을 포기하게 된다.

 

서양열강은 사츠마번의 사쓰에이 전쟁과 마찬가지로 의외의 저항력에 의해서 일본에 대한 신중론이 불거지게 되었고,

장기적으로 막부가 아닌 쵸슈와 사츠마의 뒤를 돕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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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된 쵸슈번은 막부의 반격 앞에, 바람앞의 등불과 같은 운명에 처한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