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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원 (1937년 7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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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민학교 졸업은 커녕 학교 문턱에도 못가본 서경원은 광주폭동 주동자중 하나임

 

이런 서경원을 평민당총재 김대중이 국회의원으로 국회 입성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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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원의 간첩활동

 

 

 85년 3월 중순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개최된 카톨릭 국제농총청년연맹회의에 한국 가톨릭농민회(가농) 대표로 참석한 후 85년 4월

서독 뮌헨에서 북한공작원 성낙영의 안내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갔다.

서경원은 이곳에서 북한공작원 정선생 등과 접선, 농민투쟁 실태 등을 토의한 후 평양 방문 및 김일성 면담 주선과 농민투쟁 자금지원을 약속받는 한편,

농민운동을 적극 전개하여 대정부 투쟁으로 전환시키라는 지령과 더불어 1차 공작금 만 불을 받고 4월 17일 입국, 잠입했다.

이어 9월에 8천 3백 마르크의 공작금 송금을 받았다 (평화문제연구소 편집부 1989, 8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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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10일 서독 괴팅겐 성낙영집에 '가농'의 활동상황, 농민운동과 재야운동권의 연계활동 등을 보고하고 독일화 1만 마르크의 공작금을 받았다.

3월 9일 프랑스크루트공항에서 성낙영으로부터 여행경비 명목으로 미화 5천 달러를 받았다

 

 

 

 

 

86년 4월 6일 서독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성낙영과 다시 만나 그의 안내로 유고 베오그라드 주재 북한대사관으로 가서 북한공작원 김선생과 접선,

국내 농촌실태와 문제점등 국내정세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때 김선생으로부터 남조선 정세를 분석 보고하고 더욱 가열한 통일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과 더불어 공작금 만불을 받은후 4월 `12일 입국, 잠입했다 (평화문제연구소 편집부 1989, 88,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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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9월부터 88년 4월까지 사이에 재독교포 정명영, 대전 가톨릭농민회 근무 독일인 수녀 한마리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간사 기춘 등을 통하여

북한공작원 성낙영으로부터 8회에 걸쳐 공작금 서독화 3만4천3백 마르크를 받았다.

1987년 12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 서교호텔 커피숍에서 서독유학생 정명영을 통해 전달된 공작금 서독화 8천 마르크를 수수하였다. 

1988년 4월 초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서경원 4월 중순 천주교 정평위 사무실에서

북한이 보내준 선거운동자금 독일화 1만 8천 마르크를 받았다 (평화문제연구소 편집부 1989, 88, 91).

 

 

 

 

 

잠시 "기 춘" 에 대해 설명하면

물론 홍어출신이고 정의구현 사제단 간사역임,

간첩 서경원의 비서로 이 사건 수사가 시작되자 잠수탔다가 영삼이때 갑자기 나타나 자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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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노무현이 청와대 행정관으로 특채함

(기사에서 말하는 존경하는 신부는 함세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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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청와대근무자는 신원조회,사상검증 들어갈텐데 "전혀 문제 없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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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간첩이 장관 조사하는 나라.." 발언이 나오자

행정관에서 물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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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나와서도  외무부 소속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로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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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경원으로..

 

 

서경원 당시 평민당 의원은 1988년 8월 19일부터 2박3일 동안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만났다.

그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북한쪽이 제공한 소련 여객기 '일류신'을 타고 평양으로 갔다.

서경원이 구속 석달 전인 3월 27일 한겨레신문 윤재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서경원은 김일성 주석을 "도착 이틀 뒤 삼지연 별장으로 가 오전 11시쯤 세미나룸 같은 비교적 큰 방(20평 정도)에서 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그 자리에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이 배석하였다 (정종주 1994, 77).

 

 

김일성과 면담후 국회 용지위에 손금까지 그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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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담에게 지령받은 대남투쟁 전개방법

 

1.불가침 조약 체결(평화협정)

2.미군철수 선행

3.연방제 실시

 

위의 내용을 전개하기위한 투쟁

1.농민운동 투쟁

2.시민단체,학생 노동자등을 전면에 내세워라

 

1988년 8월 20일 하오 4시쯤 자강도비행장에서 비행기편으로 평양 대동강변 소재 영빈관 숙소로 돌아와 응접실에서

그곳으로 내방한 허담과 김선생 등 5명과 회합하고 허담으로부터 "지난 85년부터 우리와 함께 사업을 시작한 이후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농촌운동을 주도하여 민주화투쟁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고 이제 국회에도 진출했으니 남조선해방 투쟁을 위해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조국통일의 제1과제로 북남간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철수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 바탕위에서 연방제를 실시하여야 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당면 과제로 김수환추기경의 방북을 성사시키라.

북남 국회회담에 관하여는 평민당이나 민정당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야당은 야당대로 특징이 있어야 할 것같다.

농민운동을 전국적 대중조직화하여 투쟁을 전개하고 남북교류를 추진하라.

재야 운동권을 결속, 활성화시키고정당・사회단체・노동자・농민・학생 등 모든 단체가 남조선당국의 간섭없이 우리와 직접 대화를 추진토록 유도하라.

운동권 특히 학생운동이 대중속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왜 우리들의 흉내를 내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의 투쟁구호도 북쪽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새로운 용어를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사용토록 해야 한다"는 지령을 받았다

(평화문제연구소 편집부 1989, 92).

 

지금까지 이런 시위가 계속되는 이유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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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제는 김대중이 서경원 방북사실을 사전에 알고있었느냐가 핵심인데

당연히 알고 있었음

 

 

 서경원은 김대중을 수행하여 유럽을 순방 중이던 1989년 2월 중순경 헝가리 부다페스트 포룸호텔에서 북한을 취재하고 싶어하는

한겨레신문 윤재걸기자에게 자신의 방북사실을 이야기하였다.

 

다음 달 3월 하순경 문익환목사 밀입북사건이 있은 후 윤재걸기자가 찾아와 전번에 이야기한 방북사실에 대하여 집요하게 인터뷰를 요구하자 이에 응하였다.

서경원은 4월 중순 평민당 중앙당 총재실에서 김대중에게 윤재걸 기자와의 인터뷰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서경원이 입북한 사실에 대하여는

상당한 관심과 흥미를 보이던 김대중이

서경원의 기자 인터뷰에 대해서는 심한 질책을 하면서 보도를 중단할 것을 강력히 지시하였다 (평화문제연구소 편집부 1989, 89).

 

 

 

 

 

 

전남해남출신의 윤재걸 당시 한걸레기자에게 방북사실 실토

윤기자는 김대중에게 확인했으나 김대중은 "당과 민주화를 우해" 잘 처신하라며 기사내지말것을 요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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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 25일 방북한 문익환 목사와 유원호씨 사건뿐만 아니라 서경원의 방북도 김대중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윤재걸이 1994년에 김대중은 양심과 도덕률을 회복해야 한다면 폭탄선언을 하였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다.

윤기자는 1989년 4월 초순 국회 당 총재실에서 김대중 총재를 단독으로 만나 서의원의 방북사실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김총재는 놀란 표정으로 "윤동지, 당과 민주화를 위해서 잘 협조해주시오. 김원기 총무하고 상의해주시오"라고 말했고,

이어 자신은 여러 차례 김원기 총무와 만나 사건의 파장과 당의 대책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는 것이다.

그 후 윤기자는 수사당국에 거짓진술을 하여 자기만 불고지죄로 처벌받고 김대중을 보호하여 주었다.

그러나 윤기자가 폭탄선언을 하였을 때 김대중은 측근을 통해 윤기자의 발언내용을 부인하였다.

 

 

 

윤기자는 방북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아 불고지죄로 국보법 처벌 받고 김대중은 나중에 모르쇠로 일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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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사실을 알고있을뿐 아니라 여비도 제공한것이란 설도 있고(이것은 명확치 않아 생략함)

공작금 받은것은 분명함

 

 9월초에 김대중을 만나 귀국보고하는 자리에서 허담에게 받은 공작금 1만달러를 제공하였다 (평화문제연구소 편집부 1989, 93).

 

이 사건으로 검찰에서 수사 받았지만

당시 여소 야대의 상황에서 서로서로 봐주기로 흐지부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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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당은 6월 28일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서경원을 제명하고, 여소야대 정국에서1990년 1월의 정치권 거래로 흐지부지 되었다 (정종주 1994, 78).

 

 

 

 김대중이 통수권자가 된후 당연히 사면 복권키기고

1999년 11월 새천년 민주당원을 대상으로 "안보교육" 까지 시키고

아직도 살아서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는 ㅁㅈㅎ 인사임.

 

 

이명박 AUT를 외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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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김대중 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