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80% 이상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할 정도로 우리국민 전체는 일본정부에 어느정도 협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취직시 불이익에 대한 우려, 유학 등 다양한 이유로 창씨개명했습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 다니고, 조선총독부에 취직하고 그럴려면 일본정부에 어느정도 협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계형 친일이죠.  기술자들 전부 친일파였던 세상이죠.

일본 정부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그속에 살아가면서, 조선인의 권리를 높여보고자 친일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광수, 윤치호 같은 사람이죠.

이광수는 민족주의자였으나, 일제시대 말기 전쟁참전 독려, 창씨개명을 했죠. 

선거참정권을 얻기 위해서죠, 피의 댓가로 조선인의 권리를 높여보고자 한 사람입니다. 

30년 이상 식민지 상황에서 언제 독립하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일본 식민지 상황에서 그속에서 조금이라도 조선인의 권리를 높여 살아가고자 방향을 잡은 것이죠. 

당시를 살아보지 않고, 지금의 시각으로 일본정부에 협조했다고 해서, 친일파로 몰아가고 돌을 던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생계형 친일자들은 해방 후 산업발전에 꼭 필요한 인력들이었죠. 안 그러면 산업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