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2일 내년 예산안에 대해 "특정 지역과 계층, 소수 기업에 성장의 기회와 성과가 집중되는 소수의 성장이 아니라 모든 지역과 《모든 국민들이 성장의 기회와 성과를 고르게 누리는 모두의 성장》으로 대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가진 202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K자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낡은 이분법적 논쟁에서 벗어나》 달라진 시대와 상황에 맞는 새로운 성장공식을 제시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더팩트, 李 "새로운 성장공식 제시해야…소수의 성장에서 모두의 성장으로")
이재명의 오늘 발언은 거의 30여년 째 반복된 패턴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기가 지역에서 ‘地主’이면서 ‘하늘 天’이고 자기 중심의 대동을 이루는 상태로, 모두가 그 상태를 생각할 때, 모두가 자기 기준의 규칙 설정하되, 남의 기준은 듣지를 않고 외면하는 상태를 말한다.
사실은 ‘모두’란 말은 이미 30여년 반복된 패턴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뻔해진다. ‘씨족습속이 얽혀진 천지만물을 이해했다는 주관적 장광설’에서 지배파벌 씨족에 맞는 것만, 여기 저기서 뽑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군주는 군주와 ‘당파색깔’이 맞는 것만 취합하고, ‘모두’라고 말하는 것은 조선 후기의 상식이었다.
여기서, 이재명 발언에 충격적인 게 있다. K자 경제의 근본 발생원인은 결국 ‘부채를 통한 자본시장 확장’에 기반한 성장 모델이, 근로를 통한 급여소득보다 앞서는 상태에서 기인한다. 이제, 원불교나 증산교 같은 호남 동학신앙에 깔린 호남유교 사상의 대동세상 모델로, 영어권 보수와 진보의 경제원론에 대하여, 공식적 멘트로 “엿먹어, 엿장수 맘대로 할꺼야” 선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부채 기반한 자본시장 확장을 세게 한 나라다. 이제 버블 터질 때 되니, 경제이론 벗어나겠다?
성리학적 음양이론을 관통하는 군자의 도를 우상화하는 씨족 밖을 넘어서는, 그냥 순수한 엿장수 맘대로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재명의 경제이론 엿먹어 하는 사고관은, 이미 조갑제기자에게서 모든 형태의 서양인문학의 약속 규칙 엿먹어, 인보길 선생에게서나 영화 [건국전쟁]에서, 법치주의 이면의 계약국가관 엿먹어! 로 나타난다. 조선후기의 선비들은 서너너덧명 만족시키는 자기들끼리의 세계를 세우고, 그 중심으로 온 천하가 제어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무질서와 시스템 붕괴였다.
질문자는 한동훈이나 오세훈 지지층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장동혁 지지층에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다. 장동혁 지지층도 역시 이 무질서의 탁류에서 못지 않다. 이분들은 씨족에서 군사정권 때 가장 절정의 순간을 누린 모양이다. 모든 국민이 그 청와대 왕궁 궁물 먹었느냐? 중립적으로 말하라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왜냐하면, 중국경전의 ‘사도덕’세상에서 중립언어는 뜨겁게 이분들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이 무질서의 탁류는 한국교회도 관통했다. 도대체, 교리나 계명의 위반문제를 따져본지 아득하다. 군사독재 때 왕 중심주의에 훼절했던 기억을 기억하는 세대에는, 조선후기 붕당주의에 덧입히는 훼절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이해한다.
이 맥락에 한국판 woke 언어가 있다. 국제사회에서 ‘비판적 인종주의’를 입고서 건국반대 남로당 민족주의가 한미동맹파를 진멸하고, 그 연장선에서 영어권 진보의 네트워크에 재벌이익 볼 때까지에 멈춘다. 쌍방에 의미있게 통한다는 그런 실체가 없다.
군사정권은 ‘청와대’만 불신지대로 나타났으나, 지금은 모든 영역에서 동학 세계관 가는 곳에, 그들끼리의 엿장수 맘대로와 벽이 생긴다. 정부마저도 공식적으로 시장경제 원론 탈출 선언을 했다.
사실, 80년대 후반 이후에 이재명의 오늘 발언 패턴은 꾸준히 발견된다. 후천개벽 사유로 자기들의 씨족이 세우지 않은 모든 것을 엎어버리고, 자기들 중심으로 하겠다. 이런 원색적 권력주의를 어떻게 믿나?
일부 ai는 영어권도 방대한 이성적 사고의 미달층이 있다고 반론하려 한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조선후기 성리학 붕당론 생활 습속 그대로, 거기에 서양용어만 붙인 경우다. 여기서, 이게 민족정서니까, 양반 족보 없는 일반인은 이런 무질서를 참아야 할까? 지금 지배층은 군사독재의 왕 중심봉건주의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엎으며 자유민주주의 한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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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민족정서’를 그런 식으로 본질화해서, 기득권이 아닌 국민에게 “혼란을 감수하고 잔소리 말라”고 강요할 이유는 없습니다.
1. ‘민족정서’는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말씀하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식의 씨족·파벌 중심 사고, 자기 기준의 규칙을 절대화하면서 타자의 기준을 외면하는 습속은 분명히 조선 후기 붕당정치와 성리학적 군자·대동 담론에서 강하게 나타났고, 오늘날에도 정치·언론·종교·지역 네트워크에서 변형되어 반복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문화적 잔존이 법치와 비인격적 시장 규칙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민족정서’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과도합니다. 한국 사회에는 동시에
- 계약과 규칙을 중시하는 시민적 태도,
- 기업·관료제·사법제도를 통한 비인격적 조정 경험,
- 민주화 이후 축적된 제도적 견제 장치
도 존재합니다. 한국이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시장경제 성장과 민주화, 법치 제도화를 이룬 사실 자체가 그 반증입니다. “씨족주의 때문에 법치·시장경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결정론은 역사적 성과와 맞지 않습니다.
2. 이재명 대통령의 “모두의 성장” 발언에 대하여
인용하신 시정연설의 핵심 프레임(“소수의 성장 → 모두의 성장”, “성장이냐 분배냐의 낡은 이분법 탈피”)은 한국 정치에서 30년 가까이 반복된 레토릭입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집권세력이 자주 사용하는 “포용적 성장”, “균형 발전”, “양극화 해소”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담론이
- 부채 기반 자산가격 상승에 의존한 성장 모델의 한계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인지,
- 아니면 특정 파벌·지지기반에 유리한 자원 배분을 “모두”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인지
는 별개의 실증·정책 문제입니다. 후자에 가깝다면, 말씀하신 “군주와 당파색이 맞는 것만 취합하고 ‘모두’라고 말하는” 패턴과 겹치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어권 경제원론에 대한 공식적인 엿먹어 선언”이나 “성리학적 음양론의 원색적 권력주의”로 바로 환원하는 것은 해석의 비약입니다. 비슷한 포용 성장 담론은 서구 진보·보수 양측에서도 나타납니다(inclusive growth, stakeholder capitalism 등).
K자형 양극화의 원인으로 지적하신 “부채를 통한 자본시장 확장”이 근로소득을 앞지르는 구조는 한국만이 아니라 많은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이를 단순히 “호남 동학·유교 대동 모델로의 회귀”로 설명하는 것은 과도한 문화결정론입니다.
3. “혼란을 감수하라”는 주장에 대한 답
질문의 핵심에 대한 직접적인 답입니다.
아닙니다.
- 민주주의와 법치의 핵심은 “지배층이 자기들끼리의 질서를 세우고 나머지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규칙의 보편성과 권력에 대한 견제입니다.
- 시민이 혼란과 무질서를 목격했을 때 “잔소리 말고 감수하라”는 태도는 오히려 씨족·파벌 중심 질서를 강화합니다. 비판과 감시, 제도적 견제, 선거를 통한 교체가 작동하지 않으면 말씀하신 “엿장수 맘대로”가 더 심해집니다.
- 군사정권 시기의 “왕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약속했던 세력이, 이후 다른 형태의 파벌적·네트워크 중심 운영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한 쪽의 씨족주의를 비판하면서 다른 쪽의 씨족주의를 면책하는 것은 일관되지 않습니다.
한동훈·오세훈 지지층이든, 장동혁 지지층이든, 이재명 지지층이든, “자기들끼리의 세계”를 절대화하고 보편 규칙을 도구화하는 경향이 나타나면 같은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이 맞습니다. “중립 언어가 사도덕 세상에선 안 통한다”는 지적도 일부 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 규칙과 사실 기반 논쟁을 포기하면 남는 것은 더 강한 파벌 대결뿐입니다.
정리
- 한국 정치·사회의 씨족·파벌·네트워크 중심 습속은 실재하며, 법치와 시장경제의 비인격적 작동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 그러나 그것을 “민족정서의 본질”로 고정하고, 일반 국민에게 혼란을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 시민의 역할은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의 보편성과 권력에 대한 견제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작동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말씀하신 “무질서의 탁류”다.
특정 정치인이나 진영의 옹호/비난이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제약하는 방향이 강화되느냐, 사람이 제도를 파벌적으로 도구화하느냐의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생산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