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아버지는 서울 신당동에서 미곡 도매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 나이 서른셋에 젊은 아내와 어린 아이 넷을 남겨놓고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가장을 잃고 하루아침에 가난에 몰린 일가가 선택한 곳은 청계천 7가 판자촌. 그게 1968년이었다. 소년의 나이 열한 살 때였다. 일가는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청상(靑孀)이 된 어머니는 자식 넷을 먹여살리려 채석장 돌 나르기, 나물 행상 등 험한 일을 가리지 않았다. 몇 년 뒤 무허가 판자촌이 도시정비사업으로 헐리면서 일가는 철거민 신세가 된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 허허벌판. 소년의 일가는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뒤 소년은 장관이 되었다. 김동연 국무총리실장 얘기다.
김동연 국무총리실장은 인생극장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온화한 그의 얼굴에서는 도저히 청소년기의 불우를 읽어낼 수가 없다. 직접 만나 보면 귀공자 같은 분위기가 더 물씬 풍긴다. 고위공직자 특유의 뻐기거나 으스대는 태도 같은 것은 찾기가 힘들다.
■ 朴 대통령이 발탁한 배경
그는 인사권자인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껄끄러운 사람일 수 있다. 2012년 대선 전 여야가 앞다투어 보편적 무상복지를 내세울 때 그는 2차관으로서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반대했던 인물이다. 김 실장 본인이나 덕수상고 동문들은 ‘장관 승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그를 장관에 기용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스펙 초월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동연 실장은 바로 오로지 실력만으로 차관에 오른 인물이다. 박 대통령이 그를 발탁한 배경이다.
그는 1957년 충북 음성에 태를 묻었다. 아버지는 1960년대 초 솔가해 서울로 올라와 미곡상에 취직했다. 미곡상 서기를 거쳐 독립적인 미곡상을 차려 제법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아버지가 돌연 세상을 떴다.
(중간 생략)
정부의 정책은 결국 예산으로 표현된다. 그는 재정정책과 예산에서 경력을 쌓았다. 재정부 출입기자들은 그를 소신이 뚜렷하고 할 말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지난해 여야가 한창 경쟁적으로 0~2세 보육정책을 발표할 때였다. 그는 “재벌가 손자까지 정부가 보육비를 대주는 것은 문제있다”고 제동을 걸어 정치권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는 재원 문제에 앞서서 보육정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0~2세의 경우 많은 전문가들이 가정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행 지원체계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가정 양육을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보육료를 100%를 지원하다보니 ‘보육시설에 보내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으로 모든 영유아를 시설에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따라서 보육시설에 보낼 것인가, 가정양육으로 바꿀 것인지 현행 지원제도를 지속하는 것을 포함해 보육 지원체계를 재구조화하는 방향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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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사람 중에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며 왜곡된 생각을 키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균형된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예산과 정책을 다루는 공직자로서 그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요구’와 맞서왔다. 공직자로서 그의 신념은 ‘사회변화에 대한 기여’이다. 김동연 실장은 이 대목에 대해 솔직한 고백을 털어놓았다.
“나도 처음에는 원망스럽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열등감도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일찍 주저앉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은행원으로 편안한 생활에 만족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꿈을 키워 갔다. 은행에 다니면서는 대학생의 꿈을 키웠고, 대학에 다니면서는 고시 합격의 꿈을 키웠다. 공무원이 되어서는 유학을 꿈꿨다. 나는 언제나 자리가 아닌 다음 단계의 꿈을 키우며 살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