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지하2.jpg



[재업] 김원봉이 일제시대 때부터 골수 빨갱이였다는 증거 자료 사료 전부 모음.

김원봉은 노짱같은 빨갱이 개새끼임. 






초대내각.jpg



원봉마왕.jpg


1.jpg

의열단(義烈圈)이 길림성에서 결성된 것은 1919년 11월 10일이었다. 결성단원은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冑)·이성우(李成宇)·곽재기(郭在驥)·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結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晙)이었으며, 김원봉을 ‘의백(義伯)’으로 추대하였다.

활동지침으로는 ‘공약 10조’·‘암살대상’·‘파괴대상’을 채택함과 동시에,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침략원흉 응징을 활동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와 함께 최고이상으로는 ‘구축왜노(驅逐倭奴)’·‘광복조국(光復祖國)’·‘타파계급(打破階級)’·‘평균지권(平均地權)’을 천명하였다.

..... 이 시기 의열단원의 진보적 사고 형성에는 류자명(柳子明 : 무無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이회영과 함께 세운 놈)이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

1922년 겨울 김원봉은 북경의 신채호(무無정부빨갱이. 이 사람이 적은 의열단의 신조 조선혁명선언은 빨갱이 사상으로 가득하다.)를 방문, 의열단의 행동강령 및 투쟁목표를 성문화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의 완성..... 

..... 남창봉기와 광주봉기로 대변되는 국공분열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상해로 온 김원봉의 당면과제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과제는 제3차 조선공산당 제2대 책임비서였던 안광천(安光泉)과 만나게 되는 1928년 중반부터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안광천과의 만남은 김원봉의 혁명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註 038 안광천의 출현은 김원봉이 지난 2년 동안 중국 국민혁명 현장체험 과정에서 절감한 협동전선론을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형상화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 시도는 1928년 10월 4일 발표된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중의 정강·정책에서 드러난다.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20개항의 정강·정책은 국민의 기본적 자유 보장, 남녀평등, 지방자치 실시, 의회주의 ‘민주국’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민족 혁명적 통일전선’의 결성을 제창한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 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 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註 039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함으로써 .....





무산2.jpg원붕.jpg

창립 9주년을 기념하여

오늘 본단의 창립 9주년 기념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오늘을 최대의 정열과 무량한 감개를 가지고 기념하는 동시에 냉정한 심정으로 우리의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직시하여 장래를 계획한다.(중략)

우리들은 폭력적 혁명을 강조하고 민중적 운동을 제창하면서 1919년 11월 10일에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본단은 창립후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제1차로 郭敬, 李成字 등의 폭탄사건을 비롯하여 朴在爀의 釜山 폭탄사건, 金益相의 총독부 파괴사건, 吳成崙의 黃?灘, 田中 습격사건, 金始顯, 劉錫鉉, 黃珏 등의 폭탄사건, 金祉燮의 왜적 왕궁 폭탄사건,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拓 습격사건……등 무릇 16차에 걸친 대파괴 암살운동을 실행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스스로 비판하면 본단도 창립 당시에 조선혁명을 계획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많은 과오와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마는 여러가지 타락분자, 비겁분자, 공론분자, 폭력부인분자들 사이에서 혁명적 의열정신을 훌륭히 유지전개해 온 것은 조선 혁명사에서 광휘있는 사실에 틀림 없다. 우리들은 항상 실천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는 본단 자체의 실천과 조선 혁명운동 전체의 실천 내지 세계 혁명운동의 실천은 우리들의 견해를 한 계단 한 계단씩 진전시켜 왔던 것이다.(중략)

조선의 혁명과 세계의 혁명을 연결시킨 것, 조선혁명의 결정적 역량을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에게 추구한 것, 광범한 대중의 혁명적 요구를 반영한 구체적 강령을 게제한 것, 폭력혁명의 준비 및 조직을 고양한 것, 그리고 모든 혁명을 조직하여 전민족적 통일기관의 촉성을 주장한 것 등은 오늘에 있어서도 그 정당성이 더욱 더 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지금 조선혁명에 관련된 현재의 정세를 다시 한번 고찰할 때 그 중요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민중에 대한 극도의 압박착취 (자본주의 제도를 돌려서 비꼬는거)

2. 그것에 대한 조선 각계급 각층의 반항 내지 불평

3. 민족적 공동전선의 개시

4. 공산주의자의 지도 아래 급격히 전개되는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의 운동

5. 혁명전선에서의 우익세력의 대두

6. 제국주의 세계의 안정이 급격히 붕괴되고 그것에 따른 광적인 반동

7. 세계 무산無産계급(가난한 노동자 농민) 및 약소민족의 반제국주의적 전선과 세계혁명적 전선과의 동맹 확립과 세계혁명 파도의 상승

8. 소비에트연방이 모든 혁명의 우군으로 존재함에 대한 제국주의 열국의 연합적 반격

(두서 생략) 강도 일본에게서 조선의 절대 독립을 탈환하기 위하여는, 그 현재의 폭압에 항거하기 위하여는 다만 협동통일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주의에 따른 대립, 모든 붕당에 의한 분열이 극복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리고 조선 혁명운동은 더 나아가서 세계 혁명전선에까지 굳게 통일되지 않으면 안된다.제약소민족의 해방운동만이 우리들 동맹군의 목적은 아니다. 세계의 무산계급 혁명운동도 또한 우리들이 믿을만한 동맹군이므로 우리들은 그들과 동맹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비에트연방과의 동맹, 그것을 제국주의에 대하여 지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절대 필요하다.

우리들은 민족적 협동전선을 절규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이 절규하는 협동전선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고, 우경적인 것이 아니라 전투적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절대 다수도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이며 가장 혁명적인 계층도 그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전선의 기초를 그들에게 두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급속히 진전하는 조선 노농계급 운동을 더욱 발전시켜 그것을 독립운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협동전선의 최대 조건이 아니면 안된다. 동시에 현재 대두하고 있는 여러가지 우경 내지 타락 경향에 대해서는 협동전선에서 끊임없이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모든 전투회피자, 폭력부인자, 점진주의자 등을 의연히 혁명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과 싸우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 혁명운동의 전선통일을 절대로 주장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맹세한다.

본단은 9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위와 같은 견해와 주장을 고창하면서 다음과 같은 함성을 올린다.

강도 일본을 타도하자.

전투적 협동전선으로.

통일적 독립당을 완성하자.

자치주의자를 타도하자.

혁명의 기초를 노농대중에게.

세계혁명과 연결하자.

소비에트연방과 동맹하자.

1928년 11월 10일



무산2.jpg원붕.jpg

- 빨갱이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빨갱이 김원봉의 연설문



일제시대 빨갱이김원봉 연설문 요약 


1. 오로지 농민 노동자 대중 무산無産 계급 계층(프롤레타리아)  혁명 공산주의 투쟁운동 ㄱㄱㄱ 


2. 소비에트 연방(소련)과의 동맹 ㄱㄱㄱ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




이미지 3.png



===========================


신편 한국사 50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   1) 독립운동정당의 성립과 활동   >   (2) 의열단

(2) 의열단

義烈團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1925년 상반기까지 파괴·암살 등의 의열투쟁에 힘을 쏟았다.註 481 의열단은 20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투쟁을 벌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년부터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인 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그해 겨울에 광주에서 의열단의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吳成倫·金山·류자명柳子明 등이 함께 참석한 이 회의에서 의열단은 장차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註 483 이 결정을 바탕으로 의열단은 1927년 초에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것은 광동에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상해와 武昌 및 南昌에 지방집행위원회를 두는 내용이었다.註 484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의열단은 다음해인 1927년 5월에<獨立黨促成運動에 대한 宣言>을 발표하였다.註 485 이것은 이미 1926년 10월에 결성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이어 1927년 4월에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조직된 직후였다. 이로써 의열단은 ‘민족협동전선운동’과 ‘혁명정당’ 결성이라는 두 가지 활동방향을 정립했다. 그들은 우선 주요 활동지역에서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교 무렵부터 김원봉과 김성숙 등이 활동하고 있던 광동에서 김성숙이 주도하여 1927년 5월 8일에 광동촉성회를 조직했다. 또한 당시 무한에도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전개한 ‘反革命淸黨運動’(상해쿠데타)을 피해 모여든 의열단원들이 많았는데, 박건웅을 중심으로 무한촉성회가 조직되었다.註 486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이는 결국 의열단이 1926년 겨울에 결의한 ‘혁명정당 전환’ 방침을 사실화하면서, 이와 함께 1927년에 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이 나온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의열단은<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라는 발표문을 통해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정당’을 제안하였다.註 490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그러다가 1930년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무렵,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1929년 봄 이래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492 그러다가 1931년 9월에 일제의 만주침공을 접하면서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남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의열단 활동은 김원봉이 남경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한 일과 한일래와 박건웅이 중심이 되어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한 일로 나타났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맺어진 인연을 최대한 살려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中韓合作에 관한 建議>,<韓國革命의 現狀과 本團의 策略>,<朝鮮義烈團의 政治決意案> 등을 제출하고, 그 결과 장개석의 결재를 얻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었다.註 493 이 학교의 설립목적은 청년간부들에게 항일투쟁정신을 계승시키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시켜 한국의 절대독립을 달성하고 중국의 목표인 만주국 탈환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기까지 3기에 걸쳐 모두 125명의 청년간부들을 배출했다.

의열단이 전개한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되다가 일단 실패한 민족협동전선체 구성에 관한 노력이었다. 1932년 10월 이래로 구체화된 이 활동은 의열단을 비롯하여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신한독립당 등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를 결성하고, 뒤이어 11월 10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註 494 이로써 1926년 이후 상해 등 중국본토지역에서 추진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한 단계 나아가 장차 ‘대동단결체’를 조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의열단의 위치에서 볼 때, 이러한 결실은 1926년 겨울에 광주에서 열린 의열단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와 1927년 5월에 발표한<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선언>등으로 시작하여 1935년 7월 5일에 성립되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연결되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은 당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문제와는 관계없이 다른 독립운동정당과 동일한 자격과 위치에서 제 역할을 발휘했다.


註 481

金榮範,≪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창작과비평사, 1997), 141쪽.

註 482

김희곤,≪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지식산업사, 1995), 250쪽.

註 483

水野直樹,<黃埔軍官學校と朝鮮の解放運動>(≪朝鮮民族運動史硏究≫6, 1989), 63쪽.

註 484

水野直樹, 위의 글, 59쪽에서 재인용.

註 485

朴泰遠,≪若山과 義烈團≫(백양당, 1947), 206쪽.

註 486

梶村樹秀,<1940年代 中國の抗日鬪爭>(≪三千里≫31, 1982), 102쪽.

註 487

韓相禱,≪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문학과지성사, 1994), 223쪽.

註 488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340∼341쪽.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註 490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102∼104쪽.

註 491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5), 704쪽.

註 492

坪江汕二,≪鮮民族運動秘史≫(東京:日刊勞動通信社, 1959), 65쪽.

註 493

군사간부학교 운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韓相禱, 앞의 책, 255∼296쪽.

金榮範, 앞의 책, 299∼316쪽.

註 494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473∼474쪽.



의열단의 대표인 김원봉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4210883&position=0#483_comment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였다.註 115




=============================



11.jpg

김원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무산계급 혁명)을 위해 일제시대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 , 레닌학교 세우고 레닌학교에서 조선인 청년들을 빨갱이들로 교육시켜 조선반도에 적화 목적을 위해 침투시켰다. 그리고 레닌이란 잡지도 발간하였으며 

무無정부빨갱이의열단테러리스트 이름을 무산자無産者전위동맹 즉 프롤레타리아 전위동맹으로 개칭하였다.




[ 김원봉은 1929년 가을 이래 북경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동맹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및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6635&position=2



"한편 김원봉은 1929년 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119 일제 자료에 의하면 김원봉은 1929년 가을부터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朝鮮共產黨再建準備委員會 및 레닌주의정치학교政治學校 운영에 관여하고 있었다.註 120 안광천의 주도 하에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는註 121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소재지는 북경北京 북성내北城內 동서조호동東西條胡同이었다. 

주요 구성원은 안광천安光泉·김원봉金元鳳·박건웅朴建雄·이영준李英俊·양백림楊伯林이었으며 

중앙부 산하에 훈련부·통신부·조직부·선전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10월의 중앙부 조직은 위원장 안광천 이하 김원봉·박건응·朴文昊·이영준·李賢卿·朴次貞의 7인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중앙부 직속으로 레닌주의사·레닌주의 정치학교가 병설되어 있었고, 하부조직으로 국내·북경·만주의 3개 지부가 있었다. 국내지부는 간사국 산하에 다시 목포·부산·강릉·대구·경성·평양·신의주·원산에 지방조직이 설치되어 있었다.註 122

레닌주의정치학교註 123는 6개월 기한으로 ‘공산주의 이론’·‘조직 및 투쟁’·‘조선혁명사’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4월∼9월, 1930년 10월〜1931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2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註 124 졸업생들은 1930년 8월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지식인 그룹·도시노동자·농민·진보적 학생층을 상대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과 대중운동의 고양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사례가 1933년 10월 일제 정보망에 포착되어 13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로부터 2년이 경과한 1935년 8월 발표된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 사건’註 125과 

‘공산청년동맹준비위원회共產靑年同盟準備委員會·강릉적색농민조합결성준비위원회江陵赤色農民組合結成準備委員會 등 조직사건’註 126이다.

또한 레닌주의사에서는 《월간 레닌주의》라는 선전지를 간행하였다. 1929년 5월 5일자로 간행된 제 1호에는 

〈조선정세朝鮮情勢와 조선공산주의자朝鮮共產主義者의 당면임무〉라는 장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註 127 이와 함께 잡지 말미에 실려 있는 ‘레닌주의 총서’ 간행예고 선전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동맹의 지향은 보다 분명해진다.註 128 이상 1929년 가을부터 1931년 전반기에 걸쳐 김원봉이 관계하고 있었던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김원봉의 동향은 공산주의 활동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1928년 11월의 선언과 함께 이 시기 김원봉의 성향에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게 드러나고 있음은 사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4210874&position=0


: 안광천安光泉의 주요 행적을 살펴 보면, 그는 동경유학시 일월회一月會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여름 귀국 후에도 일월회一月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產黨에 입당하여 그해 12월 金錣洙의 후임으로 제 3차 조선공산당(1926. 9∼1928. 2) 제 2대 책임비서 (1926. 12∼1927. 9)가 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각도간부 확대, 조직거점 확보, 만주총국·상해부·일본부 부활 등을 시도하였고, 1928년 제 3차 조선공산당 붕괴 이후에는 제 4차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직을 맡았다. 1928년 3월에는 그가 기초하고 제 4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에 관한 론강論綱〉을 통해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淸算主義的 입장의 견지로 말미암아 1928년 5월 끝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명당하였다.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주제어 관내 

출전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ch&setId=4216625&position=1


날짜 1929년 06월

김원봉·안광천, 북평北平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직하고 레닌주의정치학 교 설립.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 레닌주의 政治學校 명칭은 모스크바의 마르크스학원을 모방한 것이었다(스칼라피노·이정식, 앞의 책 p.238).



날짜 1929년 10월

權五勳, 김원봉의 레닌주의정치학교에 입학.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9.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安光泉,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과 무산자전위동맹無産者前衛同盟(의열단義烈團 개칭) 조직.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무산자無産者 = 프롤레타리아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 김원봉, 북경에서 무산자전위동맹 조직.

[출전] 조선혁명테제


날짜 1930년 09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제1기 졸업생 魚允鳳. 李鎭壹. 金武. 吳必得, 서울에 잠 입 (직접 노동자로 변신. 2개의 야체이카 조직).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0년 10월

김원봉. 안광천의 무산자동맹 잡지 레닌, 정간당함.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p. 202.(이상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자료)


날짜 1931년 02월 

레닌주의정치학교 2기 졸업생 권오훈·이소전 등 11명, 국내 잠입.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1년 07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졸업생 이철영, 김창린·이명욱 등과 함께 평양적색노平壤赤色勞 동조합動組合 조직.

[출전] 조선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4.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setId=4216692&totalCount=4&kristalProtocol=&itemId=tcmd



"이처럼 유쾌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원봉은 개인적인 아픔에 직면하게 된다. 지난 15년 간 혁명동지로서 함께 항일역정을 헤쳐왔던 아내 朴次貞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1929년 김원봉과 더불어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활동에 참여한註 331 이래 민족혁명당 부녀부장 등으로 활동해 온 그녀註 332의 죽음은 김원봉에게 또 다른 번민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1944년 4월 20일 개최된 제 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선임되었다註 333고 하지만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음모술수가 많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은 그의 행동 반경을 제약하는 것이었고 그의 인상을 ‘중산복 차림의 남성답게 잘 생긴 투사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찌푸린 표정에 말을 아끼는’ 폐쇄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게 하였다.註 334 1945년 초 중경에 도착한 일본군 학도병 출신의 회고록에서 조차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註 335 김원봉에 대한 질시는 1940년대에 들어와 시작된 사실이 아니었다.

....: 김원봉과 임시정부 내 보수적 인사들과의 타협되기 어려운 성향의 차이에 대해 국민정부의 김원봉 지원업무를 주관하였던 滕傑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김원봉金元鳳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자들은 공연히 허위虛位에 앉아 있고 실제활동이 없으므로 이끌어 갈 수 없다고 보는 반면, 임정 측 인사들은 김원봉 등을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있고 

또 언행도 너무 偏激하다고 보아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滕傑 증언, 〈三民主義力行社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 p. 74).


김원봉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는 일제패망 직후인 1945년 9월에도 중경 소재 소련대사관과 중공당에서 운영하는 신화일보新華日報와 접촉하고 있었다( 《資料韓國獨立運動》1, p. 406).


김원봉 계열과 김구 계열의 불화 모습을 전하는 한 중국인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원봉 계열은 김구를 가리켜 “연로年老하고 력쇠力衰하며 군중으로부터 이탈되어 복국復國과 건국建國을 영도할 수 없다”고 하였고, 김구 계열에서는 김원봉을 “공산당 분자로 보고 중공과 소련의 이용을 받고 있으므로 중국정부는 그의 기만을 믿지 말라”고 비난하였다 한다(祝秀俠 증언, 〈中國國民黨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p. 138).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4210874&position=1





날짜 1932년 05월 
朝鮮共産黨再建同盟 江陵그룹(권오훈·강익선), 메이데이격문 살포.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2년 06월 
朝鮮共産黨再建同盟(국제공산당계열) 江陵그룹, 정동면 유천리 농민야학 교에서 프로연극중 발각되어 다수 피체.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2년 09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국제공산당계열) 江陵그룹 10여명, 共販반대투쟁으로 피검.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2년 12월 
朝鮮共産黨再建同盟(국제공산당계열) 江陵그룹, 가마니검사 반대투쟁 전 개.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1.

날짜 1934년 07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국제공산당 계열) 사건으로 총 428명 검거·11명 송국.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신문명 조선중앙일보  
기사제목 경무당국이 발표한 당재건운동의 전모, 노동 학생층에 광범한 지하공작, 송국된 자 111명/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주요 관계자 씨명, 금년 3월 9일에 예심 종결된 취고 
기사형식 일반기사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3 
단수 07 
색인어 이름 : 김원봉,안광천,三宅鹿之助,이명&,정태식,권영태,이재유,이강명,이진일,어노식,오상선,오영&,권오훈,정동원,유기춘,강익선,최익선,최돈근,조규필,이윤경,강문영,안종서,서승석,박정두,변우식,이행인,어윤봉,오필득,&인갑,홍광중,이상각,강&호,이명신,한 대홍,김대용,안강윤,최성손,김연식,권태종,김만구,성귀래,한순원,박태준,이종신,심인택,김상규,&필수,김근찬,최선규,김삭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사회주의운동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1928-1945) >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노동운동 > 노동조합 > 혁명적노동조합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학생운동 > 독서회 > 노동자독서회



신문명 조선중앙일보  
기사제목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체계도/독일 洋行하고 와서 伯林 생활을 추억, 三宅鹿之助의 평소 사색/도립병원 안에 인쇄국을 설치, 강릉에서의 잠행운동 
기사형식 일반기사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4 
단수 08 
색인어 이름 : 안광천,김원봉,김정우,이영준,어윤봉,이&&,정동원,이진일,오필득,이윤경,권오훈,박문호,강익선,정인화,조국환,강덕선,최종필,김성렬,김재원,최종봉,조규필,최종필,김재하,정인화,조&환,조&필,최종봉,강덕선,김재하,정인화,조국환,최&근,홍광준,최선규,강&원,三宅鹿之助,정태식,조송희,이재유,권영태,정대성,함순성,변홍대,신&균,박봉국,김상룡,한봉렬,안병태,김삼만,이순금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사회주의운동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1928-1945) >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노동운동 > 노동조합 > 혁명적노동조합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학생운동 > 독서회 > 노동자독서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레닌」주의정치학교졸업생主義 政治學校卒業生 조선朝鮮에 잠입潛入 적화공작赤化工作 
북경北京에 근거根據 둔 김원봉金元鳳의 밀령密令 받고, 權麟甲 李鎭一等九名이 各地에서 活動, 江陵에서 實踐運動에[肖 : 權麟甲 李鎭一][寫 : 荷物車로 護送]//水原署高等係晝夜로 大活動//朝鮮共産黨再建同盟系圖//全協系와 握手코 共靑赤農의 AB兩結社組織, 江陵一帶를 活動舞臺로[肖 : 姜德善 曺圭弼]//罷業操縱이 發覺端緖, 最初에 檢擧는 東署 西門署에서 祕社의 端緖探知코 電光같이 三千警官動員[肖 : 咸雲鶴 金潤植 李相珏]//西署刑事隊 竹山에서 活動[寫 : 第三次 組織한 所謂A結社를 組織한 江陵 南山峯]//農民을 指導코저 地域別로 農民에 浸透, 勞動者 農民層을 敎養訓練, 各記念日에 檄文撒布[寫 : 祕社의 本據]//平壤에 出張 卄名을 押來三十여 명을 검거하엿다가 公判回附는 單二名//京畿道警察 新義州서 活動//高敞에서도 靑年一名檢擧//活動內容 ; A結社, B結社, 農民 指導「그룹」 農校「그룹」, 病院「그룹」//勞動靑年檢擧(水原)//檢擧渦中에 女兒를 順産(江陵)//京畿警察部員 車啓榮檢擧(水原) 
발행년월일 1935년 08월24일
발행구분 호외 
면수 02 
단수 01 
표제어 조선공산당재건동맹사건(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문서철 명  사상에 관한 한 정보 7  
문서 번호  교토 서쪽 기밀 제 8613 호의 3  
문서 제목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사건發覺에 관한 건  
발신자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  
수신자  경무 국장 등  
발신 일  1934 년 02 월 07 일  

색인어 이름 : 김원봉 김원봉, 안광천安光샘 ,朴建雄,李英駿,鄭海魯리素進,李鎭한, 권 오 훈,朴文昊,鄭東源,吳必얻고吳永甦리寬鎬,南英基,魚允鳳최鍾弼최鍾鳳김 주한 여름崔善圭정 용 화 강德善,金東夏,姜益善정 인화,姜泰元,李相珏,崔憲集,姜吉선 최燉根,金東元,崔明根,曺泰현 최鍾煥최承大,曺圭조용필 최遠圭,崔承여덟曺國환,洪光俊,李圭弼김 주한 단,廉在根최鎬燮금炯道최燉宇,崔建永최燉珏,權赫진 금赫來,沈亮볼래요 ,李聖봄咸貴와서,金萬9. 숲 하루코, 이종석 리鍾漢최鍾聲,崔敏植,金潤植,崔元圭,金天會,金昌會박 해 가르쳐,李東彦,金聖터지는 최善章,朴容台금振榮,曺秉음과,崔鳳한혜진,權玉천 최 재喆,閔丙대,盧鼎鉉,鄭允時,李柱세,姜益善리鍾烈,黃鍾손자,金萬炯,李京球,姜宅濟,鄭胤甲금禮源리우振燮,金昌麟,黃鍾선, 긴토키 김용옥 높은 일 환,沈仁사와,申明奎,李明旭,李吉보물,金庚柱,韓舜源,金根燦송 용 곤 김 상 규 렌弼守,崔斗翼,李昌植,李時켄,李鎭한 리寬鎬,朴又尙宇리鎭永,權淳학 ,李孝律리鎭河,許宗弼허炅升,全甲奉,黃熊도,吳萬부키 금炯斗,李相일곱 금 다섯 사와,安潤洽박炳彊,李相蜂리奎烈,朴永龍, 김원섭, 금燦奎,李光壽,李賢壽박 음과 대 리素進리鍾應,朱在버킨李貴順,朴日馨,南萬熙,咸順성,韓國模리鍾嬉,安三원 리澈地박鍾煥,鄭七星, 인권 다섯 단계,白潤赫,卞洪대,金三만사 리芬成,李仁行,曺昌주, 김 주한 동 신德均,姜晦求,徐昌,李孝貞,趙承구 리東天,沈桂월, 윤茂憲원래鍾電, 김명식,李順지금 유진 희,金花姬,崔浩極,李英淑,李順玉리載裕금 연의,趙斗元, 안전炳春,金三용 리鉉相,金秋스타,姜周軾,姜惠淑김 현,李貞賢리 정숙 박魯昌,姜潤求장鉉近금應鳳, 안전千洙금龍岑,吳한 순서 류福童,卞洪좋고,安洪性,兪順히메,孔成檜,朴榮煥,辛海甲,黃大용李錫아키라 리 백 만사,李仁基리炳德,姜允錫,禹燦9.沈鍾晨,元俊植,權赫도,金良仙,李相軒리載德,金顯旭한일麟浲,李丙驥,朴成勳,任建鎬,趙敬煥박鍾琪최 소 복,閔炳기둥, 금 만사 얻고 돈南泳,邊雨심어柳榮京,李東심어金永斗,李正煥리노 봄李正郁,趙正郁,趙成龍,權寧하야오權重徽김 전 거쳐 곽 히데토시 금炯善
지명 : 북평, 寬勳洞 안성, 소격동 강릉 東萊 빛 熙町, 공주, 평양, 안주, 이천, 고양 苑洞, 중림동, 대동, 崇四洞, 도쿄, 울진, 회양 파주 중화 부천, 鎭南 우라, 닦고, 강서, 성천, 대구, 원산, 고성, 인천, 진주 용천 해주, 博川, 北靑 포천, 신의주 안동 현, 碧潼 봉천 요양, 滿州 경성 동대문, 益善洞 아산, 東萊 아래 왕십리, 정평 김해 신흥, 말머리 리, 麻浦洞, 齊洞,苑洞, 시흥, 淸島 칠곡, 서린동, 창신동, 완도 세 물, 함흥, 나가하라, 뚝섬, 홍원, 樂園洞, 차야 마치, 仁義洞 인사동, 황금 타운, 타다노부 동 신설 리, 通洞 지아 會洞 길주, 鳳翼洞, 寧平, 안전 邊, 갑산 용인 울산 禮山, 평원, 淸凉 리, 諫洞, 계동, 臥龍洞, 內資洞, 철원, 김포, 충주, 금산, 靑松, 유우키, 明川, 松月洞, 타카시 역삼동, 安國洞, 달성군, 김제, 화동, 광저우, 숭인동, 카사이 마을, 성북동 세 淸洞, 杏村洞, 禮智洞, 운니동, 문천 부산 鏡城, 開豊, 음성군, 玉川洞, 尙州, 敦岩里, 송탄, 강화, 고창, 德原 영등포,靑葉 타운, 경산, 개천 당나라 洙洞 광화문 양평, 동숭동
단체 : 경성 벽돌 공장 일본 선후 야마다 인쇄소 강릉 공작위원회, 강원도 경찰부 강릉 경찰서, 펌프 공장, 주한 도쿄 조선 노동 총독 동맹 지부, 전협 번째 黑支 부 서부 연구 반 성산 공립 보통 學校, 新幹會 강릉 지부, 청년 동맹 강릉 지부 강릉 農學校 반제 동맹 공산 黨靑 년 사회 공산 청년 동맹, 中國 공산당 당원 조선 공산 당원 평 壤赤 색 노동 조합 평양 경찰서, 인사동 공작위원회 , 爀進 사회, 智育會 문명 사, 선명 한 인 사회,
레닌주의 정치 학교 주의적 정치學校, 동대문 경찰서, 태평양 노동 조합, 비판 사 경성 상공會社경성 여자 상업學校, 보성高普,廣成학원 중앙高普, 경성부 들려,儆新學校,養正高보 동德女高普, 화신商會경성農學校, 전기學校, 배재대高普양평 청년 동맹 양평 농민 조합 준비위원회 농민稧양평 적색 농민 조합, 담배專賣국 공장, 전기氣會사, 직업 소개소, 오오츠카 인쇄소 대륙 고무, 이노우에製絲경성 일보사 야마다 인쇄소, 어떻게 제 면사, 카타 쿠라 제 면사, 계절 영사 인쇄소, 조선 일보사, 고려 고무 공장, 중앙 일보사 조선 제 면사會社, 화신商會, 창신 조 후쿠시마 조 요시다 조 영등포 공작소 조선 제絲永영등포구 공장, 경성부 이화 여자 전문적學校중앙 보육學校경성 보육學校,藥學전문적學校, 진명 여고 보, 배재대高普, 연禧專門學校, 중동學校경성 제일高普중앙高普동德女高普경성 제국 대학 경성 둘째高普직업學校, 송도高普
사건 :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사건, 夜學 연극 간담회 강좌 삼일 운동 기념 메이데이 기념 육십 만세 운동 기념 러시아 혁명 기념일 공 靑第 두 會大 사회, 讀書 사회 조직, 鍾紡 총독 파업
기타 : 경성 일보, 중앙 일보, 보안법 위반 新幹會 청년 동맹 해소 문제, 만주 사건 카와 치안 유지법 위반 아사히 신문

김원봉, 안광천이 맨 먼저 언급되어 있고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 학교 운영하는 운영진 이라구 나온다.




사상에 관한 한 정보 6>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사건 發覺에 관한 한 건
문서철 명  사상에 관한 한 정보 6  
문서 번호  교토 서쪽 기밀 제 8613 호  
문서 제목 조선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공산黨再건설 동맹 사건發覺에 관한 한 건  
발신자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  
수신자  경무 국장 등  
발신 일 1933 년 10 월 16 일  

색인어 이름 :朴良玉,李季陽, 安光샘 , 김원봉 ,朴建雄리 히데토시 리康明(李素連), 리鍾嬉,韓國模,朴日馨,鄭福봄咸順성 강鎬孫,朱在버킨洪顯明(李貴順리 타카아키),南萬熙,廉主壽,李鎭한,魚允鳳,吳永甦(금 일산)安三원 (張斗旭), 리澈地(금 종 한)吳必얻었다 (吳聖시게루)朴文昊( 박漆山)李伯文, 권 오 훈,南英基,金舜鎭,鄭俊碩유桭海물고기魯植정 동원,李哲英,崔愛琳,南英基,李志天, 킨,吳尙선,李春岩,金學圭리素進박次貞,朴基瓚,崔俊永,劉基春,權赫진,崔敦祐,崔圭進금 상 터지는 금炳卨,崔敦圭,李永淑,李貴明전 죽자,廉圭壽리鍾國,楊琴,李賢卿
지명 : 蛤洞 대구 東萊, 고양 龍頭里 동대문, 북평, 부산, 강릉, 평양, 신의주, 안성, 아산, 苑洞, 정평, 종로, 蓬萊, 齋洞, 鍾岩 마을 아래 왕십리, 瑞興 광화문 파주, 麻浦洞, 고성, 이천, 崇四洞, 공주, 김해, 시흥 신흥 빛 熙町, 중림동, 仁義洞 경성
단체 : 경성 지방 법원,鍾紡공장, 서울 고무 공장, 조선 조선 공산당 공산 당원 재건 동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 학교 주의적 정치學校, 중앙 상공 주식會社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강릉 공작위원회,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조선 지부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북평 지부 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만주 지부大昌직물會社조선 공산黨再건설 동맹 화지 선후 야체 이카
사건 :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사건, 中國 공산당 당원 사건

경성 서대문 경찰서장이 보낸 정보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 학교 운영진 안광천, 김원봉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ad&setId=4210858&position=3



김원봉의 호는 와카야마이며陳國斌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그는 1919 년 만주 길림에서 의열단 회중을 조직 한 후 만주와 관내 그리고 국내 등지에서 의열 활동을 하였다. 1925 년에는 중국의 황포 군관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교장은 장개석이었다) 이후 중국의 북벌에도 참가 하였다. 1933 년 10 월에는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 6 대의 명의로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 하였다. 김원봉은 이러한 중국의 원조와 군관 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을 기반으로하여 의열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1929 년경에는 ML 파 공산주의자安光샘과 제휴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건설하고 부설 기관으로 레닌 정치 학교를 설립 하는 등 공산주의자들과도 관계를 갖고 있었다 (카시마 세츠코 "김원봉의 사상과 행동」, 무궁화會編"조선 1931 ○ 년대 연구」(도쿄 : 삼일 서점, 1982); 박태원 " 와카야마과 의열 회중 "(白楊堂1947); 반公昭"영 날짜 인 한국 "(中國升학자圖書의식 기 공사, 1946);秋憲樹편, 「자료 한국 독립 운동」제 2 권, pp.94 ~ 95 참조 )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0861&position=0


1928 년 이후 의열단이 협동 전선 파를 지향하는 큰 기연이 된 것은 김원봉이 1928 년 여름 상해에서 ML 파의 공산당원으로 책임 비서를 지내고 신간회 (新幹會)의 조직에이면에서 큰 몫을 담당했던 안광천 (安光샘;安孝駒)과 만남으로써 비롯되었다고한다.註082 그리고 그는 1929 년 초 북경에서 안광천과 제휴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조직하고 그 전위 투사 양성 기관으로서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설치 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행하고, 제 1 차로 1930 년 4 월부터 같은 해 9 월까지, 제 2 차로 같은 해 10 월부터 이듬해 인 1931 년 2 월까지 2 차례에 걸쳐 합계 21 명의 한국인 청년을 수용 교육 하여 한국 내 적화 공작을 위해 밀파 하였다고 일본 측 관헌 자료는 전한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0861&position=1


빨갱이 김원봉의 의열단 9 주년 창립 기념 연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0861&position=1
주석 84 번 참조.


: 조선 총독 부 고등 법원 檢事 국 사상 부, 앞 책, p.30.
조선 총독 부 경무국, 앞 책, p.80에 의하면 1929 년 말 의열단은 북경에서 ML 파와 합동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조직 하였을 때부터 좌경화되어 사실상 해체되었다고보고있다. - http : // db .history.go.kr / item / level.do? itemId = hdsr & setId = 4210861 & position = 1
주석 85 번 참조.


의열단은 1919 년 11 월에 길림성에서 창단 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활약하다가 1929 년 12 월에 해체 선언을 할 때까지 10 년 동안 파괴 · 암살 등의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의열단은 20 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 투쟁을 벌 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 년부터 활동 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 인 김원봉 (김원봉)은 여러 단원들과 함께 황포 군관 학교 (黃浦 군관 學校) 제 4기에 입학 하였다. 당시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 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 대리를 맡고 있던 등 연달 (鄧演들)이 공산주의자 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되었다. 이들은 졸업 후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 1927 년 5 월에 촉성 회 운동에 대한지지 선언을 발표하기도했다. 그후 약화 된 모습을 보이던 의열단은 조선 피 압박 대중의 요구가 대중적 협동 전선 형태라고 주장하면서 해체 성명을 발표했다. 이 무렵 김원봉은 북경에서 조선 공산당 ML 파 간부 인 안광천 (安光 샘)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조직하고 전위 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 註 069
1931 년 9 월에 만주 사변이 일어나 자, 김원봉은 의열단을 부활시켰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0861&position=2


강원도는 강릉 · 고성 · 통천 · 양양 · 삼척 · 울진 등에서 혁농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8 년 제 4 차 공산당 검거를 피하여 중국으로 망명 한 안광천은 1929 년 가을 이래 의열단의 김원봉 (김원봉)과 제휴하여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을 조직하고 그 밑에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세워 활동가를 양성하였고 다시 조선 지부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이 학교 졸업자들을 국내에 투입 하였다.註058이 학교에서 교육을받은 이진일 (리鎭壹) · 이강명 (리康明) 등은 1930 년 이래 앞의 ML 계의 '재건 동맹', '재건 준비위원회'등과 활동 하나 당시 ML 계의 중요 인물이 대거 검거되고 잔여 인물과의 연락도 여의치 않은 까닭에 파별 이 거의없는 강원도 지방에서 '조선 공산당 공작 강릉위원회'를 결성하고이를 최고 기관으로 부문별로 공청 (공 푸른) · 혁명적 농민 조합 · 반제 동맹 등을 조직 하였다.이 조직은 120여 명의 조직원을 확보하고 농촌 진흥회 방해 · 군청 면사무소에서의 항의 · 학생 맹휴 등을 주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하다가 이강명 등 94 명이 1933 년 검거되었다.註059 -http://db.history.go.kr/item/level.do? itemId = hdsr & setId = 4210861 & position = 3


한민족 독립 운동사 자료집 31 31 권 의열 투쟁 4> 경찰 신문 조서 (일문)> 의견서
의견서 

洪加勒 

한 형사 처분 기소 나오 豫又 하 훈계 방면 ヲ 접수 케타루코토노 유무. 
피의자 하나시토 자백 스.
한 범죄 事實 
다이쇼 팔년 삼월 조선 전체 道니 亘리 소위 조선 독립 만사 歲騷 擾 사건 발발 후 금 와카야마 코트 김원봉 금 若水 코트 금 두 전체 等하 國外 니 脫出 똥 재외 불 逞鮮 인 트 연락 조선 독립 노 목적 ヲ 달성 스헤쿠 광분 중 나리시가, 다음 다이쇼 구년 사월 김원봉 · 금 상 윤 · 한 奉根 리 鍾淳 · 尹滋 영국 등 길림 니 會合시 그 國光 회복 운동 노 爲메 破壞 · 암살 · 폭동 등 不斷노 폭력 ヲ 감행 조선 노 혁명 ヲ 달성 세무코토오 유일한 노 목적 토시테 의열 A-널 결사 ヲ 조직하여 其노後 之 개 본부 ヲ 북평 · 상하이 등 니 轉轉 시타루가 爾來 다이쇼 구 년 7 월 7 일 경북 남도 密陽노 爆彈 隱匿 사건 그해 구월十四日 부산 경찰서 노 爆彈 사건 같은 해 십이월 이십 칠일 밀양 경찰서 노 爆彈 사건 다이쇼 십 년 9 월 12 일 조선 총독 부 舊廳 舍노 爆彈 사건, 
다이쇼 열한 년 삼월 十八日 상하이 니 어라고 켈 다나카 대 將狙 쳐부 사건, 
다이쇼 열두 년 1 월 13 이틀 경성 종로 경찰서 노 爆彈 투척 並金 相玉 사건, 
같은 해 세 월 십사일 金始 顯外 열두 명의 노 爆彈 · 권총 노 반입 사건, 
그해 구월 29 일 상하이 鄭寅 台方 노 爆彈 隱匿 사건, 
같은 해 십이월 22 일 금 주한 아키라 등 노 음모 사건 다이쇼 십 삼년 한 달 닷새 금 祉燮 노 두 다리 爆彈 사건, 
쇼와 원년 십이월 28 일 신라 錫疇노 東拓 及殖 銀노襲擊 사건 등 노 兇暴 行爲오悉쿠 同團노手니 더 감행 당시 세인 ヲ 戰慓 세시메타루하주지 노 事實 나루가, 團長 김 전 鳳하斯루 數次 노 직접 행동 니 실패 시타루노미나라즈, 쇼와 년 두 월 아침 鮮內 노 민족 · 공산 兩 주의자 노 합류 니 더 조직 세라레타루 새로운 줄기 會노 결성 ヲ보고 鮮內 노 사상 운동 이십일 轉機 ヲ劃시, 다른면 당시 아침 鮮內 니 於테 조선 공산 당원 재건 라 분주 거 탈 ML 하노 거두 빛 샘 코트 야스 타카 駒하 鮮內 노 檢擧 網오 타쿠미 미니 脫出 똥 상하이 니 潛入시 김 전 鳳니 부모 씩面會시 조선 민족 해방 노 타 메니 메니 공산주의 운동 노 필요 널 소이 ヲ 說破 스루니 及비, 痛쿠之니 동정하고 양자 노 제휴 成루 등 四圍노 정세 하 종래 노 單純 널 민족 주의적 직접 행동 노 범주 ヲ 벗어 똥 아마 니 공산주의 적 색채 ヲ 띠 후루니 至리 아침 鮮內 니 於테 조선 공산 黨오 재건 혁명적 수단 니據리 조선 ヲ 일본 帝國노 羈絆 여리 離脫 케 惹테 공산 制度노社 會오實現 세시무베쿠, 쇼와 년 말 베이징 니於테 조선 공산 黨再 건설 동맹 ヲ 조직하여 且敎 입양 기관 토시테 레 - 닌주의 정치 學校 ヲ 부설시 여섯 달 ヲ 1 기 토시테 쇼와 오년 사월 여리이 여섯 년 두月迄노間 니 두번 니亘리 열 아홉 명의 노 졸업생 ヲ 출시, 鮮內 노 공작 니 정말로 라시메타루가 쇼와 여섯 년 구월 만주 사건 變勃 發오 계기 토시테 四圍노 정세 불리 나루오 悟리之오 중지하고南京니赴키其노頃 상하이 니 어라고 켈 항일 反滿 운동 노 고조 세루오 기화 토시테 각 불령 團體오擧 케테 연합 會오 조직하여 中國 민관 니 아 마디 항일 · 援中 · 한중 합작 노 망동ヲ 初메, 就中 금 九노如 기하 中國 항일 團體 여리 자금 노 원조 ヲ 비스지지 이봉창 사건 · 윤봉길 사건 등 ヲ 감행 세시메타루가 종래 兇暴 行爲오以테 천하 노 이목 ヲ 聳動 세시 김 전 鳳하 자연 김구 트 접근 질, 아리타리. 
한편 국민 정부 요로 니 어라고 태하 數次 노 爆彈 사건 及中 나라 군대 內니 주한 대 조선 청년 노 용감성 니 剌戟 사레 자기 노 심복 탈 강 鐸等 니意오含 메테 의열 團長 김 전 鳳等트 절충 세시메타루 결과 김 삼천 元오 交附 똥 혁명 투사 양성 기관 토시테 국민 정부 군사위원회 會幹 부 훈련반 여섯째 대 ヲ 조직 케 조선 노 절대 對獨 立토 만주 나라 탈환 ヲ 목적 도시, 日滿 인사 노 암살 중요 기계 關노 폭파 등 노 兇暴 行爲오 감행 스헤쿠 쇼와 일곱 년 십월 이십 일 이래 여섯 달 ヲ 1 기 토시테 조선 노 공산 化토其노 독립 ヲ 달성 스루니 필요 널 學術 신분증 교양하여 제 한 기 졸업생 26 명 ヲ 나와 시타루가, 其노後 쇼 구년 사월 니 至리 조선 혁명 간부 學校 트 개명 둘째 기생 토시테 쉰 네번째 명 ヲ 收容 졸업 케 孰 레모 滿洲國노 탈환 트 조선 노 독립 及共 産化노爲메 夫夫 滿洲國 內及 아침 鮮內 니 조밀 놀음 세시메쯔, 아루모노나루가 피의자 者하其노 제 2 기 졸업생 니시테 경기도 수원 郡陰 德面 남양 里니生레 할아버지 亡承 카와노存生 중파 相當노 자산 ヲ 가지고 농업 오營미居 타르, 父亨 俊노代니至리 가운 傾키 점차 생활 여의치 토나리타루 爲메, 父하 할아버지 노 뜻 ヲ 물려 키테 기독 敎監 리 파 니 속하는 경기도 수원 군 죠오 호수 오산 禮拜堂 목사 니 취임 시타루요리, 당시 아홉 歲노 본명 하父니伴 하레테 오산 공립 보통 學校 니 入學, 쇼 두 년 삼월 졸업, 같은 해 만우절 입성 사립 배재 고등 보통 學校니 入學하여 동 칠년 삼월 학교 ヲ 졸업 시타루가, 其노間 父하 목사 토시테 경기도 이천 군 청계 면장 호수 실용 同廣州 군 南終면 분 院里, 충남 道牙山 군 따뜻함 양면 온천 마을 등 노 각 禮拜堂 목사 토시테 轉轉 근무하고있는 중 逐年 가계 궁핍 본명 하 배재 高普 在學 中하殆토 苦學 同樣노 생활 ヲ 타 메니 시타루 등 환경 노 사정 하 자연 현대 사회ヲ 呪咀시, 斯노如키 불합리한 나루 사 會하 一니 자본주의 제도 노 惡弊 나루오 以테, 此노 缺陷 ヲ 애 제외 똥 평등 행복 나루 이상 사 會오 實現 세사루헤카라스. 之 개 타 메니 위해서는 조선 ヲ 일본 제국 노 羈絆 여리 離脫 케 之 니 공산 사 會노 건설 ヲ 타 메니 수니 如 카스토노 신념 ヲ 안고 쿠니 이타 리시모노나루 處,
첫째, 피의자 하 아침 鮮內 니 어라고 켈 사상 운동 니 월 술 관헌 노 단속 嚴重 나르 니 대비 결과, 國外니於 태하 斯種 노 운동 자유 니시테 열의있는 혁명 투사 노 宿望 ヲ 달성 스루니하 극 메테 쉽게 나리토妄信 결과, 豫테 자기 노 抱藏 조선 노 독립 트 공산 카노 본 懷오國外니於테遂 켄트 결의 해, 쇼와 일곱 2009 년 11 월 초순 날짜 미상 飄然 가출 평안 북도 신의주 니赴키培재 고등 보통 學校 동창 노 지인 탈 洪順 彊오訪레 동인 노 소개 니테 동월 11 일 가득 洲國 봉천 서탑 대가 조선 요리 야킨 바다 樓洪 淳文 방법 노 帳場되고, 竊 게 동지 물색 중 偶偶 同家 니 출입하는 자 稱平 안 북도 생 레金 壽吉 코트 朴永 傑토知리合 히타루가 동인 가스 혁명 의식 짙은 니시테 우수 널 투사 나루코토오 감지하고 평소 노 宿望 ヲ 仄 차려 동인 노 소개 니테 쇼 팔년 구월 육일 봉천發鐵로 營口 니 텍, 營口 여리 乘船, 당고 니 상륙하여 이곳 여리 상하 이행 노 항공편 선박 니테 동월 十三日 상하이 니 상륙, 당시 부두 니 출 환영 헤타루 자동 稱郭 賓大 나루 자 니 안 안으 사레, 이곳 부처 조계 노 모시나 인 여관 니 숙박하고 잘 십사일 구오 賓大 니 안 안으 사레 동 여관 니 올되도록 지오 稱蔣 世傑 · 劉敵 · 盧崇道 · 盧錫 衍等 트 會合 결과, 盧錫衍오除쿠 세명 트 공중 니 같은 달 십사일 23시 무렵 상하이 發翌 보름 오전 6시 무렵 난징 입고 자동차 니테 中國 강소 지앙 寧鎭니赴키 이곳 소재 노 의열 團長 김 전 鳳노 경영하는 조선 혁명 간부 學校 가스 조선 노 독립 토其노 공산 신분증 목적 도시, 종래 수많은 兇暴 行爲오 감행, 中國 정부 원조 노 하 니 오른쪽 목적 수행 노 타 메니 혁명 투사 ヲ 양성하는 물건 날코 토노 情오知 리테 동월 열 여섯 하루 유키 니 입교하여 더욱
⑴ 조선 ヲ 일본 帝國노 羈絆 여리 離脫 똥 독립 케 공산 사 會노 건설 ヲ 꾀 것.
⑵ 의열 A-入團 후 하 동 A-노 명령 니 절대 對服 순종 스루코토. 
ヲ 확인 메탈 서약서 ヲ 제출 시테 학교 트 동일한 사명 ヲ있을 것이다 의열 團니 가입,
둘째, 정면 목적 수행 노 타 메니 쇼 팔년 구월 16 일 여리이 구년 사월 중순까지 학교 둘째 기생 토시테 在學시 동창생 왕 현 淳外 오십 명 트 공중 니 의열 團長 김원봉 외부 열두 명의 노 교사 여리
1 정치 과목 토시테
(나) 哲學
(나) 유물 史觀
(다) 辨證 법
(라) 경제 학자
(마) 정보 학
(바) 中國 혁명사
(토) 삼민주의
(인치) 사의 會科 학
(재) 의열 團史
(누) 조선 노 정세
(르) 당원 조직론
(오) 세계 노 정세
2 군사 과목 토시테
(나) 戰術 학
(나) 진중 要務 령
(다) 기계 關銃 학
(라) 사정 擊敎 범위
(마) 간이 측량 학
(바) 축성 학
(토) 교통 敎範
(지) 야간 연습
(재) 보병 操典
(누) 폭파 敎範
등 ヲ 습득하고, 鐵道 · 교량 노 폭파 爆彈 노 제조 · 사용법, 총기 노 조작법 及實 彈射 擊等 孰 레모 兇暴 행 爲敢 행에 필수 나루 學術 신분증 수습 硏鑽 시타루노미나라스 졸업 논문 토시테 신문 조서 添附 노 如키 (한) 조선 혁명 운동 니 관한 의견
(두) 농촌 운동 니 월 의견
(세) 遊擊 대 노 임무 트 조직법
(사) 농지 령 트 공장 法니對 술 검토해
등 孰 레모 일본 제국주의 노 타도 트 조선 노 독립 보통 공산 신분증 목적 토스루 矯激 널 논문 ヲ 제출 등 재학 중 불 절대 김 전 鳳等토其노 목적 탈 사항 노實 行니關시 협의 오爲시,
셋째, 前顯노如키 교양 훈련 ヲ 비스지지 쇼 구년 사월 중순 졸업 수르야 졸업식 當日 하 상해 방면 니 어라고 켈 김 전 鳳等노 동지 니시테 兇暴 行爲노 元兇 탈 김구 · 安恭根 등 모 참석시 김구보다는 "현재 일본 帝國하 국제 위기 니 瀕시將니 둘째 노 세계 대전 전쟁 ヲ 야기 세무토스루카 如키 정세 니아리, 此노際 만약 일본 帝國카 倒壤 세하 조선 노 독립 하頗루 쉽게 나루모노토 신 술 고니 我我하此노 좋은 탑승기 會오逸 스루코토나쿠 목적 달성 노 爲努 힘 세사루헤카라스 "토노 취지 노 激勵오受케 졸업생 일동 니 對시 기념품 토시테 만년필 하나 宛오贈 리타루요리 졸업생 일동 하痛쿠之니 감격, 飽迄 조선 독립 노 爲鬪 爭오續 크루 旨오誓히 졸업생 대표 토시테 宋文旭오選히 동인 여리님께 노 교훈 ヲ 몸 시테 열렬한 널 투쟁 오續케必스 목적 달성ヲ 기 스트 성명 결과, 일동 之 니에 동의 한 노에서 선서, 亞테 올해 오월 칠일 의열 團長 김원봉 及敎 관 이시이 코트 尹世 胄 여리 둘째 기생 노 위치 發隊 토시테 入鮮 활동 ヲ 생명 세라레테之 ヲ 쾌락 시타루니 또한 尹世 胄하 당면한 노 임무 토시테 아침 鮮內 니 於테 노동 대중 층 니 동지 ヲ 획득 시테 쿄 오코 널 지하 조직 ヲ 결성하고이를 ヲ 戰進 대 트 명명, 其노精 粹分子 ヲ 선거 빠져 똥 조선 공산 黨再 건설 운동 니 押시 진행 메요. 戰進 대 노 강령 하
⑴ 일본 帝國오 주격 토시테 기 란토스루 차 세계 대전 戰니當 리테 조선 노 절대 對獨 립 ヲ 기 스루코토
⑵ 경제 투쟁 여리 정치 투쟁 니 轉進시 일본 帝國노 정치 · 경제 · 군사 노 주요 나루 기계 關오 탐색 破壞 스루코토
노 이항 니 주한 리. 之니基키 연락처 츠 노동 대중 ヲ 획득 똥 조직 ヲ 완료시기 到來오俟테 군수품 생산 공장 ヲ 破壞시, 또 반대로 싸우는 운동 ヲ 起시 대중 니 반 전쟁 "빌라" 노 배포 其他 노 방법 니테 宣傳오爲시 반 戰氣 분야 醞釀 격화 니努메 더 후방 攪亂노爲, 鐵道 及橋 梁오 폭파 똥 군대 · 군수품 노 수송 ヲ 방해하고 전신 · 전화 ヲ 전환 거절 똥 통신망 ヲ 破壞시, 官廳오襲擊 똥 총독 테노 정치 · 경제 노 중요 기계 關오 破壞 스루코토 등 ヲ 감행 일본 제국주의 노 타도 라 매진 세요토노 사명 ヲ 교수 케라루 화살, 之오進 ン테 승낙 이상 테其노 목적 탈 사항 노實 行니關시 협의,
넷째,
(나) 전 아키라 강령 實行노爲 조선 혁명 간부 學校 둘째 기생 노 위치 發隊 니 선거 할리 의열 團長 김원봉 여리 敎官 楊振 崑오通 똥 中國貨 백엔 ヲ 여비 토시테 지급 세라레 올해 오월 일곱 하루 동기생 施天 하지메 及敎 官陳 유일한 요소 共니 난징 發鐵로 청도 니 텍 달 구일 배편 니테 이곳 出發 대련 니 상륙 봉천 · 신의주 ヲ 經由 똥 같은 달 보름 鐵路 본적 치니 歸來시타루가, 先쯔此노 의열 A-본부 토노 통신 연락 하 中國 청도시 樂陵로 한 여섯 號元 선생님 손문 旭宛토定메 통신 하 隔字 식 (본명 니 지정 하 "여덟 마흔 여섯"식 니시테 통신 문중 팔자 눈, 네 글자 번째, 여섯 글자 째 노 문자 ヲ 綴合 스루토키하 소요 문장의 뜻 ヲ 표 로터스 방법) 及藥 제품 통신 (훼노후타린 알콜 오미자 ヲ 조합 똥 보통 통신 노 餘白, 或하行토行 토노 사이 니 기시 焙리出 시니 더 불평 ヲ 판 낭독하는 방법) 노 두 종 지정 사레, 歸鮮 후 올해 오월 스무 사흘 平壤니赴키, 배재 고등 보통 學校 동창생 니테 사립 崇實 전문적 學校 농 과학 삼년 在學 中노鄭 三賢오 학교 기숙 舍니 방문하여 동인 노 소개 니테 두부 신양 마을 여행자 宿韓 昌順 방법 니 유숙, 屢屢 테이트 會合시 같은 달 이십사 일 무렵, 鄭노 거실 니於테 "조선 민중 노 하치 하 농민 니시테, 且其 노 하치 하 소작농 나루가 소작농 하루 노 생활비 하 평균 세 잔돈 니시테 한끼 僅니 사탕 한 개 노 치 트 라이벌 스루 如키, 其노 悲慘 널 생활 하 상상 니 餘 리얼리. 타면, 蘇滿 국경 노 풍운 하 이익 이익 險惡 니시테 몇시 날짜 蘇노國 交斷 절대 시테 차 세계 大戰 노 발발 ヲ보고 루야모 保시難시 정세 니아리. 此노際 만사 하루 ·蘇開戰 세하 悲慘 나루 조선 동포 노 생활 하 한층 심화 스루니 이르기 루헤시. 此노機會오逸 세스, 신고 인 조선 청년 하 一齊니 蹶起 똥 혁명 戰線 니 립 타사루헤카라스 '운운 트 올 루헤키 1935 · 6 년 노 일본 노國際 위기 니시 시테 반 戰及 공산주의 노 實現 운동 노 긴요 널 旨오 宣傳 선동하고 심지어 이곳 일본 穀産 주식 會社, 其노他노 공장 니 근육 노동자 트 타 메니 리테 노동 대중 노 사이 니 동지 ヲ 획득 시以테之가 기초 조직 ヲ 타 메니 스헤쿠 기획 시타루모 취업 意노如 쿠나라스 목적 ヲ들 세사르 중 지병 노 요통 니惱미 본적 지혜 歸家, 靜養노止 무나키니 至리, 올해 유월 하루 退壤 시타루가, 出發니際시 정 三賢니對시情오告 케스시테 "평 壤崇 열매 전문적 學校 기숙 舍鄭 세 현 方金 부키 煥宛"니 통신 아리타루 경우 다 더 之 ヲ 새로운 라시키 봉투 니 入레替헤, 충남 道牙山 군 溫陽면 온천 리노 본명 앞으로 轉送 方오 의뢰 시테 동인 노 승낙 ヲ 비스지지, 의열 A-본부 토노 교신 노 완벽 오期시以테其노 목적 수행 노 타 메니 니 활약,
(나) 쇼 구년 유월 하루 오후 두 시경 평양 여리 집에가 노 도중 경성 驛니 하차 경성 부 남대문 통 산 쵸메 스물 아홉 번지시나 음식점 복 禧樓 니 들아 리시나 우톤오 주문晝食 노시 동점 여리 붓 벼루 · 墨오借리受케 소지 노 편지지 종이 니 "平壤니根據오置 키타루오 以테 향후 노 통신 하 평 壤崇 열매 전문적 學校 內鄭 세 현 方金 부키 煥宛 니스루코토 及今 후 노 운동 노 지령 ヲ 仰쿠 "旨오認 타메 豫테打合濟 널 中國 청도시 樂陵로 한 여섯 위안 선생님 손문 旭宛 發信 결과, 其노 목적 수행 니努메
(다) 쇼 구년 유월 하루 평양 여리 본적 치니 歸省 이래 관헌 노 주목 ヲ 방지 크루 타 메니, 先쯔 鐵道 從業 員니 취업,시기 ヲ 見테 군대 군수품 노 운송 방해 鐵道 폭파 등 ヲ감행 스헤쿠 결의, 其노頃 동창 노 선배 니시테 경동 鐵道 (수원 - 여주 간) 먼 강 驛助 역 오勤 물 금 鍾元 니 이력서 두 통 (內 일부 하 證第 열두 號現 제품 參照) ヲ 우송 시, 數回 니亘리 취업 ヲ 依賴시置 오시 處 쇼 구년 구월 초순 驛夫 일명 노 모집 알 旨노 통신 니 접하고 直니 응모 시타루모 채용 세라레사리시오 以테 또한 當局 ヲ 사기 시테면 서기 옆 경계 노 번째 ヲ 방지 켄트 기획 같은 해 십일월 十六日 충남 道牙山 카운티 니면 서기 채용 試驗 아루오 聞知하고, 같은 군 溫陽 면사무소 니 올해 수십 월 중순 (일 미상) 원서 니 이력서 · 戶籍 등본 (證第 일곱 號乃 이르기 아홉 號現 제품 參照) ヲ 첨부 노 상 제출 치 키타루모 試驗 기일 직전 탈 올해 십일월 11 일 檢擧 사레타루 타 메니 실패 니 돌아 시타루가, 북도 피의자 하 집요 니모 경찰관 ヲ 지원해 재직 노 曉하 뒷면 니 於테 농촌 적화 노 마수 오伸 하사무코토오모 企圖 결과, 올해 아홉 월경 여리 조선 일보 노廣 告니보다 조선 총독 부 경찰관 접수驗 강의 록 세트 세권 (證第 네 號現 제품 參照) 及 조선 순사 試驗 문제집 한권 (證第 다섯 號現 제품 參照) ヲ 구매 시테 순경 채용 試驗 應試 노 준비 오爲시 합격 채택 노 아침 니하 고등 형사 옆 관헌 노 기밀 ヲ 內偵 密査 똥 의열 A-본부 니 통보하고, 戰進 대 노 강령 오其노 儘實 행 스헤쿠 순조롭게 우려 루헤키 兇暴 계 劃노 지하 운동 ヲ 신지 摯熱 烈니續케 의열 Dan 노 목적 수행 노 타 메니 암약 있던 타루모노나리.
오른쪽 피의 사건 ヲ 방청 스루니 피의자 者노所 爲하 치안 유지법 제 一條 제일 · 2 항, 동 제 二條 동 제 조, 동 제 七條 니 해당한다 범죄 니시테 其노 證憑 충분 트 확인 메 라르 두 부 기소 아이나 가능 연 모노토 사료 스.

작성일 쇼와 구 2010 년 12 월 보름

발송자 경기도 경찰부 
사법 경찰관 경기도 도경 부 고무라 마사히코

수신자 경성 지방 법원 
檢事 긍정적 나라이 다 一郞 전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31 31권 義烈鬪爭 4   >   警察訊問調書(日文)   >   意見書
意見書 

金公信 

一, 刑事處分, 起訴猶豫又ハ訓戒放免ヲ受ケタルコトノ有無. 
被疑者ニ於テハナシト自供ス.
一, 犯罪事實 
大正八年三月所謂朝鮮獨立萬歲騷擾事件勃發スルヤ, 金元鳳等ハ巧ニ國外ニ脫出シテ在外不逞分子ト策謀シテ, 朝鮮ノ獨立ノ目的ヲ達成セムコトヲ企圖シ, 大正九年四月滿洲國吉林ニ於テ祖國光復ノ爲暗殺, 破壞, 暴動, 强盜等ノ兇暴行爲ヲ敢行シテ朝鮮ノ獨立ヲ達成スヘク義烈團ナル結社ヲ組織シ, 大正九年七月七日以來密陽, 釜山, 京城, 上海, 東京等ニ於テ總有兇暴行爲ヲ敢行シ世人ヲ戰慓セシメタルハ周知ノ事實ナルカ, 昭和元年十二月二十八日在京城東洋拓殖株式會社, 朝鮮殖産銀行等ニ於ケル羅錫疇ノ爆彈投擲及警察官射殺事件ヲ契機トシテ鮮內ノ民心ハ漸ク斯ル兇暴行爲ニ飽キテ, 民族, 共産兩主義者ノ提携合流トナリ, 昭和二年二月大衆團體トシテ新幹會發生シ朝鮮內ノ運動戰線ニ一轉期ヲ劃シタルノミナラス, 其ノ頃ML派ノ巨頭安光泉コト安孝駒ハ巧ニ檢擧網ヲ潛脫シテ上海ニ奔リ親シク義烈團長金元鳳ニ面會シテ直接行動ノ不利ヲ說キ且共産運動ノ有望ナルヲ勸說シタル爲之ニ動カサレテ從來ノ單純ナル民族主義運動ハ漸次共産主義的色彩ヲ帶フルニ至リ, 朝鮮ヲ共産革命ニ依リテ獨立セシメ以テ共産社會ヲ實現セシメムコトヲ企圖スルニ至リ, 金元鳳等ハ昭和四年末北坪ニ於テ朝鮮共産黨再建同盟ヲ組織シ, 之ヲ義烈團ニ隸屬セシメ, 附設敎養機關トシテ「レ―ニン主義政治學校」ヲ設ケ, 六ケ月ヲ一期トシテ同五年四月ヨリ同六年二月迠ノ間二回ニ亘リ十九名ノ卒業生ヲ出シ, 鮮內工作ニ當ラシメタルモ江原道江陵ニ於ケル權五勳, 京城ニ於テ策動中ナリシ李鎭一等ハ孰レモ京城西大門警察署ニ檢擧セラレテ失敗ニ歸シ, 他面滿洲事變勃發以來客觀的情勢ノ不利ナルヲ悟リ, 中國ニ於テ抗日反滿運動ノ高潮セルヲ奇貨トシ中國官民ニ阿附シテ抗日, 援中, 中韓合作ノ妄動ニ移ルヘク國民政府ノ要人ト折衝ヲ重ネタル結果, 國民政府ヨリ每年資金三千元ヲ受ケ反日抗滿ノ革命鬪士養成機關トシテ國民政府軍事委員會幹部訓練班第六隊ニ朝鮮靑年ヲ收容シ革命的前衛鬪士ヲ養成シ, 以テ朝鮮ノ獨立及共産化並滿洲國奪還ヲ實現スヘク第一期生二十六名ヲ募集シ昭和七年十月ヨリ同八年四月迠ノ間敎養ノ上各地ニ密派シ, 同八年九月ヨリ第二期生五十四名ヲ敎養シテ, 同九年四月ヨリ滿鮮各地ニ密派シ, 其ノ後校名ヲ朝鮮革命幹部學校ト改稱スルニ至リシモノナル處, 被疑者金公信ハ江原道伊川郡安狹面邑內里松峴洞ノ貧農ノ家ニ生レタルカ, 父興信ハ飮酒ヲ好ミ家業ニ精勵セサル爲生活益益困難トナリ, 一家離散ノ悲運ニ遭遇シ, 母ハ京畿道江華郡ノ實家ニ歸リ, 本名ハ六歲ノ頃父ニ伴ハレテ同道漣川郡郡內面玄加里百九十一番地ニ移居シ, 父ハ驛仲仕トナリテ勞働ニ從事シ生計ヲ樹テ貧困ノ生活ヲ續ケ居タルカ本名ハ大正十年四月漣川公立普通學校ニ入學, 昭和三年三月卒業シ, 居面松浦製絲工場職工トシテ就勞中同工場女工監督李美子ノ世話ニテ當時京城府外杏堂里ニ於テ崔福同等ノ經營セル往十里製絲工場職工トナリ, 昭和五年七月入城シタルモノナルカ, 其ノ後同工場閉鎖ノ爲京城府昌信洞鷄林興産株式會社製絲工場, 同漢江通湯淺製絲工場ノ職工トシテ轉轉シ, 昭和七年三月ヨリ京城府崇四洞一八二農産物種子商大村益藏方店員トナリタルモ間モナク主人大村死亡閉店シタル爲失職シ, 求職運動ニ奔走中偶偶昭和七年九月頃義烈團員ニシテ前示學校ノ敎官タル李銘環ノ妻ニシテ前記學校ニ入學セシムヘキ生徒募集ノ使命ヲ帶ヒテ, 南京ヨリ入城セル崔福同ト京畿道高陽郡漢芝面杏堂里崔載榮方ニ於テ會合シ同人ノ勸誘ニ依リ渡滬ヲ決意スルニ至リ,
第一, 昭和七年十月十七日頃當時上海ノ崔福同ノ通信ニ依リ就職ノ目的ニテ前示李美子ト共ニ京城驛發釜山ニ赴キ, 同月十九日出帆ノ慶安丸ニ乘船シタルカ同船ハ同一目的ニテ渡滬スル金聖濟及同人ノ妻鄭淑景並前示訓練班第六隊入隊ノ目的ニテ渡滬中ノ慶尙南道東萊郡東萊邑校洞四六二胡瑛コト文吉煥當二十四年, 同洞番地不詳陳嘉明コト崔章寧當二十七年等ト同乘シ相識ニ至レルカ, 同月二十四日頃上海ニ上陸スルヤ, 氏名不詳ノ鮮人男(四十歲位ノ者)埠頭ニ出迎ヘ同人ノ案內ニテ豫テ崔福同ヨリ指示サレタル民信醫院ヲ訪問シ, 義烈團員韓一來, 同人妻尹貞信及同人ノ妹尹貞斌並李銘環等ト會合シ, 李銘環ノ案內ニテ同夜午後十一時上海發翌二十五日午前八時頃南京着, 同地城內新橋在住ノ金元鳳方ニ赴キ同人ヨリ『南京ニ於テ義烈團カ國民政府援助ノ下ニ經營中ノ軍事委員會幹部訓練班第六隊(後日ノ朝鮮革命幹部學校)ハ反滿抗日運動ヲ主眼トシ朝鮮ノ獨立ト共産化ヲ圖リ, 日本帝國主義ヲ打倒シテ滿洲國奪還ヲ實現スルコトヲ唯一ノ目的トスルモノニシテ此ノ革命工作ニ要スル一切ノ學術科ヲ六ケ月間ニ修得シ, 旦中國語ヲモ敎習スルモノナルカ, 同校ニ入學スル事ハ我我祖國光復ニ燃ユル朝鮮靑年トシテ最モ肝要ナルコトナリ』ト切ニ入校ヲ勸誘サレ, 遂ニ入校ノ意ヲ決シ, 同日李集中ニ伴ハレテ胡瑛コト文吉煥, 陳嘉明コト崔章寧等ト共ニ南京郊外湯山所在軍事委員會幹部訓練班第六隊ニ入隊シ, 次テ昭和八年一月初旬義烈團カ朝鮮ヲ日本帝國ノ羈絆ヨリ離脫セシメ完全ナル獨立國家ト成シ, 然ル後勞働者, 農民ノ支配スル共産主義社會ノ建設ヲ目的トシテ, 大正九年四月以來幾多兇暴行爲ヲ續ケ, 最近ハ民族主義的ノ單純ナルヲ口運動ニ多分ニ共産主義的色彩ヲ帶ヒ, 共産革命ニ依リ目的貫徹ヲ圖ラムトスル結社ナルコトノ情ヲ知リテ之ニ加入シ,
第二,
(イ) 前顯義烈團ニ加入後ハ其ノ擴大强化ヲ圖ル爲胡平ヲ組長トシ, 張守正, 金世日及被疑者ヲ組員トスル義烈團小組ニ加盟シ, 每週一回日曜日ノ晝間學校前竹林附近ニ於テ組會ヲ開催シ, 
1, 團務報告 
2, 國際情勢 
3, 組員ノ個人批判 
4, 各自ノ硏究發表 
等ヲ爲シテ革命意識ノ昻揚ニ努メ, 他面朝鮮革命幹部訓練班ニ於テハ 
校長 金元鳳 
政治學部 
唯物哲學 金元鳳 
義烈團史 金元鳳 
マルクス經濟學 李英駿 
三民主義講座 李英駿 
社會學 朴健雄 
組織學 朴健雄 
政治學 韓時政 
世界革命史 韓時政 
朝鮮革命史 韓時政 
秘密工作方法 中國人某 
中國語 中國人某 
軍事學部 
戰術學 金鍾 
射擊敎範 金鍾 
步兵操典 申岳 
軍隊衛生學 李集中 
築城學 權畯 
陸軍禮式 權畯 
機學(機關銃及小銃操縱法) 李東華 
簡易測量學 李東華 
爆彈製造及使用法 李東華 
夜間演習及野外訓練 
隊長 申岳 
隊附 盧乙龍 
隊附 李銘環 
築城實習 權畯 
醫官 中國人某 
庶務係 中國人某 
特務係 中國人某 
等各敎官ニ於テ科目ヲ擔當シ, 每日六時間乃至八時間ノ敎養ヲ受ケ, 六ケ月間ニ於テ直接革命工作ニ必要缺ク可カラサル學科及術科ヲ習得硏鑽シ,
(ロ) 其ノ間昭和七年十月十日義烈團創立紀念日, 昭和八年三月一日朝鮮獨立騷擾紀念日, 昭和八年四月二十三日第一期生卒業式當日ノ如キハ紀念日鬪爭ノ爲式場ニ 
日本帝國主義打倒 
朝鮮革命成功萬歲 
世界革命成功萬歲 
中國革命成功萬歲 
等ノ「スロ―ガン」數十枚ヲ揭ケ, 團長金元鳳等ヨリ朝鮮ノ獨立ト赤化達成ニ關スル激勵的講話ヲ聽キ, 同校ニ於テ朝鮮獨立運動ノ意識昻揚ノ爲作成セル內容矯激ナル「愛國歌」及「革命歌」等ヲ合唱シ, 最後ニ「朝鮮革命成功萬歲」, 「中國革命成功萬歲」, 「世界革命成功萬歲」ヲ三唱シテ散會シ特ニ卒業式當日ハ午後八時頃ヨリ卒業生等出演ノ下ニ朝鮮共産革命劇ナル素人劇三幕ヲ演シ, 劇ヲ通シテ共産革命的意識ノ昻揚ヲ圖ル等孰レモ其ノ目的タル事項ノ實行ニ關シ協議シ,
第三,
(イ) 前示學校卒業後昭和八年四月二十七日頃南京郊外湯山所在朝鮮革命幹部訓練班第六隊ノ講堂ニ於テ石正司會ノ下ニ義烈團學生大會ヲ開催シ, 被疑者モ之ニ參加セルカ, 金元鳳等モ臨席シ, 石正ヨリ「義烈團ハ從來直接行動ノミニ依リ朝鮮獨立ヲ圖ラムトシ, 幾多ノ兇暴行爲ニ失敗セル歷史ヲ有スル爲鮮內ニ於テハ凶惡ナル一種ノ「テロ團」ナルカ如ク認メラレ工作上困難少カラサルヲ以テ名義變更ノ要アリ」ト提議シタルニ一同之ニ贊成シ, 來ル六月開催ノ義烈團全體大會ニ議案トシテ提出スヘキ旨ヲ協議シテ解散シ,
(ロ) 同月三十日學校ハ南京郊外約一里孝陵ニ移轉シタルカ, 同年六月下旬頃義烈團全體大會ヲ同校ニ於テ開催シ, 敎官金元鳳外七名, 卒業生被疑者外十七名參席シ, 北平ヨリ金河求, 無錫ヨリ韓一來, 南京ヨリ金文, 李春岩等來會シ, 團員約三十名參集, 金元鳳司會ノ下ニ同人ヨリ團務報告ラ爲シ中央執行委員ヨリ
⑴ 「技術的人材養成問題」ヲ提議シ, 引續キ第二期, 第三期ト繼續的ニ朝鮮革命幹部訓練班ノ爲生徒ヲ募集入校セシメ團員ノ增加ト內容ノ充實ヲ圖リ目的達成ヲ期スルコトヲ決議シ,
⑵ 「探偵部ノ設置」ニ關シテハ設置スルコトニ決定中央執行委員ニ一任シ.
⑶ 「綱領章程」ノ改正ニ關シテハ提案通リ可決シ,
⑷ 「義烈團ノ名稱變更ニ關スル件」ハ學生支部ヨリ提議シタルカ贊否兩派ニ分レ投票ノ結果名稱存續ニ決定シテ散會シ,
(ハ) 同年七月初旬頃ヨリ南京砲兵工廠ヨリ爆彈製造ノ技師張某ヲ招聘シ, 時計仕掛爆彈, 投擲爆彈, 保險爆彈(安全裝置アルモノ), 木製柄付爆彈, 擲電綱爆彈, 導火線爆彈, 簡易爆彈等ノ製造方法, 投擲法, 使用法等ヲ習得シ,
(ニ) 昭和八年八月下旬同期生李自重, 張守正, 王振鳴等ト共ニ南京城內孝子房十一號ニ移居シ, 其ノ頃團員李春岩ヨリ依賴サレタル東亞日報記事中經濟, 社會, 時事, 軍事等革命運動上參考トナルヘキ記事ノ切拔キヲナシ, 學校ニテ收得シタル「マルクス敎科書」中ヨリ別添證第一號乃至第九號ノ如キ必要事項ヲ「ノ―ト」ニ筆錄硏究シ, 本部ヨリノ指令ヲ待機シ居タルカ
(ホ) 昭和九年四月初旬頃張守正上海逃走後金元鳳ノ命ニ依リ南京ヨリ上海ニ移動シ佛界體尼蔭路大同里十七號三階ヲ借受ケ, 第二期生金邦佑ノ姉金永姬, 望志路二一二金白蓮コト(金枓奉妻)趙鳳元等ト連絡シ, 上海ニ於ケル日本官憲ノ情況, 同志ノ活動狀態等ヲ探査シ居タルカ, 同年五月二十三日頃第二期生金邦佑カ本部ノ命ニ依リ「上海ニ於テ被疑者ト連絡シ工作ニ當レ」トノ本部ノ指令ニ依リ來滬シタルニ會シ, 法界辣斐德路亭雲里五七號ニ移轉シ, 同所ニテ金邦佑ニ金永愛ヲ會見セシメ爾來彼等ト連絡シテ目的遂行ノ爲ニ活動シ,
(ヘ) 同年七月二日頃第二期黃薰, 金用得, 袁世弘, 魯崇道等本部ノ指令ニ依リ來滬シ, 金用得ハ上海ニ止リテ工作ニ從事シ, 其ノ他ノ者ハ朝鮮內ニ潛入シテ工作ニ從事スヘキ旨聞知シ, 金邦佑, 金用得ハ袁世弘, 魯崇道ヲ, 被疑者ハ孝陵ニ於テ面識アル黃薰ヲ擔當シ變裝用洋服ノ購入, 或ハ佛界法太馬路ノ郵船會社ニ交涉シテ天津行ノ切符ヲ購入シ與フル等專ラ被等ノ入鮮工作ヲ援助シ, 同月三日正午頃楊樹浦公路招商局中馬頭ニ於テ前記三名ヲ支那汽船ニ乘船入鮮セシメ,
(ト) 同月三十日頃佛界薩坡賽路豊裕里七五號ニ移轉シ, 每月義烈團本部ヨリ十五元ノ生活費ヲ受ケ, 義烈團ノ上海ニ於ケル連絡機關トシテ活躍シ, 同年八月末日頃南京城內蒼門口六四號ニ義烈團長金元鳳ヲ訪問シテ上海ニ於ケル活動狀況ヲ報告シ, 數日間病臥中ノ金元鳳ノ妻朴次貞ノ看病ニ當リ其ノ間金枓奉, 申榮三, 金容宰等ト會合シ, 尹世胄ヨリ購入ノ依賴ヲ受ケ携行セル左翼新刊書約十冊ヲ手交シ, 同月二十七日頃金元鳳ヨリ旅費三十元ヲ受ケ歸滬シタルニ恰モ金邦佑ハ其ノ四日前ニ上海總領事館ニ檢擧サレ, 同人ノ姉金永姬ハ老鞄路二六八號ニ移轉シ居リシヨリ直ニ義烈團本部ニ金邦佑ノ被檢並自己ノ身邊ニ危險切迫セル旨ノ報告ヲ爲シ, 本部ヨリ一層注意セヨトノ指令ヲ受ケ, 引續キ活動ヲ開始シ,
(チ) 同月末頃前示朴次貞ノ母來滬シ, 望志路二一二號金枓奉方ヲ訪レタルヨリ之ヲ南京ノ朴次貞ノ許ニ同伴シ, 三日間義烈團本部ニ滯在シ, 團長金元鳳, 尹世胄, 申榮三, 金容宰等ト連絡シ, 九月上旬新ニ上海ニ於テ工作方ノ指令ヲ受ケタル第二期生胡健, 敵ト共ニ南京發歸滬シ同人等ヲ法界公太馬路, 佛界辣斐德路冠幸里十五號等ヲ轉轉上宿セシメ居ル中, 九月四日頃金永姬ヲ訪問シテ金邦佑ノ釋放サレタルコトヲ知リ, 此ノ事情ノ詳細ヲ本部ニ報告連絡シ,
(リ) 同年九月七日頃第二期生蔡文秀, 王作林等ノ來滬ヲ知リ, 其ノ住居タル華東公寓及佛界馬浪路洗濯屋二階, 佛界西門路十二號等ニ彼等ヲ訪問シ, 被疑者ハ義烈團ノ上海派遣員總監督ノ地位ニアリテ金邦佑, 安貞得, 蔡文秀, 王作林, 胡健, 劉敵等ヲ指導シテ革命工作ニ關スル戰略戰術ヲ討究シ,
(ヌ) 同年十月十五日金邦佑ノ再檢擧サレタルヲ知リ, 其ノ旨本部ニ報告シ, 在滬同志ニモ注意方ヲ警告シタルカ, 他面第二期生敎官陳唯一コト李昌華ト同年七月初旬, 同十月中旬ノ二回ニ亘リ上海ニ於テ會合シテ上海ノ情況ヲ告ケ, 同人ヲ通シテ本部ト連絡シ相提携シテ工作ニ當リ居タルカ, 同年十二月初旬佛界東方公寓ニ於テ三度同人ト會合, 「第三期生ノ募集ハ當分命令アル迠待機シ單ニ連絡ヲ密ニシ置ケ」トノ指令ヲ受ケ, 陳唯一ハ洋服, ワイシャツ等ヲ新調シテ入鮮シ本名ハ其ノ指令ニ依リ第三期生トシテ入學セシムヘキ者ノ物色ニ當リ居タルカ先之安貞得ハ上海ニ於テ同年十月十二日頃檢擧サレタル爲此ノ旨本部ニ報告, 身邊ノ警戒ヲ嚴ニシ一味ト共ニ同志獲得ニ奔走シ, 本年一月初旬王作林ハ宋銀山外一名ヲ募集シ, 胡健ハ全英吉外一名ヲ募集シタルヨリ被疑者ハ胡健ノ依賴ニ依リ全英吉外一名ヲ南京ノ義烈團本部ニ同行シタルカ, 其ノ際胡健ヨリ本部宛ニ送リタル左翼書籍約十冊ヲ携行シテ石正ニ手交シ,
(ル) 昭和九年十二月八日頃上海ニ於ケル義烈團ノ「アジト」タリシ金枓奉妻趙鳳元ハ南京ノ夫ノ許ニ移轉シタルカ, 出發ニ際シ同人ヨリ其ノ住所タリシ佛界望志路二一二號林哲愛, 金海哲, 李永俊, 金白淵, 金枓奉, 趙鳳元等宛ノ郵便物來着シタル場合ハ義烈團本部ノ連絡場所タル南京奇望街信箱第十號李實宛廻送方ヲ依賴サレテ, 之ヲ快諾シ, 其ノ後本年一月中旬慶尙南道東萊ヨリ林哲愛(朴次貞)宛ノ通信二通, 一月下旬黃海道ヨリ金海哲宛ノ通信二通, 一月下旬「ロンドン」ヨリ金枓奉宛ノ雜誌一冊ヲ孰レモ受取リ, 之ヲ義烈團本部ノ連絡場所タル前記南京奇望街信箱第十號李實宛ニ廻送シ,
(オ) 本年一月中旬佛界呂班路孝友里十一號ニ同志劉敵ト同居シ, 第三期生ノ募集ニ從事シ, 二月七日李鎭一ヲ募集シテ本部ニ同行シ義烈團ニ入團セシメタルカ更ニ團長金元鳳ノ命ニ依リ李鎭一ト共ニ第三期生募集ノ使命ヲ帶ヒ歸滬, 同志獲得ニ活躍スル等, 孰レモ義烈團ノ目的遂行ノ爲ニ活動シタルモノナリ.
右被疑事件ヲ按スルニ被疑者ノ第一及第三ノ行爲ハ治安維持法第一條第一項後段及同條第三項ニ, 第二ノ行爲ハ同法第二條ニ該當スル犯罪ニシテ, 其ノ證據充分ト認メラル, ニ付起訴處分相成可然モノト思料ス.

작성일  昭和十年五月二十二日

발송자  司法警察官京畿道警部 高村正彦

수신자  京城地方法院檢事正 奈良井多一郞 殿



출처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 , 한국 역사 정보 통합 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

: 1929∼1932년 사이 의열단의 국내 대중투쟁 성과를 정리한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농민운동

○ 농민조합農民組合 신설 : 洪原·龍川·博川·江陵

○ 抗租運動 : 龍川 不二農場의 제 2차 抗租運動

○ 농민조합農民組合 개조 : 南海

一. 노동운동

○ 支部組織 : 釜山陶器工場·釜山橡皮工場·京城鐵道會社·京城朝鮮紡織工場·平壤電氣工廠

一. 학생운동

○ 支部組織 : 京城第一女子高等普通學校·京城醫學專門學校·大邱商業學校·大邱高等普通學校·平壤女子高等普通學校

( 〈韓國義烈團工作報告書〉1932. 12. 10, 《資料韓國獨立運動》3, p. 25)

이들 의열단 대중운동 조직의 구체적인 조직실태·활동상황 등에 관한 사실은 ‘江陵’의 경우를 제외하고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1930년대 국내 대중운동의 전개와 관련하여 시사적인 의열단의 국내공작 실태는 향후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


남창봉기와 광주봉기로 대변되는 국공분열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상해로 온 김원봉의 당면과제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과제는 제 3차 조선공산당 제 2대 책임비서였던 安光泉과 만나게 되는 1928년 중반부터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안광천과의 만남은 김원봉의 혁명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註 112 또한 이 시기는 김원봉의 항일투쟁 전과정에서 좌경적 경향이 비교적 뚜렷하게 표출되던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 김원봉과 의열단의 노선변화에는 안광천으로 대표되는 좌파협동전선론자들의 영향이 일정한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제 1차 국공합작의 파탄이라는 국제적 환경의 변화, 新幹會·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 등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전개라는 객관적 정세변화가 주된 요인으로 기능하였다.
김원봉이 안광천을 처음 만난 것은 1928년의 늦여름 상해에서였다. 안광천註 113은 제 3차 조선공산당 제 2대 책임비서로 활동하며, 신간회 결성을 배후 지원하는 등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제창하였으나 세력다툼에서 좌절한 인물이었다. 안광천의 출현은 김원봉이 지나간 2년 동안 중국 국민혁명 현장체험 과정에서 절감한 민족협동전선론을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형상화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 시도는 1928년 10월 4일 발표된 〈朝鮮義烈圈 제 3차 全國代表大會宣言〉註 114 중의 정강·정책에서 드러난다.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20개 항의 정강·정책은 국민의 기본적 자유 보장, 남녀평등의 지방자치 실시, 의회주의 ‘民主國’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였다.註 115
창립 당시의 공약 10조에 비해 구체적이고 진보적인 지향을 함축하고 있는 이 선언은 1926년 겨울 결의된 ‘혁명정당으로의 전환’ 방침을 구체화하는 한 과정이었으며, 또한 1927년 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한 자체정비 노력의 일환이었다. 결국 의열단의 민족협동전선운동은 자기혁신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셈인데, 그 요강은 다음달인 11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註 116의 내용으로 포괄되었다.
의열단의 민족협동전선론이 ‘실천을 통한 진전’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는 이 문건은 향후 의열단의 진로가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집중될 것임을 분명히 하였고, 그 원동력을 광범위한 대중의 혁명적 욕구에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강도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절대독립을 탈환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협동통일’뿐이라고 규정하였다. 때문에 “모든 주의에 의한 대립, 모든 붕당에 의한 분열이 극복되지 않으면 아니되고, 조선혁명 운동도 세계혁명전선에 까지 굳게 통일되어야 한다”고 민족협동전선 결성의 필연성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협동전선의 성격을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것이며, 우경적인 것이 아니고 전투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한편, 그 계급적 기초를 ‘우리민족의 절대다수이며 가장 혁명적인 노농대중’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민족협동전선의 방향설정에 대해서는 “현재 급속히 진전되는 조선 노동계급의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그것을 독립운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협동전선의 최대 조건이 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여 노동·농민운동의 고양을 중시하는 한편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독립당’을 제안하였다. ‘전투회피자’·‘폭력부인자’·‘점진주의자’와의 타협을 배제하고 있는 이 선언문은 의열단의 향후 활동 역점이 대중투쟁에 있을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였다.註 117
이러한 의열단의 노선전환 움직임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갔고, 그 결과 의열단 상해지부에서는 1929년 12월 2일 독자적인 해체성명서註 118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대중적 협동전선’의 결성을 재차 촉구하고 있는 상해지부의 이 성명에는 당시 북경에서 활동 중이던 김원봉에 대한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적극적 주도를 촉구하는 일면도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


백의사 염동진 단장은 남조선을 적화시키려고하는 빨갱이김원봉의 국군준비대를 김두한을 보내 토벌시킴.

남조선을 적화시키려는 빨갱이김원봉의 조선민청 전위별동부대 역시 김두한을 보내 토벌시킴.

김원봉 역시 백의사 대원 김두한의 테러대상이었다. 김원봉은 똥통 밑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바로 북괴로 도주했다.

이 사건을 들은 김구는 김두한을 불러서 "김원봉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이미 좌익이다." 라고 하면서 등을 툭툭 하며 김두한을 칭찬했다. 



============빨갱이킬러 김두한의 증언들============================================================


"그때 당시 백범 김구 선생 같은 분과 설렁탕 한 그릇 먹으면 우리 청년에게는 최대의 영광이거든요.다 잡수시더니 날더러 하는 말이 ‘자네, 내가 들으니까 한천동의 김 박사 댁을 어떻게 했다는 소리가 들리고, 또 김원봉 집을 어떻게 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건가?’ 웃으시면서 이렇게 점잖게 물으세요. 그러니 참 곤란할 거 아니예요. 지시는 이박사 쪽에서 몰래 받은 것인데. 하기는 김원봉은 좌우 합작에서는 백범 선생 계통이란 말이에요. 백범 선생이 좌우 합작을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사실은 아시다시피 지금 중국이 새빨개진 거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어요. 나도 이박사한테 들은 게 있으니까. ‘좌우 합작이 있다가는 도저히 우리나라 수립이 어려워서 본의는 아니지만 사실 죽일 수는 없고 죽이는 척만 한 겁니다. 용서하십시오. 본의는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서……’ 그랬더니 백범 선생은 ‘그러나 죽이면 안 되네. 우리가 어쨌든 독립이 됐으니까 될 수 있으면 화해를 하고 용서해 주고 서로 보호해야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돼’ 이렇게 톡톡 두들겨 주세요. 


그러면서 ‘김원봉 집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하고 물으세요. 또 곤란하다 말입니다.그래서 ‘사실상 김원봉이가 좌우 합작에 나온다니까 나오지 못하게 위협하기 위해서 그 정도로 했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백범 선생은 ‘자네가 그러는 바람에 김원봉이가 이북으로 갔단 말이야. 이북으로…… , 그저께 저녁에 이북으로 떠났어. 개성을 떠나 가지고 이북에 가서 방송에 나왔단 말이야. 그 사람(김원봉)이 사실상 중국에 있을 때부터 좌경이야. 우익은 아니지만 민족주의자이고 좌익인데…"

-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7&r_serial=03


...
─ 그 후에 백의사라는 것은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 백의사는 순전히 좌익 거물급만 죽이는 데 주력한 거죠.

─ 그런데 몇 사람이나?

▲ 내가 봤을 때 죽인 것은…… 1급, 2급, 3급……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잘 기억이 안 나요.
"-김두한의 증언 



"그뿐 아니라 김규식 박사 대신 대한임시정부 계통에서 김원봉이 나오려는 것을 내가 습격을 했잖아요. 신문에 굉장히 크게 났습니다. 김원봉은 의혈단 단장으로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의혈단 단장 김원봉 장군, 그때는 장군이거든요. 그는 대한임시정부의 군사부장으로 왔는데 그 유명한 김원봉 씨가 똥통 밑에 숨어 있다가 나왔다고 신문이 그때 굉장했어요. 그런데 김원봉 씨는 이북으로 튀어 버렸단 말이야. 여기 있으면 죽으니까. 장사 있나? 총질하면 가는 건데. 그러니까 이박사가 대단히 애썼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장택상 씨가 잠자코만 있었으면 꽝, 해 버리는 건데 자꾸 죽이지 말라고 해서 혼만 냈습니다’고 했어요.그런데 당시 서울에는 어떤 단체가 있었으냐 하면, 함경남북도하고 평안남북도하고 황해도 일부에서 공산당한테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고 학살당한 이북 5도 동포가 모여서 만든 ‘백의사’라는 단체가 있었어요"-백의사 대원 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7&r_serial=02





무산2.jpg원붕.jpg

결론 : 김원봉은 일제시대부터 조선공산당재건동맹 , 레닌학교를 세우고 레닌잡지를 발간하고 
지가 운영하던 무無정부빨갱이테러리스트의열단을 '무산자無産者전위동맹'으로 바꾼 
(무산자無産者는 프롤레타리아를 뜻한다.) 골수빨갱이였다. 
은행,주식회사를 테러해서 경비원 , 직원 , 사장 , 사용하는 민간인들을 총 폭탄으로 사살했다.
계급을 타파하고 평등계급의 세상을 열어 약탈착취경제제도(자본주의)를 파괴하려고했다.
김원봉은 레닌학교에서 조선인 청년들을 공산주의자들로 교육시켜 조선반도에 파견하여 수백 수천 빨갱이들을
양성하게하여 적화시키려고했으며 이를 실행에 옮겼다. 
김원봉은 의열단 9주년 창립기념연설에서 농민 노동자 무산無産 계급 투쟁혁명을 하자! , 
소련과 계속 동맹하자 !!!!! 라고 말했다. 
김원봉이 만든 빨갱이정당 민족혁명당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겠다고 강령 20개조를 발표했다. 

그러니까 국정화 교과서에 김원봉이 일제시대부터 
골수빨갱이란 사실이 반드시 넣어져야한다.  
영원한 민족의 아버지 백범 김구 선생님도 김원봉이 좌경,좌익이라고 말씀하셨다.

빨갱이심영을 고자로 만든 김두한은 빨갱이김원봉을 죽이려고 했다. 김원봉은 똥통 속에 잠수해서 겨우 살아남았다.
김원봉은 똥이 가득히 묻은 채로 38선을 향해 급히 도주해 북괴로 가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북괴 운영진으로 10년을 보내다가 김일성한테 ㅁㅈㅎ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