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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모델 part 1 http://www.ilbe.com/349932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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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이 탓던 피젤러 슈토르히 




파트1에 이어서 계속쓸께





9군 사령관으로 벨리전선의 2기갑사단을 시찰하고 귀환하던 모델은 파르티잔의 기관총 사격에 탑승하고 있던 슈토르히가 격추당할뻔 해


이때 기관총의 탄알이 모델의 상반신 아래에서 위로 관통했고 폐의 손상이 가장 심각했다고해 


치사량의 출혈로 혼수상태였던 모델의 생명을 구한건 조종사였던 빌헬름 하이스트 상사였는데 훗날 그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그가 거대한 창에 꿰뚫린것 같았다'라는 증언을 하게되지


하이스트 상사가 필사적으로 근처 야전병원에 착륙시키면서 신속한 응급조치와 수혈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수는 있었어 (세월호 사건이랑 참 비교되지?)


다행이 고비를 넘기며 드레스덴의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5번의 잔상을 인정받아 전상장 금장을 수여받기도해 (장군참모 출신으로 수여받은자는 극소수)


모델이 9군 사령관직을 비움에도 불구하고 9군은 자이들리츠 작전으로 소련 39군단을 포위섬멸하여 점령지를 오히려 넓히는데 성공했고 르제프 돌출부의 간격을 완전히 닫아버렸어


그리고 이어진 8월7일 소련군의 하계 공세마저도 막강한 9군의 수비력에 돈좌되며 모델은 9군 사령관에 복귀를 하였어


만약 모델이 없던 자이들리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9군의 운명은 주코프의 화성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의 6군 꼬라지가 날수 있었다는게 지금의 정설이야



그럼 화성작전때 모델의 활약상도 한번 보고 가야겠지?



1942년 9월과 10월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독일군 주력이 집중된 가운데 르제프 방면에 상대적으로 OKH는 관심을 덜 쏟았고 


곧 임박한 소련군의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첩보기관들은 각기 다른 정보를 쏟아내거나 번복하는등 9군의 입장에선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였어


그렇지만 모델은 자체적으로 감청항공시찰,소련군 포로진술을 통해서 11월25일에 있을 소련군 대공세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선견지명을 보여줘


폭설에 정찰기와 차량이 운행을 하지못하자 무한궤도 운용 바이크를 운영해 최전선을 오가며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지휘관들과 의논해 중부집단군 사령과 귄터 폰 클루게에게 증원 부대와 보급물자도 요청 할수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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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화성작전 당시 르제프 돌출부의 사진이야 위에 파트1에 있던 1년전 사진이랑 비교하면 9군의 공세적 방어가 엄청난 전공을 세웠음을 알수가 있지?


이때 소련군이 입은 손실은 막대하여 스탈린은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르제프 전투를 참관시켜 제2전선의 개전을 시급히 요구해



11월 25일 새벽 소련의 이반 코네프가 이끄는 서부 전선군과 막심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4개방면에서 동시에 9군을 협공해 대규모 포위망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걸 주코프가 입안한 화성 작전이라고 불러 


그러나 눈과 안개때문에 목표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소련 20군 포병대는 소련군 진격에 방해가될만큼 지형을 파헤쳐놓고 


소련의 공세를 예측한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기갑대장의 39기갑군단은 소련의 초반 충격전술에 대비해 후방 진지로 물러나 있었고 


독일군 방어진지는 정확히 소련군의 돌격루트를 예측해서 구축되있었고 이반 코네프의 서부전선군은 첫날 투입한 보병의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2개의 기갑여단도 엄청난 피해를 입게되


주코프와 코네프는 공세를 계속 강행해 균열을 만들고 병력을 들이부으려고 했으나 비좁은 돌파구에 6전차군과 제2근위기병군단이 몰리면서 병목 현상이 발생


당연히 이런 먹이감을 모델은 주특기인 집중 포격운용을 이용해 개박살 내버리고 여기에 루프트바페의 슈투카 폭격이 가해지며 6전차군과 2근위기병군단은 본진인 20군단과도 단절이 되어버려


11월 29일 아르님은 증원 기갑부대가 도착하고 바로 공세로 전환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작전으로 각개격파를 지휘했어


이렇게 서부전선군의 공세는 대충 마무리했고 이제 남은게 칼리닌 전선군이였어


칼리닌 전선군의 22군과 41군으로 벨리에 위치한 모델의 41기갑군단의 서부 방면을 공격하고 39군은 북부 방면으로 공격했으나 모델의 41군단장 요제프 하르페 기갑대장은 압도적인 전력차이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선봉 부대의 합류를 저지하였고 통신이 두절되자 모델이 직접 벨리로 날아가 지친 전투부대를 후방으로 돌리고 중부집단군 예비부대인 3개 기갑사단을 41기갑군단에 증원함으로써


하르페는 돌출된 소련군 선봉을 손쉽게 각개 포위하여 섬멸할수 있었어


이때 모델이 군수쪽에서도 조예가 깊었던게 당시 독일군의 주공이 남부집단군에 주력되있어서 9군의 전차대수는 서류상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모델은 충분한 연료를 확보하여 적재적소의 기갑부대 운영을 가능하게 하였어


마침내 12월 14일 주코프는 정식으로 소련군 탈출을 허가 하였으나 겨우 뚫은 탈출구 역시 모델의 집중포격과 그로스도이칠란트사단의 맹공으로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며 소련군은 탈출을 하였어


결국 주코프가 야심차게 입안한 화성작전은 독일군 사상자 4만명,소련군 사상자 33만5천명에 소련 정예 전차사단 6개가 와해되며 85%의 전차손실(1852대),과 대부분의 중장비들이 독일군에 노획되는 대패를 기록하였고


당시 주코프는 화성작전에 68만명+41.5만명을 투입했는데 거하게 말아드셨지


화성작전은 2차세계대전 당시 가장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로 손꼽히고 현대 전사학계에서도 르제프 공방전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었어



이후 1943년 쿠르스크 전투당시 모델은 북방공세를 맡아 로코소프스키의 방어선을 공격 독일군의 손실을 압도하는 피해를 입혔으나 소련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쿠르스크에 도달하지는 못하였고


소련군은 철천지간 원수인 모델의 9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쿠투조프 작전을 실행하였는데 모델은 9군뿐만 아니라 2기갑군의 지휘권을 인수하여 


역으로 가을여행 작전을 개시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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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1943년 7월사진 좌측의 전상장 금장 훈장이 보이지? 우측은 7월19일 가을여행 작전당시 사진


7월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동안, 독일군 49만명을 섬멸하기위해 소련군 128만2천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8만6천명 전차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최근 연구된바에 의하면 독일군 손실은 6만명이였다는게 정설이야)


소련군은 소련군은 사상자 42만명9천명,전차손실 2586대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어


그리고 참모 1명만 동행한채 마지막 순간까지 작전을 지휘하던 모델은 소련군 포로 11732명까지 데리고 와서 오히려 소련군에 엿을 먹여버려


가을여행 작전은 100만명이 넘는 소련군의 공세에 어쩔수 없이 퇴각하며 소련군의 엄청난 출혈을 야기했고 오히려 소련군의 전략예비대를 약화시키는 성과를 달성했어


덕분에 중부집단군은 19개사단을 예비병력으로 쓰는 한숨돌릴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


모델의 9군 장병 전원은 7주동안 단 하루의 휴식도없이 용전을 펼쳤으며 전장의 폭이 400km까지 확장된 상황에서도 모델은 이를 완벽하게 통제, 끊임없이 전선을 오가며 


루프트바페의 폭격을 지시하고 정확한 예비대 투입시기를 운용하는 등 지휘관으로서 천재적인면을 유감없이 발휘했지



그렇지만 300개가 넘는 해쳐리에서 뽑아내는 소련군의 떼삼사와 병력들은 도저히 10게이트 프로토스가 막을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1944년 1월 모델은 갑작스럽게 베르히테스가덴(늑대굴)로 호출되 북부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


모델은 긴급하게 방어전을 재편성하고 방패와 검 작전을 직접 히틀러에게 입안해 승인을 받아내


특이한게 당시 히틀러 앞에서 후퇴라는 단어를 꺼내면 누구든지 바로 해임되는 상황에서 모델은 후퇴를 가능한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물러서서 전력을 추스르다가 적이 허점을 보이면 랄프의 갤럭티카 팬텀마냥 공세로 전환해 재점거한다는 적극적인 전법이라고 입을 털어서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내


그리고 모델은 진짜로 소련군에게 5배가 넘는 피해를 안기며 퇴각 레닌그라드 전선을 안정시키고 모델은 공적을 인정받아 1944년 3월 제국 원수로 진급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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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보직이동을 앞둔 롬멜이 오랜만에 9군을 방문하여 화성작전때 41군단장이였던 하르페와 함께 찍은사진


당시 모델과 9군의 전우애는 무척 각별하여 모델의 53번째 생일을 함께 보낼만큼 친했어


모델이 원수로 진급한뒤 3월 말 남부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은 전략적 후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히틀러에 의해 파면되고 후임으로 모델이 임명됨으로써


남부집단군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


3개월뒤인 6월 22일 소련의 하계 대공세인 바그타리온 작전이 개시되었고 이 공세는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을 겨냥한거라고 예상한 독일군과 달리 중부집단군을 겨눈것이였지


결국 6월 28일 모델은 중부집단군 사령관까지 겸임하며 혼자서 동부전선 전체를 책임졌는데 


당시 바그라티온 작전에 의해 궤멸된 독일군은 부대원이 1명 뿐인 경우에 장비와 보급품은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전선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멍(More Hole Than Front)이 생겨난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모델은 체계적인 군대로 재편성한뒤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한 채 퇴각하며 엷은 방어선을 거듭 만들어냈고 소련군의 진격한계점을 포착하여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근교에서 특유의 파쇄공격으로 알렉세이 라드지프스키의 제2 근위전차군을 궤멸시키고 소련군을 50km나 후퇴시키며 다시금 견고한 전선을 새롭게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어


이 공적으로 모델은 제3제국 최고의 훈장인 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십자장을 받으며 동부 전선의 수호자(Retter der Ostfront)라는 별명까지 얻어


바그타리온 작전 당시 소련군 수뇌부는 1944년 연내안에 베를린 점령을 판단했고 영미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인해


루프트바페의 지원역시 종범이였을뿐만 아니라 소련군 대 독일군 전력비 5:1의 암울한 상황에 만슈타인,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등 유능한 장성들이


순식간에 해임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홀로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지켜낸 모델은 정말 놀랍고 괴수의 모습을 보여줬지 


전후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서전에 모델에게 찬사를 아낌없이 보냈어 


바그타리온 작전 이후 모델이 재건한 방어선은 모델이 서부전선으로 전임함으로 육군참모총장인 구데리안이 동부전선방어 전략의 요충지로 활용하게되



바그타리온 작전이후 1944년 8월 롬멜의 부상과 클루게의 해임으로 서부 전선의 지휘체계가 빵꾸가 나자 


히틀러는  '귀관이 서부전선에서도 수호자가 되어주길 바란다'는 명령을 받은 모델은 서부전선 총사령관과 B집단군 사령관을 겸임


팔레즈 포위망에 갇혀 있던 독일군의 4할을 탈출시키는데 특히 군단장 4명과 사단장 25명을 생환시켜서 서부 방어선을 또다시 재편하는 무지막지한 괴력을 또 보여줘


그리고 정신조금 차린 히틀러는 서부전선 총사령관직에 현역으로 복귀한 룬트슈테트를 임명하고 모델로하여금 집단군 사령관에 집중하도록 조치를 취해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후 독일군은 그냥 무질서하게 패주만하며 거지 패잔병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점령지를 축소하며 주둔병력을 아껴 다시금 방어전선을 구축하는 독일군 방어전략이 성공을 거둔게 정설이야 


아이젠하워 조차 '독일군이 안정적이고 밀도 높은 전선을 구축했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상황이였지


모델이 총사령관에 부임하기 이전 서부전선 독일군들은 그저 살려고 싸웠으나 모델의 부임이후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병력들은 사기를 고조시키고 G군집단군 사령관에게 최대한의 지휘권한을 부여 히틀러 직할 명령들을 교묘하게 빠져무시하고 히믈러의 개입을 배제하며 


(이때 히믈러의 개입이 무엇이냐 하면 인종청소를 비난한 G군집단군 사령관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그가 요청하는 보급을 싸그리 무시하고 국방군 장교들마저 연행하려 했으나 모델에 가로막히자 사사건건 충돌하는 졸렬함의 극치를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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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있게 마켓 가든 작전을 입안한 몽고메리 장군





이후 1944년 9월 영미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에 기민하게 대처해 재편성 중이던 SS기갑사단을 즉시 투입시키고 3시간만에 방어선을 구축,아른헴을 방어하고


작전을 봉쇄시켜버려 


당시 발터 하르처 SS중령은 '마켓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승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2류 부대를 동원하여 연합군 정예부대를 막아냈기 때문.'


이라고 회고하였으니 그야말로 발터 모델이 방어전의 1인자임을 공고히 한 전투가 아니고 무엇이겟노?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이후 패전만 거듭하던 독일군에게 있어서 최초의 승리라고 해


이어서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오마 브래들리가 지휘하는 미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냄으로써 


독일 국방군중 유일하게 연합군측 거물 장성들을 모조리 발라버리는 장성이라고 평가를 받아


르제프 공방전당시 소련군 참전용사들은 르제프를 '고기분쇄기'라고 회상할만큼 치를떨고 휘르트겐 숲 전투 역시 '마녀의 숲'이라는 악평을 떨쳤으니 당연한거 아니겠어?



히틀러의 정신나간 '라인 강 수비 계획'을 전해 듣고 어떻게든 효율적인 방어전을 펼치는 동부전선 병력을 아르덴 대공세에 투입하는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해


결국 혼자서 긴 시간동안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라인 강 수비 계획'을 축소시키려고 발언하였고 히틀러 마저도 중간에 끼어들지 못하고 말없이 경청만 하는


변땅크급의 포스를 보여줘


그러나 결국 히틀러는 고집을 버리지 않고 조그마한 양보를 해주고말아


이후 아르덴 대공세는 초반에 신명나게 연합군의 귀싸다구를 날리지만 제공권을 상실한 독일군은 개처발리게되


당시 모델의 심정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이런 인터뷰까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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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모델 원수는 부관인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에게 자신의 차량에 동승할 것을 명령하였다. "슈프링어." 잠시 후 모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침울했고, 시선은 여전히 그들이 가야 할 눈 덮인 언덕을 향한 채였다.


"지휘관은 휘하의 장병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겨야만 해.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상황이 저들에게 너무도 가혹하군.”

- 1945년 1월, 아르덴 대공세 중



아르덴 대공세가 좆망하고 이제 패전의 기운이 역력하게 독일에 퍼졌을때 모델은 루르 공업지역 사수를 명받았으나 미군의 거대한 포위망인 루르 포켓 작전에


갇히고 루르 일대를 폭격하자


모델은 포위망 완성전에 이미 전차부대로 역습을 가해 미군 3기갑사단장을 전사시키고 탈출구를 확보했으나 히틀러의 후퇴불가 현지사수명령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고 루르 공업 지역에 갇히게되


모델은 모든 인맥을 동원해 후퇴의사를 다시한번 타진하지만 그때마다 거부되었고 예전 참모장이였던 한스 크렙스(영화 몰락에도 나옴)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거절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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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놓고선 히틀러가 '네로 명령' 즉 연합군의 손에 넘어갈빠에 루르의 산업시설을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전해지나


모델은 제국 군수장관 슈페어와 협력해 이명령을 따르지않고 전투 손실을 최소화 하며 독일 산업 지대 7할을 차지하고 있던 루르 지방을 지켜


그런 모델에게 미군의 리지웨이 소장이 개인적인 소한을 보내어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명장 '로버트 리'의 예를 들며 항복을 권고하였어


'로버트 리'의 예를 들며 항복을 권고한거면 정말 엄청난 대우를 해준거야


모델은 서한을 손에쥔채 참모장인 카를 바게너에게 질문하였어


"우리는 역사의 빛 앞에서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일을 모두 한 걸까?" 바게너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모델은 이렇게 덧붙였다. "패배한 사령관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난처한 침묵이 이어졌고 모델은 스스로 답했다.


"고대의 패장들은 독을 마셨다."



카를 바게너는 리지웨이 소장에게 직접 찾아가 모델이 항복을 거절하는 내용을 구두로 전달한뒤 그자리에서 항복했어 


이날 모델은 자신의 참모진을 전원 해산시켜 


같은 날인 4월15일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아래 훈련도 못받은채 총을 손에 쥔 유소년과 노년의 부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증을 발부하고 "귀관들은 의무를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이 서류는 합법적인 것이니 만일 탈주병으로 체포되거나 미군의 포로가 되거든 제시하도록 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라는 최후의 명령을 남기고 제대증을 발부받지 못한 장병들에겐 보급 물자가 소진된 4월18일 모두 항복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려


그리고 이날 루르 전역의 전투는 종결되고 미군에 항복한 포로는 32만명에 가까웠어


이후 모델은 탈출을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만난 발터 막시이너 하사와 어린 병사들이 고위 장성과의 갑작스러운 대면에 놀라자

모델은 병사들의 이름, 고향, 군 경력을 일일이 물어보며 '집으로 돌아가게. 우리들의 전쟁은 끝났어.'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귀로에 행운을 비네. 독일의 미래는 자네들에게 달렸어.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훌륭한 청년이 되어달라고 전해주게'라고 말했다고 막사이너 하사는 기록하였어 


적어도 이 순간의 모델 원수는 전선에서 직접 장병들을 지휘하고 독려하던 평소의 모습을 회복하였다고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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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반드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며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무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다."

- 발터 모델 원수, 1944년 서부전선



4월 20일 밤, 뒤스부르크 인근 라팅엔숲에서 모델은 해산 명령을 거부한 채 동행한 참모들과 국방군 라디오 채널에서 송출하는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기념한 선전 장관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있었어


괴벨스는 서부 전선의 독일군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상황에서도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비밀 신병기가 최후의 승리와 독일의 황금기를 가져올 것을 부르짖었고


영미 연합군에 항복하는 민간인들을 비판하며 '루르의 배신자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비난을 퍼부었어(당시 루르 전역의 독일군 간부들이였다면 정말 대성통곡 했을듯)


그 어이없는 내용에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모델이 침묵을 깼다.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


참모들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지 왜냐하면 가족들과도 전쟁 정치에 관한 대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 휘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할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하였던 모델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게 이번이 처음이였기 때문이야


다음날 아침  모델은 빈리히 베어 소령을 긴히 불러 함께 오솔길을 걸으며 친필 편지와 결혼반지 소지품이 담긴 봉투를 건네었어

'귀관의 실력과 경험이면 해낼 수 있을 테니 이것을 자신의 아내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에 모델의 그러한 최후를 원치 않은 베어는 함께 살아남을 것을 간청하였고 몇 분의 침묵 끝에 모델은 이렇게 말하였어

"베어,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군. 육군 원수로서 조국에 승리를 가져올 수도 없었고 수백 수천이 넘는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내가 이 숲 밖으로 걸어 나가 몽고메리, 혹은 미군 앞에 서서 ‘내가 모델 원수다, 항복하겠다.’라며 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다시금 베어는 포위망에서 탈출할 희망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설득하였고 모델은 신중하게 최악의 결말을 대비하는 거라고 대답했어


오솔길 밖으로 나와 일행들과 합류한 뒤 베어는 식량을 구하고 탈출 루트를 모색하기 위해 뒤스부르크 방면으로 정찰에 나서겠다고 제안하였고 모델은 이를 허락했어(뭔가 불길하지?)


정오 무렵 귀환한 빈리히 베어에게 필링 대령과 미하엘 중령이 모델 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려주었어

아들인 한스게오르크 모델(Hansgeorg Model)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사관후보생으로 동부 전선에서 전투 중 지휘관인 만토이펠이 아버지의 최후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종전 당시엔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후일 서독 연방군에 입대 그가 집필한 교범이 오늘날에도 미국 공군의 훈련 교리로 사용될 만큼 탁월한 전문성을 인정 받았으며 준장으로 7기계화여단장 연방군 정보본부장까지 올라갔어(역시 피는 어디 가질않는구나)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군 독일 국방군, 서독 연방군에 이르기까지의 장군참모 역사와 인명록을 집대성 하여 연방군의 기틀을 다졌다. 이는 독일 연방군 시대에 이른 현재에도 꾸준히 갱신되어 출간되고 있어

현재의 웬만한 독일군 장성의 약력출처는 모델의 아들이 집대성한 저서에 기초를 하고있어 아버지 모델의 인맥이 ㅆㅅㅌㅊ했던게 아들에게도 많은 영향이 있었나봐


1955년 7월, 한스게오르크는 빈리히 베어의 도움을 받아 사망 장소에 가매장되었던 아버지 모델 원수의 유해를 휘르트겐 숲 인근 독일 군인 묘지에 이장했어

마켓 가든 작전 , 휘트르겐 숲 전투 아르덴 대공세에서 자신의 지휘를 받았던 부하들과 사후 1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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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총통의 소방수라고 별명을 얻은 그는 결국 마지막에 루르의 배신자들이라는 기가막히는 비난을 받고 치욕을 당해



정말 시대를 잘못탄 장군이라고 밖에 평가할수가 없어


당시 독일군이 그렇게 부르짖던 임무형 지휘체계 대신 명령형 지휘체계를 선호했고 무선 감청과 최대한의 정보수집을 기반으로 작전을 수립


현대전에 가장 부합하는 지휘관의 모습도 보여줘


특히 1차대전당시 파상공세로 끔찍한 인명피해를 경험했기 때문에 휘하 장교가 제출한 작전과정에 구체적인 전술계획없이 그냥 파상공세로 땜빵하려고 했다면


읽다말고 그자리에서 작성자 면상에 집어던졌다고해


또한 평민집안 출신 답게 평민 출신의 참모들과 장병들에게 살갑게 대해주었고 개인적인 이야기 고향에 대한 가족의 그리움을 전부 들어주는 


모델을 무척이나 친근하게 여기고 존경했어 어떻게보면 행보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거지


그러나 보고가 잘못되거나 머뭇거리거나 늦어지면 폭언으로 엄청난 비난을 들었어야 했어 모델의 화법이 엄청난 직설 속사포 화법이라 ㅆㅅㅌㅊ는 멘탈공격이였을거야


1차세계대전당시 참호전의 지옥속에서 갈고닦은 모델의 직설 화법은 히틀러 앞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여 


1942년 1월 20일, 9군 사령관 취임 딱 5일 째였던 모델은 중부집단군의 증원 부대가 총통이 주관하는 다른 작전에 예비대로 투입되어야 한다는 중부집단군 참모장의 연락을 받자마자 


눈보라가 몰아치는데도 파일럿에게 명령


러시아 하늘을 가로질러 동프로이센의 늑대굴에 도착하였고 갑자기 들이닥친 야전지휘관에게 놀란 히틀러가가 


재차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지만 발터 모델은 '9군에 르제프 방어를 명령한' 총통을 모노클 너머로 차갑게 바라보며 질문하였어

"총통 각하, 9군 사령관이 누구입니까. 당신입니까, 저입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책상 위에서 지도나 들여다보는 당신과 참모들보다는 전장에 있는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통보하는 일개 기갑대장의 발언에


한참동안 할 말을 잃은 히틀러는 결국 "좋아 모델,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 목숨을 걸어야 할 걸."이라며 모델의 지휘권을 존중하기로 해줘









이처럼 과감한 행동과 시대를 앞서나가는 전략적 식견을 가진 모델이 국내에 너무 묻혀있는게 아쉬워


지휘관의 면모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사단의 일개 보병에게까지 존경을 받는 지휘관을 찾기란 다시는 힘들꺼야


모델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을 오가며 ㅆㅅㅌㅊ는 성과를 올리고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일체 하지않은 진정한 군인의 모습이라고도 할수있어


그럼 모델 정보글은 여기까지 줄일게


잘읽어줫으면 좋겟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