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통합은 말로만 변증법, 혹은 삼위일체라고 하지만
사실은 불교가 기원.
(아무리 신학서적, 혹은 철학서적 굴려봐라. 답이 없다)
정토세상 바라보기로서....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이 空이며, 고려연방제가 佛임을 깨닫는 것에 전부 기독교는 乙로 복종하되
이 모든 행위는 기독교 거풀로 합리화.
이게 문목사 서적에서 반복됐다.
1980년대 민주팔이 통일타령.
변증법 운운은 새빨간 거짓말.
결국, 민중신학은 예수 신앙 사기였다.
기독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고 유교도 아닌 개잡종.
개잡종이되 기독교표현 분칠.
식민지 체제에서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이었다면 해방 이후 남북이 서로 갈리면서 분단모순이 추가된다. 좌우가 대립하면서 세대, 남녀, 지연과 학연은 물론, 계급마저 초월하여 이데올로기 갈등과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여기에 외세까지 개입하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결국 첨예한 갈등으로 양쪽은 전쟁까지 치르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는다. 이후 양쪽의 지배층은 허위의식의 체계로서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주민을 과도하게 통제하고 억압한다. 분단모순은 정치적으로는 남과 북의 대립과 소모적인 군비경쟁, 경제적으로는 시장의 분리와 남북의 인적, 물적 자원의 효율적 이용의 차단, 사회적으로는 좌우이데올로기 대립과 남과 북 주민 사이의 소통의 단절, 문화적으로는 민족문화의 분열과 파행, 국제적으로는 대미 및 대 중국 종속 심화와 동아시아 질서의 대립 격화 등을 낳았다. 더 나아가 주민 각각에게는 좌우이데올로기 및 분단의식의 내면화와 일상화라는 역기 능을 산출하고 있다. 이에 분단모순 극복과 남북의 평화적이고 자주적인 통일이 민족의 지상과제로 대두되었으며, 불교 또한 이에 동참하였다.
선학원의 김용담 스님 등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불교교리 내부에서 융해시키고자 혁신잡지를 통해 좌파적 견해를 밝혔다. 이들의 불교적 논리에 따르면 승려는 수도에 전념하고 사찰의 재산은 전부 교도들에게 맡겨 모든 재산은 공유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은 젊은 불교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따라서 혁신운동의 세력은 점차 증대하여 갔다. 또한 이들은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을 방문할 당시 동행하였다.
이후 한국불교는 이렇다 할 통일운동을 전개하지 못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1972년에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후락이 북한으로 들어가서 김일성 주석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남북한 모두 이를 이용하여 주민의 통제를 강화하고 독재를 정당화한다. 한국불교는 7.4남북공동성명이 제정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도, 7.4남북공동선언이 무산되고 분단모순이 더욱 심화되는 국면 에서 이를 극복하는 데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자, 민불련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전국적 조직을 결성하여 힘찬 투쟁을 벌였고 88년에 ‘공동올림픽쟁취불교본부’로 전화하여 남북의 축제로 올림픽을 치르고자 염원했다. 통일운동이 불교계의 공동목표로 제기되었으며 공동투쟁의 성과는 민족자주 통일불교협의회(통불협)으로 발전하였다. 통불협은 88년 12월 창립하여 다음해부터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한국의 정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광주항쟁’ 당시 군부를 지원한 미국에 대한 반미운동을 주도하였다. 핵철거,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불교도 서명 운동을 벌였고, 90년 8월에는 통일문화제를 열어 자주적 통일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기했다. (이도흠, 172쪽)
한국민주화운동사를 돌아볼 때 민주화운동과 분단극복운동은 불가분의 관계였고, 앞으로도 분단이 해소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론은 늘 분단극복론과 짝을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공시적 (synchronic) 상호 견인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검토를 통해 볼 때, 시대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민주와 통일의 초점이 달랐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부 선진적인 그룹의 경우, 분단·통일·북한문제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변혁운동 선상에서 연계되는 인적, 사상적 계통과 관련이 있다. 4·19의 주역이던 학생들의 통일논의와 통일운동 인자(因子)들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잠세 (潛勢)해 있다가 19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으로, 1980년대에는 다시 통일운동으로 이어져 표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요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남한내 변혁운동사에서 이른바 자생성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한국사회변혁운동세력은 어떤 의미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 없다는 양면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일부의 경우, 북한과의 연계를 수반한 급진적인 행동도 불사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명백히 민주화운동을 한 것이며 그래서 민주화운동세대이다. 여기에 난점이 있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불가분성을 십분 고려하더라도 냉전과 탈냉전을 거치면서 북한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민주화운동과 대북 친화성의 관계를 명확히 정리해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친북성은 명백히 주홍글씨에 해당하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세대의 북한과 연계된 통일론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냉정한 논의가 허용되기 힘든 처지이기 때문 이다. 아직까지 민주화운동세대의 분단극복론은 북한과의 연계성이 배제된 차원에서 논의를 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에 있다. 그것은 불가피한 고의성에 의한 것일지 모른다.
이와 함께 한국민주화운동사에서 통일논의와 통일운동이 고조된 시기가 특히 4·19직후와 1980년대 말이라고 할 때, 그 이유와 관련해서 통일운동의 돌출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19는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장면 정권을 창출하였다. 6월항쟁은 대통령 간선제를 무너뜨리고 직선제를 성취하였다. 전민항쟁으로 1차적인 권력개편을 완수했다는 성취감은 한국사회의 근본문제인 통일문제와 외세문제로 나아갈 내적 기반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민주와 통일은 민주→통일 이라는 단계적 진전관계라고 할수 있다. 양자의 관계로만 한정해서 본다면, 한국현대사에서 분단극본 논의는 늘 민주화운동의 발꿈치를 잡고 출현한 측면이 있다. 다만 민주화운동과 새 정치권력의 창출이라는 국면에서 그같은 관계설정이 가능했다. 한국현대사의 일정한 패턴을 반영해 통일운동세대의 형성과 변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김지형, 136-13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