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김명시 김두봉 김무정 평전]을 정치게시판에 올립니다.
정치게시판에 글 올리는건 처음이네요.
정치게시판에 김원봉 관련 글 올리는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빨갱이들이 김원봉이 빨갱이가 아니라고 선동할때 아래 짤방들과 내용들 보여주면 알아서 깁니다.
애국보수의 마지막 보루 일베와 정치게시판이 항상 영원하길 바랍니다.
의열단(義烈圈)이 길림성에서 결성된 것은 1919년 11월 10일이었다. 결성단원은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冑)·이성우(李成宇)·곽재기(郭在驥)·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結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晙)이었으며, 김원봉을 ‘의백(義伯)’으로 추대하였다.
활동지침으로는 ‘공약 10조’·‘암살대상’·‘파괴대상’을 채택함과 동시에,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침략원흉 응징을 활동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와 함께 최고이상으로는 ‘구축왜노(驅逐倭奴)’·‘광복조국(光復祖國)’·‘타파계급(打破階級)’·‘평균지권(平均地權)’을 천명하였다.
..... 이 시기 의열단원의 진보적 사고 형성에는 류자명(柳子明 : 무無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이회영과 함께 세운 놈)이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
1922년 겨울 김원봉은 북경의 신채호(무無정부빨갱이. 이 사람이 적은 의열단의 신조 조선혁명선언은 빨갱이 사상으로 가득하다.)를 방문, 의열단의 행동강령 및 투쟁목표를 성문화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의 완성.....
..... 남창봉기와 광주봉기로 대변되는 국공분열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상해로 온 김원봉의 당면과제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과제는 제3차 조선공산당 제2대 책임비서였던 안광천(安光泉)과 만나게 되는 1928년 중반부터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안광천과의 만남은 김원봉의 혁명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註 038 안광천의 출현은 김원봉이 지난 2년 동안 중국 국민혁명 현장체험 과정에서 절감한 협동전선론을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형상화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 시도는 1928년 10월 4일 발표된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중의 정강·정책에서 드러난다.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20개항의 정강·정책은 국민의 기본적 자유 보장, 남녀평등, 지방자치 실시, 의회주의 ‘민주국’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민족 혁명적 통일전선’의 결성을 제창한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 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 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註 039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함으로써 .....
창립 9주년을 기념하여
오늘 본단의 창립 9주년 기념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오늘을 최대의 정열과 무량한 감개를 가지고 기념하는 동시에 냉정한 심정으로 우리의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직시하여 장래를 계획한다.(중략)
우리들은 폭력적 혁명을 강조하고 민중적 운동을 제창하면서 1919년 11월 10일에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본단은 창립후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제1차로 郭敬, 李成字 등의 폭탄사건을 비롯하여 朴在爀의 釜山 폭탄사건, 金益相의 총독부 파괴사건, 吳成崙의 黃?灘, 田中 습격사건, 金始顯, 劉錫鉉, 黃珏 등의 폭탄사건, 金祉燮의 왜적 왕궁 폭탄사건,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拓 습격사건……등 무릇 16차에 걸친 대파괴 암살운동을 실행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스스로 비판하면 본단도 창립 당시에 조선혁명을 계획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많은 과오와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마는 여러가지 타락분자, 비겁분자, 공론분자, 폭력부인분자들 사이에서 혁명적 의열정신을 훌륭히 유지전개해 온 것은 조선 혁명사에서 광휘있는 사실에 틀림 없다. 우리들은 항상 실천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는 본단 자체의 실천과 조선 혁명운동 전체의 실천 내지 세계 혁명운동의 실천은 우리들의 견해를 한 계단 한 계단씩 진전시켜 왔던 것이다.(중략)
조선의 혁명과 세계의 혁명을 연결시킨 것, 조선혁명의 결정적 역량을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에게 추구한 것, 광범한 대중의 혁명적 요구를 반영한 구체적 강령을 게제한 것, 폭력혁명의 준비 및 조직을 고양한 것, 그리고 모든 혁명을 조직하여 전민족적 통일기관의 촉성을 주장한 것 등은 오늘에 있어서도 그 정당성이 더욱 더 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지금 조선혁명에 관련된 현재의 정세를 다시 한번 고찰할 때 그 중요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민중에 대한 극도의 압박착취 (자본주의 제도를 돌려서 비꼬는거)
2. 그것에 대한 조선 각계급 각층의 반항 내지 불평
3. 민족적 공동전선의 개시
4. 공산주의자의 지도 아래 급격히 전개되는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의 운동
5. 혁명전선에서의 우익세력의 대두
6. 제국주의 세계의 안정이 급격히 붕괴되고 그것에 따른 광적인 반동
7. 세계 무산無産계급(가난한 노동자 농민) 및 약소민족의 반제국주의적 전선과 세계혁명적 전선과의 동맹 확립과 세계혁명 파도의 상승
8. 소비에트연방이 모든 혁명의 우군으로 존재함에 대한 제국주의 열국의 연합적 반격
(두서 생략) 강도 일본에게서 조선의 절대 독립을 탈환하기 위하여는, 그 현재의 폭압에 항거하기 위하여는 다만 협동통일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주의에 따른 대립, 모든 붕당에 의한 분열이 극복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리고 조선 혁명운동은 더 나아가서 세계 혁명전선에까지 굳게 통일되지 않으면 안된다.제약소민족의 해방운동만이 우리들 동맹군의 목적은 아니다. 세계의 무산계급 혁명운동도 또한 우리들이 믿을만한 동맹군이므로 우리들은 그들과 동맹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비에트연방과의 동맹, 그것을 제국주의에 대하여 지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절대 필요하다.
우리들은 민족적 협동전선을 절규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이 절규하는 협동전선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고, 우경적인 것이 아니라 전투적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절대 다수도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이며 가장 혁명적인 계층도 그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전선의 기초를 그들에게 두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급속히 진전하는 조선 노농계급 운동을 더욱 발전시켜 그것을 독립운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협동전선의 최대 조건이 아니면 안된다. 동시에 현재 대두하고 있는 여러가지 우경 내지 타락 경향에 대해서는 협동전선에서 끊임없이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모든 전투회피자, 폭력부인자, 점진주의자 등을 의연히 혁명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과 싸우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 혁명운동의 전선통일을 절대로 주장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맹세한다.
본단은 9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위와 같은 견해와 주장을 고창하면서 다음과 같은 함성을 올린다.
강도 일본을 타도하자.
전투적 협동전선으로.
통일적 독립당을 완성하자.
자치주의자를 타도하자.
혁명의 기초를 노농대중에게.
세계혁명과 연결하자.
소비에트연방과 동맹하자.
1928년 11월 10일
- 빨갱이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빨갱이 김원봉의 연설문
일제시대 빨갱이김원봉 연설문 요약
1. 오로지 농민 노동자 대중 무산無産 계급 계층(프롤레타리아) 혁명 공산주의 투쟁운동 ㄱㄱㄱ
2. 소비에트 연방(소련)과의 동맹 ㄱㄱㄱ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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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50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 1) 독립운동정당의 성립과 활동 > (2) 의열단
(2) 의열단
義烈團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1925년 상반기까지 파괴·암살 등의 의열투쟁에 힘을 쏟았다.註 481 의열단은 20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투쟁을 벌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년부터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인 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그해 겨울에 광주에서 의열단의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吳成倫·金山·류자명柳子明 등이 함께 참석한 이 회의에서 의열단은 장차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註 483 이 결정을 바탕으로 의열단은 1927년 초에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것은 광동에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상해와 武昌 및 南昌에 지방집행위원회를 두는 내용이었다.註 484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의열단은 다음해인 1927년 5월에<獨立黨促成運動에 대한 宣言>을 발표하였다.註 485 이것은 이미 1926년 10월에 결성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이어 1927년 4월에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조직된 직후였다. 이로써 의열단은 ‘민족협동전선운동’과 ‘혁명정당’ 결성이라는 두 가지 활동방향을 정립했다. 그들은 우선 주요 활동지역에서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교 무렵부터 김원봉과 김성숙 등이 활동하고 있던 광동에서 김성숙이 주도하여 1927년 5월 8일에 광동촉성회를 조직했다. 또한 당시 무한에도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전개한 ‘反革命淸黨運動’(상해쿠데타)을 피해 모여든 의열단원들이 많았는데, 박건웅을 중심으로 무한촉성회가 조직되었다.註 486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이는 결국 의열단이 1926년 겨울에 결의한 ‘혁명정당 전환’ 방침을 사실화하면서, 이와 함께 1927년에 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이 나온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의열단은<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라는 발표문을 통해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정당’을 제안하였다.註 490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그러다가 1930년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무렵,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1929년 봄 이래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492 그러다가 1931년 9월에 일제의 만주침공을 접하면서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남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의열단 활동은 김원봉이 남경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한 일과 한일래와 박건웅이 중심이 되어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한 일로 나타났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맺어진 인연을 최대한 살려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中韓合作에 관한 建議>,<韓國革命의 現狀과 本團의 策略>,<朝鮮義烈團의 政治決意案> 등을 제출하고, 그 결과 장개석의 결재를 얻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었다.註 493 이 학교의 설립목적은 청년간부들에게 항일투쟁정신을 계승시키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시켜 한국의 절대독립을 달성하고 중국의 목표인 만주국 탈환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기까지 3기에 걸쳐 모두 125명의 청년간부들을 배출했다.
의열단이 전개한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되다가 일단 실패한 민족협동전선체 구성에 관한 노력이었다. 1932년 10월 이래로 구체화된 이 활동은 의열단을 비롯하여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신한독립당 등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를 결성하고, 뒤이어 11월 10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註 494 이로써 1926년 이후 상해 등 중국본토지역에서 추진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한 단계 나아가 장차 ‘대동단결체’를 조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의열단의 위치에서 볼 때, 이러한 결실은 1926년 겨울에 광주에서 열린 의열단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와 1927년 5월에 발표한<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선언>등으로 시작하여 1935년 7월 5일에 성립되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연결되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은 당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문제와는 관계없이 다른 독립운동정당과 동일한 자격과 위치에서 제 역할을 발휘했다.
註 481
金榮範,≪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창작과비평사, 1997), 141쪽.
註 482
김희곤,≪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지식산업사, 1995), 250쪽.
註 483
水野直樹,<黃埔軍官學校と朝鮮の解放運動>(≪朝鮮民族運動史硏究≫6, 1989), 63쪽.
註 484
水野直樹, 위의 글, 59쪽에서 재인용.
註 485
朴泰遠,≪若山과 義烈團≫(백양당, 1947), 206쪽.
註 486
梶村樹秀,<1940年代 中國の抗日鬪爭>(≪三千里≫31, 1982), 102쪽.
註 487
韓相禱,≪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문학과지성사, 1994), 223쪽.
註 488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340∼341쪽.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註 490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102∼104쪽.
註 491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5), 704쪽.
註 492
坪江汕二,≪鮮民族運動秘史≫(東京:日刊勞動通信社, 1959), 65쪽.
註 493
군사간부학교 운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韓相禱, 앞의 책, 255∼296쪽.
金榮範, 앞의 책, 299∼316쪽.
註 494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473∼474쪽.
의열단의 대표인 김원봉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4210883&position=0#483_comment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였다.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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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무산계급 혁명)을 위해 일제시대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 , 레닌학교 세우고 레닌학교에서 조선인 청년들을 빨갱이들로 교육시켜 조선반도에 적화 목적을 위해 침투시켰다. 그리고 레닌이란 잡지도 발간하였으며
무無정부빨갱이의열단테러리스트 이름을 무산자無産者전위동맹 즉 프롤레타리아 전위동맹으로 개칭하였다.
[ 김원봉은 1929년 가을 이래 북경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동맹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및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6635&position=2
"한편 김원봉은 1929년 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119 일제 자료에 의하면 김원봉은 1929년 가을부터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朝鮮共產黨再建準備委員會 및 레닌주의정치학교政治學校 운영에 관여하고 있었다.註 120 안광천의 주도 하에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는註 121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소재지는 북경北京 북성내北城內 동서조호동東西條胡同이었다.
주요 구성원은 안광천安光泉·김원봉金元鳳·박건웅朴建雄·이영준李英俊·양백림楊伯林이었으며
중앙부 산하에 훈련부·통신부·조직부·선전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10월의 중앙부 조직은 위원장 안광천 이하 김원봉·박건응·朴文昊·이영준·李賢卿·朴次貞의 7인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중앙부 직속으로 레닌주의사·레닌주의 정치학교가 병설되어 있었고, 하부조직으로 국내·북경·만주의 3개 지부가 있었다. 국내지부는 간사국 산하에 다시 목포·부산·강릉·대구·경성·평양·신의주·원산에 지방조직이 설치되어 있었다.註 122
레닌주의정치학교註 123는 6개월 기한으로 ‘공산주의 이론’·‘조직 및 투쟁’·‘조선혁명사’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4월∼9월, 1930년 10월〜1931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2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註 124 졸업생들은 1930년 8월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지식인 그룹·도시노동자·농민·진보적 학생층을 상대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과 대중운동의 고양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사례가 1933년 10월 일제 정보망에 포착되어 13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로부터 2년이 경과한 1935년 8월 발표된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 사건’註 125과
‘공산청년동맹준비위원회共產靑年同盟準備委員會·강릉적색농민조합결성준비위원회江陵赤色農民組合結成準備委員會 등 조직사건’註 126이다.
또한 레닌주의사에서는 《월간 레닌주의》라는 선전지를 간행하였다. 1929년 5월 5일자로 간행된 제 1호에는
〈조선정세朝鮮情勢와 조선공산주의자朝鮮共產主義者의 당면임무〉라는 장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註 127 이와 함께 잡지 말미에 실려 있는 ‘레닌주의 총서’ 간행예고 선전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동맹의 지향은 보다 분명해진다.註 128 이상 1929년 가을부터 1931년 전반기에 걸쳐 김원봉이 관계하고 있었던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김원봉의 동향은 공산주의 활동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1928년 11월의 선언과 함께 이 시기 김원봉의 성향에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게 드러나고 있음은 사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4210874&position=0
: 안광천安光泉의 주요 행적을 살펴 보면, 그는 동경유학시 일월회一月會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여름 귀국 후에도 일월회一月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產黨에 입당하여 그해 12월 金錣洙의 후임으로 제 3차 조선공산당(1926. 9∼1928. 2) 제 2대 책임비서 (1926. 12∼1927. 9)가 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각도간부 확대, 조직거점 확보, 만주총국·상해부·일본부 부활 등을 시도하였고, 1928년 제 3차 조선공산당 붕괴 이후에는 제 4차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직을 맡았다. 1928년 3월에는 그가 기초하고 제 4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에 관한 론강論綱〉을 통해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淸算主義的 입장의 견지로 말미암아 1928년 5월 끝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명당하였다.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주제어 관내
출전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ch&setId=4216625&position=1
날짜 1929년 06월
김원봉·안광천, 북평北平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직하고 레닌주의정치학 교 설립.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 레닌주의 政治學校 명칭은 모스크바의 마르크스학원을 모방한 것이었다(스칼라피노·이정식, 앞의 책 p.238).
날짜 1929년 10월
權五勳, 김원봉의 레닌주의정치학교에 입학.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9.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安光泉,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과 무산자전위동맹無産者前衛同盟(의열단義烈團 개칭) 조직.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무산자無産者 = 프롤레타리아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 김원봉, 북경에서 무산자전위동맹 조직.
[출전] 조선혁명테제
날짜 1930년 09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제1기 졸업생 魚允鳳. 李鎭壹. 金武. 吳必得, 서울에 잠 입 (직접 노동자로 변신. 2개의 야체이카 조직).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0년 10월
김원봉. 안광천의 무산자동맹 잡지 레닌, 정간당함.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p. 202.(이상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자료)
날짜 1931년 02월
레닌주의정치학교 2기 졸업생 권오훈·이소전 등 11명, 국내 잠입.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1년 07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졸업생 이철영, 김창린·이명욱 등과 함께 평양적색노平壤赤色勞 동조합動組合 조직.
[출전] 조선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4.
"이처럼 유쾌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원봉은 개인적인 아픔에 직면하게 된다. 지난 15년 간 혁명동지로서 함께 항일역정을 헤쳐왔던 아내 朴次貞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1929년 김원봉과 더불어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활동에 참여한註 331 이래 민족혁명당 부녀부장 등으로 활동해 온 그녀註 332의 죽음은 김원봉에게 또 다른 번민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1944년 4월 20일 개최된 제 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선임되었다註 333고 하지만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음모술수가 많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은 그의 행동 반경을 제약하는 것이었고 그의 인상을 ‘중산복 차림의 남성답게 잘 생긴 투사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찌푸린 표정에 말을 아끼는’ 폐쇄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게 하였다.註 334 1945년 초 중경에 도착한 일본군 학도병 출신의 회고록에서 조차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註 335 김원봉에 대한 질시는 1940년대에 들어와 시작된 사실이 아니었다.
....: 김원봉과 임시정부 내 보수적 인사들과의 타협되기 어려운 성향의 차이에 대해 국민정부의 김원봉 지원업무를 주관하였던 滕傑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김원봉金元鳳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자들은 공연히 허위虛位에 앉아 있고 실제활동이 없으므로 이끌어 갈 수 없다고 보는 반면, 임정 측 인사들은 김원봉 등을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있고
또 언행도 너무 偏激하다고 보아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滕傑 증언, 〈三民主義力行社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 p. 74).
김원봉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는 일제패망 직후인 1945년 9월에도 중경 소재 소련대사관과 중공당에서 운영하는 신화일보新華日報와 접촉하고 있었다( 《資料韓國獨立運動》1, p. 406).
김원봉 계열과 김구 계열의 불화 모습을 전하는 한 중국인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원봉 계열은 김구를 가리켜 “연로年老하고 력쇠力衰하며 군중으로부터 이탈되어 복국復國과 건국建國을 영도할 수 없다”고 하였고, 김구 계열에서는 김원봉을 “공산당 분자로 보고 중공과 소련의 이용을 받고 있으므로 중국정부는 그의 기만을 믿지 말라”고 비난하였다 한다(祝秀俠 증언, 〈中國國民黨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p. 138).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4210874&positi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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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38년 10월10일
김원봉金元鳳, 중국군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한구漢口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산 하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창설.
[출전] 한민족독립운동사 4 p. 448. (이상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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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이란 빨갱이총연합정치단체 만들고 '조선민족전선연맹'이라고 빨갱이 군사총연합도 세우고
조선민족전선연맹 소속 부대로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는데 빨갱이 군대임.
조선의용대를 이끄는 김원봉 김두봉 김무정 최창익 허정숙 김명시 전부 빨갱이들임. 김두봉은 나중에 북괴 제1대 수령되는 사람이고
김무정은 북괴 장군이 되는데. 김두봉 김무정은 625 남침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음. 김원봉은 북괴에서 10년간
국가검열성 총책임자, 노동성 총책임자 , 북괴 초대 내각 대의원 등 북괴의 요직들을 두루두루 맡고 훈장까지 받음.
최창익은 일제시대부터 아주 유명한 극極빨갱이이고 소련에서 전문적으로 공산당교육을 받고온 인간임.
허정숙도 일제시대에 이미 유명한 여자 빨갱이였고, 애비 허헌 역시 빨갱이임.
허헌은 북괴 주요 정치인물이 되고 허정숙 역시 북괴 초대내각 문화선전성 총책임자 대의원이 됨.
김명시는 조선공산당 두목 박헌영이 보낸 여자 빨갱이임.
얘네들을 전부 '연안파빨갱이'라고 부름.
이 인간들은 독립운동 한적없음. 농민 노동자 계급유일독재 사회주의 낙원을 세우기위해 자본주의 제도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놈들임.
독립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이 하는거고 민족주의자들은 우파임.
북괴 빨갱이가 '우리민족끼리~' 라고 해서 북괴 빨갱이가 민족주의자는 절대로 아닌것처럼,
김원봉 김두봉 김무정 등이 민족주의자들도 자기들 편으로 포섭시킨다고해서 민족주의자라~~고 한다면..., 그건 절대로 아님.
소련의 한국 지역 책임자인 김일성은 남조선의 빨갱이들에게 지령들을 내린다.
그 지령은 "남조선을 폭동으로 적화시키라"였다.
해방 이후 조선반도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괴상한 국가가 출현한다.
고려공산당이며 빨갱이 인민당 당수인 빨갱이 여운형이 만들었구 지방 곳곳에 '인민위원회'란 빨갱이 자치기구를 도배했다.
북조선에는 김일성이 소련의 한국지역 책임자로 온다.
그러자 여운형의 인민위원회는 김일성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남조선을 적화시키기위해 본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좌측이 조선공산당 보스 박헌영 , 우측이 고려공산당원이자 빨갱이 인민당 보스인 여운형)
여운형은 눈빛부터 사악한 빨갱이의 눈깔을 가지고있었다.
빨갱이김원봉은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국안하고 개인자격으로 입국해서 남조선을 적화시키기위해 온다.
빨갱이김원봉은 귀국 직후 빨갱이 여운형 조선인민공화국의 군사부장으로 임명된다.
빨갱이 대장군이 된 것이다.
빨갱이김원봉은 그 즉시 노동자 농민 계급의 군대를 급히 만든다. 바로 빨갱이 국군준비대였다. 그 숫자는 무려 8만이었다.
빨갱이 군대 국군준비대 창설에 참가한 놈들 :
1. 조선인민공화국 군사부장 김원봉 장군
2. 고려공산당원이자 빨갱이 인민당,인민위원회 보스 여운형 , 중도좌파 반쪽 빨갱이 안재홍
3. 조선공산당 보스 박헌영
4. 빨갱이 부녀총동맹 대장 김명시
5. 빨갱이 성주식 , 조선공산당 소속 빨갱이 단체들 청총 전평 전농
빨갱이김원봉 : "일제를 따라 지원병 , 학병이 됐던 청년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이제 국군준비대입니다!
최고명예의장으로 김일성 장군 , 김무정 장군을 추대합니다!
국군준비대 8만 여러분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미군정과 이승만 정권과 대한민국 경찰을 가리킴)의 군대가
되지말고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프롤레타리아 무산無産 계급)을 위한 군대가 되어야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자료
조선朝鮮의 「짠타크(잔다르크)」 로 불리는 빨갱이김명시 : "국군준비대 여러분 ! 전 무정武亭장군(북괴 장군 김무정)의 직속지휘관으로 부하 2,000명을 가지고 항일전에 활동하여 무훈을 세운
연안독립동맹延安獨立同盟의 여장군 김명시金命時입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전 중국에서 김무정 장군과 함께 조선인 지원병 , 학병들을 맞아들여 공산주의 사상을 교육시켰습니다.
이제 이 지원병 , 학병들은 (김원봉 장군을 따라) 통일전선戰線에 참가하여 한뭉치가 되어야합니다.
조선사람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이승만 정권과 경찰을 비꼬는 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하여 한뭉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피로 조선을 되찾자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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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9월 14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정부의 군사부장으로 등장하기도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김원봉金元鳳의 귀국 .......................
.......귀국 직후 김원봉은 국내 혁명가들(빨갱이들)을 방문 국내사정을 청취하는 한편,
12월 8일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식에 참석 스스로 ‘군인’임을 천명하였다.
또 그는 12월 26일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국군준비대 전국대회 축사를 통해 “국군은 친일파·민족반역자의 군대가 아닌……노동자·농민·근로대중을 위한 군대가 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는註 363 등 분주한 시간 속에서 1946년의 새해를 맞게 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76843&positio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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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김원봉 :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여러분! 전 군인입니다! 혁명의 선봉에 서십시오 !!!
김원봉은 미군정 , 이승만 정권 , 대한민국 경찰들을 모조리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몰아서 한꺼번에 다 때려잡아
적화시키려고하는 무시무시한 악마惡魔였다.
빨갱이독립군(조선의용대의 화북 지역 멀티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여女장군 김명시金明時.
동료 여성교관 허정숙과는 달리 결혼을 밥먹듯이 하진않았다.
남조선을 적화시킬려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가입해서 '부총'이라는 여성부를 거느리게된다.
빨갱이김원봉과 함께 [빨갱이국군준비대] 8만을 만들고 후배들을 열심히 훈련시켰다.
김명시는 일제시대부터 '조선공산당재건운동' 골수빨갱이 '조선공산당 당원'이었으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자이며
조선공산당 보스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빨갱이김원봉의 빨갱이조선의용대를 도우러 화북으로 갔다.
화북에서 빨갱이조선의용군 제1선 적구부대 ‘여자부대’를 지휘하고
빨갱이조선독립동맹 천진분맹 책임자로 있었다.
해방 이후엔 북조선 노동당 정치위원으로 남조선에서 활동했다.

빨갱이 군대 국군준비대는 광복군마저 흡수해버린 후 대규모 시위를 길거리에서 벌이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1. 신탁통치를 반대한다. 북한이랑 합치자
2. 남조선의 모든 정당은 해체하라 임시정부도 해체하라 여운형의 인민공화국도 전부 해체하라
각 당과 각 파는 모조리 해체하라
3. 오로지 민족통일전선戰線 뿐이다! 오로지 우리민족끼리다! 우리는 민죽주의민족전선戰線(남조선 빨갱이 총연합)의 선봉군이다 !
오로지 통일! 오로지 독립! 민족분열을 반대한다! 북조선과 합체하자 !
4. 우리는 다만 조선인민군이다 !
5. 이승만은 반동이다 ! 반성없는 반역자들은 피의 세례를 받으리라 ! 우린 최후로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싸운다 !
6. 우리 언론을 탄압하는 우미관 김두한을 죽이자 !
1946년 1월 - 미군정이 보낸 특수부대 수십명이 빨갱이국군준비대를 상대로 2차례 공격하여서 간부들을 모조리 납치해감.
다음날 김두한과 우미관식구들하고 대한민청 청년단이 와서 총과 죽창 칼 쇠파이프로
신나게 학살. 빨갱이국군준비대는 그렇게 강제해산됨.
==========김두한이 증언하는 빨갱이 국군준비대 ============================================
김두한 :
1. 남로당으로 변한 조선공산당 외에 공산당 조직도 수십 개나 있었지요. 공산당 조직은 노동계, 학생, 예술가쪽으로도 힘을 뻗쳐서 전국에 많은 산하 조직을 갖고 있었지요. 이 조직들이 인민전선이라는 단일전선으로 나갈 때였죠.
2. 한데 미국은 좌익과 우익을 합작시키려고 하지 않고 좌익과 우익을 제외한 중간노선한테 정권을 주려는 거예요.
하지만 말이 중간노선이지 그들 대부분이 좌익계라서 만일 중간노선이 정권을 잡게 되면 적화될 게 뻔해서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북에 있는 소련군은 우익을 다 때려 죽이고 공산당만 적극적으로 밀었는데,
3. 그때만 해도 남조선에 군대라는 게 없었어요. 국방경비대가 1947년쯤 돼서야 정식으로 발족했으니까. 그때 군사영어학교라고 나중에 국방경비대가 되는 단체가 있었지만 2,3천 명에 불과한 데다 미군들 눈치 보느라 군사 활동을 아예 못했거든요. 그러니 힘이 없었지요. 하지만 좌익들은 북쪽의 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까 힘이 아주 막강했어요.
4. 말이 국군준비대지 사실은 남한인민항쟁 유격사령부예요. 이 국군준비대의 명령계통이 조선인민공화국(고려공산당 인민당 빨갱이 보스 여운형이 세운 인민위원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인민위원회의 군사부장 그러니까 총사령관이 김원봉이다. 사실상 김원봉이 국군준비대의 총보스)이예요.
5. 국군준비대는 명동에 본부를 두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장교집합소를 만들고 학병 출신들과 지원병을 모집해 세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6. 이 국군준비대를 유심히 보고 있자니 단순한 준비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군사 반란을 일으켜 남한을 적화시키려는 야욕이 감춰져 있었던 거지요.
잘 아시겠지만 여순반란 사건도 몇몇 장교가 모의해서 시작했지만 나중에 몇 천 명씩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국군준비대도 몇 명 안 되는 인원이지만 만일 사건이 커져서 소련군이 북에서 밀고 들어오면 큰일날 일이지요.
이에 한민당도 위기상황을 느끼고 동분서주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니 저걸 부수지 않으면 무력혁명이 일어나겠다 해서 국군준비대를 때려부시라는 명령을 제가 받은겁니다.
7. 그때는 경찰이라고 해봐야 전국을 합쳐서 몇 백 명밖에 안 되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경찰이 군인들과 전쟁을 할 수 있나요.
경찰은 치안이나 담당하던 사람들인데 싸울 줄을 알아야지.
8. 장덕수 선생은 공산주의는 피의 혁명을 원하기 때문에 국군준비대가 틀림없이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감지한 거예요. 그래서 고민 끝에 내게 부탁한 거지요. 군사조직도 없고 경찰도 못믿으니까.
한데 그 전에 미군한테 무장을 해제당해 무기가 없었잖아요. 그 얘길 장덕수 선생에게 했죠. 그랬더니 장택상 씨가 무기를 책임지겠다고 해요. 지금 중앙청 옆에 경찰별동대 본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경찰전문학교 무기창고가 있다는 거예요. 총이 5천자루가 있는데 그걸 전부 줄 테니 소문 안 나게 가져 가서 일을 치르라는 거죠. 뚝섬 근처 한강변에 자갈천이라는 인적이 드믄 벌판이 있었어요. 그곳에 총을 갖다 놓으면 우리가 가져 가겠다고 했지요. 3천 명만 동원하면 충분하니 3천 자루만 달라고 했지요.
─ 장택상 씨는 그때 군정의 수도청장이었죠?
▲ 네. 수도청장이니까 경찰의 총수인 조병옥 박사와 상의해서 총을 구해줄 수가 있었던 거지요.
총 외에도 수류탄을 비롯해 실탄, 기관총까지 갖다 놓았더군요. 총을 인계한 나는 특공대원을 차출하기 시작했습니다.
9. 빨갱이 국군준비대는 내가 지들을 기습하는줄 전혀 모르고 있었죠. 장교 훈련소가 지금의 육사 자리입니다.
그때 목조 건물이 6개가 있었어요. 2층짜리지만 제법 컸어요. 전부 6개 동이지만 1, 2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니까 12개잖아요.
그래서 부하들을 12개조로 편성했지요. 다 때려잡아 죽였습니다.
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3&r_serial=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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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참고 자료 :
민족혁명당 , 조선민족전선연맹 , 조선의용대 , 화북조선독립동맹 , 화북조선의용군 에 관한
네이버 지식백과 검색 (한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등등)
한국 사회주의 운동 인명 사전 150 페이지
노동자의 책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7&idx=3336
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3&r_serial=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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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1932년 사이 의열단의 국내 대중투쟁 성과를 정리한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농민운동
○ 농민조합農民組合 신설 : 洪原·龍川·博川·江陵
○ 抗租運動 : 龍川 不二農場의 제 2차 抗租運動
○ 농민조합農民組合 개조 : 南海
一. 노동운동
○ 支部組織 : 釜山陶器工場·釜山橡皮工場·京城鐵道會社·京城朝鮮紡織工場·平壤電氣工廠
一. 학생운동
○ 支部組織 : 京城第一女子高等普通學校·京城醫學專門學校·大邱商業學校·大邱高等普通學校·平壤女子高等普通學校
( 〈韓國義烈團工作報告書〉1932. 12. 10, 《資料韓國獨立運動》3, p. 25)
이들 의열단 대중운동 조직의 구체적인 조직실태·활동상황 등에 관한 사실은 ‘江陵’의 경우를 제외하고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1930년대 국내 대중운동의 전개와 관련하여 시사적인 의열단의 국내공작 실태는 향후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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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한국 사회주의 운동 인명 사전 150 페이지
노동자의 책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7&idx=3336
[김명시(金命時, 1907~?) 金喜元 金輝星 金輝然 스베찌로바 (여성)] ()
(고려공청 회원, 중공 上海韓人支部 선전부 책임) 경남 마산 출신으로 김형선(金炳善)의 동생이다. 1924년 3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여학교를 중퇴했다. 1925년 7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마산 제1야체 이까에 배속되었다. 10월 고려공청에서 모스끄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2월 예비과에 입학했다. 1927년 6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로 파견되어 8월 상해에서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상해한인지부 조직부 및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달 중국공산당 한인지부 갑조(甲組) 조장, 9월 상해한인청년동맹 부인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5월 상해에서 대만공산당(臺灣共産黨) 결성을 지원했고 6월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 위원이 되었다. 1929년 10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중국 공산당 및 공청에 가입시키기 위해 북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갔다. 1930년 1월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 및 기관지 『반일전선(反日戰線)』 담당자가 되었다. 5월 중공 아성현(阿城縣)위원회 건립에 참여하고 부인부 책임자가 되었다. 1931년 11월 중공 상해한인지부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고 12월 상해 한인반제동맹(韓人反帝同盟) 결성에 참여했다
(민전 중앙위원) 1932년 3월 코민테른 동양부 산하 조선문제 뜨로이까의 지도하에 기관지 『코뮤니스트』 배포를 위해 귀국했다. 4월 김형선과 함께 경인지역에서 『코뮤니스트』,『태평양노조』를 인쇄, 배포했다. 5월 일본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던 도중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933년 12월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화북(華北)조선독립동맹 화북 책임자를 지냈다. 1945년 12월 서울에서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달 조선국군준비대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가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민전 서울지부 의장단으로 선출되었고 12월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선전부장이 되었다.
[김원봉(金元鳳, 1898~1958) 金若山 陳國斌] ()
1929년 봄 북경(北京)에서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하여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청년간부를 양성했다. 그 무렵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정치학교 졸업생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국내의 노농대중운동에 합세하게 했다.....................................,
[김형선(金炯善, 1904~50) 金元植, 崔命煥] ()
(조공 당원) 경남 마산 출신으로, 김형윤(金炯潤)의 형, 김명시(金命時)의 오빠이다. 1917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간이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퇴학당했다. 상점원 및 부두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마산창고회사 사무원으로 5년간 근무했다. 1924년 8월 마산공산당 결성에 참여했다. 1925년 4월 경남 사상단체 동인회(同人會)에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5월 마산청년회 운동부원이 되었다. 7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마산야체이까에,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하여 마산제1야체이까에 배속되었다. 9월 마산노농동우회 교무부 책임자가 되었다. 12월 ‘제1차 조공검거사건’에 연루되어 마산경찰서에 한때 검속되었다. 같은 달 마산청년연합회 총무부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1926년 봄 『조선일보』 마산지국을 경영했다. 3월 마산기자단 집행위원, 4월 마산노동연맹 발기준비위원, 경남기자동맹 서무부 책임자, 5월 마산노동회의 벽신문 『첫소리』 통신부원이 되었다. 8월 ‘제2차 조공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중국 상해(上海)를 거쳐 광동(廣東)으로 망명했다.
(남로당 중앙감찰위 부위원장) 1927년 1월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했다. 1928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강소성(江蘇省)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에 배속되었다. 1929년 6월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10월 유호(留滬) 한국독립운동자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총무부장이 되었다. 1930년 7월경 중공의 지시에 따라 코민테른 동양부 산하 조선문제 뜨로이까의 조직선으로 배속되었다. 1931년 2월 조공 재건운동을 위해 입국했다. 1932년 4월 반일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했다. 11월 『코뮤니스트』 배포망을 조직하고 그 배포망을 통해 조공 재건운동에 종사했다. 1933년 7월 영등포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34년 12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건국준비위원회 교통부 위원이 되었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 경제부장 대리로 선정되고 조공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국원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가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중앙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당대회의 즉각 소집을 반대했다.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2월 남로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50년 9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피해 월북하던 중 사망했다.
김두한 : 남로당으로 변한 조선공산당 외에 공산당 조직도 수십 개나 있었지요. 공산당 조직은 노동계, 학생, 예술가쪽으로도 힘을 뻗쳐서 전국에 많은 산하 조직을 갖고 있었지요. 이 조직들이 인민전선이라는 단일전선으로 나갈 때였죠.
한데 미국은 좌익과 우익을 합작시키려고 하지 않고 좌익과 우익을 제외한 중간노선한테 정권을 주려는 거예요. 하지만 말이 중간노선이지 그들 대부분이 좌익계라서 만일 중간노선이 정권을 잡게 되면 적화될 게 뻔해서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지요.북에 있는 소련군은 우익을 다 때려 죽이고 공산당만 적극적으로 밀었는데, 하지 장군은 처음에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좌익도 살리고 우익도 살리겠다는 하지 노선을 견지했지요. 그때만 해도 군대라는 게 없었어요. 국방경비대가 1947년쯤 돼서야 정식으로 발족했으니까. 그때 군사영어학교라고 나중에 국방경비대가 되는 단체가 있었지만 2,3천 명에 불과한 데다 미군들 눈치 보느라 군사 활동을 아예 못했거든요. 그러니 힘이 없었지요. 하지만 좌익들은 북쪽의 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까 힘이 아주 막강했어요.
평안도 출신으로 일본군에 학병으로 입대했다가 중위로 진급한 남모씨라는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일본군을 탈출해서 어디로 갔는고 하니 연안으로 갔어요. 연안에는 팔로군이 있거든요. 만일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갔다면 광복군이 됐겠지만 워낙 멀어서 가까운 연안으로 가는 바람에 좌익이 된 거지. 사상이 없다 해도 팔로군 모택동 밑에서 해방될 때까지 1년 9개월간 있었으면 빨갱이가 되는 거죠.남씨가 해방되고 나서 남한에 들어와서 군사를 조직하기 시작한 거예요. 말이 국군준비대지 사실은 남한인민항쟁 유격사령부예요. 이 국군준비대의 명령계통이 조선인민공화국(고려공산당 인민당 빨갱이 보스 여운형이 세운 인민위원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인민위원회의 군사부장 그러니까 총사령관이 김원봉이다. 사실상 김원봉이 국군준비대의 총보스)이예요.
국군준비대는 명동에 본부를 두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장교집합소를 만들고 학병 출신들과 지원병을 모집해 세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운형씨가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많은 젊은이들이 멋모르고 국군준비대에 입대했습니다. 이 국군준비대를 유심히 보고 있자니 단순한 준비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군사 반란을 일으켜 남한을 적화시키려는 야욕이 감춰져 있었던 거지요.잘 아시겠지만 여순반란 사건도 몇몇 장교가 모의해서 시작했지만 나중에 몇 천 명씩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국군준비대도 몇 명 안 되는 인원이지만 만일 사건이 커져서 소련군이 북에서 밀고 들어오면 큰일날 일이지요. 이에 한민당도 위기상황을 느끼고 동분서주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니 저걸 부수지 않으면 무력혁명이 일어나겠다 해서 국군준비대를 때려부시라는 명령을 제가 받은겁니다.
그때는 경찰이라고 해봐야 전국을 합쳐서 몇 백 명밖에 안 되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경찰이 군인들과 전쟁을 할 수 있나요. 경찰은 치안이나 담당하던 사람들인데 싸울 줄을 알아야지. 그래도 장덕수 같은 분이 한민당에 있었기에 국군준비대의 위험성을 미리 알아차린 겁니다.
장덕수 선생이 누굽니까? 내가 보기에 장선생은 정치이론이나 정치견해가 이승만 박사나 백범 선생보다 더 뛰어난 분이예요. 장덕수 선생이 젊었을 적엔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하지 않았어요? 그 장선생이 레닌에게 한국공산당을 조직하라는 밀명을 받고, 공작금조로 준 35만원을 들고 그대로 미국으로 튀었지요. 레닌을 만날 만큼 뛰어난 공산주의 이론가였지만 고국에 돌아와서는 민족주의 진영에 서서 한민당 총무부장으로 있었던 겁니다.
저도 장덕수 선생에게 공산주의의 잘못된 점을 여러 번 강의 들었는데 무식한 나지만 머리에 쏙쏙 들어옵디다. 그걸 내 부하들에게 다시 설명해주곤 했거든요. 장덕수 선생은 공산주의는 피의 혁명을 원하기 때문에 국군준비대가 틀림없이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감지한 거예요. 그래서 고민 끝에 내게 부탁한 거지요. 군사조직도 없고 경찰도 못믿으니까.
한데 그 전에 미군한테 무장을 해제당해 무기가 없었잖아요. 그 얘길 장덕수 선생에게 했죠. 그랬더니 장택상 씨가 무기를 책임지겠다고 해요. 지금 중앙청 옆에 경찰별동대 본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경찰전문학교 무기창고가 있다는 거예요. 총이 5천자루가 있는데 그걸 전부 줄 테니 소문 안 나게 가져 가서 일을 치르라는 거죠. 뚝섬 근처 한강변에 자갈천이라는 인적이 드믄 벌판이 있었어요. 그곳에 총을 갖다 놓으면 우리가 가져 가겠다고 했지요. 3천 명만 동원하면 충분하니 3천 자루만 달라고 했지요.
─ 장택상 씨는 그때 군정의 수도청장이었죠?
▲ 네. 수도청장이니까 경찰의 총수인 조병옥 박사와 상의해서 총을 구해줄 수가 있었던 거지요.
총 외에도 수류탄을 비롯해 실탄, 기관총까지 갖다 놓았더군요. 총을 인계한 나는 특공대원을 차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만 2천 명 중 체격이 크고 뚱뚱한 사람은 전부 뒤로 빼는 거예요. 그러면 키가 조그만 사람만 남거든요. 뚱뚱한 친구들이 ‘저희는 왜 뒤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묻죠. ‘너는 필요 없어, 저리 가’ 정면 습격할 때는 체격이 큰 게 유리하지만 비밀리에 기습할 때는 체구가 작은 놈이 더 낫지요.
제주도 조랑말 있지 않습니까? 조그만 놈이 아주 야물지요. 사람도 키가 작고 곱슬머리, 옴폭 눈 등이 아주 독하지요. 피부도 하얀 사람보다는 노랑이 더 독하구요. 곱슬머리에 옴폭 눈에게 걸리면 큰일 나요.
작은 놈이 독하고 사람 잘 죽이지, 덩치 크고 뚱뚱한 놈은 겁이 많아요. 뱃살이 많은 놈은 살이 흐물흐물해서 안 돼요. 또 덩치가 작더라도 눈이 크면 안 돼요. 겁이 많으니까. 그런 놈들 데리고 가면 일 다 잡쳐놓아요.
그런데 그런 놈들만 추리니까 천 5백 명이 조금 넘을 정도밖에 안 돼요. 총은 3천 자루인데.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 잡칠 수는 없으니까. 하는 수 없이 야간천막 쳐놓고 남은 무기를 지키라고 해놓고 천 5백 명만 데리고 떠났지요.
차는 남산공원 올라가는 곳에 쭉 세워놓았더군요. 운전사에게 1만 원씩은 줘야 합니다. 원래 1천5백 원이면 되지만 총을 든 대원들을 수송하는 거니까.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무조건 가는 겁니다. 조수석에는 총 가진 대원이 앉아 있으니까 꼼짝도 못하죠.
그러고나서 출발하는데 밤 12시쯤 됐나, 제 1한강로에서 이태원, 동대문으로 가는 길 곳곳에 경찰 간부들이 나와 지키고 있어요. 일반 경찰들 시키면 혹시 좌익에게 정보가 새나갈까봐 그런 거지요. 근데 수송만 해서 되나요. 처음 본 총이니까 연습을 해야지요.
38 구경식 옛날 총의 격발대를 잡아 당기고 총알 넣는 게 좀 힘듭니까. 실탄 연습은 못하고 차안에서 격발 연습만 하게 한 뒤 출발을 했지요. 조모, 신모, 김모 등 별동대 대장들은 오토바이 타고 뒤쫓아 갔는데 길이 그때만 해도 울퉁불퉁 억수로 나빠서 도착하니 근 3시가 됐어요.
─ 새벽 3시요. 그럼 그때까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나요?
▲ 네, 전혀 모르고 있었죠. 장교 훈련소가 지금의 육사 자리입니다. 그때 목조 건물이 6개가 있었어요. 2층짜리지만 제법 컸어요. 전부 6개 동이지만 1, 2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니까 12개잖아요. 그래서 부하들을 12개조로 편성했지요.
─ 지난시간엔 국군준비대 습격이야기 였는데 그 사건이 일어난 때가 1945년 가을이나 겨울쯤 됐겠지요.
▲ 10월 16일쯤 됐죠.
─ 그 해 겨울에 삼청동의 학병동맹을 습격했다는데 그 얘기를 좀 해주시죠. 국군경비대가 학병동맹이랑 관련이 있었던건데.
─ 국군경비대는 학도병, 일본군,징병군, 실전전투의 군사훈련을 받은것이고 학병동맹은 군사조직을 떠나서 순수한 학생조직이었죠.
─ 불시에 습격했다고 하던데 그 사건이 일설에 의하면 경찰에서 했다는 얘기도 있고, 김선생님 조직이 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 그거야 당연히 우리가 한 거죠. 하지만 경찰의 부탁을 받아서 한 거니 경찰에서 했다는 얘기도 맞기는 하지요. 경찰이 저에게 부탁한 것은 대한민청으로 이름을 바꾼 바로 뒤였어요. 지난번에 얘기한 학병동맹을 습격하기 바로 전 일이지요.
최련씨라는 경찰 간부가 있어요. 장택상 수도청장의 경찰 고문을 했던 사람인데요. 경찰 간부로는 가장 높은 분이지요. 그분이 자기 비서를 보내 나를 만나자고 해서, 충무로의 태극당에서 조금 올라가서 언덕 밑에 있던 천양본인가 천양사인가 하는 요리집으로 갔어요.
일정 때는 가장 큰 일본 요리집이었는데, 해방 후에는 한국 사람이 맡아서 하고 있었지요. 1시 조금 넘어서인가 점심을 했지요.구석방에 가니 최씨가 기다리고 계시다가 아주 반갑게 맞이해줘요. 웬일이냐고 물으니까 아주 중요한 얘기가 있다면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나가서 전화를 걸고 다시 오셨어요. 최씨는 그동안 공산당을 많이 죽여 경찰계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일제 시대 때 순사에서 시작해서 조선 사람으로 경찰 부장까지 지낸 사람이니까요. 그 양반이 해방을 함흥에서 맞이했습니다.
함흥 형사과장이었으니까. 근데 형사과장은, 고등과장이라고도 하는데, 사상범을 다루는 일을 하잖아요. 게다가 함경도는 공산당이 들끓는 곳입니다. 만주나 블라디보스토크도 가깝고 하니 아주 힘든 자리지요. 그 양반이 아무래도 장택상 씨한테 코치한 것 같아요. 장택상 씨는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얼마나 지독한지 잘 모르거든요.바로 장택상 씨가 왔어요. 장택상 씨에게 전화를 한 거지요. ‘아유, 두한이, 참 오래간만일세. 너무 수고해 주어 참 고맙네’ 라고 말하며 위로해주더군요. 참, 장택상 씨가 제스처를 잘합니다. 우리만 해도 그때 순진했으니까.
점심이 나오자 맥주 한 잔 놓고 얘기를 시작했어요. ‘우리 김 동지가 이번에 나라를 위해 꼭 한 가지 일을 해 줘야겠네’. ‘그게 뭡니까?’ ‘이걸 우리가 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주 두통거리가 돼요.’그분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군사 조직보다 더 골치 아픈 게 바로 학생 조직이다. 학생조직이 좌경화되면 대학이 많은데다 대학생들이 모두 인텔리라 파급 효과가 크다는 거였지요. 그 사람들이 고향과 군에 들어가면 발언권이 아주 셉니다. 아무래도 많이 배워 언변이 뛰어나지 않겠습니까. 이 학생 조직이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 사회로 파고 들어가면 순진한 사람들은 쉽게 선동이 된다 이 얘깁니다.
사실 일반 대중이야 거의 백지 상태 아닙니까. 공산당 이론에 대해서 전혀 모르니까 대학생들이 좋은 것만 골라 얘기하면 홀딱 넘어가는 거지. 그래서 학생 조직을 분쇄시켜야 한다는 얘기였지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니 경찰은 두었다 뭐하고 이런 일을 나한테 시키는 겁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아, 우리 경찰이 건드리면 나중에 문제가 돼’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면 UN총회에서 다뤄지고 그러면 한국 독립도 힘들게 된다, 이 얘기였지요.
‘독립된 국가의 경찰이라면 문제가 아니겠지만 군정 하에서는 하지중장으로부터 불덩어리가 떨어지면 내가 녹아, 내가 녹으면 일을 못해’ 이러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이 일을 맡아 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학생들이니까 총으로 쏘거나 죽이지는 말고 과격하게 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도록 간청했어요. 그래서 제가 하겠다고 약속하고 장택상 씨와 만난 다음날 부하들 가운데 체격 좋은 놈으로 1백 명을 골랐지요.
곡괭이 자루 있잖아요? 박달나무와 참나무로 만든 곡괭이 자루를 차에 실어서 삼청동 옆 들판 창고에 갖다 두었어요. 그 창고 부근에 토끼에서 피를 뽑아 연구하던 곳이 있었어요. 그 창고를 경찰이 지켜줬지요. 그리고는 밤 2시에 1백 명의 대원을 데리고 곡괭이 자루 하나씩을 들고 쳐들어갔지요. 당시 학병동맹 훈련소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았거든요.
자는 놈들을 습격했는데 의외로 반항이 있어서 부하들에게 조심하라고 시켰지만 곡괭이 자루에 몇 놈이 맞았어요. 그래서 삼청동 부근이 피바다로 얼룩져 버린 사건이 발생했죠.
(입력일 : 2007.03.19)-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3&r_serial=04
빨갱이김명시는 일제시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 출신이며 12월 예비과에 입학 그리고 졸업 ,
상하이 중국공산주의 청년단 회원 , 중국공산당 한인 지부 조장 , 대만공산당 결성 지원 ,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 위원 ,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 동맹 결성 지원 및 집행 위원 및 기관지 '반일전선' 담당자
조선반도로 와서 '코뮤니티스트(공산주의자의 영어)' , '태평양노조(노동조합)'라는 잡지를 뿌리고 다님.
그러다가 조선반도의 순경(순사. '경찰'을 뜻하는 일본 용어)에게 공산주의 죄목으로 붙잡혀 징역.
탈옥하여서 빨갱이김원봉의 빨갱이조선민족전선연맹+빨갱이조선의용대의 멀티인 화북지대의 빨갱이조선독립동맹+빨갱이조선의용군의
책임자를 지낸 빨갱이김명시. '광막한 만주벌판을 호마 타고 달리던 여장군 김명시.'으로 불려짐.
조선의용군의 총사령관인 빨갱이김무정의 부관이었음. 빨갱이김명시 여장군은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을 깨부심.
수많은 일본군 포로들과 수많은 부자 지주들이 조선의용군 교관인 그녀의 채찍에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같은 여성 교관으로 훗날 북괴 초대 내각의 중요인물이 되는 허정숙이 있었다.
해방 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의 산하 단체인 부총(조선부녀총동맹)의 선전부 위원을 지냈다. 오늘날 여성부(빨갱이제갈슨상이 만든)의 시조에 해당된다.
, 빨갱이 국군준비대의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해 여女장군의 자격으로서 후배인 국군준비대 8만에게 응원 축사를 신나게 했다.
빨갱이김원봉은 후배 빨갱이여女장군 김명시와 함께 미군정을 몰아내고 남조선을 적화통일시키기위해서 빨갱이 국군준비대 8만을 조직했다.
공산주의 최고레벨 김명시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빨갱이김무정이 북괴 장교로 있으므로 상관을 위해 남조선을 적화통일시키려고 작정하였다.
빨갱이국군준비대는 광복군마저 흡수하고 10만이나 되는 군세軍勢를 과시하며 길거리에서 깽판치고 다니며 남조선의 모든 정당은 해체해라 여운형인민공화국도 해체해라
김구 임시정부도 해체하라 어서 남과 북은 민족통일전선의 이념 아래에서 통일하라 독립국이 되어라 외세의 신탁지배를 받지말라
이승만은 반동이다 김두한은 반동이다 라고 강요해대는 무력시위를 해댔다.
하지만 1946년 1월에 빨갱이국군준비대가 미군특수부대 수십명이 간부들을 납치하고 , 김두한 우미관 식구들에게 털려 대학살당해 강제해산 당한다.
1946년 2월 남조선에 빨갱이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된다. 김명시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해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됨 , 민족전선 서울지부 의장단으로 선출됨. 빨갱이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선전부장이 되었다.
당시 여운형 , 박헌영 , 김원봉의 [남조선빨갱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북괴 김일성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지령들을 그대로 따라하고있었다.
미군정을 몰아내기위해서 빨갱이국군준비대 8만을 조직했었지만 실패했었다.
그래서 [남조선빨갱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북괴 김일성이 보낸 지령문에 따라 최후의 발악을 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전국에 걸쳐서 총파업운동과
전국의 경찰서 파출소를 노리는 무장폭력시위폭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짠다. 더불어 위조지폐도 신나게 찍어서 남조선 경제를 망치려는 음모를 꾸민다.
빨갱이 남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인 빨갱이김원봉은 국군준비대의 실패를 만회하기위해 1946년 12월 조선민청 전위부대란 빨갱이 별동대를 조직하고
빨갱이정진영을 별동대장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조선민청 전위부대는 1947년 5월 김두한과 미군정에게 처절한 토벌을 당해 공중분해된다.
1948년 4월 - 빨갱이김원봉 , 빨갱이박헌영 , 빨갱이홍명희 , 빨갱이허헌 , 빨갱이심영 월북.
여장군 김명시만 냅두고 지들끼리만 도망쳤다.
1949.10.03 까지.일제강점기 빨갱이연안독립동맹원이자 해방 후 빨갱이 부녀동맹 간부를 역임하고 빨갱이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있던 김명시는
총파업운동과 무장시위폭동을 배후에서 계속 지휘하며 미군정을 조선반도에서 몰아내기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썼다.
그녀는 미국을 미제국주의 침략세력으로 봤다. 과거에 일본을 그렇게 보았듯이.
하지만 결국 경찰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그녀는 부평경찰서에 구금된 지 이틀 만에 목 매달아 자살했다.
당시 친일경찰들은 빨갱이들로 드글거리는 혼돈스러운 남조선의 치안상태를 바로잡으려고 동분서주했다.
서울경찰청장 장택상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는 빨갱이 청년들은 흔하디 흔했다. 빨갱이여두목인 김명시는 친일경찰에 의해 혹독한 문초를 받아 배후를 토설하라고
수백번 말하고 수백번 고문을 해도 말을 안들었다. 오히려 동지들을 밀고하기싫어서 빨갱이 지하본부 위치를 자백하기 싫어서 경찰이 안보는 사이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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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50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 1) 독립운동정당의 성립과 활동 > (2) 의열단
(2) 의열단
義烈團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1925년 상반기까지 파괴·암살 등의 의열투쟁에 힘을 쏟았다.註 481 의열단은 20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투쟁을 벌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년부터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인 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그해 겨울에 광주에서 의열단의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吳成倫·金山·류자명柳子明 등이 함께 참석한 이 회의에서 의열단은 장차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註 483 이 결정을 바탕으로 의열단은 1927년 초에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것은 광동에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상해와 武昌 및 南昌에 지방집행위원회를 두는 내용이었다.註 484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의열단은 다음해인 1927년 5월에<獨立黨促成運動에 대한 宣言>을 발표하였다.註 485 이것은 이미 1926년 10월에 결성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이어 1927년 4월에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조직된 직후였다. 이로써 의열단은 ‘민족협동전선운동’과 ‘혁명정당’ 결성이라는 두 가지 활동방향을 정립했다. 그들은 우선 주요 활동지역에서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교 무렵부터 김원봉과 김성숙 등이 활동하고 있던 광동에서 김성숙이 주도하여 1927년 5월 8일에 광동촉성회를 조직했다. 또한 당시 무한에도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전개한 ‘反革命淸黨運動’(상해쿠데타)을 피해 모여든 의열단원들이 많았는데, 박건웅을 중심으로 무한촉성회가 조직되었다.註 486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이는 결국 의열단이 1926년 겨울에 결의한 ‘혁명정당 전환’ 방침을 사실화하면서, 이와 함께 1927년에 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이 나온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의열단은<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라는 발표문을 통해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정당’을 제안하였다.註 490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그러다가 1930년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무렵,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1929년 봄 이래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492 그러다가 1931년 9월에 일제의 만주침공을 접하면서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남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의열단 활동은 김원봉이 남경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한 일과 한일래와 박건웅이 중심이 되어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한 일로 나타났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맺어진 인연을 최대한 살려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中韓合作에 관한 建議>,<韓國革命의 現狀과 本團의 策略>,<朝鮮義烈團의 政治決意案> 등을 제출하고, 그 결과 장개석의 결재를 얻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었다.註 493 이 학교의 설립목적은 청년간부들에게 항일투쟁정신을 계승시키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시켜 한국의 절대독립을 달성하고 중국의 목표인 만주국 탈환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기까지 3기에 걸쳐 모두 125명의 청년간부들을 배출했다.
의열단이 전개한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되다가 일단 실패한 민족협동전선체 구성에 관한 노력이었다. 1932년 10월 이래로 구체화된 이 활동은 의열단을 비롯하여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신한독립당 등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를 결성하고, 뒤이어 11월 10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註 494 이로써 1926년 이후 상해 등 중국본토지역에서 추진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한 단계 나아가 장차 ‘대동단결체’를 조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의열단의 위치에서 볼 때, 이러한 결실은 1926년 겨울에 광주에서 열린 의열단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와 1927년 5월에 발표한<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선언>등으로 시작하여 1935년 7월 5일에 성립되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연결되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은 당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문제와는 관계없이 다른 독립운동정당과 동일한 자격과 위치에서 제 역할을 발휘했다.
註 481
金榮範,≪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창작과비평사, 1997), 141쪽.
註 482
김희곤,≪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지식산업사, 1995), 250쪽.
註 483
水野直樹,<黃埔軍官學校と朝鮮の解放運動>(≪朝鮮民族運動史硏究≫6, 1989), 63쪽.
註 484
水野直樹, 위의 글, 59쪽에서 재인용.
註 485
朴泰遠,≪若山과 義烈團≫(백양당, 1947), 206쪽.
註 486
梶村樹秀,<1940年代 中國の抗日鬪爭>(≪三千里≫31, 1982), 102쪽.
註 487
韓相禱,≪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문학과지성사, 1994), 223쪽.
註 488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340∼341쪽.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註 490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102∼104쪽.
註 491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5), 704쪽.
註 492
坪江汕二,≪鮮民族運動秘史≫(東京:日刊勞動通信社, 1959), 65쪽.
註 493
군사간부학교 운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韓相禱, 앞의 책, 255∼296쪽.
金榮範, 앞의 책, 299∼316쪽.
註 494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473∼474쪽.
의열단의 대표인 김원봉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4210883&position=0#483_comment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였다.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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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무산계급 혁명)을 위해 일제시대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 , 레닌학교 세우고 레닌학교에서 조선인 청년들을 빨갱이들로 교육시켜 조선반도에 적화 목적을 위해 침투시켰다. 그리고 레닌이란 잡지도 발간하였으며
무無정부빨갱이의열단테러리스트 이름을 무산자無産者전위동맹 즉 프롤레타리아 전위동맹으로 개칭하였다.
[ 김원봉은 1929년 가을 이래 북경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동맹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및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6635&position=2
"한편 김원봉은 1929년 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119 일제 자료에 의하면 김원봉은 1929년 가을부터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朝鮮共產黨再建準備委員會 및 레닌주의정치학교政治學校 운영에 관여하고 있었다.註 120 안광천의 주도 하에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는註 121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소재지는 북경北京 북성내北城內 동서조호동東西條胡同이었다.
주요 구성원은 안광천安光泉·김원봉金元鳳·박건웅朴建雄·이영준李英俊·양백림楊伯林이었으며
중앙부 산하에 훈련부·통신부·조직부·선전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10월의 중앙부 조직은 위원장 안광천 이하 김원봉·박건응·朴文昊·이영준·李賢卿·朴次貞의 7인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중앙부 직속으로 레닌주의사·레닌주의 정치학교가 병설되어 있었고, 하부조직으로 국내·북경·만주의 3개 지부가 있었다. 국내지부는 간사국 산하에 다시 목포·부산·강릉·대구·경성·평양·신의주·원산에 지방조직이 설치되어 있었다.註 122
레닌주의정치학교註 123는 6개월 기한으로 ‘공산주의 이론’·‘조직 및 투쟁’·‘조선혁명사’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4월∼9월, 1930년 10월〜1931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2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註 124 졸업생들은 1930년 8월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지식인 그룹·도시노동자·농민·진보적 학생층을 상대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과 대중운동의 고양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사례가 1933년 10월 일제 정보망에 포착되어 13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로부터 2년이 경과한 1935년 8월 발표된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 사건’註 125과
‘공산청년동맹준비위원회共產靑年同盟準備委員會·강릉적색농민조합결성준비위원회江陵赤色農民組合結成準備委員會 등 조직사건’註 126이다.
또한 레닌주의사에서는 《월간 레닌주의》라는 선전지를 간행하였다. 1929년 5월 5일자로 간행된 제 1호에는
〈조선정세朝鮮情勢와 조선공산주의자朝鮮共產主義者의 당면임무〉라는 장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註 127 이와 함께 잡지 말미에 실려 있는 ‘레닌주의 총서’ 간행예고 선전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동맹의 지향은 보다 분명해진다.註 128 이상 1929년 가을부터 1931년 전반기에 걸쳐 김원봉이 관계하고 있었던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김원봉의 동향은 공산주의 활동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1928년 11월의 선언과 함께 이 시기 김원봉의 성향에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게 드러나고 있음은 사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4210874&position=0
: 안광천安光泉의 주요 행적을 살펴 보면, 그는 동경유학시 일월회一月會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여름 귀국 후에도 일월회一月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產黨에 입당하여 그해 12월 金錣洙의 후임으로 제 3차 조선공산당(1926. 9∼1928. 2) 제 2대 책임비서 (1926. 12∼1927. 9)가 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각도간부 확대, 조직거점 확보, 만주총국·상해부·일본부 부활 등을 시도하였고, 1928년 제 3차 조선공산당 붕괴 이후에는 제 4차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직을 맡았다. 1928년 3월에는 그가 기초하고 제 4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에 관한 론강論綱〉을 통해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淸算主義的 입장의 견지로 말미암아 1928년 5월 끝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명당하였다.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주제어 관내
출전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ch&setId=4216625&position=1
날짜 1929년 06월
김원봉·안광천, 북평北平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직하고 레닌주의정치학 교 설립.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 레닌주의 政治學校 명칭은 모스크바의 마르크스학원을 모방한 것이었다(스칼라피노·이정식, 앞의 책 p.238).
날짜 1929년 10월
權五勳, 김원봉의 레닌주의정치학교에 입학.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9.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安光泉,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과 무산자전위동맹無産者前衛同盟(의열단義烈團 개칭) 조직.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무산자無産者 = 프롤레타리아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 김원봉, 북경에서 무산자전위동맹 조직.
[출전] 조선혁명테제
날짜 1930년 09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제1기 졸업생 魚允鳳. 李鎭壹. 金武. 吳必得, 서울에 잠 입 (직접 노동자로 변신. 2개의 야체이카 조직).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0년 10월
김원봉. 안광천의 무산자동맹 잡지 레닌, 정간당함.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p. 202.(이상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자료)
날짜 1931년 02월
레닌주의정치학교 2기 졸업생 권오훈·이소전 등 11명, 국내 잠입.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1년 07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졸업생 이철영, 김창린·이명욱 등과 함께 평양적색노平壤赤色勞 동조합動組合 조직.
[출전] 조선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4.
"이처럼 유쾌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원봉은 개인적인 아픔에 직면하게 된다. 지난 15년 간 혁명동지로서 함께 항일역정을 헤쳐왔던 아내 朴次貞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1929년 김원봉과 더불어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활동에 참여한註 331 이래 민족혁명당 부녀부장 등으로 활동해 온 그녀註 332의 죽음은 김원봉에게 또 다른 번민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1944년 4월 20일 개최된 제 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선임되었다註 333고 하지만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음모술수가 많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은 그의 행동 반경을 제약하는 것이었고 그의 인상을 ‘중산복 차림의 남성답게 잘 생긴 투사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찌푸린 표정에 말을 아끼는’ 폐쇄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게 하였다.註 334 1945년 초 중경에 도착한 일본군 학도병 출신의 회고록에서 조차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註 335 김원봉에 대한 질시는 1940년대에 들어와 시작된 사실이 아니었다.
....: 김원봉과 임시정부 내 보수적 인사들과의 타협되기 어려운 성향의 차이에 대해 국민정부의 김원봉 지원업무를 주관하였던 滕傑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김원봉金元鳳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자들은 공연히 허위虛位에 앉아 있고 실제활동이 없으므로 이끌어 갈 수 없다고 보는 반면, 임정 측 인사들은 김원봉 등을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있고
또 언행도 너무 偏激하다고 보아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滕傑 증언, 〈三民主義力行社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 p. 74).
김원봉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는 일제패망 직후인 1945년 9월에도 중경 소재 소련대사관과 중공당에서 운영하는 신화일보新華日報와 접촉하고 있었다( 《資料韓國獨立運動》1, p. 406).
김원봉 계열과 김구 계열의 불화 모습을 전하는 한 중국인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원봉 계열은 김구를 가리켜 “연로年老하고 력쇠力衰하며 군중으로부터 이탈되어 복국復國과 건국建國을 영도할 수 없다”고 하였고, 김구 계열에서는 김원봉을 “공산당 분자로 보고 중공과 소련의 이용을 받고 있으므로 중국정부는 그의 기만을 믿지 말라”고 비난하였다 한다(祝秀俠 증언, 〈中國國民黨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p. 138).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4210874&positi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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