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노직은 분명 적극적 해악과 비적극적 기여를 구분함. 
적극적 해악은 쉽게 말해 남에게 고의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위임. 이런 행위에는 도덕적 비난이 가해져야 하고 비적극적 기여는 그 사람이 어찌하든 자유라고 했는데, 이 원리는 사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고 주창한 자유론에까지 올라갈 정도로 계보가 깊음.

여기서 싱어는 한 발 더 나아감. 그는 물에 빠진 아이의 유비에 기댄 구호-기부 논증으로 비적극적 기여또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의무의 위반)이 된다고 했던 것 같음. 우리가 적은 비용(물에 젖음.)으로 타인에게로의 상당한 해악(아이의 익사.)를 막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 의무라고 한 것인데, 여기서 좀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출발하는 것 같음.

참 쉽지 않은 이야기임. 나에게로 남은 것이 정신적 외상과 적절한 양육환경에서 자라지 못함인데, 난 정말 남은 상상도 못할 고통을 받았음.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지금조차 치가 떨림. 본인의 모친은 사실 좀 '멍청한 편'이기에, 이 유전자는 부친에게 기인했을 것임. 그렇다면 부친또한 나처럼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고, 그 가능성이 자신의 불운으로 거세당했던 것일 뿐임. 여기까진 이해가 됨. 다만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제일 큰 문제는, 어째서 그는 왜 나의 가능성 또한 거세하려고 들었던 것이냐는 것임. 

학대에 노출돼 꽃피울 시기를 잃어버린 지적인 가능성.
불균형한 영양상태로인한 비가역적인 신체상태와 여러 질병.

본인은 이 상황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자 했으나, 정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음.
적절한 격리가 적절한 시기에 계속 이루어졌다면, 결국 지금의 상황에서 보듯 내가 인생에서의 중요한 시기를 버리거나 또다른 정신적 외상을 겪었을 가능성 또한 차단되었지도 모름.

물론 그 사람들도 그 사람들 나름의 인생이 있고, 내가 구호의 손길을 기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나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 . 앞서 다른 글에서 말했듯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임. 또한 싱어가 미리 단서를 단 것처럼, 그 비용이 적지 않더라면(본인의 익사도 담보한다든가.) 구호를 강요하는 것은 또다른 도덕적 폭력이 됨.

그래서 본인은, 부친을 넘어서 나를 외면했던 사람들과도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 같음.
학부생으로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한다든가, 나의 상당한 시간을 남을 위해 나누어 준다든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쉽게 마음을 열었던 것은 사실 이에 기반함.
나는 남을 위해 조건 없이 상당한 호의를 나누어줄 수 있는가?
그것이 적은 비용이 아닐지라도 그녀의 고통을 방지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의무인가?

결혼이라든지 깊게 이어지는 걸 원해서 결코 조건 없지는 않은 것 같지만....
내가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고통을 방지하는 것은 이제 나에게 있어서 의무임.

왜 이 사람과의 결혼을 바라는 건지도 알겠음. 나는 나의 또다른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고, 이는 적절한 유전자와 안정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과 아이를 낳고 적절한 양육을 제공하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임.

이렇게 생각을 많이하게 하는 이성과 알게된 것도 사실 인생에서 거의 처음이긴 한데.... 뭐 그렇다는거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