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에서 근대국가로 넘어가는 극변기
대한민국의 전환점에 서있었던 인물 이승만.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건국의 주역인가?
12년 장기집권 끝에 하야를 한 반민주적 독재자였는가?
수많은 논란과 상반된 평가속의 인물 그는 누구인가?
[출처] 초대대통령 이승만 그를 재평가하다 |작성자 문천상

미국으로 출국 1904년 11월 4일 29세
독립보존요청이라는 중요한 임무와 함께
미국유학을 결심한 이승만은 가족들을 남겨둔채 미국으로 떠난다.
1904년 12월 31일 서울을 떠난지 56일만에 이승만은 미국에 도착한다.
미국 도착 8개월 후 미국 한 휴양지에 외교관 복장을 한 이승만이 나타났다.
곧 열리게 될 러일 강화 회의에서 중재역할을 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립보존 요청을 하는게
시급한 상황이었다.
1905년 8월 5일 대통령 여름 별장에 이승만과 하와이 교민 대표 윤명구가 도착했다.
일본에 가기전 화와이에 들른 미군무장관의 소개장 덕분에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내밀었다.
청원서에 따르면 자신들은 8천명 하와이 교포들의 대표이며 고종황제가 아니 1200만 백성의
민의를 대변한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의 러일전쟁중 각종 칩략과 배신행위를 비난했다.
그리고 조미수호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 독립의 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 했다.
조선왕도 그때 러시아때 또 일제가 침탈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해양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미국의 도움을 청하는 그런 청원을 하시게 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승만을 취재했던 미국신문에 의외의 기사가 실린다.
이승만이 황제의 대표가 아니라 친일조직으로 알려진 일진회의 대표로 자처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승만은 같은 기사에서 일본의 이중성과 침략야욕을 강하게 비판하며 미국이 한국독립보존의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왜 이렇게 모순되는 주장을 하는 것일 까?
일진회가 친일단체로서의 변모하는 것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한 열흘전에 본격적으로 친일단체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승만대통령이 떠나서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 단계에서는 친일단체라고 볼수 없는 것이고 그때는 나라의 국권을 지키고 국민이 주인이되는 것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의 단체다. 그 단체의 대표로서 국민의 주인이되는 나라인, 미국의 대통령에게 우리를 지켜주고 같은 나라의 체제를 만들기 원하니까 일본의 침략을 막아달라는 것이 청원서의 중심이 된다.
현재 루즈벨트의 별장에는 세계 각처에서 남긴 귀한 선물들이 전시되있다.
그중 관리인이 한국에서 온 취재인에게 처음 공개한다며 보여준다는 유물, 그것은 조선의 전통 나전 철기 이었다. 나전철귀 뒷면에는 조선의 왕이 보냈다는 글귀가 선명하다.
유물관리대장에는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기록되었다.
청원서에도 나와 있듯이 평소 고종을 불신했던, 이승만은 어떻게 이 선물을 가져간 것일까?
이승만이 직접 고종황제로부터 받아서 간것이 아니라, 민영환과 한규설 그 두분중에 한분이
고종황제로부터 받아서 이제 이승만에게 전달해주고 가서 대통령만날 때 선물로 드리라고 한것 같습니다.
루즈벨트는 공식외교를 통해서 청원서를 제출하라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1924년 외교사가 덴데트가 발표한 논문에 그 이유가 밝혀졌다. 이 논문에 의하면 미국은 일본에 대한제국의 종주권을 갖는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라며 일본의 입장을 옹호했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일본을 좋아했습니다. 지난 세대 동안의 일본의 발전에 매우 경탄했고. 훗날 일본이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러시아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무능하고 내부적인 갈드을 겪고 있는 대한제국정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그리고 문명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비록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이승만의 미국대통령 공식 면담소식은 국내외 주요언론을 통해서 알려졌다.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미국뿐아니라 국내까지 알리는 계기가 됐고, 이때의 경험은 훗날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자주 사용하는 청원외교와 여론 중시외교의 바탕이 됐다.
독립보존을 위한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국에서는 을사늑약이 체결됐고 이승만은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겪게 된다. 16살에 결혼한 박씨에서 태어난 이태산은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전염병으로 잃게 된것이다.
미국동부최고의 명문 하버드. 선교사들의 추천서덕분에 조지워싱턴대 2학년에 편입했던 이승만은 졸업후 하버드대 대학원에 입학한다
① 여수·순천반란사건과 같은 위기로부터 신생 대한민국을 구출하고 국가 존립에 필수 요건인 안보를 확보했다.
② 6·25전쟁 중 남한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고 미국으로부터 한국군의 훈련과 장비 현대화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냄으로써 막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③ 공산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조봉암(曺奉岩)을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한 다음 지주 출신 의원들로써 채워진 국회에 압력을 가하여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켜 전 국민의 75%에 해당하는 남한 농민들을 위해 농지개혁을 완수했다.
④ 건국 초 열악한 재정 여건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우선순위를 배정하여 각급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교사들을 재훈련하여, 한글로 쓰여진 교재들을 개발함으로써 국민교육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고 동시에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경제개발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했다. 이로써 그는 후세의 한국인들로부터 ‘교육대통령(The Education President)’으로 기억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⑤ 신생 대한민국은 군사, 경제면에서 미국과 유엔의 원조에 매달려야 하는 일개 속국(client sate)에 불과했지만 그는 [자신의 출중한 외교역량을 발휘해]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진정한 주권 국가로 대접받게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출처] 초대대통령 이승만 그를 재평가하다 |작성자 문천상

▲1949년 1월 8일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이승만.ⓒ동아일보 지면
이승만 "대마도 반환하라" 日에 수십차례 요구
건국 즉시 "국제약속 지켜라” 성명-회견 되풀이...
김상훈씨, 오늘 이승만포럼서 정당성-근거 제시
시간의 바퀴를 1948년 대한민국 건국 무대로 돌이키자.
이 해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을 연다.
평생을 조국 해방을 위해 일제와 싸워왔던 이 대통령은 이 회견에서 대일관계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대마도 한국 영유권’ 발언에 당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9월 9일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다.
[출처] 초대대통령 이승만 그를 재평가하다 |작성자 문천상
[출처] 초대대통령 이승만 그를 재평가하다 |작성자 문천상
게다가 베트남에 캄보디아에 라오스에 몽골에 대한민국 주위는 대만 일본은 빼고 전부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유일하게 대한민국만이 대륙에서 공산화되지않음
[출처] 초대대통령 이승만 그를 재평가하다 |작성자 문천상
이승만 내각이 친일파집단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하셧을때....

[출처] 초대대통령 이승만 그를 재평가하다 |작성자 문천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