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맨날 눈팅만 하던 게이야

정치적인 글이나 유머자료가 거의 주된 자료이긴 하지만

정보자료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길래 눈팅만 하다가 예전에 올렸던 자료 수정해서 올린당.

재미있게 봐주길 바래.


원래 공대학생인데 교양학점 하나 채울려고 사학과 전공 수업 들으면서 발표했던 내용 간략하게 정리한거당.

비 전공자니까 좀 틀린 내용이 있어도 너그럽게 봐주라. 그냥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상식 늘리는 차원에서 쓰는글이양



고등학교 때 기초적인 세계사 수업을 들었거나 로마인 이야기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로원이 주가 되었던 공화정과 황제가 주가 되었던 제정만 존재했다고 알고있을텐데


사실 공화정 이전에 로믈루스가 로마를 건국하면서 약 3백여년간 왕정이 존재하였고 


공화정과 절대군주정(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제정의 개념) 사이에 '원수정'이라는 특이한 정치체제가 존재하였어


그렇다면 이 '원수정'이라는 것은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절대군주정과는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원수정의 탄생 배경과 과정 그리고 의의에 대해서 다함께 알아boja



P.S 원래 황제라는 용어보다는 '원수'라는 칭호를 써야함이 옳지만 혼란을 방지하고자 황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


참고문헌

⓵ 아우구스투스 원수정에 대한 연구 (배은숙대구사학 42, 1991)

⓶ 티베리우스 황제 집권 초기 왕조 지배 이념 강조의 정치적 배경(안희돈역사교육 제108, 2008)

⓷ 로마 제정사 연구(허승일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⓸ 로마사 (프리츠 M. 하이켈하임세드릭 A.요 현대지성사 / 1999)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jpg

그림1.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출처: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 - 생각의 나무)



로마라는 나라가 도시국가에서 방대한 영토로 발돋움 하게 됨에 따라 공화정 체제에서의 로마에서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나타나



첫째로는 전쟁으로 배출된 몇몇 유능한 군 장군들의 군사독재로 인하여 로마 내의 공동체적 질서와 자유를 압도하였다는거야. 


물론 공화정 내에는 독재관 이라는 직책이 있었지만(예: 포에니 전쟁에서 독재관에 임명된 파비우스 막시무스) 비상시에만 인정되었고,


기간이 한정되어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지. 하지만 공화정 말기에 나타난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같은 군 지휘관들의 대두는


'공화정'이라는 기존의 질서를 크게 흔들어 놓았지


둘째로는 로마의 영토가 커진것을 이유로 들수 있어.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로마는 날이 갈수록 급속하게 국력이 팽창해


이러한 성장은 빠르고 발전된 행정 체제를 필요로 하지만 '공화정'이라는 정치제제는 명령보다는 합의체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가


당면한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하기에는 문제가 있었지. 특히 로마가 정복한 해외영토를 직접 지배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관료제의 발달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어.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로마에는 수많은 명장과 위인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로마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빼먹을 수 없을꺼야.


카이사르의 업적은 엄청나게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원로원의 수를 약 천명까지 늘린 카이사르의 행동은 원로원이라는 집단에 불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어


(한 귀족의 총애받던 노예가 자유를 얻고 귀족의 추천을 받아 원로원에 입성했다 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까)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집정관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선언하면서 카이사르로 인해 늘어난 원로원의 숫자를 2/3 으로까지 줄였고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하였지. 신기하지 않아? 아우구스투스 황제라고 불리우는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하였는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의 결전에서 승리한 후 명실상부한 로마의 제 1인자로 등극하였어. 


사회의 질서가 도깨비 방망이 마냥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새로운 질서를 위한 제도들이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급격한 변화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었던 상황이었어


또한 아직까지 로마에 남아있는 공화정 체제의 신봉자들과 원로원 의원 등 전통적 지배층의 지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황제라는 권력과 나란히 원로원이라는 구질서가 상당 부분 존속하여야 했지. 


그래서 표면적으로나마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해. 그에 보답하는 의미로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엄한 칭호를 부여해.



명실 상부한 1인자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조금씩 자신의 권한을 강화해.


첫째, 그는 속주에 관한 법(lex de provinviis)’를 통하여 제국 내 속주를 황제가 지배하는 속주와 원로원 관할 속주로 양분하였지.(그림1 참조) 


이는 대부분의 군단이 주둔하는 변방의 속주를 차지함으로써 제국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는 것이었어. 


전제 권력의 본질이 무력이라는 것으로 보았을 때 군대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황제의 권력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군대개편을 통하여 군인들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제공하여 군대의 충성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거야

.

둘째, 군대의 충성과 더불어 황제의 전제 권력에 필요한 한 가지는 바로 황실 재정 바로 MONEY라고 할수 있는데. 그림1에서 이집트 보이지? 


이곳은 황제속주이지만 좀 더 중요한 위치야. 당시 이집트에서는 질 좋은 밀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곳에서 나오는 돈은 


황실 금고로 들어가기 때문에 황실 재정을 튼튼하게 유지시켜 줄 수 있었어.  아무튼 이러한 Money의 확보는 뒤를 이은 황제들의 중대한 문제가 된다


군대 개편을 통한 직업 군인들의 전역비를 지불하기 위하여 군인 금고의 재원 확보뿐만이 아니라 전문 관료의 수를 늘려 가는데 드는 경비


로마 시의 무산다이쥬에게 일자리를 주거나 빵과 서커스를 제공해 줘야 하는 부담도 황제의 몫이 된거야.


말하자면 황제는 권력을 독점하게 된 동시에 지난 날 과두 지배자들이 수행하던 공공 봉사를 홀로 감당하게 해야 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지.




하지만 이러한 원수정에서 원로원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그래도 유지시켜놨는데 아무일도 안하고 탱자탱자 놀릴수는 없자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로원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목적과 과제들을 추구한 하나의 통합체였어. 제정 초기 원로원은 로마의 황제에게 많은 조언을 해줌으로써 


황제가 더 좋은 정치를 펼칠수 있도록 도와주었지


로마법상 최고 기구의 구성원으로서 원로원의 지지는 원수정 체제 속에서 국정의 원활한 운영과 황제권의 안정을 위하여 중요해. 그래서 원수정 기간의 황제들은 원로원의 승인을 받는 것을 꽤나 중요하게 여겼어(물론 안그런 황제들도 있었음, 절대군주정 시대에는 원로원 자체가 노짱따라 가버림)


로마 권력의 핵심이 황제에게 넘어감에 따라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조언을 하거나 투표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의지를 충실히 반영하는 일종의 거수기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원로원에서 공화적인 전통과 명분을 고수하던 


로마의 옛 명문가 출신들이 점차 사라짐에 따라 황제를 견제할 수단으로서의 원로원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원로원은 로마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주인은 로마인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제국을 통치하였어.




하지만 이러한 원수정도 결국에는 그 끝을 맞이하게 되


당시 로마에서는 황제의 권한과 권위가 공화정 시대의 방식으로 규정되고 있는 한, 그것의 자동 세습은 당시 로마에서는 불가능한 개념이었어.


(아들에게 자기마음대로 물려주는 것도 힘들었고,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음) 능력이 있다면 누구든지 황제가 될 수 있는 것이었지


다만 원수정 초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카리스마에 힘입어 혈통적인 세습이 가능하였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후에 오현제가 취한 양자 상속제와 원로원의 동의를 얻은 평화적인 제위 계승으로 원수 권력의 무력적인 본질인 군대가 크게 노출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오현제 이후의 군인황제 시기에는 이 같은 사태가 한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군사적 전제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상황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추구하였던 공화주의적 위장이 사실상 무의미 하였으므로


원수정은 2세기 말에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건 여기까지야.


원수정의 의의에 대해서까지 이야기 하려면 더 많은 내용이 필요하겠지만 더 썼다가는 미친놈 소리 들을것 같아서 이만 줄일께.


3줄요약:

1. 원수정은 공화정도 제정도 아닌 이상한 정치체제였다.

2.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카이사르는 엄청난 사람이다.

3. 원수정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더 필요하다.




이 아래부터는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인 내용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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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수정(元首政, Principatus): 1인자의 지위에 있는 프린켑스(princeps)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정치. 절대 군주제(Dominatus)와는 조금 다른, 원로원과의 이원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치체제. 프린키파투스라는 단어 대신에 일반적으로 번역되는 원수정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원수정에 대한 연구(배은숙, 대구사학 42, 1991)


2. 아우구스투스는 초기에 두 자리에 불과한 집정관직 중 하나를 독점함으로써 원로원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 기원전 23년 집정관직을 포기하는 대신 호민관의 권한을 부여받았고 이것은 자신의 지위를 합법화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권력의 토대가 군대라는 점을 감추어 줄 뿐만이 아니라 평민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이용하여 원로원 귀족 세력에 대한 압력 행사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로마 제정사 연구 (허승일 ,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3. 원로원은 군대가 상주하지 않는 안전하고 부유한 속주를 차지하고, 황제는 덜 풍요롭고 덜 안정된(가장 나중에 로마 영토로 편입된) 속주들을 관할하였다. 황제 관할의 속주는 속주 총독으로 무관이 임명되었으며 속주 통치와 더불어 속주 방위를 담당하였다.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이 파견한 총독이 징세권을 장악했기에 총독 임기 중 사복을 채우는 비리 등이 일어났지만 황제 재무관으로 인해 속주에서의 징세는 황제에게 속하고, 총독은 세금을 쓰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바뀌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밀은 황제 수입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기 때문에 황제는 부왕과 같은 황제 대리를 임명하여 통치와 징세와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지도로 보는 세계사 (조르주 뒤비, 생각의 나무, 2006)


4.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는 틀림없이 군주의 지위였으나 그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와 디오의 시대 모두의 표준적인 군주정의 모델을 제공한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세계와 파르티아 왕들의 지위와는 같지 않았다. 비록 실제로는 왕조적 고려들이 중요하긴 했지만,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계승자들은 왕조적 계승권에 의해 지배자가 된 것은 아니었고, 그들의 권력은 통치자의 어떤 절대 주권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권력은 전통적으로 로마의 합법적인 지위와 원천인 원로원과 민회에서 통과된 법률과 결의에 기초를 두었다" - 로마사 (프리츠 M. 하이켈하임, 세드릭 A./ 현대지성사 /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