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는 기본적으로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대가정'을 추구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장제스의 정치를 '유교 파시즘'이란 독특한 형태로 풀이하기도 한다. 장제스의 정치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국민당의 일개 군관에서 유력 인물-지도자 워너비를 거쳐 최고 사령관에 이르렀다. 중산함 사건으로 쑨원의 측근이 되었고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과 쉬충즈 숙청을 담당하면서 국민당의 거물이 되었으며 중산함 사건으로 왕징웨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고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당시 중국의 정치란 것이 암살, 매수, 획략, 획책이 판을 치는 상황이었고 장제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일에 능했기 때문에 그가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장제스는 의회민주주의가 언젠가 중국에 도입돼야 함은 인정했지만 당대 중국의 상황에는 언감생심이라면서 도입을 거부했고[2]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을 추구한 쑨커나 다른 지식인과 충돌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지지자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좋아하다 못해 준파시스트화하여 여러 인권 문제를 일으켰다. 장제스를 위한 첩보/테러 조직 남의사는 백주 대낮에 반대파 암살이나 고문과 같은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고 CC단도 한 몫 했다. 중국의 강제수용소는 이미 국민당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국민당 치하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이런데 끌려와서 코렁탕을 먹고 있었다. 결국 국공내전에서 중국 지식인들은 대다수 공산당쪽으로 전형한다.

4.2. 반공

장제스의 정치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반공 성향인데 한가지 재밌는 것은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소, 용공 성향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이다.[3] 소련 고문인 보로딘은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장제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중산함 사건도 장제스가 국민당 내부 공산당원과 좌파들의 쿠데타를 선동하여 역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리고 상하이 쿠데타가 벌어지기 전까지도 완전한 반공을 보여주지 않다가 상하이 쿠데타로 완전히 공산당을 쓸어버리고 소련과 단교했다. 군벌들도 공산당을 싫어했기 때문에 장제스와 대립하던 왕징웨이도 펑위샹의 요구에 반공에 합의해야 해서 공산당은 난징 정부와 우한 정부에 모두 버림받는다. 이에 공산당원들은 발악적인 저항을 했지만 모두 진압된다. 애초에 장제스의 정책 자체가 자본주의 지상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그 당시 군벌들이 다 그러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의 적들과 손을 잡아 이용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던 사람이다. 장쉐량을 비롯한 만주 군벌들도 북벌 시절엔 적이었고 펑위샹, 옌시산과는 천하를 놓고 한번씩 다투어봤으며 리쭝런, 바이충시는 반란을 두번이나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룽윈, 천지탕 등의 지방 군벌들과도 이합집산과 반목을 반복했다. 그런데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깨기 전까지 일관되게 적대했던 것이 공산당이었다. 편하게 헤쳐, 모여가 가능한 군벌들과 공산당의 성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당이 군벌들에 우세한 점이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혁명사상인데 공산당은 국민당보다도 혁신적이라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이를 알기에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목을 매달았다. 단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에 집착한 것은 군벌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군벌군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중앙군을 지방에 박아 군벌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쓰촨, 윈난, 화북의 군벌들은 장제스하면 치를 떨게 되고 아예 공산당과 내통하여 태업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장쉐량의 시안 사건이다.

하지만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합작을 아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대장정 이후 공산당에 홍군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국민당에 다시 받아주겠다고 제안한 바도 있고 시안 사건으로 강요된 합작도 번복하진 않았다. 이미 반일감정이 너무 고조되어 합작을 거부했다간 국민당의 집권 기반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컸고 결국은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아 중일전쟁 이후 무리한 공세를 취하다가 망해버리지만.

5. 대인관계

5.1. 천치메이

장제스가 복종하고 존경했던 인물 1호

천치메이는 장제스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인물로 장제스의 형이자 사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장제스는 그를 위해서 그의 정적을 병원에서 쏘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를 맹렬히 추종했다. 천치메이도 장제스를 아꼈고 그에게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들과 인맥을 쌓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천치메이가 암살된 이후 장제스는 그야말로 한동안 폐인이 되어 상하이의 홍등가를 뒹굴고 다니면서 술과 여자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후 장제스는 천치메이의 조카들인 천리푸와 천궈푸를 최측근으로 삼아 총애했다.

5.2. 쑨원

http://img.secretchina.com/dat/media/21/2012/01/25/20120125093126620.jpg" style="cursor: pointer;" alt="" src="http://cdn.mirror.wiki/http://img.secretchina.com/dat/media/21/2012/01/25/20120125093126620.jpg">

[4]

장제스가 복종하고 존경했던 인물 2호

일각에선 쑨원과 장제스의 인연이 장제스의 일본 유학 시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장제스와 쑨원이 일본에서 만났다고 하기엔 정황이 맞지 않을 뿐더러 설사 만났다 하더라도 어쩌다 스친 정도이지 의미 있는 만남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장제스와 쑨원이 본격적인 인연은 장제스가 중산함 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쑨원을 구하면서다. 이전까지 장제스는 천중밍와 대립하던 처지라서 그와 연합하던 쑨원에게 크게 실망했었고 쑨원도 장제스에게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았으나 이 사건 이후로 자신의 측근으로 삼었다.

쑨원은 천치메이가 죽은 이후 장제스가 복종한 마지막 인물로 장제스는 거의 병적으로 쑨원의 신임을 갈구했다. 소련행을 자처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고자 했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왜 믿지 않냐고 거의 애원하기까지 했다. 장제스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들에 쑨원은 어린애를 타이르듯이 대처해야했다. 이후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을 맡는 등 국민당의 간부가 되었고 쑨원이 가장 믿는 심복 중 한명의 위치에까지 오르지만 우리나라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쑨원의 정치적 후계자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후 쑨원이 죽은 이후 장제스는 쑨원의 처제인 쑹메이링과 결혼하는 등 자신과 쑨원의 연계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자신이 쑨원의 후계자인것처럼 행동하긴 하였다.

5.3. 왕징웨이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9/Wang_Jingwei_and_Chiang_Kai-shek.jpg" style="cursor: pointer;" alt="" src="http://cdn.mirror.wiki/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9/Wang_Jingwei_and_Chiang_Kai-shek.jpg">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1

어제의 동지에서 오늘의 원수로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놀라겠지만 원래 장제스는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와 더불어 국민당의 좌익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쑨원 사후 한동안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제스를 왕징웨이의 사람으로 보았다. 이후 국민당 보수파인 쉬충즈와 후한민이 쑨원의 비서이자 국민당의 대표적 좌익인 랴오중카이를 암살하자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함께 후한민과 쉬충즈를 모두 숙청하였다. 매우 돈독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둘의 사이는 조금씩 틀어졌다. 이것이 1차로 폭발한 것이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자신을 납치하려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선다는 구실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소련 고문들과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다가 다시 풀어주었는데 이것으로 사람들은 장제스가 좌익도 아니고 왕징웨이 똘마니도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기 인식하게 된다. 사실상 이때부터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자신의 위협적인 라이벌로 인식하게 되었지만 북벌 때문에 두 사람은 일단은 협력관계였다. 하지만 장제스가 우한과 상하이를 잇달아 점령한 이후 발생한 신수도 논쟁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고 반대파들에 의한 자신의 실각을 병적으로 겁내던 장제스는 자신에 위협적인 소련 고문 보로딘의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군사독재자와 폭군의 등장을 용납할 수 없다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부여된 초법적인 사령관 특권을 회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때 장제스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고 결국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게 된다. 상하이 쿠데타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일단은 장제스에 협조하던 왕징웨이는 당연히 경악했고 우한 정부를 세워 장제스의 난징 정부와 대립했다. 군벌 장쭤린의 공격으로 둘은 다시 일시적으로 협력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고 왕징웨이는 펑위샹과 동맹을 맺어 장제스에 대응하려 했지만 펑위샹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결국 왕징웨이는 난징 정부에 합류하지만 둘의 대립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순간까지 계속 되었다.[5]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왕징웨이는 중국이 사는 길은 일본에 협력하는 것 뿐이라 굳게 믿고 일본에 붙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질렀다. 결국 그는 혁명가에서 한간으로 추락했고 이후 장제스는 옛 동지의 무덤을 폭파시키는 것으로 배신자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

5.4. 후한민

5.5.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과 장제스가 뭔 관계가 있는가 싶겠지만 사실 둘의 커넥션은 장제스가 20년대에 소련행을 가던 때부터 시작된다. 이때 장제스는 스탈린 대신에 트로츠키를 만나긴 했지만 국민당과 소련의 협력관계의 초석을 다졌고 이후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이 커넥션은 유지되었다. 친소파로 인식되던 장제스에게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보내주기도 했다. 스탈린은 한동안 공산당에 국민당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며 장제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며 여러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상하이 쿠데타 이후 스탈린은 돌연 노선을 바꾸어 국민당 내부 반혁명분자들을 숙청하고 공산당 자체 무력을 갖추고 국민당을 장악할 것을 지시하여 왕징웨이-공산당 합작까지 깨고 만다. 한동안 소련과 국민당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국민당을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악취가 가시지 않은 화장실같은 곳이라고 디스해댔으며 스탈린은 장제스를 '즙을 모두 짜낸 레몬'이라고 불렀다. 어찌 마오쩌둥을 마가린 공산주의자라고 부른게 생각난다. 음식 비유를 좋아하시는 강철의 대원수? 하지만 몇년 되지 않아 둘의 관계는 회복되었고[6] 우호관계는 유지되었으며 국공내전으로 장제스가 쫓겨나는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마오쩌둥보다는 장제스의 편에 가까웠다. 뭐 쫓겨난 이후에는 소 닭보는 사이(일단 적대이긴 해도)가 되지만.

5.6. 조지프 스틸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b/Chiang_Kai_Shek_and_wife_with_Lieutenant_General_Stilwell.jpg" style="cursor: pointer;" alt="" src="http://cdn.mirror.wiki/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b/Chiang_Kai_Shek_and_wife_with_Lieutenant_General_Stilwell.jpg">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2

장제스, 쑹메이링, 스틸웰. 사진에선 웃고 있지만 실제로 장제스와 스틸웰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장제스와 미국에서 파견한 군사고문이자 버마-중국 전역 연합국 총참모장[7]인 스틸웰 대장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일단 스틸웰은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8] 서로가 독선주의적 성격인탓에 장제스와 의견 충돌이 잦았다.

혹자는 스틸웰이 군인치고는 어학에 상당히 소질이 있어서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했고, 특히 중국어에도 능통했는데 (당시 중국어를 배우기도 힘들었고, 서양인이 한자를 배운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보자), 만약에 인종차별주의자라면 이게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건 편견일뿐이다. 예를 들어 근대 중국사에 대한 연구의 시발점을 닦은 존.K 페어뱅크만 해도 중국에 오랫동안 체류했었지만 그는 근대 중국사를 서양의 충격으로 정체된 중국이 움직였다.는 서술을 고수했으며 심지어 그의 주장이 1970년대부터 부분적으로 비판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은퇴할때까지 그러한 방식을 고수하였다. 좀 더 가까운 사례를 들으면 말끝마다 한국을 까대는 구로다 가쓰히로도 한국말에 매우 능통한 인물이다. 인종차별주의자라면 외국어를 못 배울 것이란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중국말 할줄 아니까 스틸웰이 일기장과 기자들 앞에서 뱉은 수많은 인종적 편견들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려는 것 자체가 매우 황당한 발상이다. 중국어를 공부하느냐 마느냐와 동양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며 그건 그가 10년동안 중국에 체류한걸 감안해보면 대단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특기할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이걸 변호하기 위해서 스틸웰이 1920~30년대 미국 장성들 중에서도 근무고과가 가장 높았던 장성으로서, 노르망디 때 아이젠하워와 함께 유럽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고려될 정도라는 왜곡까지 하는데 애초에 이론적 점수가 높은것과 실전에서 유능한건 별개의 영역이며 스틸웰의 총참모장 해임이 1944년 10월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1944년 6월이라는것만 감안해보아도 이게 얼마나 근거없는 낭설인지는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스틸웰도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완고하고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에 (사관학교 교관 당시 스틸웰은 생도들에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신랄한 조 vinegar Joe"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 장제스와 번번히 의견충돌을 빚었다. 이렇게 양측이 계속 반발하다가 1944년 이치고 작전에서 중국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군수물자와 전략예비대인 Y군의 파병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그 책임을 장제스에게 떠넘기면서 양측의 관계는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후 스틸웰은 피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전 중국군의 지휘권을 요구하였고 이에 분노가 폭발한 장제스는 미국 정부에 스틸웰을 선택할것이냐, 중국을 선택할것이냐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결국 스틸웰은 해임되었고 이후 오키니와에서 근무하다가 지병인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한편 이전 버전에는 스틸웰이 유능한 장군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건 그의 버마 원정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파멸적인지 고려하지않은 무책임한 발언이다. 1942년의 버마 수비전에서는 10만의 병력중 75%의 병력과 대부분의 장비를 상실했으며 사단장을 포위한 고위 장교들마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음에도 본인은 자신의 주둔지가 함락되기전에 임팔로 직무유기[9][10]에 가까운 도피를 시작했고 (자신이 작전을 짠 주제에) 그 책임을 중국군에게 떠넘겼다. 이를 두고 이게 다 무능한 중국군 탓이라고 중국군 탓을 하는 자들도 보이는데 이 10만명은 중국군 중에서도 정예였고 중국에서 중국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을 때는 한번도 이런 궤멸적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중국군과 싸운 영국군들은 중국군을 매우 노련한 베테랑이라고 칭송했고 쑨리런 장군은 수만명에 달하는 영국, 인도군과 많은 민간인들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고 스틸웰도 쑨리런 만은 동양의 롬멜이라고 칭찬했다. 게다가 이후에는 중국군을 훈련시킨다는 명목으로 50만의 중국군을 인도로 이동시켜 반격작전에 차질을 빚게 만들었고 원조 물자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중국 주재 미 육군항공대와 중국군에게 가는 물자를 거의 차단했으며 클레어 셔놀트는 루즈벨트 대통령앞까지 가서 원조물자를 구걸해야했다. 이후 1944년 버마 탈환전에서는 일본군에 대한 정찰 부실, 영국군과의 비협조로 엄청난 손실을 입어가면서 전진했는데 이를 보고 <중일전쟁(1928-1945)>의 저자인 권성욱은 "스틸웰은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채 오히려 분열과 불화만 조장할 뿐이었다."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기까지했다. 이 동안 중국 본토는 대륙타통작전으로 완전히 황폐화되었고 그가 버마 탈환의 명분으로 내세운 버마 공로의 재개통도 1945년 1월이라는걸 감안해보면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셈이었다. 즉 그는 오히려 중국에 민폐(...)만 끼쳤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바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것이다.

애초에 스틸웰이 왜 중국에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스틸웰의 중국 부임은 스틸웰이 유능한 장군이라서가 아니라 중국말 잘한다는 이유로 중미 우호관계를 상징하기 위해 보낸 얼굴마담이었다. 그는 대규모 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은 없었고 처음으로 대규모 전선을 지휘해보자 자신의 능력 밖의 황당한 지시만 내렸다. 그리고 스틸웰의 임무는 중미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미국에 국민당은 멍청하며 공산당 잡을 생각만 하고 비겁하다고 이간질만 하였으며 전략적으로도 일본군 공세를 앞두고 중국군 예비대와 정예부대를 빼내서 자신의 개인명예를 위해 소모시키는 5열스러운 행동만 반복했다. 게다가 그는 대규모 병력을 이용한 야전에서의 승부를 노래불렀고 장제스의 지연전,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을 미개하다고 비웃었는데 정작 그는 버마에서 자신이 그리 좋아하던 야전을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깨지고 남탓만 했다. 그는 단적으로 명장은 커녕 범장도 못되는 졸장이었다. 오죽하면 연합군의 무타구치 렌야란 말이 나온다. 역덕들이 스틸웰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가는 이유가 다 있다.

5.7. 마오쩌둥

http://history.people.com.cn/NMediaFile/2012/0806/MAIN201208061017000515949236273.jpg" style="cursor: pointer;" alt="" src="http://cdn.mirror.wiki/http://history.people.com.cn/NMediaFile/2012/0806/MAIN201208061017000515949236273.jpg">

역사에 길이 남을 숙적 관계.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3

유방 vs 항우, 조조 vs 유비, 주원장 vs 진우량에 못지 않을 역사적 라이벌 중의 하나다.

장제스는 평생 마오쩌둥을 잡아 죽이거나 국민당의 밑에 복종시키려 했고 한번도 그를 믿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총말곤 겨눠본게 없는 이런 악연도 참 드물 것이다. 물론 찾자면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이 국민당에서 활동하여 잠시 협력관계를 가진 것이 있긴 하지만 둘의 커넥션이 없었으니 큰 의미는 없다고 할밖에...

둘은 중일전쟁 후에 딱 한번 만난적이 있다. 이는 미국의 중재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평화협상을 위헤 만난 것이었는데, 마오쩌둥은 큰 위험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측이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장제스가 있던 충칭으로 왔다. 이를 현대판 "홍문지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마오쩌둥은 충칭에 도착하자마자 마음에도 없는 "장위원장(장제스를 지칭) 만세"를 삼창하고, 기자들에게는 자신은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제스를 존경하며 그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천명. 그리하여 국공 양당의 휴전 합의를 이뤄내기도 하다. 하지만, 장제스가 먼저 "공산당이 협정을 어기고 있다"는 구실로 이를 파기하고 공산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제2차 국공내전으로 발전한다.

http://www.athensacademy.net/teachers/bsensing/WHH/14-%20Mao%20Zedong%20and%20Jiang%20Jieshi%20%28Chiang%20Kai-shek%29%20toast%20each%20other%20during%20the%20Double%20Ten%20Accord%20negotiations%20in%20September%201945.jpg" style="cursor: pointer;" alt="" src="http://cdn.mirror.wiki/http://www.athensacademy.net/teachers/bsensing/WHH/14-%20Mao%20Zedong%20and%20Jiang%20Jieshi%20%28Chiang%20Kai-shek%29%20toast%20each%20other%20during%20the%20Double%20Ten%20Accord%20negotiations%20in%20September%201945.jpg">

중일전쟁 직후인 1945년 9월 충칭으로 온 마오쩌둥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마오와 건배하는 장제스.

사실 마오쩌둥은 첫아내를 장제스의 손에 잃었기 때문에, 장제스를 좋게 볼수가 없었다.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이후 국공합작이 붕괴되면서 공산당원의 숙청을 시작했고, 초공전에 패한 후 분풀이였는지 게릴라전을 펼치던 마오쩌둥과 떨어져 지내던 첫아내 양카이후이(양개혜)를 찾아내 처형했다. [11] 그때 징강산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던 마오쩌둥이 다른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다는 것은 함정. 마오쩌둥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양카이후이가 유일했던 것을 보이며 (양카이후이의 처형소식을 들었을 때 통곡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그녀를 기리는 시를 짓고 정권을 잡은 후에도, 국가적으로 그녀를 추모하는 사업을 벌였다. 마오쩌둥의 그 이후로도 결혼을 두번 더 하지만, 다른 아내들은 양카이후이 만큼의 애정을 받지 못했다. (문혁기간중에 설친 장칭의 경우 1945년 이후로는 거의 별거상태였다.)

5.8. 저우언라이

http://res.news.ifeng.com/attachments/2011/01/05/4e5dc56186c6f0bc8e4ae35e5bade2b1.jpg" style="cursor: pointer;" alt="" src="http://cdn.mirror.wiki/http://res.news.ifeng.com/attachments/2011/01/05/4e5dc56186c6f0bc8e4ae35e5bade2b1.jpg">[12]

한때의 친밀한 동료였던 각별한 적

원래 저우언라이와 장제스의 인연은 저우언라이-마오쩌둥 인연보다도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제스가 황푸군관학교 교장이었을 때 저우언라이는 학교 정치주임이었다. 정치주임은 한마디로 말해서 학교에 배치된 정치장교였다. 둘은 매일 같이 아침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친했다고 저우언라이가 후에 밝힌 바 있다.

이때는 저우언라이가 공산당 뿐만 아니라 국민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 소속 정치장교로서 국민당의 이념인 삼민주의를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국민당 일을 하면서도 장제스 모르게 비밀리에 학생들을 포섭하여 공산당원을 모집하여 학교내에 공산당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중 가장 유명한 이가 린뱌오. 여담이지만 장제스의 제자였던 린뱌오는 제2차 국공내전에 국민당군에게 만주방면에서 참패(요심전역)를 안겨주었고, 이 한판으로 국민당에 유리했던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뒤집혀 장제스는 대만으로 쫓겨갔다. 장제스로는 호랑이 새끼를 키운판.

어쨌든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각별히 여겨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장제스의 반공 성향을 눈치챈 저우언라이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둘이 틀어지게 된 계기는 중산함 사건 (이 사건은 국민당 측과 공산당 측의 주장이 다르다. 서로 상대방의 음모라고 주장.)인데 장제스의 반공성향에 저우언라이는 장제스 곁을 떠나게 된다. 이후 둘은 장제스가 북벌 과정에서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노동자 세력의 거물로 장제스에게 상하이의 노동자들의 권익에 대해 협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저우언라이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군에게 한번 사로잡히는데 장제스는 옛 정을 생각해서 그를 놓아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실수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혹은 체포되지 않고 마오쩌둥의 해방구로 도피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옆에서 보좌하게 되었고 공산당 영도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둘이 다시 만난 것은 시안 사건 때로 장제스는 협상을 하기 위해 나타난 저우언라이를 보고 반가워하면서 우린 적이지만 자네를 잊은 적이 없네, 언젠가 우리 둘이 다시 일할 날이 오길 바라겠네. 라고 말하였다.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저우언라이는 충칭에 거주하면서 장제스가 자주 회동했지만 국공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고 결국 둘은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으로 장제스는 결국 대만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만 있었다면 대륙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5.9. 장쉐량

장제스의 적이면서도 동지였던 인물이다. 국민당이 만주를 차지하는데 정통성을 부여했긴 했으며,반장전쟁 당시 장제스를 지지했지만 시안 사건으로 HP1 남은 마오쩌둥을 최종일격만 날리면 되는 상황에서 취소시킨 주역으로 장제스의 인생을 송두리째 말아먹은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시안 사건 이후 장쉐량은 10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게 되지만 바로 다음 해 중일전쟁이 발발, 국민당의 천도가 계속되면서 장쉐량도 계속 거처지를 옮기게 된다. 어찌됐건 장쉐량은 만주지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전쟁 때 장제스는 비록 전에는 적 이었어도 공공의 적과 싸우기 위해 나름 너그럽게 봐줬지만 장쉐량은 예외였으므로 장쉐량의 봉천군벌은 시안 사건을 기점 으로 완벽히 몰락하게 된다.

2차대전 종전 후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국부천대 까지 이뤄졌지만 장쉐량은 감옥에서 수감생활 하는 것 에서 가택연금으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 묶여있었고 오죽하면 1970년대에[13] 장제스 생일에 장쉐량이 시계를 선물로 보내지만[시간이] 이에 장제스는 낚시대를 보내는 걸로 답한다.[15] 일설에 의하면 장제스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 중 하나가 '장쉐량을 절대 풀어주지 말것이라는 설도 있으니 원한이 심하게 생긴 모양. 이 탓인지 장제스가 죽은 후 후계자였던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가 계엄해제에 민진당의 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줄 정도로 민주화에 힘썼지만 장쉐량은 예외였고 그대로 연금생활이 지속되다가 장징궈도 죽은 후 후임총통인 리덩후이 시기에서야 연금이 풀린다. 이때가 1993년. 1937년 부터 수감 및 연금생활 이었으니 56년 동안 감옥에서 있었다고 보면 된다.

5.10. 프랭클린 루즈벨트

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305/13/htm_201305130514630103011.jpg" style="cursor: pointer;" alt="" src="http://cdn.mirror.wiki/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305/13/htm_201305130514630103011.jpg">

카이로에서 만난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처음엔 괜찮았다. 루즈벨트는 중국에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장제스를 지원하지 말자는 미 육군의 조언을 물리치고 대중 지원을 승인했으며 장제스에게 수차례 친전을 보내어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를 만난 루즈벨트가 장제스에게 그동안 자신이 상상하던 카리스마나 패기를 느끼지 못하고 실망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소통 부재와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루즈벨트는 장제스가 항일 의사가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에 스틸웰의 곡해가 중간에 개입되면서 더욱 틀어졌고 말년에는 루즈벨트가 장제스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일을 의논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마지막까지 장제스를 지원했고 루즈벨트가 죽었단 소식에 장제스는 후임 지도자인 트루먼이 루즈벨트만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다. 특히 장제스가 우려한 것은 트루먼이 공산당과 손을 잡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실수로 망하게 되었으니...

장제스 본인은 루즈벨트에 꽤 호감을 품은 모양이로 루즈벨트를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5.11. 윈스턴 처칠

꽤 험악했다. 윈스턴 처칠은 전통적인 제국주의자였고 장제스는 영국을 침략자들로 보아 매우 혐오했다. 이후 홍콩 문제나 조계지 문제로 영국과 중국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협력관계가 된 후에도 영국은 장제스가 동남아에 영향력을 확보할까봐 중국과 험악한 사이였다. 장제스도 처칠을 제국주의자 우두머리라고 욕하곤 했는데 카이로 회담에서 만나고 나선 처칠이 그래도 걸물이라고 인정했고 처칠은 장제스가 조용하고 신중하며 민완하다 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처칠은 끝까지 장제스를 카이로 회담에 불러오는 것을 반대했으며 불러온 다음에도 피라미드 관광이나 시키자는 입장으로 중국을 우습게 봤고 결국 중영의 험악한 관계는 카이로 회담 내내 지속되었다.

5.12. 김구

http://blogimg.ohmynews.com/attach/7215/1053975230.jpg" style="cursor: pointer;" alt="" src="http://cdn.mirror.wiki/http://blogimg.ohmynews.com/attach/7215/1053975230.jpg">

장제스와 김구

꽤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제스는 김구의 최대 후원자였고 장제스는 김구가 죽은 이후에도 김구를 항일 동지라고 높였으며 김신을 집안 사람처럼 대우하는 등 김구와 자신의 인연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김구, 이승만의 소개로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와 면담(1945년 11월)\


독일과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많은 육해군의 중국군 장교들이 독일로 파견되어 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장제스의 차남인 장웨이​궈도 있었는데, 그는 뮌헨 사관학교에서 전차 교리를 배웠고 귀국 후 전차 제1연대를 지휘합니다. 장제스는 신흥 강대국인 독일과 동맹을 맺어서 일본을 견제하기를 원하였지만, 히틀러는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오히려 일본에 접근합니다. 히틀러의 생각에 대해 군부는 재무장을 위해서는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필요하다며 반대했지만 군부에 대한 경쟁심이 있었던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은 히틀러와 손을 잡고 강행하여 1936년 11월 25일 독-일 방공협정이 체결됩니다.

그렇다고 독일과 중국의 관계가 당장 끊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폰 팔켄하우젠은 히틀러가 중립을 지키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장제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서 방어 전략을 수립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1938년 1월에는 중국과 일본의 정전 협정의 중재를 맡기도 했으나 중국내 반일감정과 일본의 경직된 태도로 인해 실패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중국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팔켄하우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38년 5월까지 모든 고문단이 철수하고 군수품 수출 또한 모두 중단됩니다. 이는 자체적인 군수생산력이 빈약했던 중국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표면적인 것과는 별개로 민간차원의 교류는 계속되었고 충칭에는 독일 대사관도 있어 비밀리에 중국의 정보를 일본에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 공정부대가 독일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서 충칭에 몰래 잠입한 후 장제스를 생포하는 계획도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1940년 3월 난징에서 왕징웨이가 친일괴뢰정권을 수립합니다. 히틀러는 군부의 반대로 중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기를 고민하였고 1941년 7월에야 장제스 정권과 단교하여 왕징웨이 정권과 수교합니다. 또한 장제스 정권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41년 12월 9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집니다. 이로서 장제스 정권과 나치 독일의 오랜 밀월 관계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왕씨 이분이 애각신라왕실이면 이분이 고려왕이네.신라왕실후손이 이사람이고 청나라황실이네.

 

배신자 김구 장제스 이승만 의해서 제거당하는구나,

 

독립군이란 신라왕실후손이 세운 청나라를 멸망시키는것이 독립운동이네.

 

영국압잡이가되어서ㅡ조국를 배신한세력들,이승만,김구,장제스,

본명아이신기오로 풀린(愛新覺羅福臨, 애신각라복림)
재위1643년 ~ 1661년
출생일1638년 3월 15일
사망일1661년 2월 5일
황후폐후 박이제길특씨
효혜장황후
효강장황후
부황숭덕제
모후효장문황후
이전 황제숭덕제
다음 황제강희제
묘호세조(世祖)
시호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
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
至仁純孝章皇帝)

순치제(順治帝, 숭덕(崇德) 3년 음력 1월 30일 (1638년 3월 15일) ~ 순치(順治) 18년 음력 1월 7일 (1661년 2월 5일))는 청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643년 ~ 1661년)이다. 아이신기오로 풀린(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ᡶᡠᠯᡳᠨ
, 한국 한자愛新覺羅福臨 애신각라복림), 묘호세조(世祖), 시호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짧은 시호로는 장황제(章皇帝)이며 연호순치(順治)이다. 만주어로는 이지슌 다산 한(만주어: ᡳᠵᡳᠰᡥᡡᠨ
ᡩᠠᠰᠠᠨ
ᠾᠠᠨ
Ijishūn Dasan Han)이라 하고, 몽골어로는 아이비어 자사크 칸(몽골어: ᠨᠠᠢᠷᠠᠯᠲ
ᠤᠺᠬᠠᠨᠨᠺ
ᠺᠬᠠᠨᠨ
Eyebeer Zasagch Khaan)으로 불리기도 한다. 청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숭덕제(崇德帝) 홍타이지의 아홉 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그의 후궁이었던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이다.

1643년(숭덕 8년), 아버지인 홍타이지가 돌연사를 한 이후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뜻하지 않게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른 후 숙부인 예친왕 도르곤과 종숙 지르하란이 섭정으로서 국사를 도맡아 이듬해인 1644년(순치 원년)에는 중원으로 들어가 멸망한 명나라의 뒤를 이어 새로운 통일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강경책과 유화책을 골고루 사용, 한족의 문화와 생활 관습을 존중하고 중요한 상소문에도 만주어와 한문의 병용을 허락하였으나 한족 백성들에게는 변발을 강요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아담 샬 폰 벨과 같은 예수회 선교사를 골고루 등용하여 천문대와 화포 개발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운남성 등에 흩어져 있던 명나라의 잔존 세력인 남명을 궤멸시키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서양 문화에 대한 호감은 뒷날 그의 아들인 강희제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발판이 되었다

청나라는 신라의 후손이 새웠다

 

국군으로 들어와서 한반도 민족을 학살하는 개새끼들 반드시 찿아서 민족이 복수해야 된다,

나치모양을한 세종대왕익선관,
 
세종대왕익선관이랑 마야 아즈텍 인디언이 일치한다,

인디언아파치 로마제국우두머리왕실상징.

 

김구 이승만 장제스놈이 남한에서 육이오때 조선민족을 이천만명 양민를 학살한 내용이 위내용에서

 

진실이 나오네요,,조선왕가우리집도 모조리 학살당하는데 나치기가 조선왕가 우리집 국기죠,

1900.12.11[1] ~ 1972.05.11

李範奭.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가,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호는 철기(鐵驥).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아내는 김마리아

 
이범석 광복군에 가담 영국 미국의 간첩활동하기 위해서 한반도로 침투할려고 준비한
 
사람,1945년 조선이 분단되고 멸망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으로 임명,
 
한반도를 육이오만들어 민간인 조선인 고려인계 이천만명을 학살에 앞장선 장본인같음,
 
노무현 대통령은 왜 대한민국은 생기지말아야 될나라가 생겼다고 했는가,
 
이해할수있는 부분이고,
 
이승만이 초대대통령하고도 한반도에서 쫒겨났는지 알수있는부분,
 
이들은 조선나치민족을 식민지하고 학살하기위해서 들어온 장본인이다,
 
우리는 알아야한다,광복군이란 독립군이란 대한제국 조선을 멸망시키고 광복을 얻겠다는 뜻을
 
가진것으로 상당히 나쁜역사다,
 
그래서 한반도에 육이오가 일어나고 양민이 이천만명학살당하고,
 
진짜조선왕가가 학살당하고 가짜로 만들어졌다,
 
동아일보 창간호에 실린 조선의 영토 범위에서 광복군과 독립군의 실체를 알수있다,
 
우리조선땅을 무너트리는 반란군세력인것이다,

동아일보 창간호에 실린 애류 권덕규 선생님에 우리나라 강역

동아해(東亞海)

애류(崖溜) 권덕규 (權悳奎)

동아일보 창간호 / 1920.04.01 기사(칼럼) / 동아해(東亞解)"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40100209205004&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4-01&officeId=00020&pageNo=5&printNo=1&publishType=00020


"19193.1 운동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기에 192035일 조선일보가 창간되고 같은 해 41일 동아일보 창간호 중 동아(東亞)의 뜻을 해설한 컬럼임


http://cafe.daum.net/sisa-1/dqMu/17160

주시경 선생의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애류(崖溜) 권덕규 (權悳奎)1890~1950. 국어학자. 사학자. 경기도 김포 출신. 1913년 휘문의숙 졸업. 휘문고보, 중앙고보,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침. 주시경 선생의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 1921년 조선어 연구회 창립 회원. 1930년 맞춤법 통일안 원안 작성 위원. 표준말 사정 위원(경기도 대표). 1936년 큰사전 편찬 위원을 지냄. 저서: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 을지문덕.”


http://tip.daum.net/openknow/39233813

동아일보 창간호 192041일 동아해(東亞海)에 실린 권덕규 선생님의 글을 인용하면

우리 땅을 조각 나누어 육대주(六大洲)라 하니 동()에 아시아요, (西)에 유로파, 아푸리카 및 남북(南北) 아메리카며 남()에 오시에니아니 그 명의(名義)...” 

"우리 조선(朝鮮)이라는 지역(地域)이 음산남북(陰山南北) 흑수이남(黑水以南) 반도(半島)까지의 동아(東亞) 및 북아(北亞)의 대륙(大陸)임은 역사(歷史)를 읽는 이의 다 인정하는 바어니와 ..."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기까지 우리 땅을 조각 나누어 육대주(六大洲)라 했고 그리고 우리 강역에 범위가 음산남북(陰山南北) 흑수이남(黑水以南) 반도(半島)까지의 동아(東亞) 및 북아(北亞)의 대륙(大陸)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조선인이 호주대륙에서 영국 미국에게 영토잃고 피난온상태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육이오를 만들어 조선 고려양민을 이천만명학살했다,

 

왜 이들은 한반도민족을 학살했나,

 

그이유가 제블러거 글을 모두잃고 조선역사을 이해한다면,이들이 어떤놈들인가 알수있는것이다,

 

조선인과 고려인은 인디언후손으로 북미대륙과호주대륙영토의 주인인민족이다,

 

원래 주인들이다,그리고 독일계 유럽쪽이 멸망당하고 나치조선민족도움으로 일어서고,

 

이것은 영국과 나치조선이 부디치는 2차대전의 진정한 이유이다,

 

그리고 북미대륙 호주대륙 한반도 조선사에서 지구조선사로 변하는것은 1차대전를 독일연합국이 패해서

 

조선나치나라에 의탁했기 때문에,1차대전에 독일연합국과 함께하다가 패한세력이

 

자동으로 조선연방의 세력으로 되면서 지구조선사가 1920년부터 만들어지면서,

 

1차대전에 패한세력이 나치조선으로 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영국과 충돌이 예견된것이고,

 

독일은 독수리민족이다,조선왕은 독수리민족의 우두머리왕실이다,

 

백선엽 만주국장교출신으로 조만식독립운동가 비서다,

 

그리고 조만식은 인디에서 유학하면서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련이랑 손잡는다,이차대전당시 소련과미국은 구별할수없는 같은세력이다,

 

이차대전당시 미국이소련이고 소련이미국이고 이들은 그냥 전쟁의 승리자로 러시아제국 고령인영토와

 

미국땅 호주대륙의 조선영토를 갈라같를 뿐이다,둘다 조선영토를 강탈한세력으로,

 

조선독립군세력이다,대한제국 조선독립군세력이란,소련세력 미국세력이 독립군세력이다,

 

이들이 진정한 조선독립군 대한제국의 독립군이다,소련과미국은 조선나라에서 독립하고자 독립운동한

 

세력들인것이다,왜냐 나치기가 조선왕실국기이고 마야 잉카 아즈텍 연합국기이고,

 

미국백악관이 조선왕궁이기 때문이다,

소련국기를  휘날리는 미국인들,,미국과 소련은 그의미가 같다,

 

이것을 독립군으로 포장되여진것이다,결국 인류조선사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유엔나라로 만들어

 

쪼개는것이 독립운동이다,물론 인류조선왕가 역사가 싫어면 할수없다,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

 

문제는 이런세력들때문에 한반도민족 인디언들이 고향땅을 잃어버린것이다,

 

그리고 가장 피해자가되어 살아가고있는것이다,

 

육이오만 생각해도 엄청난사건이다,

 

한반도가 나치조선민족세력이라고 이차대전양의 두배폭탄을 한반도 뿌려서 조선이 초토화된다,

 

그리고 조선나라을 멸망시키는 독립군이란놈들이 장악해서,한반도 민간인을 이천만명학살한다,

 

정신똑바로 차리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