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학살 책임과 인식의 전환에 대하여
진명행 2011.04.03



4.3 사태의 기본적 성격은 남로당 무장대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요 폭동이다. 

그것을 가장 먼저 전제해야 한다. 이를 부정한다면 논의자체가 될 수 없다.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된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하지만 요즘은 이것을 뒤바꿔서 얘기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첫째로는 "폭동이나 반란"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번째로는 "폭동이나 반란"이 있었음은 인정하지만, 이보다 국가의 폭력성을 더욱 강조하고, 그 모든 책임을 국가에 돌리는 사람이다. 
세번째로는 "민중적 역량"을 강조하여 이승만과 미군정에 대한 항쟁이나 투쟁의 일환으로 평가하려는 사람이다.

첫째와 셋째는 논의의 방대성으로 인해 여기서 논외로 한다.


지금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두번째의 시각에 대해서다. 
이들은 500여명에 불과한 "빨갱이들을 잡자고 3만명 이상의 양민을 희생시킨 것은 명백한 학살"이라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이 타당하려면 다음의 전제사항에 대한 정합성을 먼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1. 무장 세력 "500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은 무고하다.
2. 희생당한 "3만명"은 모두 군경에 의해 희생당했다.
3. 희생당한 "3만명"은 정확한 근거에 의한 공식적 통계이다.
4. 군경 또는 무장대에 의해 학살된 사람을 객관적 증거에 의해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1항~5항에 대한 저간의 인식은 나름 각자 주워들은 팩트에 기반했을 것이다. (게시자 주: 5항은 4항의 오기)
그러면 그 팩트는 충분히 고민했고 검증했으며 객관적인가? 
여기서 자신있게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의심된다. 
또 설령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 중에서도 중립성이 의심되는 기관에서 내놓은 자료만을 보고 
단순히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우선 1항과 2항에 대해서 논해보자. 
미군정이 조사한 1948년 6월 20일자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 에 따르면 
제주 남로당은 평균 60명~80명으로 구성된 소위 인민해방군 대대를 각 면당 최소 1개 이상을 두고 있었다. 
당시 제주에 총 12개 면이 있었으므로 무장대의 병력은 720명~960명까지 추산해볼 수 있겠다.

무장대에 직접 가담하고 있는 자들 외에도 이들의 병참을 지원하기 위해 
각 면, 동, 리에 조직된 인민자위대가 약 3,000명~5,000명 가량 된다

그러면 이들을 양민으로 분류해야 할까? 만약 
이들을 양민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면, 토벌 작전 중에 이들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정보와 자료 등은 충분했을까?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하게 고려해야 한다.

"1948년 8월 해주 인민대회에 제주도 대표로 당위원장 안요검, 부위원장 강규찬, 군사부장 김달삼, 
부녀부장 고진희 등 4명을 보낼 때에 이들을 태운 작은 배를 한밤중에 모슬포에서 
해녀들이 적의 해안 경비망을 뚫고 먼 바다까지 끌어내 갔다"는데 
만약 이 해녀들이 공작 도중 군경에게 발각 나 총격을 받고 희생을 당했다면 이를 "양민학살"로 볼 것인가?


3항과 4항에 대해서 논한다. 
희생자의 숫자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스테리다. 
8만명 운운은 애초에 김봉현과 김민주가 자신들의 저서에서 "이재민" 숫자를 "희생자" 숫자로 착각, 
오기(誤記)한데서 연유하였으므로 이 說에 의하여 논의하는 것은 더이상 실익이 없다.

최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4.3사건 신고된 희생자 수를 14,028명으로 공식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숫자는 1950년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발표한 27,719명보다 턱없이 적은 숫자여서, 
느닷없이 인구감소분을 감안한다며 25,000명~30,000명의 규모로 추산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군정이 사건직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희생자 수는 최대 15,000명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4.3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추정치는 별로 의미가 없고, 애초에 신고된 14,028명의 수준에서 논의해야 합당하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3만명 설도 상당히 부풀려졌다고 해야 맞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학살주체에 의한 객관적 구분 및 검증의 부실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4.3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신고된 희생자 14,028명 중에서 78.1%인 10,955명은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1,764명(12.6%)는 무장대에 의해, 1,266명(9%)는 공란에 의해 희생됐다.

이 구분은 단순히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판단했을 것이다. 
지난번 5.18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증언은 참고자료일 뿐 검증된 객관적 자료는 아니다. 
고의에 의한 거짓과 왜곡, 또는 착각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가해주체를 공란으로 기재한 비율이 9%나 되는 것이다. 


다음 자료를 본다.

 "1월 19일자 한국군 정보보고서는 현재 폭도들이 한국 전역에서 한국군과 경찰 희생자의 시신에서 
제복을 벗겨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몇 주 동안 토벌대 제복을 입은 게릴라와 교전을 벌인 몇 건의 사건이 있었다. 
마천에서는 두 차례나 한국군 복장을 한 폭도들이 경찰을 살해했고, 
군인 복장을 한 폭도 6명이 1월 3일 제주도의 삼양리에 나타나 마을의 우익들을 집합시키고 발포하여 31명을 사살했다." 
... 미군정 G2 보고서 1949년 1월 20일(No. 1042) 보고.
 
그러면 이 광경을 목격한 마을 주민이나 유가족들이 누구에게 죽었다고 진술해야 하는가? 
1949년 4월 1일자 미군정의 4.3사건 조사보고에 따르면 당시 희생된 14,000명~15,000명의 사망자 중 
80%는 군경에 의해, 20%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보고 있음을 감안할 때, 
4.3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는 확실히 군경에 의한 희생자는 최대한 많이, 
무장대 빨갱이들에 의한 희생자는 가급적 최소화하기 위해 애쓴 혐의마저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계산해보자. 
14,000명~15,000명 희생자 중 무장대 본진 900명, 지원세력 3,000명~4,000명,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 3,000명 
합계 7,000명인 전체의 50% 희생자는 누구의 책임인가? 
이들을 모조리 "양민학살"의 범주에 집어넣고 이승만 개새끼를 얘기하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점을 고민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계산을 해도 나머지 50%는 폭동사태와는 무관하게 군경에 의해 희생당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4.3 사태가 발생한 초기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여순반란 사건이 터지면서 급박해진 군부측이 해안선 소개를 통한 강경모드를 전환된 이후 2개월동안 엄청난 희생이 따른 것이다.


반란을 진압할 임무를 가진 군대 내에서 조차 좌익세력들이 득시글 대고 
반란과 폭동이 하루가 멀다않고 발생했던 해방직후의 현실을 생각해보자. 
국가체계가 잡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란진압에 동원된 이들의 임무수행이 미숙했고, 
감정적인 충동에 의한 살인이나 학살이 없을 수가 있는가? 


하지만 이들의 죄상을 묻는 일이나 진실을 밝히는 일이 
가장 1차적인 책임이 있는 자들의 원죄까지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 불필요하게 사건을 왜곡하고 과장하는 일이 있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4.3이나 5.18에 관심을 가지는 목적이 그저 이승만 개새끼, 전두환이 개새끼 하는데 있다면 
차라리 신경 끊고 와우나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발전을 위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