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서 평화롭게
잉여짓 하고 있는데
사촌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 사촌 형이 소방 공무원이거든.
사촌 형이 이번에 이사를 가는데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니
예전에 형이 공무원 시험 준비할 때 보던 책들이 나왔대.
그래서 나보고 그거 줄테니 공무원 시험 보라고 하더라.
( 교통사고 때문에 올 겨울에 수술을 한번 더 해야해서
딱히 계획 없이 살고 있었거든 )

그래서 ㅇㅋ 함.

2009년판 ㅍㅌㅊ???
암튼

그래서 부모님께
공무원 시험 봐보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부모님도 ㅇㅋ 함.

그래서 이번에
지방직 시험 봤음.
시험장은 인천여상.
하앍하앍 여고생이 엉덩이를 비볐덤 의자에 앉을 생각에
전날부터 잠을 설쳤다.

시험 당일.
그렇게 잠을 설쳤더니
피곤해 죽겠더라구.
그래서 박카스라도 하나 마실까 해서
시험장으로 곧장 안 들어가고 편의점을 찾아다녔어.

편의점을 찾아 지도에 표시한 길을 걸어갔다.
지도에는 안 나왔는데 저기 6번 출구에 주유소가 있거든.
그래서 주유소 근처에는 편의점이나 슈퍼가 있을가 같아
저기까지 걸어갔는데
편의점은 커녕 슈퍼도 없더라.
정말이지 이상한 동네야.

그래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저 화살표 표시한 골목 사이로 간판 몇 개가 보이길래
혹시 저 골목에는 슈퍼라도 있을까싶어
들어가봤더니

슈퍼는 커녕
왠 한문만 잔뜩 써있는 중국 간판들만 보이더라.
저 동네가 인천항 바로 앞이라 그런지
중국 무역 관련 가게들이 많던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슈퍼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거 아니냐?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짜증이 나서
돌아나오려고 뒤돌아보니

내 뒤로 대 여섯명이 따라오고 있더랔ㅋ
처음에는 뭔가 싶어서 당황했는데
알고보니 전부 인천여상으로 시험보러 온 사람들이었음ㅋ
내가 가방메고 그 골목으로 막 들어가니까
거기가 시험장인 줄 알고 다들 날 따라온거였음ㅋㅋ

졸지에 피리 부는 사나임 됨.
뭐 암튼.

인천여상으로 가는데
뭔 놈의 학교가 그렇게 위에 있는지
들어가는 길이 엄청 언덕이야.

도착해서 보니
한참을 돌기도 했고 언덕길도 길고 해서
목이 마르더라구.
보니까 학교 안에 정수기가 있어서
물 좀 마시려고 했더니 일회용 컵이 없어.

다행히도
난 커피 중독이라 가방 안에 이렇게
종이컵과 일회용 커피믹스를 항상 들고 다니거든.
그래서 종이컵 하나를 꺼내서
물을 마시는데

내 뒤로 두 사람이 물 마시려고
기다리더라구.

왜 정수기 물 먹다가 뒤에 사람들 오면
약간 뒤로 빠져주잖아.
나 마실동안 뒷 사람 물 받으라고.
그래서 약간 뒤로 빠졌는데

이상하게도 그 두 사람이 물은 안 받고
나만 봐.

단 몇 초간이었지만
그 순간 왠지 컵을 놓고 와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거기다가 컵을 버린다는 개념도 아니고
배려심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왠지 그래야만 할 거 같았어.

그렇개 컵을 놓고 오니까ㅋ
뒤에 있던 두 명이 그 컵으로 물을 먹더랔ㅋㅋㅋ

별 거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을 한 거 같아서 기분은 좋았어.
그리고
당연하게도 시험은 망쳤지.

그렇게 시험을 보고 집에 왔는데
기분이 참 안 좋았어.
단순히 시험을 망쳐서가 아니고
뭔가 남들은 굉장히 열심히 사는데 나는 그렇지 않는거
같아서.
누군가는 그 꿈을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을텐데
난 너무 쉽게 생각한거 같아서.
솔직히 처음에는 좀 우습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시험장에 가서 열심히 준비한 사람들을 보니까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 남들의 그런 열정까지 폄하한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럽고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어.
그래서 그렇게
한참을 노무룩해 앉아있었거든.

내가 너무 시무룩해 있으니까
엄마가 옆에 오더니
내 태몽 얘기를 해주더라.






그랬다.





이제 공무원 시험은 안 보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