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김명시 김두봉 김무정 평전]을 정치게시판에 올립니다.



정치게시판에 글 올리는건 처음이네요. 

정치게시판에 김원봉 관련 글 올리는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빨갱이들이 김원봉이 빨갱이가 아니라고 선동할때 아래 짤방들과 내용들 보여주면 알아서 깁니다.


애국보수의 마지막 보루 일베와 정치게시판이 항상 영원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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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義烈圈)이 길림성에서 결성된 것은 1919년 11월 10일이었다. 결성단원은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冑)·이성우(李成宇)·곽재기(郭在驥)·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結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晙)이었으며, 김원봉을 ‘의백(義伯)’으로 추대하였다.

활동지침으로는 ‘공약 10조’·‘암살대상’·‘파괴대상’을 채택함과 동시에,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침략원흉 응징을 활동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와 함께 최고이상으로는 ‘구축왜노(驅逐倭奴)’·‘광복조국(光復祖國)’·‘타파계급(打破階級)’·‘평균지권(平均地權)’을 천명하였다.

..... 이 시기 의열단원의 진보적 사고 형성에는 류자명(柳子明 : 무無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이회영과 함께 세운 놈)이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

1922년 겨울 김원봉은 북경의 신채호(무無정부빨갱이. 이 사람이 적은 의열단의 신조 조선혁명선언은 빨갱이 사상으로 가득하다.)를 방문, 의열단의 행동강령 및 투쟁목표를 성문화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의 완성..... 

..... 남창봉기와 광주봉기로 대변되는 국공분열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상해로 온 김원봉의 당면과제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과제는 제3차 조선공산당 제2대 책임비서였던 안광천(安光泉)과 만나게 되는 1928년 중반부터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안광천과의 만남은 김원봉의 혁명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註 038 안광천의 출현은 김원봉이 지난 2년 동안 중국 국민혁명 현장체험 과정에서 절감한 협동전선론을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형상화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 시도는 1928년 10월 4일 발표된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중의 정강·정책에서 드러난다.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20개항의 정강·정책은 국민의 기본적 자유 보장, 남녀평등, 지방자치 실시, 의회주의 ‘민주국’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민족 혁명적 통일전선’의 결성을 제창한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 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 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註 039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함으로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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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9주년을 기념하여

오늘 본단의 창립 9주년 기념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오늘을 최대의 정열과 무량한 감개를 가지고 기념하는 동시에 냉정한 심정으로 우리의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직시하여 장래를 계획한다.(중략)

우리들은 폭력적 혁명을 강조하고 민중적 운동을 제창하면서 1919년 11월 10일에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본단은 창립후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제1차로 郭敬, 李成字 등의 폭탄사건을 비롯하여 朴在爀의 釜山 폭탄사건, 金益相의 총독부 파괴사건, 吳成崙의 黃?灘, 田中 습격사건, 金始顯, 劉錫鉉, 黃珏 등의 폭탄사건, 金祉燮의 왜적 왕궁 폭탄사건,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拓 습격사건……등 무릇 16차에 걸친 대파괴 암살운동을 실행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스스로 비판하면 본단도 창립 당시에 조선혁명을 계획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많은 과오와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마는 여러가지 타락분자, 비겁분자, 공론분자, 폭력부인분자들 사이에서 혁명적 의열정신을 훌륭히 유지전개해 온 것은 조선 혁명사에서 광휘있는 사실에 틀림 없다. 우리들은 항상 실천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는 본단 자체의 실천과 조선 혁명운동 전체의 실천 내지 세계 혁명운동의 실천은 우리들의 견해를 한 계단 한 계단씩 진전시켜 왔던 것이다.(중략)

조선의 혁명과 세계의 혁명을 연결시킨 것, 조선혁명의 결정적 역량을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에게 추구한 것, 광범한 대중의 혁명적 요구를 반영한 구체적 강령을 게제한 것, 폭력혁명의 준비 및 조직을 고양한 것, 그리고 모든 혁명을 조직하여 전민족적 통일기관의 촉성을 주장한 것 등은 오늘에 있어서도 그 정당성이 더욱 더 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지금 조선혁명에 관련된 현재의 정세를 다시 한번 고찰할 때 그 중요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민중에 대한 극도의 압박착취 (자본주의 제도를 돌려서 비꼬는거)

2. 그것에 대한 조선 각계급 각층의 반항 내지 불평

3. 민족적 공동전선의 개시

4. 공산주의자의 지도 아래 급격히 전개되는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의 운동

5. 혁명전선에서의 우익세력의 대두

6. 제국주의 세계의 안정이 급격히 붕괴되고 그것에 따른 광적인 반동

7. 세계 무산無産계급(가난한 노동자 농민) 및 약소민족의 반제국주의적 전선과 세계혁명적 전선과의 동맹 확립과 세계혁명 파도의 상승

8. 소비에트연방이 모든 혁명의 우군으로 존재함에 대한 제국주의 열국의 연합적 반격

(두서 생략) 강도 일본에게서 조선의 절대 독립을 탈환하기 위하여는, 그 현재의 폭압에 항거하기 위하여는 다만 협동통일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주의에 따른 대립, 모든 붕당에 의한 분열이 극복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리고 조선 혁명운동은 더 나아가서 세계 혁명전선에까지 굳게 통일되지 않으면 안된다.제약소민족의 해방운동만이 우리들 동맹군의 목적은 아니다. 세계의 무산계급 혁명운동도 또한 우리들이 믿을만한 동맹군이므로 우리들은 그들과 동맹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비에트연방과의 동맹, 그것을 제국주의에 대하여 지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절대 필요하다.

우리들은 민족적 협동전선을 절규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이 절규하는 협동전선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고, 우경적인 것이 아니라 전투적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절대 다수도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이며 가장 혁명적인 계층도 그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전선의 기초를 그들에게 두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급속히 진전하는 조선 노농계급 운동을 더욱 발전시켜 그것을 독립운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협동전선의 최대 조건이 아니면 안된다. 동시에 현재 대두하고 있는 여러가지 우경 내지 타락 경향에 대해서는 협동전선에서 끊임없이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모든 전투회피자, 폭력부인자, 점진주의자 등을 의연히 혁명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과 싸우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 혁명운동의 전선통일을 절대로 주장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맹세한다.

본단은 9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위와 같은 견해와 주장을 고창하면서 다음과 같은 함성을 올린다.

강도 일본을 타도하자.

전투적 협동전선으로.

통일적 독립당을 완성하자.

자치주의자를 타도하자.

혁명의 기초를 노농대중에게.

세계혁명과 연결하자.

소비에트연방과 동맹하자.

1928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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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갱이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빨갱이 김원봉의 연설문



일제시대 빨갱이김원봉 연설문 요약 


1. 오로지 농민 노동자 대중 무산無産 계급 계층(프롤레타리아)  혁명 공산주의 투쟁운동 ㄱㄱㄱ 


2. 소비에트 연방(소련)과의 동맹 ㄱㄱㄱ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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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50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   1) 독립운동정당의 성립과 활동   >   (2) 의열단

(2) 의열단

義烈團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1925년 상반기까지 파괴·암살 등의 의열투쟁에 힘을 쏟았다.註 481 의열단은 20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투쟁을 벌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년부터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인 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그해 겨울에 광주에서 의열단의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吳成倫·金山·류자명柳子明 등이 함께 참석한 이 회의에서 의열단은 장차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註 483 이 결정을 바탕으로 의열단은 1927년 초에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것은 광동에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상해와 武昌 및 南昌에 지방집행위원회를 두는 내용이었다.註 484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의열단은 다음해인 1927년 5월에<獨立黨促成運動에 대한 宣言>을 발표하였다.註 485 이것은 이미 1926년 10월에 결성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이어 1927년 4월에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조직된 직후였다. 이로써 의열단은 ‘민족협동전선운동’과 ‘혁명정당’ 결성이라는 두 가지 활동방향을 정립했다. 그들은 우선 주요 활동지역에서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교 무렵부터 김원봉과 김성숙 등이 활동하고 있던 광동에서 김성숙이 주도하여 1927년 5월 8일에 광동촉성회를 조직했다. 또한 당시 무한에도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전개한 ‘反革命淸黨運動’(상해쿠데타)을 피해 모여든 의열단원들이 많았는데, 박건웅을 중심으로 무한촉성회가 조직되었다.註 486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이는 결국 의열단이 1926년 겨울에 결의한 ‘혁명정당 전환’ 방침을 사실화하면서, 이와 함께 1927년에 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이 나온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의열단은<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라는 발표문을 통해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정당’을 제안하였다.註 490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그러다가 1930년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무렵,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1929년 봄 이래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492 그러다가 1931년 9월에 일제의 만주침공을 접하면서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남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의열단 활동은 김원봉이 남경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한 일과 한일래와 박건웅이 중심이 되어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한 일로 나타났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맺어진 인연을 최대한 살려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中韓合作에 관한 建議>,<韓國革命의 現狀과 本團의 策略>,<朝鮮義烈團의 政治決意案> 등을 제출하고, 그 결과 장개석의 결재를 얻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었다.註 493 이 학교의 설립목적은 청년간부들에게 항일투쟁정신을 계승시키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시켜 한국의 절대독립을 달성하고 중국의 목표인 만주국 탈환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기까지 3기에 걸쳐 모두 125명의 청년간부들을 배출했다.

의열단이 전개한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되다가 일단 실패한 민족협동전선체 구성에 관한 노력이었다. 1932년 10월 이래로 구체화된 이 활동은 의열단을 비롯하여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신한독립당 등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를 결성하고, 뒤이어 11월 10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註 494 이로써 1926년 이후 상해 등 중국본토지역에서 추진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한 단계 나아가 장차 ‘대동단결체’를 조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의열단의 위치에서 볼 때, 이러한 결실은 1926년 겨울에 광주에서 열린 의열단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와 1927년 5월에 발표한<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선언>등으로 시작하여 1935년 7월 5일에 성립되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연결되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은 당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문제와는 관계없이 다른 독립운동정당과 동일한 자격과 위치에서 제 역할을 발휘했다.


註 481

金榮範,≪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창작과비평사, 1997), 141쪽.

註 482

김희곤,≪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지식산업사, 1995), 250쪽.

註 483

水野直樹,<黃埔軍官學校と朝鮮の解放運動>(≪朝鮮民族運動史硏究≫6, 1989), 63쪽.

註 484

水野直樹, 위의 글, 59쪽에서 재인용.

註 485

朴泰遠,≪若山과 義烈團≫(백양당, 1947), 206쪽.

註 486

梶村樹秀,<1940年代 中國の抗日鬪爭>(≪三千里≫31, 1982), 102쪽.

註 487

韓相禱,≪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문학과지성사, 1994), 223쪽.

註 488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340∼341쪽.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註 490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102∼104쪽.

註 491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5), 704쪽.

註 492

坪江汕二,≪鮮民族運動秘史≫(東京:日刊勞動通信社, 1959), 65쪽.

註 493

군사간부학교 운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韓相禱, 앞의 책, 255∼296쪽.

金榮範, 앞의 책, 299∼316쪽.

註 494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473∼474쪽.



의열단의 대표인 김원봉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4210883&position=0#483_comment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였다.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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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무산계급 혁명)을 위해 일제시대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 , 레닌학교 세우고 레닌학교에서 조선인 청년들을 빨갱이들로 교육시켜 조선반도에 적화 목적을 위해 침투시켰다. 그리고 레닌이란 잡지도 발간하였으며 

무無정부빨갱이의열단테러리스트 이름을 무산자無産者전위동맹 즉 프롤레타리아 전위동맹으로 개칭하였다.




[ 김원봉은 1929년 가을 이래 북경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동맹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및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6635&position=2



"한편 김원봉은 1929년 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119 일제 자료에 의하면 김원봉은 1929년 가을부터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朝鮮共產黨再建準備委員會 및 레닌주의정치학교政治學校 운영에 관여하고 있었다.註 120 안광천의 주도 하에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는註 121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소재지는 북경北京 북성내北城內 동서조호동東西條胡同이었다. 

주요 구성원은 안광천安光泉·김원봉金元鳳·박건웅朴建雄·이영준李英俊·양백림楊伯林이었으며 

중앙부 산하에 훈련부·통신부·조직부·선전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10월의 중앙부 조직은 위원장 안광천 이하 김원봉·박건응·朴文昊·이영준·李賢卿·朴次貞의 7인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중앙부 직속으로 레닌주의사·레닌주의 정치학교가 병설되어 있었고, 하부조직으로 국내·북경·만주의 3개 지부가 있었다. 국내지부는 간사국 산하에 다시 목포·부산·강릉·대구·경성·평양·신의주·원산에 지방조직이 설치되어 있었다.註 122

레닌주의정치학교註 123는 6개월 기한으로 ‘공산주의 이론’·‘조직 및 투쟁’·‘조선혁명사’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4월∼9월, 1930년 10월〜1931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2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註 124 졸업생들은 1930년 8월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지식인 그룹·도시노동자·농민·진보적 학생층을 상대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과 대중운동의 고양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사례가 1933년 10월 일제 정보망에 포착되어 13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로부터 2년이 경과한 1935년 8월 발표된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 사건’註 125과 

‘공산청년동맹준비위원회共產靑年同盟準備委員會·강릉적색농민조합결성준비위원회江陵赤色農民組合結成準備委員會 등 조직사건’註 126이다.

또한 레닌주의사에서는 《월간 레닌주의》라는 선전지를 간행하였다. 1929년 5월 5일자로 간행된 제 1호에는 

〈조선정세朝鮮情勢와 조선공산주의자朝鮮共產主義者의 당면임무〉라는 장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註 127 이와 함께 잡지 말미에 실려 있는 ‘레닌주의 총서’ 간행예고 선전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동맹의 지향은 보다 분명해진다.註 128 이상 1929년 가을부터 1931년 전반기에 걸쳐 김원봉이 관계하고 있었던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김원봉의 동향은 공산주의 활동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1928년 11월의 선언과 함께 이 시기 김원봉의 성향에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게 드러나고 있음은 사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4210874&position=0


: 안광천安光泉의 주요 행적을 살펴 보면, 그는 동경유학시 일월회一月會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여름 귀국 후에도 일월회一月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產黨에 입당하여 그해 12월 金錣洙의 후임으로 제 3차 조선공산당(1926. 9∼1928. 2) 제 2대 책임비서 (1926. 12∼1927. 9)가 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각도간부 확대, 조직거점 확보, 만주총국·상해부·일본부 부활 등을 시도하였고, 1928년 제 3차 조선공산당 붕괴 이후에는 제 4차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직을 맡았다. 1928년 3월에는 그가 기초하고 제 4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에 관한 론강論綱〉을 통해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淸算主義的 입장의 견지로 말미암아 1928년 5월 끝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명당하였다.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주제어 관내 

출전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ch&setId=4216625&position=1


날짜 1929년 06월

김원봉·안광천, 북평北平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직하고 레닌주의정치학 교 설립.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 레닌주의 政治學校 명칭은 모스크바의 마르크스학원을 모방한 것이었다(스칼라피노·이정식, 앞의 책 p.238).



날짜 1929년 10월

權五勳, 김원봉의 레닌주의정치학교에 입학.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9.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安光泉,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과 무산자전위동맹無産者前衛同盟(의열단義烈團 개칭) 조직.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무산자無産者 = 프롤레타리아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 김원봉, 북경에서 무산자전위동맹 조직.

[출전] 조선혁명테제


날짜 1930년 09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제1기 졸업생 魚允鳳. 李鎭壹. 金武. 吳必得, 서울에 잠 입 (직접 노동자로 변신. 2개의 야체이카 조직).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0년 10월

김원봉. 안광천의 무산자동맹 잡지 레닌, 정간당함.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p. 202.(이상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자료)


날짜 1931년 02월 

레닌주의정치학교 2기 졸업생 권오훈·이소전 등 11명, 국내 잠입.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1년 07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졸업생 이철영, 김창린·이명욱 등과 함께 평양적색노平壤赤色勞 동조합動組合 조직.

[출전] 조선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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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유쾌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원봉은 개인적인 아픔에 직면하게 된다. 지난 15년 간 혁명동지로서 함께 항일역정을 헤쳐왔던 아내 朴次貞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1929년 김원봉과 더불어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활동에 참여한註 331 이래 민족혁명당 부녀부장 등으로 활동해 온 그녀註 332의 죽음은 김원봉에게 또 다른 번민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1944년 4월 20일 개최된 제 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선임되었다註 333고 하지만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음모술수가 많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은 그의 행동 반경을 제약하는 것이었고 그의 인상을 ‘중산복 차림의 남성답게 잘 생긴 투사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찌푸린 표정에 말을 아끼는’ 폐쇄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게 하였다.註 334 1945년 초 중경에 도착한 일본군 학도병 출신의 회고록에서 조차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註 335 김원봉에 대한 질시는 1940년대에 들어와 시작된 사실이 아니었다.

....: 김원봉과 임시정부 내 보수적 인사들과의 타협되기 어려운 성향의 차이에 대해 국민정부의 김원봉 지원업무를 주관하였던 滕傑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김원봉金元鳳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자들은 공연히 허위虛位에 앉아 있고 실제활동이 없으므로 이끌어 갈 수 없다고 보는 반면, 임정 측 인사들은 김원봉 등을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있고 

또 언행도 너무 偏激하다고 보아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滕傑 증언, 〈三民主義力行社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 p. 74).


김원봉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는 일제패망 직후인 1945년 9월에도 중경 소재 소련대사관과 중공당에서 운영하는 신화일보新華日報와 접촉하고 있었다( 《資料韓國獨立運動》1, p. 406).


김원봉 계열과 김구 계열의 불화 모습을 전하는 한 중국인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원봉 계열은 김구를 가리켜 “연로年老하고 력쇠力衰하며 군중으로부터 이탈되어 복국復國과 건국建國을 영도할 수 없다”고 하였고, 김구 계열에서는 김원봉을 “공산당 분자로 보고 중공과 소련의 이용을 받고 있으므로 중국정부는 그의 기만을 믿지 말라”고 비난하였다 한다(祝秀俠 증언, 〈中國國民黨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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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32년 05월 
朝鮮共産黨再建同盟 江陵그룹(권오훈·강익선), 메이데이격문 살포.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2년 06월 
朝鮮共産黨再建同盟(국제공산당계열) 江陵그룹, 정동면 유천리 농민야학 교에서 프로연극중 발각되어 다수 피체.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2년 09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국제공산당계열) 江陵그룹 10여명, 共販반대투쟁으로 피검.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2년 12월 
朝鮮共産黨再建同盟(국제공산당계열) 江陵그룹, 가마니검사 반대투쟁 전 개.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4년 07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국제공산당 계열) 사건으로 총 428명 검거·11명 송국.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신문명 조선중앙일보  
기사제목 경무당국이 발표한 당재건운동의 전모, 노동 학생층에 광범한 지하공작, 송국된 자 111명/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주요 관계자 씨명, 금년 3월 9일에 예심 종결된 취고 
기사형식 일반기사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3 
단수 07 
색인어 이름 : 김원봉,안광천,三宅鹿之助,이명&,정태식,권영태,이재유,이강명,이진일,어노식,오상선,오영&,권오훈,정동원,유기춘,강익선,최익선,최돈근,조규필,이윤경,강문영,안종서,서승석,박정두,변우식,이행인,어윤봉,오필득,&인갑,홍광중,이상각,강&호,이명신,한 대홍,김대용,안강윤,최성손,김연식,권태종,김만구,성귀래,한순원,박태준,이종신,심인택,김상규,&필수,김근찬,최선규,김삭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사회주의운동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1928-1945) >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노동운동 > 노동조합 > 혁명적노동조합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학생운동 > 독서회 > 노동자독서회



신문명 조선중앙일보  
기사제목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체계도/독일 洋行하고 와서 伯林 생활을 추억, 三宅鹿之助의 평소 사색/도립병원 안에 인쇄국을 설치, 강릉에서의 잠행운동 
기사형식 일반기사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4 
단수 08 
색인어 이름 : 안광천,김원봉,김정우,이영준,어윤봉,이&&,정동원,이진일,오필득,이윤경,권오훈,박문호,강익선,정인화,조국환,강덕선,최종필,김성렬,김재원,최종봉,조규필,최종필,김재하,정인화,조&환,조&필,최종봉,강덕선,김재하,정인화,조국환,최&근,홍광준,최선규,강&원,三宅鹿之助,정태식,조송희,이재유,권영태,정대성,함순성,변홍대,신&균,박봉국,김상룡,한봉렬,안병태,김삼만,이순금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사회주의운동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1928-1945) >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노동운동 > 노동조합 > 혁명적노동조합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학생운동 > 독서회 > 노동자독서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레닌」주의정치학교졸업생主義 政治學校卒業生 조선朝鮮에 잠입潛入 적화공작赤化工作 
북경北京에 근거根據 둔 김원봉金元鳳의 밀령密令 받고, 權麟甲 李鎭一等九名이 各地에서 活動, 江陵에서 實踐運動에[肖 : 權麟甲 李鎭一][寫 : 荷物車로 護送]//水原署高等係晝夜로 大活動//朝鮮共産黨再建同盟系圖//全協系와 握手코 共靑赤農의 AB兩結社組織, 江陵一帶를 活動舞臺로[肖 : 姜德善 曺圭弼]//罷業操縱이 發覺端緖, 最初에 檢擧는 東署 西門署에서 祕社의 端緖探知코 電光같이 三千警官動員[肖 : 咸雲鶴 金潤植 李相珏]//西署刑事隊 竹山에서 活動[寫 : 第三次 組織한 所謂A結社를 組織한 江陵 南山峯]//農民을 指導코저 地域別로 農民에 浸透, 勞動者 農民層을 敎養訓練, 各記念日에 檄文撒布[寫 : 祕社의 本據]//平壤에 出張 卄名을 押來三十여 명을 검거하엿다가 公判回附는 單二名//京畿道警察 新義州서 活動//高敞에서도 靑年一名檢擧//活動內容 ; A結社, B結社, 農民 指導「그룹」 農校「그룹」, 病院「그룹」//勞動靑年檢擧(水原)//檢擧渦中에 女兒를 順産(江陵)//京畿警察部員 車啓榮檢擧(水原)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2 
단수 01 
표제어 조선공산당재건동맹사건(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문서철 명  사상에 관한 한 정보 7  
문서 번호  교토 서쪽 기밀 제 8613 호의 3  
문서 제목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사건發覺에 관한 건  
발신자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  
수신자  경무 국장 등  
발신 일  1934 년 02 월 07 일  

색인어 이름 : 김원봉 김원봉, 안광천安光샘 ,朴建雄,李英駿,鄭海魯리素進,李鎭한, 권 오 훈,朴文昊,鄭東源,吳必얻고吳永甦리寬鎬,南英基,魚允鳳최鍾弼최鍾鳳김 주한 여름崔善圭정 용 화 강德善,金東夏,姜益善정 인화,姜泰元,李相珏,崔憲集,姜吉선 최燉根,金東元,崔明根,曺泰현 최鍾煥최承大,曺圭조용필 최遠圭,崔承여덟曺國환,洪光俊,李圭弼김 주한 단,廉在根최鎬燮금炯道최燉宇,崔建永최燉珏,權赫진 금赫來,沈亮볼래요 ,李聖봄咸貴와서,金萬9. 숲 하루코, 이종석 리鍾漢최鍾聲,崔敏植,金潤植,崔元圭,金天會,金昌會박 해 가르쳐,李東彦,金聖터지는 최善章,朴容台금振榮,曺秉음과,崔鳳한혜진,權玉천 최 재喆,閔丙대,盧鼎鉉,鄭允時,李柱세,姜益善리鍾烈,黃鍾손자,金萬炯,李京球,姜宅濟,鄭胤甲금禮源리우振燮,金昌麟,黃鍾선, 긴토키 김용옥 높은 일 환,沈仁사와,申明奎,李明旭,李吉보물,金庚柱,韓舜源,金根燦송 용 곤 김 상 규 렌弼守,崔斗翼,李昌植,李時켄,李鎭한 리寬鎬,朴又尙宇리鎭永,權淳학 ,李孝律리鎭河,許宗弼허炅升,全甲奉,黃熊도,吳萬부키 금炯斗,李相일곱 금 다섯 사와,安潤洽박炳彊,李相蜂리奎烈,朴永龍, 김원섭, 금燦奎,李光壽,李賢壽박 음과 대 리素進리鍾應,朱在버킨李貴順,朴日馨,南萬熙,咸順성,韓國模리鍾嬉,安三원 리澈地박鍾煥,鄭七星, 인권 다섯 단계,白潤赫,卞洪대,金三만사 리芬成,李仁行,曺昌주, 김 주한 동 신德均,姜晦求,徐昌,李孝貞,趙承구 리東天,沈桂월, 윤茂憲원래鍾電, 김명식,李順지금 유진 희,金花姬,崔浩極,李英淑,李順玉리載裕금 연의,趙斗元, 안전炳春,金三용 리鉉相,金秋스타,姜周軾,姜惠淑김 현,李貞賢리 정숙 박魯昌,姜潤求장鉉近금應鳳, 안전千洙금龍岑,吳한 순서 류福童,卞洪좋고,安洪性,兪順히메,孔成檜,朴榮煥,辛海甲,黃大용李錫아키라 리 백 만사,李仁基리炳德,姜允錫,禹燦9.沈鍾晨,元俊植,權赫도,金良仙,李相軒리載德,金顯旭한일麟浲,李丙驥,朴成勳,任建鎬,趙敬煥박鍾琪최 소 복,閔炳기둥, 금 만사 얻고 돈南泳,邊雨심어柳榮京,李東심어金永斗,李正煥리노 봄李正郁,趙正郁,趙成龍,權寧하야오權重徽김 전 거쳐 곽 히데토시 금炯善
지명 : 북평, 寬勳洞 안성, 소격동 강릉 東萊 빛 熙町, 공주, 평양, 안주, 이천, 고양 苑洞, 중림동, 대동, 崇四洞, 도쿄, 울진, 회양 파주 중화 부천, 鎭南 우라, 닦고, 강서, 성천, 대구, 원산, 고성, 인천, 진주 용천 해주, 博川, 北靑 포천, 신의주 안동 현, 碧潼 봉천 요양, 滿州 경성 동대문, 益善洞 아산, 東萊 아래 왕십리, 정평 김해 신흥, 말머리 리, 麻浦洞, 齊洞,苑洞, 시흥, 淸島 칠곡, 서린동, 창신동, 완도 세 물, 함흥, 나가하라, 뚝섬, 홍원, 樂園洞, 차야 마치, 仁義洞 인사동, 황금 타운, 타다노부 동 신설 리, 通洞 지아 會洞 길주, 鳳翼洞, 寧平, 안전 邊, 갑산 용인 울산 禮山, 평원, 淸凉 리, 諫洞, 계동, 臥龍洞, 內資洞, 철원, 김포, 충주, 금산, 靑松, 유우키, 明川, 松月洞, 타카시 역삼동, 安國洞, 달성군, 김제, 화동, 광저우, 숭인동, 카사이 마을, 성북동 세 淸洞, 杏村洞, 禮智洞, 운니동, 문천 부산 鏡城, 開豊, 음성군, 玉川洞, 尙州, 敦岩里, 송탄, 강화, 고창, 德原 영등포,靑葉 타운, 경산, 개천 당나라 洙洞 광화문 양평, 동숭동
단체 : 경성 벽돌 공장 일본 선후 야마다 인쇄소 강릉 공작위원회, 강원도 경찰부 강릉 경찰서, 펌프 공장, 주한 도쿄 조선 노동 총독 동맹 지부, 전협 번째 黑支 부 서부 연구 반 성산 공립 보통 學校, 新幹會 강릉 지부, 청년 동맹 강릉 지부 강릉 農學校 반제 동맹 공산 黨靑 년 사회 공산 청년 동맹, 中國 공산당 당원 조선 공산 당원 평 壤赤 색 노동 조합 평양 경찰서, 인사동 공작위원회 , 爀進 사회, 智育會 문명 사, 선명 한 인 사회,
레닌주의 정치 학교 주의적 정치學校, 동대문 경찰서, 태평양 노동 조합, 비판 사 경성 상공會社경성 여자 상업學校, 보성高普,廣成학원 중앙高普, 경성부 들려,儆新學校,養正高보 동德女高普, 화신商會경성農學校, 전기學校, 배재대高普양평 청년 동맹 양평 농민 조합 준비위원회 농민稧양평 적색 농민 조합, 담배專賣국 공장, 전기氣會사, 직업 소개소, 오오츠카 인쇄소 대륙 고무, 이노우에製絲경성 일보사 야마다 인쇄소, 어떻게 제 면사, 카타 쿠라 제 면사, 계절 영사 인쇄소, 조선 일보사, 고려 고무 공장, 중앙 일보사 조선 제 면사會社, 화신商會, 창신 조 후쿠시마 조 요시다 조 영등포 공작소 조선 제絲永영등포구 공장, 경성부 이화 여자 전문적學校중앙 보육學校경성 보육學校,藥學전문적學校, 진명 여고 보, 배재대高普, 연禧專門學校, 중동學校경성 제일高普중앙高普동德女高普경성 제국 대학 경성 둘째高普직업學校, 송도高普
사건 :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사건, 夜學 연극 간담회 강좌 삼일 운동 기념 메이데이 기념 육십 만세 운동 기념 러시아 혁명 기념일 공 靑第 두 會大 사회, 讀書 사회 조직, 鍾紡 총독 파업
기타 : 경성 일보, 중앙 일보, 보안법 위반 新幹會 청년 동맹 해소 문제, 만주 사건 카와 치안 유지법 위반 아사히 신문

김원봉, 안광천이 맨 먼저 언급되어 있고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 학교 운영하는 운영진 이라구 나온다.




사상에 관한 한 정보 6>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사건 發覺에 관한 한 건
문서철 명  사상에 관한 한 정보 6  
문서 번호  교토 서쪽 기밀 제 8613 호  
문서 제목 조선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공산黨再건설 동맹 사건發覺에 관한 한 건  
발신자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  
수신자  경무 국장 등  
발신 일 1933 년 10 월 16 일  

색인어 이름 :朴良玉,李季陽, 安光샘 , 김원봉 ,朴建雄리 히데토시 리康明(李素連), 리鍾嬉,韓國模,朴日馨,鄭福봄咸順성 강鎬孫,朱在버킨洪顯明(李貴順리 타카아키),南萬熙,廉主壽,李鎭한,魚允鳳,吳永甦(금 일산)安三원 (張斗旭), 리澈地(금 종 한)吳必얻었다 (吳聖시게루)朴文昊( 박漆山)李伯文, 권 오 훈,南英基,金舜鎭,鄭俊碩유桭海물고기魯植정 동원,李哲英,崔愛琳,南英基,李志天, 킨,吳尙선,李春岩,金學圭리素進박次貞,朴基瓚,崔俊永,劉基春,權赫진,崔敦祐,崔圭進금 상 터지는 금炳卨,崔敦圭,李永淑,李貴明전 죽자,廉圭壽리鍾國,楊琴,李賢卿
지명 : 蛤洞 대구 東萊, 고양 龍頭里 동대문, 북평, 부산, 강릉, 평양, 신의주, 안성, 아산, 苑洞, 정평, 종로, 蓬萊, 齋洞, 鍾岩 마을 아래 왕십리, 瑞興 광화문 파주, 麻浦洞, 고성, 이천, 崇四洞, 공주, 김해, 시흥 신흥 빛 熙町, 중림동, 仁義洞 경성
단체 : 경성 지방 법원,鍾紡공장, 서울 고무 공장, 조선 조선 공산당 공산 당원 재건 동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 학교 주의적 정치學校, 중앙 상공 주식會社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강릉 공작위원회,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조선 지부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북평 지부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만주 지부大昌직물會社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화지 선후 야체 이카
사건 :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사건, 中國 공산당 당원 사건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이 보낸 정보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 학교 운영진 안광천, 김원봉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ad&setId=4210858&position=3



김원봉의 호는 와카야마이며陳國斌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그는 1919 년 만주 길림에서 의열단 회중을 조직 한 후 만주와 관내 그리고 국내 등지에서 의열 활동을 하였다. 1925 년에는 중국의 황포 군관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교장은 장개석이었다) 이후 중국의 북벌에도 참가 하였다. 1933 년 10 월에는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 6 대의 명의로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 하였다. 김원봉은 이러한 중국의 원조와 군관 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을 기반으로하여 의열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1929 년경에는 ML 파 공산주의자安光샘과 제휴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건설하고 부설 기관으로 레닌 정치 학교를 설립 하는 등 공산주의자들과도 관계를 갖고 있었다 (카시마 세츠코 "김원봉의 사상과 행동」, 무궁화會編"조선 1931 ○ 년대 연구」(도쿄 : 삼일 서점, 1982); 박태원 " 와카야마과 의열 회중 "(白楊堂1947); 반公昭"영 날짜 인 한국 "(中國升학자圖書의식 기 공사, 1946);秋憲樹편, 「자료 한국 독립 운동」제 2 권, pp.94 ~ 95 참조 )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0861&position=0


1928 년 이후 의열단이 협동 전선 파를 지향하는 큰 기연이 된 것은 김원봉이 1928 년 여름 상해에서 ML 파의 공산당원으로 책임 비서를 지내고 신간회 (新幹會)의 조직에이면에서 큰 몫을 담당했던 안광천 (安光샘;安孝駒)과 만남으로써 비롯되었다고한다.註082 그리고 그는 1929 년 초 북경에서 안광천과 제휴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조직하고 그 전위 투사 양성 기관으로서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설치 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행하고, 제 1 차로 1930 년 4 월부터 같은 해 9 월까지, 제 2 차로 같은 해 10 월부터 이듬해 인 1931 년 2 월까지 2 차례에 걸쳐 합계 21 명의 한국인 청년을 수용 교육 하여 한국 내 적화 공작을 위해 밀파 하였다고 일본 측 관헌 자료는 전한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0861&position=1


빨갱이 김원봉의 의열단 9 주년 창립 기념 연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0861&position=1
주석 84 번 참조.


: 조선 총독 부 고등 법원 檢事 국 사상 부, 앞 책, p.30.
조선 총독 부 경무국, 앞 책, p.80에 의하면 1929 년 말 의열단은 북경에서 ML 파와 합동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조직 하였을 때부터 좌경화되어 사실상 해체되었다고보고있다. - http : // db .history.go.kr / item / level.do? itemId = hdsr & setId = 4210861 & position = 1
주석 85 번 참조.


의열단은 1919 년 11 월에 길림성에서 창단 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활약하다가 1929 년 12 월에 해체 선언을 할 때까지 10 년 동안 파괴 · 암살 등의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의열단은 20 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 투쟁을 벌 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 년부터 활동 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 인 김원봉 (김원봉)은 여러 단원들과 함께 황포 군관 학교 (黃浦 군관 學校) 제 4기에 입학 하였다. 당시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 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 대리를 맡고 있던 등 연달 (鄧演들)이 공산주의자 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되었다. 이들은 졸업 후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 1927 년 5 월에 촉성 회 운동에 대한지지 선언을 발표하기도했다. 그후 약화 된 모습을 보이던 의열단은 조선 피 압박 대중의 요구가 대중적 협동 전선 형태라고 주장하면서 해체 성명을 발표했다. 이 무렵 김원봉은 북경에서 조선 공산당 ML 파 간부 인 안광천 (安光 샘)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조직하고 전위 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 註 069
1931 년 9 월에 만주 사변이 일어나 자, 김원봉은 의열단을 부활시켰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0861&position=2


강원도는 강릉 · 고성 · 통천 · 양양 · 삼척 · 울진 등에서 혁농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8 년 제 4 차 공산당 검거를 피하여 중국으로 망명 한 안광천은 1929 년 가을 이래 의열단의 김원봉 (김원봉)과 제휴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을 조직하고 그 밑에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세워 활동가를 양성하였고 다시 조선 지부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이 학교 졸업자들을 국내에 투입 하였다.註058이 학교에서 교육을받은 이진일 (리鎭壹) · 이강명 (리康明) 등은 1930 년 이래 앞의 ML 계의 '재건 동맹', '재건 준비위원회'등과 활동 하나 당시 ML 계의 중요 인물이 대거 검거되고 잔여 인물과의 연락도 여의치 않은 까닭에 파별 이 거의없는 강원도 지방에서 '조선 공산당 공작 강릉위원회'를 결성하고이를 최고 기관으로 부문별로 공청 (공 푸른) · 혁명적 농민 조합 · 반제 동맹 등을 조직 하였다.이 조직은 120여 명의 조직원을 확보하고 농촌 진흥회 방해 · 군청 면사무소에서의 항의 · 학생 맹휴 등을 주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하다가 이강명 등 94 명이 1933 년 검거되었다.註059 -http://db.history.go.kr/item/level.do? itemId = hdsr & setId = 4210861 & position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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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이 일제시대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레닌학교 세우고 빨갱이들을 교육시켜서 조선반도로
잠입시킴 ㄷㄷ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레닌」주의정치학교졸업생主義 政治學校卒業生 조선朝鮮에 잠입潛入 적화공작赤化工作 
북경北京에 근거根據 둔 김원봉金元鳳의 밀령密令 받고, 權麟甲 李鎭一等九名이 各地에서 活動, 江陵에서 實踐運動에[肖 : 權麟甲 李鎭一][寫 : 荷物車로 護送]//水原署高等係晝夜로 大活動//朝鮮共産黨再建同盟系圖//全協系와 握手코 共靑赤農의 AB兩結社組織, 江陵一帶를 活動舞臺로[肖 : 姜德善 曺圭弼]//罷業操縱이 發覺端緖, 最初에 檢擧는 東署 西門署에서 祕社의 端緖探知코 電光같이 三千警官動員[肖 : 咸雲鶴 金潤植 李相珏]//西署刑事隊 竹山에서 活動[寫 : 第三次 組織한 所謂A結社를 組織한 江陵 南山峯]//農民을 指導코저 地域別로 農民에 浸透, 勞動者 農民層을 敎養訓練, 各記念日에 檄文撒布[寫 : 祕社의 本據]//平壤에 出張 卄名을 押來三十여 명을 검거하엿다가 公判回附는 單二名//京畿道警察 新義州서 活動//高敞에서도 靑年一名檢擧//活動內容 ; A結社, B結社, 農民 指導「그룹」 農校「그룹」, 病院「그룹」//勞動靑年檢擧(水原)//檢擧渦中에 女兒를 順産(江陵)//京畿警察部員 車啓榮檢擧(水原)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2 
단수 01 
표제어 조선공산당재건동맹사건(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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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34년 07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국제공산당 계열) 사건으로 총 428명 검거·11명 송국.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4년 07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국제공산당 계열) 사건으로 총 428명 검거·11명 송국.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4년 07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국제공산당 계열) 사건으로 총 428명 검거·11명 송국.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출처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 , 한국 역사 정보 통합 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빨갱이김원봉이 무려 조선반도로 빨갱이들을 428명이나 잠입시킴.
김원봉은 국제공산당 즉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 즉 소련과 연계하여서 조선반도에 빨갱이들을 정말
정성껏 심음. 그리고 전부 잡혀버림.

428명이나 경찰서 지하로 가서 고문당했다는거임. 
근데 이건 하나의 사례에 불과함.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우루루 경찰서로 잡혀오는건
일제시대에 흔히 볼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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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38년 10월10일

김원봉金元鳳, 중국군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한구漢口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산 하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창설.

[출전] 한민족독립운동사 4 p. 448. (이상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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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이란 빨갱이총연합정치단체 만들고 '조선민족전선연맹'이라고 빨갱이 군사총연합도 세우고

조선민족전선연맹 소속 부대로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는데 빨갱이 군대임.

조선의용대를 이끄는 김원봉 김두봉 김무정 최창익 허정숙 김명시 전부 빨갱이들임. 김두봉은 나중에 북괴 제1대 수령되는 사람이고

김무정은 북괴 장군이 되는데. 김두봉 김무정은 625 남침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음. 김원봉은 북괴에서 10년간

국가검열성 총책임자, 노동성 총책임자 , 북괴 초대 내각 대의원 등 북괴의 요직들을 두루두루 맡고 훈장까지 받음.

최창익은 일제시대부터 아주 유명한 극極빨갱이이고 소련에서 전문적으로 공산당교육을 받고온 인간임.

정숙도 일제시대에 이미 유명한 여자 빨갱이였고, 애비 허헌 역시 빨갱이임.

허헌은 북괴 주요 정치인물이 되고 허정숙 역시 북괴 초대내각 문화선전성 총책임자 대의원이 됨.

김명시는 조선공산당 두목 박헌영이 보낸 여자 빨갱이임.

얘네들을 전부 '연안파빨갱이'라고 부름.


이 인간들은 독립운동 한적없음. 농민 노동자 계급유일독재 사회주의 낙원을 세우기위해 자본주의 제도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놈들임.

독립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이 하는거고 민족주의자들은 우파임.

북괴 빨갱이가 '우리민족끼리~' 라고 해서 북괴 빨갱이가 민족주의자는 절대로 아닌것처럼,

김원봉 김두봉 김무정 등이 민족주의자들도 자기들 편으로 포섭시킨다고해서 민족주의자라~~고 한다면..., 그건 절대로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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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한국 지역 책임자인 김일성은 남조선의 빨갱이들에게 지령들을 내린다.


그 지령은 "남조선을 폭동으로 적화시키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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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조선반도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괴상한 국가가 출현한다.

고려공산당이며 빨갱이 인민당 당수인 빨갱이 여운형이 만들었구 지방 곳곳에 '인민위원회'란 빨갱이 자치기구를 도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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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에는 김일성이 소련의 한국지역 책임자로 온다. 



그러자 여운형의 인민위원회는 김일성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남조선을 적화시키기위해 본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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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조선공산당 보스 박헌영 , 우측이 고려공산당원이자 빨갱이 인민당 보스인 여운형)


여운형은 눈빛부터 사악한 빨갱이의 눈깔을 가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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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김원봉은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국안하고 개인자격으로 입국해서 남조선을 적화시키기위해 온다.



빨갱이김원봉은 귀국 직후 빨갱이 여운형 조선인민공화국의 군사부장으로 임명된다. 

빨갱이 대장군이 된 것이다.



빨갱이김원봉은 그 즉시 노동자 농민 계급의 군대를 급히 만든다. 바로 빨갱이 국군준비대였다. 그 숫자는 무려 8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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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군대 국군준비대 창설에 참가한 놈들 : 



1. 조선인민공화국 군사부장 김원봉 장군 


2. 고려공산당원이자 빨갱이 인민당,인민위원회 보스 여운형 , 중도좌파 반쪽 빨갱이 안재홍


3. 조선공산당 보스 박헌영


4.  빨갱이 부녀총동맹 대장 김명시 


5. 빨갱이 성주식 , 조선공산당 소속 빨갱이 단체들 청총 전평 전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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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김원봉 : "일제를 따라 지원병 , 학병이 됐던 청년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이제 국군준비대입니다!

최고명예의장으로 김일성 장군 , 김무정 장군을 추대합니다!

국군준비대 8만 여러분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미군정과 이승만 정권과 대한민국 경찰을 가리킴)의 군대가

되지말고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프롤레타리아 무산無産 계급)을 위한 군대가 되어야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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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의 「짠타크(잔다르크)」 로 불리는 빨갱이김명시 :  "국군준비대 여러분 ! 전 무정武亭장군(북괴 장군 김무정)의 직속지휘관으로 부하 2,000명을 가지고 항일전에 활동하여 무훈을 세운 

연안독립동맹延安獨立同盟의 여장군 김명시金命時입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전 중국에서 김무정 장군과 함께 조선인 지원병 , 학병들을 맞아들여 공산주의 사상을 교육시켰습니다. 

이제 이 지원병 , 학병들은 (김원봉 장군을 따라) 통일전선戰線에 참가하여 한뭉치가 되어야합니다.

조선사람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이승만 정권과 경찰을 비꼬는 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하여 한뭉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피로 조선을 되찾자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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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9월 14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정부의 군사부장으로 등장하기도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김원봉金元鳳의 귀국 .......................

.......귀국 직후 김원봉은 국내 혁명가들(빨갱이들)을 방문 국내사정을 청취하는 한편, 

12월 8일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식에 참석 스스로 ‘군인’임을 천명하였다. 

또 그는 12월 26일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국군준비대 전국대회 축사를 통해 “국군은 친일파·민족반역자의 군대가 아닌……노동자·농민·근로대중을 위한 군대가 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는註 363 등 분주한 시간 속에서 1946년의 새해를 맞게 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76843&positio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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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김원봉 :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여러분! 전 군인입니다! 혁명의 선봉에 서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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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김원봉은 빨갱이국군준비대를 만들고서 프롤레타리아(농민 노동자 근로대중 무산無産계급 혁명 투쟁)을 위한  군대가 되라고 말했다.

김원봉은 미군정 , 이승만 정권 , 대한민국 경찰들을 모조리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몰아서 한꺼번에 다 때려잡아 

적화시키려고하는 무시무시한 악마惡魔였다.



빨갱이독립군(조선의용대의 화북 지역 멀티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여女장군 김명시金明時.  

동료 여성교관 허정숙과는 달리 결혼을 밥먹듯이 하진않았다. 

남조선을 적화시킬려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가입해서 '부총'이라는 여성부를 거느리게된다.

빨갱이김원봉과 함께 [빨갱이국군준비대] 8만을 만들고 후배들을 열심히 훈련시켰다.


김명시는 일제시대부터 '조선공산당재건운동' 골수빨갱이 '조선공산당 당원'이었으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자이며 

조선공산당 보스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빨갱이김원봉의 빨갱이조선의용대를 도우러 화북으로 갔다.  

화북에서 빨갱이조선의용군 제1선 적구부대 ‘여자부대’를 지휘하고 

빨갱이조선독립동맹 천진분맹 책임자로 있었다.

해방 이후엔 북조선 노동당 정치위원으로 남조선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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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군대 국군준비대는 광복군마저 흡수해버린 후 대규모 시위를 길거리에서 벌이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1. 신탁통치를 반대한다. 북한이랑 합치자


2. 남조선의 모든 정당은 해체하라 임시정부도 해체하라 여운형의 인민공화국도 전부 해체하라

각 당과 각 파는 모조리 해체하라 


3. 오로지 민족통일전선戰線 뿐이다! 오로지 우리민족끼리다! 우리는 민죽주의민족전선戰線(남조선 빨갱이 총연합)의 선봉군이다 !

 오로지 통일! 오로지 독립!  민족분열을 반대한다! 북조선과 합체하자 !


4. 우리는 다만 조선인민군이다 !


5. 이승만은 반동이다 !   반성없는 반역자들은 피의 세례를 받으리라 ! 우린 최후로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싸운다 !


6. 우리 언론을 탄압하는 우미관 김두한을 죽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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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 미군정이 보낸 특수부대 수십명이 빨갱이국군준비대를 상대로 2차례 공격하여서 간부들을 모조리 납치해감.

다음날 김두한과 우미관식구들하고 대한민청 청년단이 와서 총과 죽창 칼 쇠파이프로

신나게 학살. 빨갱이국군준비대는 그렇게 강제해산됨. 




==========김두한이 증언하는 빨갱이 국군준비대 ============================================


김두한 : 


1. 남로당으로 변한 조선공산당 외에 공산당 조직도 수십 개나 있었지요. 공산당 조직은 노동계, 학생, 예술가쪽으로도 힘을 뻗쳐서 전국에 많은 산하 조직을 갖고 있었지요. 이 조직들이 인민전선이라는 단일전선으로 나갈 때였죠.



2. 한데 미국은 좌익과 우익을 합작시키려고 하지 않고 좌익과 우익을 제외한 중간노선한테 정권을 주려는 거예요. 

하지만 말이 중간노선이지 그들 대부분이 좌익계라서 만일 중간노선이 정권을 잡게 되면 적화될 게 뻔해서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북에 있는 소련군은 우익을 다 때려 죽이고 공산당만 적극적으로 밀었는데, 



3. 그때만 해도 남조선에 군대라는 게 없었어요. 국방경비대가 1947년쯤 돼서야 정식으로 발족했으니까. 그때 군사영어학교라고 나중에 국방경비대가 되는 단체가 있었지만 2,3천 명에 불과한 데다 미군들 눈치 보느라 군사 활동을 아예 못했거든요. 그러니 힘이 없었지요. 하지만 좌익들은 북쪽의 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까 힘이 아주 막강했어요. 


4. 말이 국군준비대지 사실은 남한인민항쟁 유격사령부예요. 이 국군준비대의 명령계통이 조선인민공화국(고려공산당 인민당 빨갱이 보스 여운형이 세운 인민위원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인민위원회의 군사부장 그러니까 총사령관이 김원봉이다. 사실상 김원봉이 국군준비대의 총보스)이예요. 



5. 국군준비대는 명동에 본부를 두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장교집합소를 만들고 학병 출신들과 지원병을 모집해 세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6. 이 국군준비대를 유심히 보고 있자니 단순한 준비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군사 반란을 일으켜 남한을 적화시키려는 야욕이 감춰져 있었던 거지요.

잘 아시겠지만 여순반란 사건도 몇몇 장교가 모의해서 시작했지만 나중에 몇 천 명씩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국군준비대도 몇 명 안 되는 인원이지만 만일 사건이 커져서 소련군이 북에서 밀고 들어오면 큰일날 일이지요. 

이에 한민당도 위기상황을 느끼고 동분서주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니 저걸 부수지 않으면 무력혁명이 일어나겠다 해서 국군준비대를 때려부시라는 명령을 제가 받은겁니다. 



7. 그때는 경찰이라고 해봐야 전국을 합쳐서 몇 백 명밖에 안 되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경찰이 군인들과 전쟁을 할 수 있나요. 

경찰은 치안이나 담당하던 사람들인데 싸울 줄을 알아야지. 


8. 장덕수 선생은 공산주의는 피의 혁명을 원하기 때문에 국군준비대가 틀림없이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감지한 거예요. 그래서 고민 끝에 내게 부탁한 거지요. 군사조직도 없고 경찰도 못믿으니까.


한데 그 전에 미군한테 무장을 해제당해 무기가 없었잖아요. 그 얘길 장덕수 선생에게 했죠. 그랬더니 장택상 씨가 무기를 책임지겠다고 해요. 지금 중앙청 옆에 경찰별동대 본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경찰전문학교 무기창고가 있다는 거예요. 총이 5천자루가 있는데 그걸 전부 줄 테니 소문 안 나게 가져 가서 일을 치르라는 거죠. 뚝섬 근처 한강변에 자갈천이라는 인적이 드믄 벌판이 있었어요. 그곳에 총을 갖다 놓으면 우리가 가져 가겠다고 했지요. 3천 명만 동원하면 충분하니 3천 자루만 달라고 했지요.


─ 장택상 씨는 그때 군정의 수도청장이었죠?


▲ 네. 수도청장이니까 경찰의 총수인 조병옥 박사와 상의해서 총을 구해줄 수가 있었던 거지요.

총 외에도 수류탄을 비롯해 실탄, 기관총까지 갖다 놓았더군요. 총을 인계한 나는 특공대원을 차출하기 시작했습니다.



9. 빨갱이 국군준비대는 내가  지들을 기습하는줄 전혀 모르고 있었죠. 장교 훈련소가 지금의 육사 자리입니다. 

그때 목조 건물이 6개가 있었어요. 2층짜리지만 제법 컸어요. 전부 6개 동이지만 1, 2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니까 12개잖아요.

그래서 부하들을 12개조로 편성했지요. 다 때려잡아 죽였습니다. 


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3&r_serial=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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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빨갱이 두목들이 전부 북괴로 도주하자 김일성은 북조선 빨갱이와 남조선 빨갱이를 퓨전시켜 
북괴를 건국해 초대 내각이 출범한다. (1948년)

수상은 김일성.  
허헌 김달현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국가검열성(국방상) 총책임자 김원봉 
민족보위상 최용건
주석 김두봉
장군 김무정
문화선전성 총책임자 허정숙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
내무상 박일우
농업상 박문규
상업상 장시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육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이승엽
노동상 허성택
보건상 이병남
도시경영상 이용
무임소상 이극로
최고재판소장 김익선
최고검찰소장 장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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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게 김원봉이 김일성에게 반란하려는 역도들을 색출하고 ,  국방전략을 짜는 국가검열성 국방성의 총책임자
였다는 사실이다.
김원봉은 일제시대에  무無정부빨갱이질하다가 소련과 동맹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하게된 의열단 ,  
조선공산당재건동맹,레닌학교,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화북 멀티 조선의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월북하니 김일성이 그를 검열 책임자에 국방 장관으로 앉혀놓은 것이다. 
김원봉은 1948년부터 1952년까지 검열책임자 국방장관으로 일한다. 그 사실은 그가 625 남침 수뇌부에 소속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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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김일성은 1950년을 '조국통일의 해'라고 지랄한다.
남조선 적화에 번번이 실패하자 이제 무력으로 남조선을 적화시키기로 작정한 것이다.


남조선에서 빨갱이들이 바퀴벌레마냥 아무리 무수히 나와도 김두한과 경찰들과 이승만 정권 , 미군정이 
에프킬라 뿌리며 신나게 잡아대니 어쩔수없이 남조선을 적화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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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공산당에 의해 전부 적화되자 김일성은 일제시대 중국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원봉 김두봉 김무정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3만명을 북괴로 전부 오게 한다.
조선의용군은 빨갱이김원봉 총사령관 빨갱이김두봉 부사령관 빨갱이김무정 장군놈 최창익 허정숙 김명시 빨갱이들이 만든 
일제시대 빨갱이 군대다. 
그러자 북괴의 군사력은 엄청나게 존나 세진다. 조선인팔로군,동북항일연군까지 북괴로 와서 무려 5만명이나 모인다.
거기에 북괴 본래 인민군까지 합치면 5만을 훱씬 넘는 병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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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 제1대 주석 김두봉 (김일성이 세워놓은 허수아비 부하)이 1949년 12월말에 모스크바의 아시아방어회의에 가서 
한반도에서의 남침 전쟁에 대한 미래의 행동계획을 소련으로부터 지령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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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마오쩌둥은 신중하게 625 전쟁 계획을 짜서 소련의 한국지역 책임자이자 북괴의 수상이자 진짜 권력자인 김일성에게 하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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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지하공작대와 무장공비를 남조선으로 몰래 파견시킨다.


그리고 남로당 50만명 인원들로 하여금 이승만에게 거짓전향하게 하고 내부 반란 세력으로 임명한다.
빨치산 부대도 보낸다.


1. 지하 공작대 , 무장공비는 남조선에 가서 숨어있다가 폭동을 조장해라 

2. 빨치산 부대는 남조선 국방경비대의 연락통신망을 다 파괴해라 

3. 남조선의 남로당 빨갱이 50만명은 거짓전향했다가 내부 폭동을 일으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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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이 공동의장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前線'이란 대남對南 선동 라디오는 
우리민족끼리 어서 통일하자고 선동하는 방송들을 자꾸 내보냈다. 
아주 구체적인 내용으로 방송을 보냈는데. 방송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반일 감정 조장 (한국과 일본의 사이 이간질)

2. 이승만 정부를 반동이라 하며 비난

3. 미국이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하니까 외세를 배격하고 우리민족끼리 통일해야한다.

4. 우리 북조선 인민들은 전부 평화통일을 위한 서명에 전부 동참했다.

5.  남조선 민주주의자들은 독재 이승만 파쇼에 저항하여 제2대 국회의원선거國會議員選擧(5·30선거)를 방해해라.
 인민위원회 부활시켜라 

6.  남조선의 파쇼 경찰은 남조선의 민주주의자들(빨갱이들)에 대한 검거를 즉시 중단하고 석방하라

7. 외세를 배격하고 북조선 남조선의 통일국회를 열자 

8. 유엔 , 미군정은 즉시 남조선에서 철수하라 

9.  조국통일祖國統一을 방해한 자者(한국대통령韓國大統領을 포함한 지도자급指導者級 인사人士 거의 전원全員)는 
민족반역자이므로 통일 회의참석대상會議參席對象에서 제외하라!

10.  남한南韓의 국회國會와 최고인민회의最高人民會議를 합병하자! 이것은 최고인민회의最高人民會議 통합안統合案이다!

11. 공동농장 만들어라 공동공장 만들어라

12. 소련蘇聯과 민주주의 중국中國과 인민민주주의 여러 나라들人民民主主義諸國들 및 기타 
자유애호국가自由愛護國家들과의 친선親善관계를 발전, 강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13. 미제국주의자 타도하라 친일파 모조리 다 죽여버려라 !

14. 남조선 군대와 경찰은 전부 해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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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전선 공동의장 김원봉의 대남對南 선전 방송은 사실 625 남침을 가리고 마치 평화통일을 북한이 원하는듯양 
연기하는 연막전술이었다.

연막전술이 아주 잘 무럭무럭 피워지는 동안 북조선은 남침을 위한 모든 준비를 착실히 해놓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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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김원봉은 625 남침에 적극 협력한 북괴의 국방 장관이며 국가검열성 총책임자이며 남조선에 우리민족끼리 선동하는 방송
내보내는 조국통일전선이란 라디오의 MC였다. 
이놈이 내보내는 방송 때문에 대한민국은 북괴가 전쟁 준비하는거모르고 평화통일 막 외쳐대니 전쟁준비안하는건가? 하다가
그냥 털려서 낙동강 이남 빼곤 북괴한테 다 먹혀버렸다. 
김원봉은 신나게 조국통일전선 라디오 MC를 맡아서 방송했다. 북괴가 625 남침 준비하는거 못알아차리게 연막전술을
무럭무럭 편거다. 김원봉은 MC무현같은 빨갱이개새끼였다.  
김원봉이 중국에서 운영하던 빨갱이 조선의용군 3만명이 625 남침 선봉에 서서 한국의 경찰 , 군인 , 부자를 낙동강 이남 빼곤
 전부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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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참고 자료 : 




출처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 , 한국 역사 정보 통합 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민족혁명당 , 조선민족전선연맹 , 조선의용대 , 화북조선독립동맹 , 화북조선의용군 에 관한

네이버 지식백과 검색 (한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등등)



한국 사회주의 운동 인명 사전 150 페이지


노동자의 책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7&idx=3336



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3&r_serial=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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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1932년 사이 의열단의 국내 대중투쟁 성과를 정리한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농민운동

○ 농민조합農民組合 신설 : 洪原·龍川·博川·江陵

○ 抗租運動 : 龍川 不二農場의 제 2차 抗租運動

○ 농민조합農民組合 개조 : 南海

一. 노동운동

○ 支部組織 : 釜山陶器工場·釜山橡皮工場·京城鐵道會社·京城朝鮮紡織工場·平壤電氣工廠

一. 학생운동

○ 支部組織 : 京城第一女子高等普通學校·京城醫學專門學校·大邱商業學校·大邱高等普通學校·平壤女子高等普通學校

( 〈韓國義烈團工作報告書〉1932. 12. 10, 《資料韓國獨立運動》3, p. 25)

이들 의열단 대중운동 조직의 구체적인 조직실태·활동상황 등에 관한 사실은 ‘江陵’의 경우를 제외하고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1930년대 국내 대중운동의 전개와 관련하여 시사적인 의열단의 국내공작 실태는 향후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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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봉기와 광주봉기로 대변되는 국공분열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상해로 온 김원봉의 당면과제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과제는 제 3차 조선공산당 제 2대 책임비서였던 安光泉과 만나게 되는 1928년 중반부터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안광천과의 만남은 김원봉의 혁명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註 112 또한 이 시기는 김원봉의 항일투쟁 전과정에서 좌경적 경향이 비교적 뚜렷하게 표출되던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 김원봉과 의열단의 노선변화에는 안광천으로 대표되는 좌파협동전선론자들의 영향이 일정한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제 1차 국공합작의 파탄이라는 국제적 환경의 변화, 新幹會·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 등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전개라는 객관적 정세변화가 주된 요인으로 기능하였다.
김원봉이 안광천을 처음 만난 것은 1928년의 늦여름 상해에서였다. 안광천註 113은 제 3차 조선공산당 제 2대 책임비서로 활동하며, 신간회 결성을 배후 지원하는 등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제창하였으나 세력다툼에서 좌절한 인물이었다. 안광천의 출현은 김원봉이 지나간 2년 동안 중국 국민혁명 현장체험 과정에서 절감한 민족협동전선론을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형상화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 시도는 1928년 10월 4일 발표된 〈朝鮮義烈圈 제 3차 全國代表大會宣言〉註 114 중의 정강·정책에서 드러난다.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20개 항의 정강·정책은 국민의 기본적 자유 보장, 남녀평등의 지방자치 실시, 의회주의 ‘民主國’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였다.註 115
창립 당시의 공약 10조에 비해 구체적이고 진보적인 지향을 함축하고 있는 이 선언은 1926년 겨울 결의된 ‘혁명정당으로의 전환’ 방침을 구체화하는 한 과정이었으며, 또한 1927년 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한 자체정비 노력의 일환이었다. 결국 의열단의 민족협동전선운동은 자기혁신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셈인데, 그 요강은 다음달인 11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註 116의 내용으로 포괄되었다.
의열단의 민족협동전선론이 ‘실천을 통한 진전’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는 이 문건은 향후 의열단의 진로가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집중될 것임을 분명히 하였고, 그 원동력을 광범위한 대중의 혁명적 욕구에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강도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절대독립을 탈환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협동통일’뿐이라고 규정하였다. 때문에 “모든 주의에 의한 대립, 모든 붕당에 의한 분열이 극복되지 않으면 아니되고, 조선혁명 운동도 세계혁명전선에 까지 굳게 통일되어야 한다”고 민족협동전선 결성의 필연성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협동전선의 성격을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것이며, 우경적인 것이 아니고 전투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한편, 그 계급적 기초를 ‘우리민족의 절대다수이며 가장 혁명적인 노농대중’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민족협동전선의 방향설정에 대해서는 “현재 급속히 진전되는 조선 노동계급의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그것을 독립운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협동전선의 최대 조건이 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여 노동·농민운동의 고양을 중시하는 한편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독립당’을 제안하였다. ‘전투회피자’·‘폭력부인자’·‘점진주의자’와의 타협을 배제하고 있는 이 선언문은 의열단의 향후 활동 역점이 대중투쟁에 있을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였다.註 117
이러한 의열단의 노선전환 움직임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갔고, 그 결과 의열단 상해지부에서는 1929년 12월 2일 독자적인 해체성명서註 118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대중적 협동전선’의 결성을 재차 촉구하고 있는 상해지부의 이 성명에는 당시 북경에서 활동 중이던 김원봉에 대한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적극적 주도를 촉구하는 일면도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한국 사회주의 운동 인명 사전 150 페이지


노동자의 책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7&idx=3336


[김명시(金命時, 1907~?) 金喜元 金輝星 金輝然 스베찌로바 (여성)] () 


(고려공청 회원, 중공 上海韓人支部 선전부 책임) 경남 마산 출신으로 김형선(金炳善)의 동생이다. 1924년 3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여학교를 중퇴했다. 1925년 7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마산 제1야체 이까에 배속되었다. 10월 고려공청에서 모스끄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2월 예비과에 입학했다. 1927년 6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로 파견되어 8월 상해에서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상해한인지부 조직부 및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달 중국공산당 한인지부 갑조(甲組) 조장, 9월 상해한인청년동맹 부인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5월 상해에서 대만공산당(臺灣共産黨) 결성을 지원했고 6월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 위원이 되었다. 1929년 10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중국 공산당 및 공청에 가입시키기 위해 북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갔다. 1930년 1월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 및 기관지 『반일전선(反日戰線)』 담당자가 되었다. 5월 중공 아성현(阿城縣)위원회 건립에 참여하고 부인부 책임자가 되었다. 1931년 11월 중공 상해한인지부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고 12월 상해 한인반제동맹(韓人反帝同盟) 결성에 참여했다 

(민전 중앙위원) 1932년 3월 코민테른 동양부 산하 조선문제 뜨로이까의 지도하에 기관지 『코뮤니스트』 배포를 위해 귀국했다. 4월 김형선과 함께 경인지역에서 『코뮤니스트』,『태평양노조』를 인쇄, 배포했다. 5월 일본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던 도중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933년 12월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화북(華北)조선독립동맹 화북 책임자를 지냈다. 1945년 12월 서울에서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달 조선국군준비대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가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민전 서울지부 의장단으로 선출되었고 12월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선전부장이 되었다. 


[김원봉(金元鳳, 1898~1958) 金若山 陳國斌] () 

 1929년 봄 북경(北京)에서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하여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청년간부를 양성했다. 그 무렵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정치학교 졸업생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국내의 노농대중운동에 합세하게 했다....................................., 


[김형선(金炯善, 1904~50) 金元植, 崔命煥] () 


(조공 당원) 경남 마산 출신으로, 김형윤(金炯潤)의 형, 김명시(金命時)의 오빠이다. 1917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간이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퇴학당했다. 상점원 및 부두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마산창고회사 사무원으로 5년간 근무했다. 1924년 8월 마산공산당 결성에 참여했다. 1925년 4월 경남 사상단체 동인회(同人會)에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5월 마산청년회 운동부원이 되었다. 7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마산야체이까에,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하여 마산제1야체이까에 배속되었다. 9월 마산노농동우회 교무부 책임자가 되었다. 12월 ‘제1차 조공검거사건’에 연루되어 마산경찰서에 한때 검속되었다. 같은 달 마산청년연합회 총무부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1926년 봄 『조선일보』 마산지국을 경영했다. 3월 마산기자단 집행위원, 4월 마산노동연맹 발기준비위원, 경남기자동맹 서무부 책임자, 5월 마산노동회의 벽신문 『첫소리』 통신부원이 되었다. 8월 ‘제2차 조공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중국 상해(上海)를 거쳐 광동(廣東)으로 망명했다. 

(남로당 중앙감찰위 부위원장) 1927년 1월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했다. 1928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강소성(江蘇省)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에 배속되었다. 1929년 6월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10월 유호(留滬) 한국독립운동자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총무부장이 되었다. 1930년 7월경 중공의 지시에 따라 코민테른 동양부 산하 조선문제 뜨로이까의 조직선으로 배속되었다. 1931년 2월 조공 재건운동을 위해 입국했다. 1932년 4월 반일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했다. 11월 『코뮤니스트』 배포망을 조직하고 그 배포망을 통해 조공 재건운동에 종사했다. 1933년 7월 영등포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34년 12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건국준비위원회 교통부 위원이 되었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 경제부장 대리로 선정되고 조공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국원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가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중앙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당대회의 즉각 소집을 반대했다.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2월 남로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50년 9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피해 월북하던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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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 남로당으로 변한 조선공산당 외에 공산당 조직도 수십 개나 있었지요. 공산당 조직은 노동계, 학생, 예술가쪽으로도 힘을 뻗쳐서 전국에 많은 산하 조직을 갖고 있었지요. 이 조직들이 인민전선이라는 단일전선으로 나갈 때였죠.


한데 미국은 좌익과 우익을 합작시키려고 하지 않고 좌익과 우익을 제외한 중간노선한테 정권을 주려는 거예요. 하지만 말이 중간노선이지 그들 대부분이 좌익계라서 만일 중간노선이 정권을 잡게 되면 적화될 게 뻔해서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지요.북에 있는 소련군은 우익을 다 때려 죽이고 공산당만 적극적으로 밀었는데, 하지 장군은 처음에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좌익도 살리고 우익도 살리겠다는 하지 노선을 견지했지요. 그때만 해도 군대라는 게 없었어요. 국방경비대가 1947년쯤 돼서야 정식으로 발족했으니까. 그때 군사영어학교라고 나중에 국방경비대가 되는 단체가 있었지만 2,3천 명에 불과한 데다 미군들 눈치 보느라 군사 활동을 아예 못했거든요. 그러니 힘이 없었지요. 하지만 좌익들은 북쪽의 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까 힘이 아주 막강했어요. 


평안도 출신으로 일본군에 학병으로 입대했다가 중위로 진급한 남모씨라는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일본군을 탈출해서 어디로 갔는고 하니 연안으로 갔어요. 연안에는 팔로군이 있거든요. 만일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갔다면 광복군이 됐겠지만 워낙 멀어서 가까운 연안으로 가는 바람에 좌익이 된 거지. 사상이 없다 해도 팔로군 모택동 밑에서 해방될 때까지 1년 9개월간 있었으면 빨갱이가 되는 거죠.남씨가 해방되고 나서 남한에 들어와서 군사를 조직하기 시작한 거예요. 말이 국군준비대지 사실은 남한인민항쟁 유격사령부예요. 이 국군준비대의 명령계통이 조선인민공화국(고려공산당 인민당 빨갱이 보스 여운형이 세운 인민위원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인민위원회의 군사부장 그러니까 총사령관이 김원봉이다. 사실상 김원봉이 국군준비대의 총보스)이예요. 

국군준비대는 명동에 본부를 두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장교집합소를 만들고 학병 출신들과 지원병을 모집해 세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운형씨가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많은 젊은이들이 멋모르고 국군준비대에 입대했습니다. 이 국군준비대를 유심히 보고 있자니 단순한 준비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군사 반란을 일으켜 남한을 적화시키려는 야욕이 감춰져 있었던 거지요.잘 아시겠지만 여순반란 사건도 몇몇 장교가 모의해서 시작했지만 나중에 몇 천 명씩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국군준비대도 몇 명 안 되는 인원이지만 만일 사건이 커져서 소련군이 북에서 밀고 들어오면 큰일날 일이지요. 이에 한민당도 위기상황을 느끼고 동분서주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니 저걸 부수지 않으면 무력혁명이 일어나겠다 해서 국군준비대를 때려부시라는 명령을 제가 받은겁니다. 


그때는 경찰이라고 해봐야 전국을 합쳐서 몇 백 명밖에 안 되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경찰이 군인들과 전쟁을 할 수 있나요. 경찰은 치안이나 담당하던 사람들인데 싸울 줄을 알아야지. 그래도 장덕수 같은 분이 한민당에 있었기에 국군준비대의 위험성을 미리 알아차린 겁니다. 


장덕수 선생이 누굽니까? 내가 보기에 장선생은 정치이론이나 정치견해가 이승만 박사나 백범 선생보다 더 뛰어난 분이예요. 장덕수 선생이 젊었을 적엔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하지 않았어요? 그 장선생이 레닌에게 한국공산당을 조직하라는 밀명을 받고, 공작금조로 준 35만원을 들고 그대로 미국으로 튀었지요. 레닌을 만날 만큼 뛰어난 공산주의 이론가였지만 고국에 돌아와서는 민족주의 진영에 서서 한민당 총무부장으로 있었던 겁니다.


저도 장덕수 선생에게 공산주의의 잘못된 점을 여러 번 강의 들었는데 무식한 나지만 머리에 쏙쏙 들어옵디다. 그걸 내 부하들에게 다시 설명해주곤 했거든요. 장덕수 선생은 공산주의는 피의 혁명을 원하기 때문에 국군준비대가 틀림없이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감지한 거예요. 그래서 고민 끝에 내게 부탁한 거지요. 군사조직도 없고 경찰도 못믿으니까.


한데 그 전에 미군한테 무장을 해제당해 무기가 없었잖아요. 그 얘길 장덕수 선생에게 했죠. 그랬더니 장택상 씨가 무기를 책임지겠다고 해요. 지금 중앙청 옆에 경찰별동대 본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경찰전문학교 무기창고가 있다는 거예요. 총이 5천자루가 있는데 그걸 전부 줄 테니 소문 안 나게 가져 가서 일을 치르라는 거죠. 뚝섬 근처 한강변에 자갈천이라는 인적이 드믄 벌판이 있었어요. 그곳에 총을 갖다 놓으면 우리가 가져 가겠다고 했지요. 3천 명만 동원하면 충분하니 3천 자루만 달라고 했지요.


─ 장택상 씨는 그때 군정의 수도청장이었죠?


▲ 네. 수도청장이니까 경찰의 총수인 조병옥 박사와 상의해서 총을 구해줄 수가 있었던 거지요.

총 외에도 수류탄을 비롯해 실탄, 기관총까지 갖다 놓았더군요. 총을 인계한 나는 특공대원을 차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만 2천 명 중 체격이 크고 뚱뚱한 사람은 전부 뒤로 빼는 거예요. 그러면 키가 조그만 사람만 남거든요. 뚱뚱한 친구들이 ‘저희는 왜 뒤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묻죠. ‘너는 필요 없어, 저리 가’ 정면 습격할 때는 체격이 큰 게 유리하지만 비밀리에 기습할 때는 체구가 작은 놈이 더 낫지요.


제주도 조랑말 있지 않습니까? 조그만 놈이 아주 야물지요. 사람도 키가 작고 곱슬머리, 옴폭 눈 등이 아주 독하지요. 피부도 하얀 사람보다는 노랑이 더 독하구요. 곱슬머리에 옴폭 눈에게 걸리면 큰일 나요. 


작은 놈이 독하고 사람 잘 죽이지, 덩치 크고 뚱뚱한 놈은 겁이 많아요. 뱃살이 많은 놈은 살이 흐물흐물해서 안 돼요. 또 덩치가 작더라도 눈이 크면 안 돼요. 겁이 많으니까. 그런 놈들 데리고 가면 일 다 잡쳐놓아요.


그런데 그런 놈들만 추리니까 천 5백 명이 조금 넘을 정도밖에 안 돼요. 총은 3천 자루인데.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 잡칠 수는 없으니까. 하는 수 없이 야간천막 쳐놓고 남은 무기를 지키라고 해놓고 천 5백 명만 데리고 떠났지요.


차는 남산공원 올라가는 곳에 쭉 세워놓았더군요. 운전사에게 1만 원씩은 줘야 합니다. 원래 1천5백 원이면 되지만 총을 든 대원들을 수송하는 거니까.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무조건 가는 겁니다. 조수석에는 총 가진 대원이 앉아 있으니까 꼼짝도 못하죠. 


그러고나서 출발하는데 밤 12시쯤 됐나, 제 1한강로에서 이태원, 동대문으로 가는 길 곳곳에 경찰 간부들이 나와 지키고 있어요. 일반 경찰들 시키면 혹시 좌익에게 정보가 새나갈까봐 그런 거지요. 근데 수송만 해서 되나요. 처음 본 총이니까 연습을 해야지요. 


38 구경식 옛날 총의 격발대를 잡아 당기고 총알 넣는 게 좀 힘듭니까. 실탄 연습은 못하고 차안에서 격발 연습만 하게 한 뒤 출발을 했지요. 조모, 신모, 김모 등 별동대 대장들은 오토바이 타고 뒤쫓아 갔는데 길이 그때만 해도 울퉁불퉁 억수로 나빠서 도착하니 근 3시가 됐어요.


─ 새벽 3시요. 그럼 그때까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나요?


▲ 네, 전혀 모르고 있었죠. 장교 훈련소가 지금의 육사 자리입니다. 그때 목조 건물이 6개가 있었어요. 2층짜리지만 제법 컸어요. 전부 6개 동이지만 1, 2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니까 12개잖아요. 그래서 부하들을 12개조로 편성했지요. 




─ 지난시간엔 국군준비대 습격이야기 였는데 그 사건이 일어난 때가 1945년 가을이나 겨울쯤 됐겠지요.


▲ 10월 16일쯤 됐죠. 


─ 그 해 겨울에 삼청동의 학병동맹을 습격했다는데 그 얘기를 좀 해주시죠. 국군경비대가 학병동맹이랑 관련이 있었던건데.


─ 국군경비대는 학도병, 일본군,징병군, 실전전투의 군사훈련을 받은것이고 학병동맹은 군사조직을 떠나서 순수한 학생조직이었죠.


─ 불시에 습격했다고 하던데 그 사건이 일설에 의하면 경찰에서 했다는 얘기도 있고, 김선생님 조직이 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 그거야 당연히 우리가 한 거죠. 하지만 경찰의 부탁을 받아서 한 거니 경찰에서 했다는 얘기도 맞기는 하지요. 경찰이 저에게 부탁한 것은 대한민청으로 이름을 바꾼 바로 뒤였어요. 지난번에 얘기한 학병동맹을 습격하기 바로 전 일이지요.


최련씨라는 경찰 간부가 있어요. 장택상 수도청장의 경찰 고문을 했던 사람인데요. 경찰 간부로는 가장 높은 분이지요. 그분이 자기 비서를 보내 나를 만나자고 해서, 충무로의 태극당에서 조금 올라가서 언덕 밑에 있던 천양본인가 천양사인가 하는 요리집으로 갔어요. 


일정 때는 가장 큰 일본 요리집이었는데, 해방 후에는 한국 사람이 맡아서 하고 있었지요. 1시 조금 넘어서인가 점심을 했지요.구석방에 가니 최씨가 기다리고 계시다가 아주 반갑게 맞이해줘요. 웬일이냐고 물으니까 아주 중요한 얘기가 있다면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나가서 전화를 걸고 다시 오셨어요. 최씨는 그동안 공산당을 많이 죽여 경찰계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일제 시대 때 순사에서 시작해서 조선 사람으로 경찰 부장까지 지낸 사람이니까요. 그 양반이 해방을 함흥에서 맞이했습니다.


함흥 형사과장이었으니까. 근데 형사과장은, 고등과장이라고도 하는데, 사상범을 다루는 일을 하잖아요. 게다가 함경도는 공산당이 들끓는 곳입니다. 만주나 블라디보스토크도 가깝고 하니 아주 힘든 자리지요. 그 양반이 아무래도 장택상 씨한테 코치한 것 같아요. 장택상 씨는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얼마나 지독한지 잘 모르거든요.바로 장택상 씨가 왔어요. 장택상 씨에게 전화를 한 거지요. ‘아유, 두한이, 참 오래간만일세. 너무 수고해 주어 참 고맙네’ 라고 말하며 위로해주더군요. 참, 장택상 씨가 제스처를 잘합니다. 우리만 해도 그때 순진했으니까. 


점심이 나오자 맥주 한 잔 놓고 얘기를 시작했어요. ‘우리 김 동지가 이번에 나라를 위해 꼭 한 가지 일을 해 줘야겠네’. ‘그게 뭡니까?’ ‘이걸 우리가 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주 두통거리가 돼요.’그분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군사 조직보다 더 골치 아픈 게 바로 학생 조직이다. 학생조직이 좌경화되면 대학이 많은데다 대학생들이 모두 인텔리라 파급 효과가 크다는 거였지요. 그 사람들이 고향과 군에 들어가면 발언권이 아주 셉니다. 아무래도 많이 배워 언변이 뛰어나지 않겠습니까. 이 학생 조직이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 사회로 파고 들어가면 순진한 사람들은 쉽게 선동이 된다 이 얘깁니다.


사실 일반 대중이야 거의 백지 상태 아닙니까. 공산당 이론에 대해서 전혀 모르니까 대학생들이 좋은 것만 골라 얘기하면 홀딱 넘어가는 거지. 그래서 학생 조직을 분쇄시켜야 한다는 얘기였지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니 경찰은 두었다 뭐하고 이런 일을 나한테 시키는 겁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아, 우리 경찰이 건드리면 나중에 문제가 돼’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면 UN총회에서 다뤄지고 그러면 한국 독립도 힘들게 된다, 이 얘기였지요.

‘독립된 국가의 경찰이라면 문제가 아니겠지만 군정 하에서는 하지중장으로부터 불덩어리가 떨어지면 내가 녹아, 내가 녹으면 일을 못해’ 이러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이 일을 맡아 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학생들이니까 총으로 쏘거나 죽이지는 말고 과격하게 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도록 간청했어요. 그래서 제가 하겠다고 약속하고 장택상 씨와 만난 다음날 부하들 가운데 체격 좋은 놈으로 1백 명을 골랐지요.


곡괭이 자루 있잖아요? 박달나무와 참나무로 만든 곡괭이 자루를 차에 실어서 삼청동 옆 들판 창고에 갖다 두었어요. 그 창고 부근에 토끼에서 피를 뽑아 연구하던 곳이 있었어요. 그 창고를 경찰이 지켜줬지요. 그리고는 밤 2시에 1백 명의 대원을 데리고 곡괭이 자루 하나씩을 들고 쳐들어갔지요. 당시 학병동맹 훈련소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았거든요.


자는 놈들을 습격했는데 의외로 반항이 있어서 부하들에게 조심하라고 시켰지만 곡괭이 자루에 몇 놈이 맞았어요. 그래서 삼청동 부근이 피바다로 얼룩져 버린 사건이 발생했죠. 


(입력일 : 2007.03.19)-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3&r_serial=04



빨갱이김명시는 일제시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 출신이며 12월 예비과에 입학 그리고 졸업 ,


상하이 중국공산주의 청년단 회원 , 중국공산당 한인 지부 조장 , 대만공산당 결성 지원 ,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 위원 ,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 동맹 결성 지원 및 집행 위원 및 기관지 '반일전선' 담당자


조선반도로 와서 '코뮤니티스트(공산주의자의 영어)' , '태평양노조(노동조합)'라는 잡지를 뿌리고 다님.

그러다가 조선반도의 순경(순사. '경찰'을 뜻하는 일본 용어)에게 공산주의 죄목으로 붙잡혀 징역.  

탈옥하여서 빨갱이김원봉의 빨갱이조선민족전선연맹+빨갱이조선의용대의 멀티인 화북지대의 빨갱이조선독립동맹+빨갱이조선의용군의 

책임자를 지낸 빨갱이김명시.  '광막한 만주벌판을 호마 타고 달리던 여장군 김명시.'으로 불려짐.

조선의용군의 총사령관인 빨갱이김무정의 부관이었음. 빨갱이김명시 여장군은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을 깨부심.


수많은 일본군 포로들과 수많은 부자 지주들이 조선의용군 교관인 그녀의 채찍에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같은 여성 교관으로 훗날 북괴 초대 내각의 중요인물이 되는 허정숙이 있었다. 


해방 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의 산하 단체인 부총(조선부녀총동맹)의 선전부 위원을 지냈다. 오늘날 여성부(빨갱이제갈슨상이 만든)의 시조에 해당된다.

 ,  빨갱이 국군준비대의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해 여女장군의 자격으로서 후배인 국군준비대 8만에게 응원 축사를 신나게 했다.


빨갱이김원봉은 후배 빨갱이여女장군 김명시와 함께 미군정을 몰아내고 남조선을 적화통일시키기위해서 빨갱이 국군준비대 8만을 조직했다. 

공산주의 최고레벨 김명시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빨갱이김무정이 북괴 장교로 있으므로 상관을 위해 남조선을 적화통일시키려고 작정하였다.


빨갱이국군준비대는 광복군마저 흡수하고 10만이나 되는 군세軍勢를 과시하며 길거리에서 깽판치고 다니며 남조선의 모든 정당은 해체해라 여운형인민공화국도 해체해라 

김구 임시정부도 해체하라 어서 남과 북은 민족통일전선의 이념 아래에서 통일하라 독립국이 되어라 외세의 신탁지배를 받지말라

이승만은 반동이다 김두한은 반동이다 라고 강요해대는 무력시위를 해댔다.


하지만 1946년 1월에 빨갱이국군준비대가 미군특수부대 수십명이 간부들을 납치하고 , 김두한 우미관 식구들에게 털려 대학살당해 강제해산 당한다.


1946년 2월 남조선에 빨갱이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된다. 김명시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해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됨 , 민족전선 서울지부 의장단으로 선출됨. 빨갱이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선전부장이 되었다.


당시 여운형 , 박헌영 , 김원봉의 [남조선빨갱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북괴 김일성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지령들을 그대로 따라하고있었다.

미군정을 몰아내기위해서 빨갱이국군준비대 8만을 조직했었지만 실패했었다. 


그래서 [남조선빨갱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북괴 김일성이 보낸 지령문에 따라 최후의 발악을 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전국에 걸쳐서 총파업운동과 

전국의 경찰서 파출소를 노리는 무장폭력시위폭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짠다. 더불어 위조지폐도 신나게 찍어서 남조선 경제를 망치려는 음모를 꾸민다.


빨갱이 남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인 빨갱이김원봉은 국군준비대의 실패를 만회하기위해 1946년 12월 조선민청 전위부대란 빨갱이 별동대를 조직하고 

빨갱이정진영을 별동대장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조선민청 전위부대는 1947년 5월 김두한과 미군정에게 처절한 토벌을 당해 공중분해된다.


1948년 4월 - 빨갱이김원봉 , 빨갱이박헌영 , 빨갱이홍명희 , 빨갱이허헌 , 빨갱이심영 월북.

 여장군 김명시만 냅두고 지들끼리만 도망쳤다.  


1949.10.03 까지.일제강점기 빨갱이연안독립동맹원이자 해방 후 빨갱이 부녀동맹 간부를 역임하고 빨갱이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있던 김명시는

총파업운동과 무장시위폭동을 배후에서 계속 지휘하며 미군정을 조선반도에서 몰아내기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썼다.

그녀는 미국을 미제국주의 침략세력으로 봤다. 과거에 일본을 그렇게 보았듯이. 


하지만 결국 경찰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그녀는 부평경찰서에 구금된 지 이틀 만에 목 매달아 자살했다. 

당시 친일경찰들은 빨갱이들로 드글거리는 혼돈스러운 남조선의 치안상태를 바로잡으려고 동분서주했다.

서울경찰청장 장택상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는 빨갱이 청년들은 흔하디 흔했다. 빨갱이여두목인 김명시는 친일경찰에 의해 혹독한 문초를 받아 배후를 토설하라고 

수백번 말하고 수백번 고문을 해도 말을 안들었다. 오히려 동지들을 밀고하기싫어서 빨갱이 지하본부 위치를 자백하기 싫어서 경찰이 안보는 사이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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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
백의사 대원 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7&r_serial=02


이처럼 김일성은 1950년을 조국통일祖國統一의 해로 정하고 각오를 다짐하면서 남한에 대해서는 유격대투쟁을, 북한에 대해서는 군사력건설을 가속시켰던 것이다.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의 군사력을 훨씬 능가하는 가공할 만한 전투태세戰鬪態勢로 급속하게 증강된 것은 1949년과 1950년 사이의 가을과 겨울에 걸쳐 진행된 두번째 軍事力增强時期에 이룩되었다(첫번째 시기는 1949년 3월 朝蘇軍事援助條約 직후의 시기). 북한군은 중국의 공산당 승리 후 3만여 명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귀향으로 더욱 증강되었다.註 215 더욱이 김두봉金枓奉을단장 단장團長으로 하는 북한사절단北韓使節團이 1949년 12월 말에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아시아방어회의防禦會議에 참가하면서 한반도에서의 미래의 행동계획이 결정된 것으로 보이며, 
1950년 초에 모택동毛澤東이 소련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거론되었다.註 216 그리고 김일성이 1950년 2월에 모스크바를 재차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6월에 남한을 공격하겠다고 설명했고 귀국길에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모택동에게 같은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스탈린은 처음에 때가 좋지 않으며 매우 위험하다고 하였으나 
모택동毛澤東이 공격을 서둘러도 좋다는 견해를 피력하였음을 알고 스탈린도 남침을 승인하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이후 북한의 소비에트정권 수립 이후 계획된 길이었기에 그 임무를 김일성에게 위임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드디어 북한의 남침계획은 실행으로 옮겨질 단계에 도달했다. 인민군民軍은 이미 1949년 가을 이래 전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전술지원공군력戰術支援空軍力을 강화하기 위해 전방지역에 수 많은 활주로를 건설하였으며, 2월과 3월에 걸쳐 38도선 5km 이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실은 화물차들이 속속 도착하였으며, 평양平壞-사리원-38도선 간의 철도를 군전용으로 전환하였다.註 218 
그리고 10대 소년·소녀들을 서둘러 징집하여 통신요원通信要員, 간호요원看護要員 등으로 충당하였으며, 
지하공작대地下工作隊와 무장공비를 남파시키고 거짓된 평화공세로 남침준비를 위장했던 것이다.註 219 
미군정보계통美軍情報系統에서는 이러한 변화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북한이 빠르면 1950년 봄에 전쟁을 일으킬 공산이 크다고 보고했던 것이다.註 220

북한北韓은 전쟁준비戰爭準備를 완료한 다음 사상학습思想學習에 주력하는 한편, 1950년 5월 17일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 
정치·군사수뇌首腦와 각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모여 작전회의作戰會議를 개최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박헌영은 처음에는 남침공격의 성공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으나 김일성의 전면남침계획全面南侵計劃에 찬동하고 인민군人民軍의 진격進擊이 개시되면 한국내의 50만萬 남로당원南勞黨員 들이 들고 일어나 폭동을 야기시킬 것이므로 전쟁은 2주일내에 끝장이 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것이다.註 221


南侵計劃이 확정되자 북한은 그들의 侵略企圖를 위장하고 전쟁도발구실을 조작하여 남한에 뒤집어 씌우고 세계여론을 기만하기 위한 평화공세를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대남 심리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라디오방송을 통한 대남선동이 격화되었는데, 반일감정의 助長, 李承晚政府 非難, 미국이 한국의 내전을 조장하고 미국내의 침체된 경제회복을 위해 새로운 전쟁을 陰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註 222 또한 4월에는 이른바 朝鮮平和擁護委員會를 동원하여 북한주민들에게 평화통일을 위한 署名運動을 전개하여 약 2개월 간 570만명(당시 북한 인구는 900만)의 주민들이 서명했다고 조작했던 것이다.註 223
이와 아울러 남한에 대해서는 제2대 國會議員選擧(5·30선거)방해를 위한 유격활동을 전개하도록 지령하고 평양방송을 통해 선동하였으나 미미한 정도에 불과했다.註 224 38선지역에서의 충돌도 총 24건이나 되었으나 그다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註 225 이렇듯 남한지역에서 共產黨活動이 저조했던 이유는 남한정부의 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활동이 3월 초 부터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250명의 간첩단 적발 : 金三龍과 李舟河도 3월 27일 체포됨).註 226 이로 인해 南勞黨組織은 거의 와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5월 30일의 남한총선 직후 어수선한 틈을 악용하여 6월 7일 祖國統一民主主義前線(1949년 6월 25일 창설)으로 하여금 남한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統一方案을 방송을 통해 제의했다(6월 1일 신문에 게재). 그 내용은 ① 1950년 8월 5일~8일 사이에 統一立法機關 설치를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서울에서 신설된 立法會議(統一國會) 開催, ② 1950년 6월 15일~17일에 海州 또는 開城에서 남북대표가 모여 총선거 시행에 관해 討議, ③ 祖國統一을 방해한 者(韓國大統領을 포함한 指導者級 人士 거의 全員)는 민족반역자이므로 會議參席對象에서 제외하고 유엔韓國委員團의 개입금지 등이다.註 227 이 제의에 대해 한국측은 2년 전의 전례를 감안하여 유엔감시 아래 북한내에서의 보충선거가 정당하다고 응수하고 북한의 제의를 거부했다.
그 밖에도 開戰 직전에 또 하나의 마지막 연막전술로서 억류중인 要人 相互交換을 제의했다. 북한은 감금 중인 民族指導者 曺晚植을 볼모로 하여 한국에서 3월에 체포당한 남로당 工作責 金三龍, 李舟河 兩人을 38도선 부근에서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남한측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고 曺晚植의 건강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면서 구체적 절차를 제의하게 되자 북한측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註 228 북한은 이어서 6월 19일 또 다른 위장된 통일방안을 제의하였는데 이번에는 새로이 구성된 南韓의 國會와 最高人民會議를 합병하자는 最高人民會議 統合案을 제시했다. 이 안은 祖國統一 民主主義前線 中央委員會(金日成派와 朴憲永派가 숫적으로는 거의 동수)에서 며칠간의 토의를 거쳐 내 놓은 것이라서 祖統과 北韓政府 간에 밀접히 협조한 案이었다고 평양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선동을 계속했던 것이다.註 229 사실상 이 안은 두 가지 목적을 띤 음모였던 것이다. 통일에 대한 선전·선동을 통해 南韓을 統一案에 열중하게 함으로써 북한의 남침준비를 은폐시키면서 향후에 서울을 점령했을 때 議會의 支持를 얻고자 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9月공세의 실패, 遊擊隊活動의 실패, 5·30選擧沮止失敗, 최근의 統一案의 합의실패 등을 감안할 때 현실성이 없는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정권이 통일을 거부한다고 비난하여 평화공세를 강화함으로써 開戰에 대한 책임을 남한에 전가시키기 위한 연막전술이었던 것이다.註 230
南韓當局이 6월 8일 북한의 祖統의 僞裝統一方案을 거부한 이틀 후인 6월 10일에 이미 북한의 民族保衛省에서는 前方師園長과 旅團長 등 주요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秘密軍事指揮官會議를 열고 大機動作戰訓練을 가상한 무력남침의 비상사태를 갖추게 했다. 이 野外 機動訓練은 극비로 실시할 것을 강조했다. 12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하여 6월 18일에는 계획된 지점에 진출하게 되자 각 사단에 偵察命令 제1호가 하달되었으며, 20일에는 마지막 빨치산部隊(악 100여 명을 3~5명으로 분산)를 남파시켰다. 이들 유격대가 받은 임무는 5일 후에 있을 주력부대의 공격을 지원하는 작전으로서 南韓 國防警備隊의 연락통신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註 231 開戰 3일 전인 6월 22일(14: 00시)에는 각 師團長 앞으로 戰鬪命令 제1호가 하달되었던 것이다.註 232 이 두 가지 명령이 먼저 러시아어로 작성되고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는 점과 최전방 野戰部隊級까지 소련고문단이 상주하고 있었던 점은 소련이 南侵 計劃에 얼마나 깊숙히 관여했는가 하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註 233
이리하여 韓國戰爭은 1948년 미·소 점령후 5년 동안 분단의 씨앗이 공산당에 의한 전쟁의 불씨로 계속 키워져 갔던 것이다. 공산당은 1차적으로 合法·非合法的 정치투쟁을 전개했으나 이것이 실패하자 제2단계의 비합법적 폭력투쟁을 선택하였고, 이것마저 실패하자 김일성은 소련과의 합작으로 全面 武力赤化統一路線을 선택했던 것이다. 1949년 초 이전의 활동은 주로 남로당에 의해 진행되었고 다수의 사건들은 남로당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발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주요 방향은 북한 지도층에 의해 결정되었고, 1949년 3월 김일성의 소련방문 이후부터의 주도권은 김일성에게 있었던 것이다.



<<<6.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

앞의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北民戰은 1949년 6월 25일 평양平壤에서 정견政見과 신앙信仰이 
상이相異한 71개 정당政黨·사회단체社會團體 704명이 참가參加해 


남북한南北韓 좌익정당左翼政黨 사회단체社會團體 운석회의連席會議를 개최하고 
허헌許憲의 ‘국내외정세國內外情勢와 우리의 당면임무當面任務’의 보고를 청취한 후 
남북한민주주의전선南北韓民主主義戰線을 통합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으로 개편 강화했다.


이 조국통일전선祖國統一戰線은 의장단議長團인 김원봉金元鳳 .............

이 조통선祖統戰은 다음과 같은 강령綱領을 제시했다.

〈강령綱領〉

1. 남조선南朝鮮으로부터 미군米軍을 즉시 철거撤去케 하며 소위所謂 「유엔위원회委員團」을 물러가게 하고
조국祖國의 완전完全 독립獨立을 위하여 투쟁한다.

2. 통일統一을 방해하는 조국祖國의 반역자反逆者들을 반대하며, 조국祖國의 통일統一을 급속히 달성하기 위한 투쟁에 
인민人民들의 총역량總力量을 동원動員한다.

3. 우리 조국祖國의 북반부北半部에서 이미 실시된 민주개혁民主改革들을 일층 공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투쟁한다.

4. 1948년 8월 25일 총선거總選擧의 결과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政府를 
지지支持하며 조선인민朝鮮人民의 권리權利를 향상시키기 위한 공화국정부共和國政府의 활동을 협조한다.

5. 전조선적全朝鮮的으로 광범한 민주개혁民主改革을 실시하며 전체 조선인민朝鮮人民에게 
공민公民의 동등권同等權과 언론言論 출판 집회 시위 결사結社의 자유自由와 신앙의 자유 등 민주주의적 
권리權利와 자유自由를 보장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6. 남조선南朝鮮에서 미제국주의자美帝國主義者들과 조선반동분자朝鮮反動分子들에게 의하여 
강압强壓당한 인민人民들의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를 부활復活시키며 그 합법화合法化를 위하여 투쟁한다.


7. 일본국가日本國家 일본인日本人개인個人 법인法人 및 조선인민朝鮮人民의 반역자叛逆者에게 소유所有되었던 
토지土地를 무상몰수無償沒收하여 농민農民에게 무상분배無償分配하는 원칙原則에 의하여 
남조선南朝鮮에서 토지개혁土地改革을 실시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8. 일본국가日本國家 일본인 個人, 법인法人 또는 조선인반역자朝鮮人叛逆者들에게 소유所有되었든 산업產業 기타 
기업소企業所들의 국유화國有化를 남조선南朝鮮에서 실시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9. 남조선南朝鮮에서 민주운동民主運動에 대한 탄력彈歷과 테로를 반대하여 남조선南朝鮮 감옥監獄 등에 투옥된 
애국자들의 석방을 위하여 투쟁한다.

10. 소련蘇聯과 민주주의 중국中國과 인민민주주의 여러 나라들人民民主主義諸國들 및 기타 
자유애호국가自由愛護國家들과의 친선親善관계를 발전, 강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11. 일본日本을 제국주의적帝國主義的 일본日本으로 부활시키려는 정책政策을 반대하여 투쟁한다.

12. 침략적侵略的 동맹同盟을 조직하며 새 전쟁戰爭 도발목적을 가진 제국주의국가帝國主義國家들의 
정책政策을 반대反對하며 평화平和와 국재적國際的 협동協同의 강화를 위하여 투쟁한다.

13. 민족경제民族經濟와 민족문화民族文化를 발전시키며 조선인민朝鮮人民들 속에서 문맹文盲을 퇴치退治하며 
지식知識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며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사상思想잔재와 
기타 반민주주의적反民主主義的 사상을 반대하여 투쟁한다.


〈조통祖統의 선언서宜言書〉
전항생략前項省略

친애親愛하는 동포형제자매同胞兄弟姉妹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은 조국祖國의 평화통일平和統一을 실천할 것을 
남북조선南北朝鮮의 전체 민주정당民主政黨 및 사회단체社會團體들과 전체 조선인민朝鮮人民에게 
호소呼訴하여 하기下記의 평화적平和的 통일방안統一方案을 제의提議한다.
1. 조국祖國의 평화적平和的 통일사업統一事業을 조선인민朝鮮人民이 자기自己의 수중手中에 틀어쥐고 
우리 인민자체人民自體로 반드시 실천하자.
2. 우리는 조국祖國의 평화적 통일平和的 統一에 방해를 주는 미군米軍이 우리 조선朝鮮에서 즉시卽時 철퇴撤退할 것을 요구한다.
3. 우리는 비법적非法的 기관機關인 소위所謂「유엔朝鮮위원단委員團」이 우리 강토强土로부터 즉시 물러갈 것을 요구한다.
4. 우리는 남북조선南北朝鮮을 통하여 통일적統一的 입법기관立法機關 선거를 동시에 실시할 것을 제의한다.
5. 조국祖國의 평화통일平和統一을 원하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제정당諸政黨 사회단체社會團體 대표代表들로 구성된 
위원회委員會의 지도하에서 선거選擧를 실시하자.
6. 조국祖國의 평화통일계획平和統一計劃을 토의討議하기 위하여 남북조선南北朝鮮 제정당諸政黨·사회단체社會團體 대표代表들의 협의회協議會를 소집하고 협의회에서 선거지도위원회選擧指導委員會를 구성하자.
7. 입법기관立法機關 선거는 1949년 9월에 실시하며 선거選擧는 일반적 평등적平等的 비밀투표의 원칙에서 실시하자. 
일본日本통치시대에 일제日帝와 열성적으로 협력協力한 자들은 선거권選擧權을 박탈당한다.
8. 선거選擧의 자유自由를 보장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대책對策들을 반드시 실시하자.
(1) 전체全體 민주주의民主主義 제정당諸政黨 사회단체社會團體들과 그의 활동가活動家들에 대한 탄압彈壓을 금지할 것.
(2) 전체 민주주의 제정당諸政黨 사회단체社會團體들을 합법화合法化하며 그들에게 자유적自由的 활동권活動權을 보장할 것.
(3) 민주주의 제 정당 사회단체 出版機關들의 폐간廢刊에 대한 지령指令을 취소하고 민주주의 제정당·사회단체들에게 
자기自己의 출판기관出版機關을 가질 권리權利를 보장保障할 것.
(4) 언론言論·출판·집회·군중대회群衆大會·시위示威의 자유自由를 보장할 것.
(5) 전체정치범全體政治犯들을 즉시 석방할 것.
9. 선거지도위원회選擧指導委員會는 다음과 같은 권한權限을 가진다.
(1) 남조선南朝鮮에 존재하여 있는 정부政府와 그의 기관機關들에 선거選擧준비와 실시에 관계되는 필요한 지시指示들을 줄 것.
(2) 자기自己의 결정決定과 지시指示실행을 검열檢閱할 것.
(3) 선거지도위원회選擧指導委員會가 구성하는 위원회委員會를 통하여 조선朝鮮에서 외국군대外國軍隊의 철거撤去를 감시할 것.
10. 선거지도위원회選擧指導委員會의 구성과 함께 남북조선南北朝鮮에 현존現存하여 있는 경찰보안警察保安기관들은 선거지도위원회의 직접 관할하管轄下에로 넘어온다. 선거지도위원회는 경찰대警察隊로부터 친일파親日派 일본경찰日本警察과 헌병대憲兵隊에 복무하던 자들을 제외시키며 제주도인민항쟁濟州道人民抗爭과 남조선유격운동탄압南朝鮮遊擊運動彈壓에 참가한 경찰대警察隊들을 해산解散시킨다.
11. 총선거總選擧 결과에 수립된 최고위법기관最高立法機關은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의 헌법憲法을 채택採擇하며 그 헌법에 기초하여 정부政府를 구성하며 정부는 남북조선南北朝鮮에 지금 현존現存하고 있는 정부政府로부터 정권政權을 접수하며 그 정부政府들은 해산解散된다.
12. 남북조선南北朝鮮에 현존現存하여 있는 군대軍隊들은 민주주의民主主義 기초 위에서 조선공화국정부朝鮮共和國政府가 연합聯合시킨다. 제주도濟州道와 기타 지대地帶들에서 인민항쟁人民抗爭과 빨치산運動 탄압에 참가하였던 
남조선南朝鮮「국방군國防軍」부대部隊들은 해산解散시킨다.
인민항쟁人民抗爭과 빨지산運動 진압에 참가하였던 자들에게는 군대軍隊에 복무服務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 탄압을 추진한 자들과 조직한 자들은 처벌處罰을 당한다.
(이하以下 생략省略함)
통일적統一的 민주주의독립조선만세!民主主義獨立朝鮮萬歲!
영원永遠히 통일統一된 조선인민만세!朝鮮人民萬歲!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結成大會

- 위 조국통일전선에 대한 정보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서 가져온 정확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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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50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   1) 독립운동정당의 성립과 활동   >   (2) 의열단

(2) 의열단

義烈團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1925년 상반기까지 파괴·암살 등의 의열투쟁에 힘을 쏟았다.註 481 의열단은 20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투쟁을 벌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년부터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인 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그해 겨울에 광주에서 의열단의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吳成倫·金山·류자명柳子明 등이 함께 참석한 이 회의에서 의열단은 장차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註 483 이 결정을 바탕으로 의열단은 1927년 초에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것은 광동에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상해와 武昌 및 南昌에 지방집행위원회를 두는 내용이었다.註 484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의열단은 다음해인 1927년 5월에<獨立黨促成運動에 대한 宣言>을 발표하였다.註 485 이것은 이미 1926년 10월에 결성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이어 1927년 4월에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조직된 직후였다. 이로써 의열단은 ‘민족협동전선운동’과 ‘혁명정당’ 결성이라는 두 가지 활동방향을 정립했다. 그들은 우선 주요 활동지역에서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교 무렵부터 김원봉과 김성숙 등이 활동하고 있던 광동에서 김성숙이 주도하여 1927년 5월 8일에 광동촉성회를 조직했다. 또한 당시 무한에도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전개한 ‘反革命淸黨運動’(상해쿠데타)을 피해 모여든 의열단원들이 많았는데, 박건웅을 중심으로 무한촉성회가 조직되었다.註 486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이는 결국 의열단이 1926년 겨울에 결의한 ‘혁명정당 전환’ 방침을 사실화하면서, 이와 함께 1927년에 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이 나온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의열단은<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라는 발표문을 통해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정당’을 제안하였다.註 490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그러다가 1930년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무렵,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1929년 봄 이래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492 그러다가 1931년 9월에 일제의 만주침공을 접하면서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남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의열단 활동은 김원봉이 남경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한 일과 한일래와 박건웅이 중심이 되어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한 일로 나타났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맺어진 인연을 최대한 살려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中韓合作에 관한 建議>,<韓國革命의 現狀과 本團의 策略>,<朝鮮義烈團의 政治決意案> 등을 제출하고, 그 결과 장개석의 결재를 얻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었다.註 493 이 학교의 설립목적은 청년간부들에게 항일투쟁정신을 계승시키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시켜 한국의 절대독립을 달성하고 중국의 목표인 만주국 탈환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기까지 3기에 걸쳐 모두 125명의 청년간부들을 배출했다.

의열단이 전개한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되다가 일단 실패한 민족협동전선체 구성에 관한 노력이었다. 1932년 10월 이래로 구체화된 이 활동은 의열단을 비롯하여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신한독립당 등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를 결성하고, 뒤이어 11월 10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註 494 이로써 1926년 이후 상해 등 중국본토지역에서 추진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한 단계 나아가 장차 ‘대동단결체’를 조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의열단의 위치에서 볼 때, 이러한 결실은 1926년 겨울에 광주에서 열린 의열단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와 1927년 5월에 발표한<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선언>등으로 시작하여 1935년 7월 5일에 성립되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연결되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은 당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문제와는 관계없이 다른 독립운동정당과 동일한 자격과 위치에서 제 역할을 발휘했다.


註 481

金榮範,≪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창작과비평사, 1997), 141쪽.

註 482

김희곤,≪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지식산업사, 1995), 250쪽.

註 483

水野直樹,<黃埔軍官學校と朝鮮の解放運動>(≪朝鮮民族運動史硏究≫6, 1989), 63쪽.

註 484

水野直樹, 위의 글, 59쪽에서 재인용.

註 485

朴泰遠,≪若山과 義烈團≫(백양당, 1947), 206쪽.

註 486

梶村樹秀,<1940年代 中國の抗日鬪爭>(≪三千里≫31, 1982), 102쪽.

註 487

韓相禱,≪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문학과지성사, 1994), 223쪽.

註 488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340∼341쪽.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註 490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102∼104쪽.

註 491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5), 704쪽.

註 492

坪江汕二,≪鮮民族運動秘史≫(東京:日刊勞動通信社, 1959), 65쪽.

註 493

군사간부학교 운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韓相禱, 앞의 책, 255∼296쪽.

金榮範, 앞의 책, 299∼316쪽.

註 494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473∼474쪽.



의열단의 대표인 김원봉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4210883&position=0#483_comment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였다.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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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jpg

김원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무산계급 혁명)을 위해 일제시대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 , 레닌학교 세우고 레닌학교에서 조선인 청년들을 빨갱이들로 교육시켜 조선반도에 적화 목적을 위해 침투시켰다. 그리고 레닌이란 잡지도 발간하였으며 

무無정부빨갱이의열단테러리스트 이름을 무산자無産者전위동맹 즉 프롤레타리아 전위동맹으로 개칭하였다.




[ 김원봉은 1929년 가을 이래 북경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동맹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및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6635&position=2



"한편 김원봉은 1929년 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119 일제 자료에 의하면 김원봉은 1929년 가을부터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朝鮮共產黨再建準備委員會 및 레닌주의정치학교政治學校 운영에 관여하고 있었다.註 120 안광천의 주도 하에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는註 121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소재지는 북경北京 북성내北城內 동서조호동東西條胡同이었다. 

주요 구성원은 안광천安光泉·김원봉金元鳳·박건웅朴建雄·이영준李英俊·양백림楊伯林이었으며 

중앙부 산하에 훈련부·통신부·조직부·선전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10월의 중앙부 조직은 위원장 안광천 이하 김원봉·박건응·朴文昊·이영준·李賢卿·朴次貞의 7인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중앙부 직속으로 레닌주의사·레닌주의 정치학교가 병설되어 있었고, 하부조직으로 국내·북경·만주의 3개 지부가 있었다. 국내지부는 간사국 산하에 다시 목포·부산·강릉·대구·경성·평양·신의주·원산에 지방조직이 설치되어 있었다.註 122

레닌주의정치학교註 123는 6개월 기한으로 ‘공산주의 이론’·‘조직 및 투쟁’·‘조선혁명사’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4월∼9월, 1930년 10월〜1931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2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註 124 졸업생들은 1930년 8월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지식인 그룹·도시노동자·농민·진보적 학생층을 상대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과 대중운동의 고양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사례가 1933년 10월 일제 정보망에 포착되어 13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로부터 2년이 경과한 1935년 8월 발표된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 사건’註 125과 

‘공산청년동맹준비위원회共產靑年同盟準備委員會·강릉적색농민조합결성준비위원회江陵赤色農民組合結成準備委員會 등 조직사건’註 126이다.

또한 레닌주의사에서는 《월간 레닌주의》라는 선전지를 간행하였다. 1929년 5월 5일자로 간행된 제 1호에는 

〈조선정세朝鮮情勢와 조선공산주의자朝鮮共產主義者의 당면임무〉라는 장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註 127 이와 함께 잡지 말미에 실려 있는 ‘레닌주의 총서’ 간행예고 선전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동맹의 지향은 보다 분명해진다.註 128 이상 1929년 가을부터 1931년 전반기에 걸쳐 김원봉이 관계하고 있었던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김원봉의 동향은 공산주의 활동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1928년 11월의 선언과 함께 이 시기 김원봉의 성향에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게 드러나고 있음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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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광천安光泉의 주요 행적을 살펴 보면, 그는 동경유학시 일월회一月會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여름 귀국 후에도 일월회一月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產黨에 입당하여 그해 12월 金錣洙의 후임으로 제 3차 조선공산당(1926. 9∼1928. 2) 제 2대 책임비서 (1926. 12∼1927. 9)가 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각도간부 확대, 조직거점 확보, 만주총국·상해부·일본부 부활 등을 시도하였고, 1928년 제 3차 조선공산당 붕괴 이후에는 제 4차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직을 맡았다. 1928년 3월에는 그가 기초하고 제 4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에 관한 론강論綱〉을 통해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淸算主義的 입장의 견지로 말미암아 1928년 5월 끝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명당하였다.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주제어 관내 

출전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ch&setId=4216625&position=1


날짜 1929년 06월

김원봉·안광천, 북평北平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직하고 레닌주의정치학 교 설립.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 레닌주의 政治學校 명칭은 모스크바의 마르크스학원을 모방한 것이었다(스칼라피노·이정식, 앞의 책 p.238).



날짜 1929년 10월

權五勳, 김원봉의 레닌주의정치학교에 입학.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9.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安光泉,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과 무산자전위동맹無産者前衛同盟(의열단義烈團 개칭) 조직.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무산자無産者 = 프롤레타리아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 김원봉, 북경에서 무산자전위동맹 조직.

[출전] 조선혁명테제


날짜 1930년 09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제1기 졸업생 魚允鳳. 李鎭壹. 金武. 吳必得, 서울에 잠 입 (직접 노동자로 변신. 2개의 야체이카 조직).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0년 10월

김원봉. 안광천의 무산자동맹 잡지 레닌, 정간당함.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p. 202.(이상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자료)


날짜 1931년 02월 

레닌주의정치학교 2기 졸업생 권오훈·이소전 등 11명, 국내 잠입.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1년 07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졸업생 이철영, 김창린·이명욱 등과 함께 평양적색노平壤赤色勞 동조합動組合 조직.

[출전] 조선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4.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setId=4216692&totalCount=4&kristalProtocol=&itemId=tcmd



"이처럼 유쾌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원봉은 개인적인 아픔에 직면하게 된다. 지난 15년 간 혁명동지로서 함께 항일역정을 헤쳐왔던 아내 朴次貞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1929년 김원봉과 더불어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활동에 참여한註 331 이래 민족혁명당 부녀부장 등으로 활동해 온 그녀註 332의 죽음은 김원봉에게 또 다른 번민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1944년 4월 20일 개최된 제 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선임되었다註 333고 하지만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음모술수가 많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은 그의 행동 반경을 제약하는 것이었고 그의 인상을 ‘중산복 차림의 남성답게 잘 생긴 투사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찌푸린 표정에 말을 아끼는’ 폐쇄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게 하였다.註 334 1945년 초 중경에 도착한 일본군 학도병 출신의 회고록에서 조차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註 335 김원봉에 대한 질시는 1940년대에 들어와 시작된 사실이 아니었다.

....: 김원봉과 임시정부 내 보수적 인사들과의 타협되기 어려운 성향의 차이에 대해 국민정부의 김원봉 지원업무를 주관하였던 滕傑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김원봉金元鳳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자들은 공연히 허위虛位에 앉아 있고 실제활동이 없으므로 이끌어 갈 수 없다고 보는 반면, 임정 측 인사들은 김원봉 등을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있고 

또 언행도 너무 偏激하다고 보아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滕傑 증언, 〈三民主義力行社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 p. 74).


김원봉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는 일제패망 직후인 1945년 9월에도 중경 소재 소련대사관과 중공당에서 운영하는 신화일보新華日報와 접촉하고 있었다( 《資料韓國獨立運動》1, p. 406).


김원봉 계열과 김구 계열의 불화 모습을 전하는 한 중국인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원봉 계열은 김구를 가리켜 “연로年老하고 력쇠力衰하며 군중으로부터 이탈되어 복국復國과 건국建國을 영도할 수 없다”고 하였고, 김구 계열에서는 김원봉을 “공산당 분자로 보고 중공과 소련의 이용을 받고 있으므로 중국정부는 그의 기만을 믿지 말라”고 비난하였다 한다(祝秀俠 증언, 〈中國國民黨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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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32년 05월 
朝鮮共産黨再建同盟 江陵그룹(권오훈·강익선), 메이데이격문 살포.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2년 06월 
朝鮮共産黨再建同盟(국제공산당계열) 江陵그룹, 정동면 유천리 농민야학 교에서 프로연극중 발각되어 다수 피체.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2년 09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국제공산당계열) 江陵그룹 10여명, 共販반대투쟁으로 피검.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2년 12월 
朝鮮共産黨再建同盟(국제공산당계열) 江陵그룹, 가마니검사 반대투쟁 전 개.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4년 07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국제공산당 계열) 사건으로 총 428명 검거·11명 송국.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신문명 조선중앙일보  
기사제목 경무당국이 발표한 당재건운동의 전모, 노동 학생층에 광범한 지하공작, 송국된 자 111명/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주요 관계자 씨명, 금년 3월 9일에 예심 종결된 취고 
기사형식 일반기사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3 
단수 07 
색인어 이름 : 김원봉,안광천,三宅鹿之助,이명&,정태식,권영태,이재유,이강명,이진일,어노식,오상선,오영&,권오훈,정동원,유기춘,강익선,최익선,최돈근,조규필,이윤경,강문영,안종서,서승석,박정두,변우식,이행인,어윤봉,오필득,&인갑,홍광중,이상각,강&호,이명신,한 대홍,김대용,안강윤,최성손,김연식,권태종,김만구,성귀래,한순원,박태준,이종신,심인택,김상규,&필수,김근찬,최선규,김삭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사회주의운동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1928-1945) >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노동운동 > 노동조합 > 혁명적노동조합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학생운동 > 독서회 > 노동자독서회



신문명 조선중앙일보  
기사제목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체계도/독일 洋行하고 와서 伯林 생활을 추억, 三宅鹿之助의 평소 사색/도립병원 안에 인쇄국을 설치, 강릉에서의 잠행운동 
기사형식 일반기사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4 
단수 08 
색인어 이름 : 안광천,김원봉,김정우,이영준,어윤봉,이&&,정동원,이진일,오필득,이윤경,권오훈,박문호,강익선,정인화,조국환,강덕선,최종필,김성렬,김재원,최종봉,조규필,최종필,김재하,정인화,조&환,조&필,최종봉,강덕선,김재하,정인화,조국환,최&근,홍광준,최선규,강&원,三宅鹿之助,정태식,조송희,이재유,권영태,정대성,함순성,변홍대,신&균,박봉국,김상룡,한봉렬,안병태,김삼만,이순금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사회주의운동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1928-1945) >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노동운동 > 노동조합 > 혁명적노동조합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학생운동 > 독서회 > 노동자독서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레닌」주의정치학교졸업생主義 政治學校卒業生 조선朝鮮에 잠입潛入 적화공작赤化工作 
북경北京에 근거根據 둔 김원봉金元鳳의 밀령密令 받고, 權麟甲 李鎭一等九名이 各地에서 活動, 江陵에서 實踐運動에[肖 : 權麟甲 李鎭一][寫 : 荷物車로 護送]//水原署高等係晝夜로 大活動//朝鮮共産黨再建同盟系圖//全協系와 握手코 共靑赤農의 AB兩結社組織, 江陵一帶를 活動舞臺로[肖 : 姜德善 曺圭弼]//罷業操縱이 發覺端緖, 最初에 檢擧는 東署 西門署에서 祕社의 端緖探知코 電光같이 三千警官動員[肖 : 咸雲鶴 金潤植 李相珏]//西署刑事隊 竹山에서 活動[寫 : 第三次 組織한 所謂A結社를 組織한 江陵 南山峯]//農民을 指導코저 地域別로 農民에 浸透, 勞動者 農民層을 敎養訓練, 各記念日에 檄文撒布[寫 : 祕社의 本據]//平壤에 出張 卄名을 押來三十여 명을 검거하엿다가 公判回附는 單二名//京畿道警察 新義州서 活動//高敞에서도 靑年一名檢擧//活動內容 ; A結社, B結社, 農民 指導「그룹」 農校「그룹」, 病院「그룹」//勞動靑年檢擧(水原)//檢擧渦中에 女兒를 順産(江陵)//京畿警察部員 車啓榮檢擧(水原)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2 
단수 01 
표제어 조선공산당재건동맹사건(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문서철 명  사상에 관한 한 정보 7  
문서 번호  교토 서쪽 기밀 제 8613 호의 3  
문서 제목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사건發覺에 관한 건  
발신자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  
수신자  경무 국장 등  
발신 일  1934 년 02 월 07 일  

색인어 이름 : 김원봉 김원봉, 안광천安光샘 ,朴建雄,李英駿,鄭海魯리素進,李鎭한, 권 오 훈,朴文昊,鄭東源,吳必얻고吳永甦리寬鎬,南英基,魚允鳳최鍾弼최鍾鳳김 주한 여름崔善圭정 용 화 강德善,金東夏,姜益善정 인화,姜泰元,李相珏,崔憲集,姜吉선 최燉根,金東元,崔明根,曺泰현 최鍾煥최承大,曺圭조용필 최遠圭,崔承여덟曺國환,洪光俊,李圭弼김 주한 단,廉在根최鎬燮금炯道최燉宇,崔建永최燉珏,權赫진 금赫來,沈亮볼래요 ,李聖봄咸貴와서,金萬9. 숲 하루코, 이종석 리鍾漢최鍾聲,崔敏植,金潤植,崔元圭,金天會,金昌會박 해 가르쳐,李東彦,金聖터지는 최善章,朴容台금振榮,曺秉음과,崔鳳한혜진,權玉천 최 재喆,閔丙대,盧鼎鉉,鄭允時,李柱세,姜益善리鍾烈,黃鍾손자,金萬炯,李京球,姜宅濟,鄭胤甲금禮源리우振燮,金昌麟,黃鍾선, 긴토키 김용옥 높은 일 환,沈仁사와,申明奎,李明旭,李吉보물,金庚柱,韓舜源,金根燦송 용 곤 김 상 규 렌弼守,崔斗翼,李昌植,李時켄,李鎭한 리寬鎬,朴又尙宇리鎭永,權淳학 ,李孝律리鎭河,許宗弼허炅升,全甲奉,黃熊도,吳萬부키 금炯斗,李相일곱 금 다섯 사와,安潤洽박炳彊,李相蜂리奎烈,朴永龍, 김원섭, 금燦奎,李光壽,李賢壽박 음과 대 리素進리鍾應,朱在버킨李貴順,朴日馨,南萬熙,咸順성,韓國模리鍾嬉,安三원 리澈地박鍾煥,鄭七星, 인권 다섯 단계,白潤赫,卞洪대,金三만사 리芬成,李仁行,曺昌주, 김 주한 동 신德均,姜晦求,徐昌,李孝貞,趙承구 리東天,沈桂월, 윤茂憲원래鍾電, 김명식,李順지금 유진 희,金花姬,崔浩極,李英淑,李順玉리載裕금 연의,趙斗元, 안전炳春,金三용 리鉉相,金秋스타,姜周軾,姜惠淑김 현,李貞賢리 정숙 박魯昌,姜潤求장鉉近금應鳳, 안전千洙금龍岑,吳한 순서 류福童,卞洪좋고,安洪性,兪順히메,孔成檜,朴榮煥,辛海甲,黃大용李錫아키라 리 백 만사,李仁基리炳德,姜允錫,禹燦9.沈鍾晨,元俊植,權赫도,金良仙,李相軒리載德,金顯旭한일麟浲,李丙驥,朴成勳,任建鎬,趙敬煥박鍾琪최 소 복,閔炳기둥, 금 만사 얻고 돈南泳,邊雨심어柳榮京,李東심어金永斗,李正煥리노 봄李正郁,趙正郁,趙成龍,權寧하야오權重徽김 전 거쳐 곽 히데토시 금炯善
지명 : 북평, 寬勳洞 안성, 소격동 강릉 東萊 빛 熙町, 공주, 평양, 안주, 이천, 고양 苑洞, 중림동, 대동, 崇四洞, 도쿄, 울진, 회양 파주 중화 부천, 鎭南 우라, 닦고, 강서, 성천, 대구, 원산, 고성, 인천, 진주 용천 해주, 博川, 北靑 포천, 신의주 안동 현, 碧潼 봉천 요양, 滿州 경성 동대문, 益善洞 아산, 東萊 아래 왕십리, 정평 김해 신흥, 말머리 리, 麻浦洞, 齊洞,苑洞, 시흥, 淸島 칠곡, 서린동, 창신동, 완도 세 물, 함흥, 나가하라, 뚝섬, 홍원, 樂園洞, 차야 마치, 仁義洞 인사동, 황금 타운, 타다노부 동 신설 리, 通洞 지아 會洞 길주, 鳳翼洞, 寧平, 안전 邊, 갑산 용인 울산 禮山, 평원, 淸凉 리, 諫洞, 계동, 臥龍洞, 內資洞, 철원, 김포, 충주, 금산, 靑松, 유우키, 明川, 松月洞, 타카시 역삼동, 安國洞, 달성군, 김제, 화동, 광저우, 숭인동, 카사이 마을, 성북동 세 淸洞, 杏村洞, 禮智洞, 운니동, 문천 부산 鏡城, 開豊, 음성군, 玉川洞, 尙州, 敦岩里, 송탄, 강화, 고창, 德原 영등포,靑葉 타운, 경산, 개천 당나라 洙洞 광화문 양평, 동숭동
단체 : 경성 벽돌 공장 일본 선후 야마다 인쇄소 강릉 공작위원회, 강원도 경찰부 강릉 경찰서, 펌프 공장, 주한 도쿄 조선 노동 총독 동맹 지부, 전협 번째 黑支 부 서부 연구 반 성산 공립 보통 學校, 新幹會 강릉 지부, 청년 동맹 강릉 지부 강릉 農學校 반제 동맹 공산 黨靑 년 사회 공산 청년 동맹, 中國 공산당 당원 조선 공산 당원 평 壤赤 색 노동 조합 평양 경찰서, 인사동 공작위원회 , 爀進 사회, 智育會 문명 사, 선명 한 인 사회,
레닌주의 정치 학교 주의적 정치學校, 동대문 경찰서, 태평양 노동 조합, 비판 사 경성 상공會社경성 여자 상업學校, 보성高普,廣成학원 중앙高普, 경성부 들려,儆新學校,養正高보 동德女高普, 화신商會경성農學校, 전기學校, 배재대高普양평 청년 동맹 양평 농민 조합 준비위원회 농민稧양평 적색 농민 조합, 담배專賣국 공장, 전기氣會사, 직업 소개소, 오오츠카 인쇄소 대륙 고무, 이노우에製絲경성 일보사 야마다 인쇄소, 어떻게 제 면사, 카타 쿠라 제 면사, 계절 영사 인쇄소, 조선 일보사, 고려 고무 공장, 중앙 일보사 조선 제 면사會社, 화신商會, 창신 조 후쿠시마 조 요시다 조 영등포 공작소 조선 제絲永영등포구 공장, 경성부 이화 여자 전문적學校중앙 보육學校경성 보육學校,藥學전문적學校, 진명 여고 보, 배재대高普, 연禧專門學校, 중동學校경성 제일高普중앙高普동德女高普경성 제국 대학 경성 둘째高普직업學校, 송도高普
사건 :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사건, 夜學 연극 간담회 강좌 삼일 운동 기념 메이데이 기념 육십 만세 운동 기념 러시아 혁명 기념일 공 靑第 두 會大 사회, 讀書 사회 조직, 鍾紡 총독 파업
기타 : 경성 일보, 중앙 일보, 보안법 위반 新幹會 청년 동맹 해소 문제, 만주 사건 카와 치안 유지법 위반 아사히 신문

김원봉, 안광천이 맨 먼저 언급되어 있고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 학교 운영하는 운영진 이라구 나온다.




사상에 관한 한 정보 6>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사건 發覺에 관한 한 건
문서철 명  사상에 관한 한 정보 6  
문서 번호  교토 서쪽 기밀 제 8613 호  
문서 제목 조선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공산黨再건설 동맹 사건發覺에 관한 한 건  
발신자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  
수신자  경무 국장 등  
발신 일 1933 년 10 월 16 일  

색인어 이름 :朴良玉,李季陽, 安光샘 , 김원봉 ,朴建雄리 히데토시 리康明(李素連), 리鍾嬉,韓國模,朴日馨,鄭福봄咸順성 강鎬孫,朱在버킨洪顯明(李貴順리 타카아키),南萬熙,廉主壽,李鎭한,魚允鳳,吳永甦(금 일산)安三원 (張斗旭), 리澈地(금 종 한)吳必얻었다 (吳聖시게루)朴文昊( 박漆山)李伯文, 권 오 훈,南英基,金舜鎭,鄭俊碩유桭海물고기魯植정 동원,李哲英,崔愛琳,南英基,李志天, 킨,吳尙선,李春岩,金學圭리素進박次貞,朴基瓚,崔俊永,劉基春,權赫진,崔敦祐,崔圭進금 상 터지는 금炳卨,崔敦圭,李永淑,李貴明전 죽자,廉圭壽리鍾國,楊琴,李賢卿
지명 : 蛤洞 대구 東萊, 고양 龍頭里 동대문, 북평, 부산, 강릉, 평양, 신의주, 안성, 아산, 苑洞, 정평, 종로, 蓬萊, 齋洞, 鍾岩 마을 아래 왕십리, 瑞興 광화문 파주, 麻浦洞, 고성, 이천, 崇四洞, 공주, 김해, 시흥 신흥 빛 熙町, 중림동, 仁義洞 경성
단체 : 경성 지방 법원,鍾紡공장, 서울 고무 공장, 조선 조선 공산당 공산 당원 재건 동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 학교 주의적 정치學校, 중앙 상공 주식會社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강릉 공작위원회,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조선 지부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북평 지부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만주 지부大昌직물會社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화지 선후 야체 이카
사건 :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사건, 中國 공산당 당원 사건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이 보낸 정보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 학교 운영진 안광천, 김원봉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ad&setId=4210858&positio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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