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들은 북한특수군이 1980년 당시 광주에 왔다면 몰랐을리 있겠냐 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말은 맞다.

 

그래서 당연히 모르지 않았다. 일본의 언론들도 알고 있었고 당시 한국의 언론들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정부가 가장 먼저 알고 있었고 중요한 정보를 일본 정부에 제공하여 언론에 흘리게 하였다.

아마도 한반도 전면전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몰랐거나 방심했다.

 

그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한다.

개인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중요자료 몇개를 선별해 게시해 본다.

 

 

남침징후에 대한 첩보가 5건이 잇따르면서 드디어 1980년 5월 10일에는 일본내각조사실로부터 또 다시 “북한이 남침을 결정하였다”는 긴급첩보가 입수됐다. “남침 시기는 4월 중순, 김재규 처형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김재규 처형에 따른 항의데모가 절정에 이를 때를 결정적인 시기로 정하였다. 그러나 처형이 지연되자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5.15-5.20 사이에 남침을 하기로 재결정하였다.” 이 첩보는 중국 당국이 일본 방위청에 제보한 것이었다.(1980.5.10. 육군본부작성 “북괴남침설 분석”) 

 

날이 갈수록 우리 정보당국에 입수된 정보내용도 점점 더 구체성을 띄었다. 북한은 1980년 2월에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쟁물자동원훈련을 실시했고, 철도역에 비상열차를 24시간 대기시켰다. 1980년 3월에는 남파돼 있는 간첩들에게 남한의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 기폭조”를 시위 군중에 잠입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총련에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하고,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계엄사 114p)1980년 5월 8일, 김일성은 극비리에 소련을 방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회동했고, 5.18일에는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표현했다. “나는 두 개의 조선을 반대한다. 남반부 인민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금년 내에는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어서 5월 19일에는 북한 인민군 고위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모종의 비밀회동까지 했다.

 

-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中 -

 

 

<1980년 3월 28일 경향신문 >

 



<1980년 6월 28일 매일경제 >

 


<1980년 5월 23일 무장간첩 이창룡 검거 동아일보 >

 

5.18-3.JPG 

  

 

무장간첩의 침투도 활발했다. 1980년의 북한 무장간첩 침투사건은 5월초까지 4개월간 10건이나 되었다. 1979년 12개월간 검거된 사건은 불과 5건이었다. 이 10건 중 7건이 1980년의 3월부터 5.18 발생 직전까지 2개월 반 동안에 집중적으로 침투되었다. 1979-80의 언론보도 집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들이 있다.  

 

1) 1980년3월17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2) 1980년3월23일, 서부전선 9사단 지역 한강하구로 침투하던 공비가 아군에 발각되어 교전하다가 도주했다. 3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했고, 소음기가 달린 권총과 암호문을 노획했다, 암호문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 전사답게 돌격대답게 싸워라”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3) 1980년3월25일. 무장간첩선 1척이 포항만으로 침투하다가 해군에 의해 침몰하여 무장간첩 8명이 사망했다.  

4) 1980년 3월 27일, 강원도 15사단 정면에서 남하하던 공비와 교전상황이 발생했다. 모두가 도주했고, 무장공비 1명만 사살했다.  

5) 1980년 5월 12일, DMZ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공비와 미군 사이에 또 교전이 발생했다.  

6) 1980년5월 15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미국초소 전방 20m가지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미군과 교전하다가 돌아갔다.  

7) 1980년 5월 16일.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1명(이창룡)을 체포했다. 환각제를 다량 소지했다.  

남침관련첩보도 입수되었다. 1979년 12월, “1980년 초에 남침을 감행할 것”이라는 첩보를 미국으로부터 입수했고, 같은 시기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도 “1980년 1월에 남침할 가능성이 높다”는 첩보를 입수했다(1979.12.25자.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북괴대남도발 위협판단”).  

이것 말고도 남침징후에 대한 첩보가 5건 더 있었다. 마지막으로 1980년 5월 10일, 일본내각조사실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하였다”는 긴급첩보를 입수했다.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