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outu.be/zWglWFIT-e8
북괴 최고인민회의 1차. 사진의 맨오른쪽에서 2번째가 김일성. 3번째가 박헌영. 4번째가 김책이다.
'박헌영'
조선공산당 최고 두목. 남로당 최고두목
북괴 부수상. 북괴 권력 제2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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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요약 :
요약 :요약 : 김원봉 = 북괴에서 10년간 운영진하며 국가검열성 총책임자 , 노동성 총책임자 , 북괴초대 내각 대의원 ,
북괴 대남對南 선동 기구 '조국통일전선'의 공동의장이 된 빨갱이
일제시대부터 골수빨갱이 (일제시대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레닌학교 세우고 지가 운영하는 의열단을
무산자無産者 전위동맹 즉 프롤레타리아 전위동맹으로 이름 바꿈. 소련과 동맹하고 농민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 혁명을 적극 추진한 놈. 빨갱이 군사단체 '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 만듬. )
김무정 = 김원봉의 친구빨갱이이며 김원봉 빨갱이조선의용대의 화북 멀티 관리자. 북괴 장교. 625 남침함.
김두봉 = 김원봉의 친구빨갱이. 김원봉 빨갱이조선의용대의 화북 멀티 관리자. 북괴 제1대 주석이 되어서 625 남침 적극 주장.
최창익 = 김원봉의 친구빨갱이. 김원봉 빨갱이조선의용대의 화북 멀티 관리자. 극極빨갱이. 북괴 초대 내각 대의원.
허정숙 = 김원봉의 친구빨갱이. 김원봉 빨갱이조선의용대의 화북 멀티 관리자. 북괴의 문화선전성 총책임자가 됨.
아버지가 '허헌'인데. 이놈 역시 빨갱이.
허헌 = 허정숙빨갱이의 아버지인데. 이놈도 빨갱이임.
백남운 = 김두봉의 친구빨갱이. 남조선에서 빨갱이 정당 신민당 운영하고 남로당도 운영하다가 북괴로 도주해
북괴 초대 내각 의원이 됨.
최용건 = 김원봉의 황포군관학교 동창 친구빨갱이. 황포군관학교는 빨갱이들이 교사들로 우글거리던 괴상한 학교.
김일성 친구
김책 = 김일성 친구빨갱이
김일성 = 소련군 장교. 북괴 수상. 북괴 최고권력자
박헌영 = 북괴 부수상. 조선공산당 두목.
홍명희 = 북괴 부수상. 빨갱이
김달현 = 빨갱이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출신 운영진 : 김일성 , 김책, 안길, 김일 등
부수상 라인 : 박헌영 홍명희
김원봉 친구 계열 운영진 : 김원봉 김두봉, 최창익, 김창만, 허정숙, 무정, 이춘암, 김여필, 박효삼, 윤공흠, 김민산, 박훈일, 박일우,김교영, 명희조, 한빈 등이다
국내공산주의 계열 운영진 : 주영하, 박정애, 장순명, 한설야, 최경덕, 강진건, 장시우, 임해, 오기섭, 이순근, 장종식 등이다.
소련계 한인 운영진 : 허가이, 박창식, 김영태, 김렬, 김재욱, 한일무, 태성수, 전성화 등
일제시대 김원봉과 친구들의 빨갱이 관계도圖
===============관련 증거 자료들================================================
창립 9주년을 기념하여
오늘 본단의 창립 9주년 기념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오늘을 최대의 정열과 무량한 감개를 가지고 기념하는 동시에 냉정한 심정으로 우리의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직시하여 장래를 계획한다.(중략)
우리들은 폭력적 혁명을 강조하고 민중적 운동을 제창하면서 1919년 11월 10일에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본단은 창립후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제1차로 郭敬, 李成字 등의 폭탄사건을 비롯하여 朴在爀의 釜山 폭탄사건, 金益相의 총독부 파괴사건, 吳成崙의 黃?灘, 田中 습격사건, 金始顯, 劉錫鉉, 黃珏 등의 폭탄사건, 金祉燮의 왜적 왕궁 폭탄사건,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拓 습격사건……등 무릇 16차에 걸친 대파괴 암살운동을 실행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스스로 비판하면 본단도 창립 당시에 조선혁명을 계획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많은 과오와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마는 여러가지 타락분자, 비겁분자, 공론분자, 폭력부인분자들 사이에서 혁명적 의열정신을 훌륭히 유지전개해 온 것은 조선 혁명사에서 광휘있는 사실에 틀림 없다. 우리들은 항상 실천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는 본단 자체의 실천과 조선 혁명운동 전체의 실천 내지 세계 혁명운동의 실천은 우리들의 견해를 한 계단 한 계단씩 진전시켜 왔던 것이다.(중략)
조선의 혁명과 세계의 혁명을 연결시킨 것, 조선혁명의 결정적 역량을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에게 추구한 것, 광범한 대중의 혁명적 요구를 반영한 구체적 강령을 게제한 것, 폭력혁명의 준비 및 조직을 고양한 것, 그리고 모든 혁명을 조직하여 전민족적 통일기관의 촉성을 주장한 것 등은 오늘에 있어서도 그 정당성이 더욱 더 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지금 조선혁명에 관련된 현재의 정세를 다시 한번 고찰할 때 그 중요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민중에 대한 극도의 압박착취 (자본주의 제도를 돌려서 비꼬는거)
2. 그것에 대한 조선 각계급 각층의 반항 내지 불평
3. 민족적 공동전선의 개시
4. 공산주의자의 지도 아래 급격히 전개되는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의 운동
5. 혁명전선에서의 우익세력의 대두
6. 제국주의 세계의 안정이 급격히 붕괴되고 그것에 따른 광적인 반동
7. 세계 무산無産계급(가난한 노동자 농민) 및 약소민족의 반제국주의적 전선과 세계혁명적 전선과의 동맹 확립과 세계혁명 파도의 상승
8. 소비에트연방이 모든 혁명의 우군으로 존재함에 대한 제국주의 열국의 연합적 반격
(두서 생략) 강도 일본에게서 조선의 절대 독립을 탈환하기 위하여는, 그 현재의 폭압에 항거하기 위하여는 다만 협동통일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주의에 따른 대립, 모든 붕당에 의한 분열이 극복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리고 조선 혁명운동은 더 나아가서 세계 혁명전선에까지 굳게 통일되지 않으면 안된다.제약소민족의 해방운동만이 우리들 동맹군의 목적은 아니다. 세계의 무산계급 혁명운동도 또한 우리들이 믿을만한 동맹군이므로 우리들은 그들과 동맹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비에트연방과의 동맹, 그것을 제국주의에 대하여 지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절대 필요하다.
우리들은 민족적 협동전선을 절규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이 절규하는 협동전선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고, 우경적인 것이 아니라 전투적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절대 다수도 노농(노동자 농민)대중이며 가장 혁명적인 계층도 그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전선의 기초를 그들에게 두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급속히 진전하는 조선 노농계급 운동을 더욱 발전시켜 그것을 독립운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협동전선의 최대 조건이 아니면 안된다. 동시에 현재 대두하고 있는 여러가지 우경 내지 타락 경향에 대해서는 협동전선에서 끊임없이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모든 전투회피자, 폭력부인자, 점진주의자 등을 의연히 혁명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과 싸우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 혁명운동의 전선통일을 절대로 주장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맹세한다.
본단은 9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위와 같은 견해와 주장을 고창하면서 다음과 같은 함성을 올린다.
강도 일본을 타도하자.
전투적 협동전선으로.
통일적 독립당을 완성하자.
자치주의자를 타도하자.
혁명의 기초를 노농대중에게.
세계혁명과 연결하자.
소비에트연방과 동맹하자.
1928년 11월 10일
- 빨갱이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빨갱이 김원봉의 연설문
일제시대 빨갱이김원봉 연설문 요약
1. 오로지 농민 노동자 대중 무산無産 계급 계층(프롤레타리아) 혁명 공산주의 투쟁운동 ㄱㄱㄱ
2. 소비에트 연방(소련)과의 동맹 ㄱㄱㄱ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http://db.history.go.kr/
김원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무산계급 혁명)을 위해 일제시대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 , 레닌학교 세우고 레닌학교에서 조선인 청년들을 빨갱이들로 교육시켜 조선반도에 적화 목적을 위해 침투시켰다. 그리고 레닌이란 잡지도 발간하였으며
무無정부빨갱이의열단테러리스트 이름을 무산자無産者전위동맹 즉 프롤레타리아 전위동맹으로 개칭하였다.
[ 김원봉은 1929년 가을 이래 북경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동맹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및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4216635&position=2
"한편 김원봉은 1929년 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119 일제 자료에 의하면 김원봉은 1929년 가을부터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朝鮮共產黨再建準備委員會 및 레닌주의정치학교政治學校 운영에 관여하고 있었다.註 120 안광천의 주도 하에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는註 121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소재지는 북경北京 북성내北城內 동서조호동東西條胡同이었다.
주요 구성원은 안광천安光泉·김원봉金元鳳·박건웅朴建雄·이영준李英俊·양백림楊伯林이었으며
중앙부 산하에 훈련부·통신부·조직부·선전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10월의 중앙부 조직은 위원장 안광천 이하 김원봉·박건응·朴文昊·이영준·李賢卿·朴次貞의 7인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중앙부 직속으로 레닌주의사·레닌주의 정치학교가 병설되어 있었고, 하부조직으로 국내·북경·만주의 3개 지부가 있었다. 국내지부는 간사국 산하에 다시 목포·부산·강릉·대구·경성·평양·신의주·원산에 지방조직이 설치되어 있었다.註 122
레닌주의정치학교註 123는 6개월 기한으로 ‘공산주의 이론’·‘조직 및 투쟁’·‘조선혁명사’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4월∼9월, 1930년 10월〜1931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2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註 124 졸업생들은 1930년 8월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지식인 그룹·도시노동자·농민·진보적 학생층을 상대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과 대중운동의 고양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사례가 1933년 10월 일제 정보망에 포착되어 13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로부터 2년이 경과한 1935년 8월 발표된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產黨再建同盟 사건’註 125과
‘공산청년동맹준비위원회共產靑年同盟準備委員會·강릉적색농민조합결성준비위원회江陵赤色農民組合結成準備委員會 등 조직사건’註 126이다.
또한 레닌주의사에서는 《월간 레닌주의》라는 선전지를 간행하였다. 1929년 5월 5일자로 간행된 제 1호에는
〈조선정세朝鮮情勢와 조선공산주의자朝鮮共產主義者의 당면임무〉라는 장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註 127 이와 함께 잡지 말미에 실려 있는 ‘레닌주의 총서’ 간행예고 선전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동맹의 지향은 보다 분명해진다.註 128 이상 1929년 가을부터 1931년 전반기에 걸쳐 김원봉이 관계하고 있었던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김원봉의 동향은 공산주의 활동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1928년 11월의 선언과 함께 이 시기 김원봉의 성향에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게 드러나고 있음은 사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4210874&position=0
: 안광천安光泉의 주요 행적을 살펴 보면, 그는 동경유학시 일월회一月會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여름 귀국 후에도 일월회一月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產黨에 입당하여 그해 12월 金錣洙의 후임으로 제 3차 조선공산당(1926. 9∼1928. 2) 제 2대 책임비서 (1926. 12∼1927. 9)가 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각도간부 확대, 조직거점 확보, 만주총국·상해부·일본부 부활 등을 시도하였고, 1928년 제 3차 조선공산당 붕괴 이후에는 제 4차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직을 맡았다. 1928년 3월에는 그가 기초하고 제 4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에 관한 론강論綱〉을 통해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淸算主義的 입장의 견지로 말미암아 1928년 5월 끝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명당하였다.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주제어 관내
출전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ch&setId=4216625&position=1
날짜 1929년 06월
김원봉·안광천, 북평北平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직하고 레닌주의정치학 교 설립.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 레닌주의 政治學校 명칭은 모스크바의 마르크스학원을 모방한 것이었다(스칼라피노·이정식, 앞의 책 p.238).
날짜 1929년 10월
權五勳, 김원봉의 레닌주의정치학교에 입학.
[출전] 조선중앙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9.
날짜 [AD] 1929년 12월31일
내용
김원봉(金元鳳)과 안광천(安光泉) 등은 1929년에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安光泉,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과 무산자전위동맹無産者前衛同盟(의열단義烈團 개칭) 조직.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무산자無産者 = 프롤레타리아
날짜 1930년 08월
안광천. 김원봉, 북경에서 무산자전위동맹 조직.
[출전] 조선혁명테제
날짜 1930년 09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제1기 졸업생 魚允鳳. 李鎭壹. 金武. 吳必得, 서울에 잠 입 (직접 노동자로 변신. 2개의 야체이카 조직).
[출전] 매일신보 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0년 10월
김원봉. 안광천의 무산자동맹 잡지 레닌, 정간당함.
[출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p. 202.(이상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자료)
날짜 1931년 02월
레닌주의정치학교 2기 졸업생 권오훈·이소전 등 11명, 국내 잠입.
[출전] 매일신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88.
날짜 1931년 07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졸업생 이철영, 김창린·이명욱 등과 함께 평양적색노平壤赤色勞 동조합動組合 조직.
[출전] 조선일보호외 1935. 8. 24.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 p. 494.
"이처럼 유쾌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원봉은 개인적인 아픔에 직면하게 된다. 지난 15년 간 혁명동지로서 함께 항일역정을 헤쳐왔던 아내 朴次貞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1929년 김원봉과 더불어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활동에 참여한註 331 이래 민족혁명당 부녀부장 등으로 활동해 온 그녀註 332의 죽음은 김원봉에게 또 다른 번민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1944년 4월 20일 개최된 제 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선임되었다註 333고 하지만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음모술수가 많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은 그의 행동 반경을 제약하는 것이었고 그의 인상을 ‘중산복 차림의 남성답게 잘 생긴 투사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찌푸린 표정에 말을 아끼는’ 폐쇄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게 하였다.註 334 1945년 초 중경에 도착한 일본군 학도병 출신의 회고록에서 조차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註 335 김원봉에 대한 질시는 1940년대에 들어와 시작된 사실이 아니었다.
....: 김원봉과 임시정부 내 보수적 인사들과의 타협되기 어려운 성향의 차이에 대해 국민정부의 김원봉 지원업무를 주관하였던 滕傑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김원봉金元鳳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자들은 공연히 허위虛位에 앉아 있고 실제활동이 없으므로 이끌어 갈 수 없다고 보는 반면, 임정 측 인사들은 김원봉 등을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있고
또 언행도 너무 偏激하다고 보아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滕傑 증언, 〈三民主義力行社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 p. 74).
김원봉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는 일제패망 직후인 1945년 9월에도 중경 소재 소련대사관과 중공당에서 운영하는 신화일보新華日報와 접촉하고 있었다( 《資料韓國獨立運動》1, p. 406).
김원봉 계열과 김구 계열의 불화 모습을 전하는 한 중국인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원봉 계열은 김구를 가리켜 “연로年老하고 력쇠力衰하며 군중으로부터 이탈되어 복국復國과 건국建國을 영도할 수 없다”고 하였고, 김구 계열에서는 김원봉을 “공산당 분자로 보고 중공과 소련의 이용을 받고 있으므로 중국정부는 그의 기만을 믿지 말라”고 비난하였다 한다(祝秀俠 증언, 〈中國國民黨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中國人士證言》p. 138).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kn&setId=4210874&positi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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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50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 1) 독립운동정당의 성립과 활동 > (2) 의열단
(2) 의열단
義烈團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1925년 상반기까지 파괴·암살 등의 의열투쟁에 힘을 쏟았다.註 481 의열단은 20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투쟁을 벌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년부터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인 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그해 겨울에 광주에서 의열단의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吳成倫·金山·류자명柳子明 등이 함께 참석한 이 회의에서 의열단은 장차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註 483 이 결정을 바탕으로 의열단은 1927년 초에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것은 광동에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상해와 武昌 및 南昌에 지방집행위원회를 두는 내용이었다.註 484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의열단은 다음해인 1927년 5월에<獨立黨促成運動에 대한 宣言>을 발표하였다.註 485 이것은 이미 1926년 10월에 결성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이어 1927년 4월에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조직된 직후였다. 이로써 의열단은 ‘민족협동전선운동’과 ‘혁명정당’ 결성이라는 두 가지 활동방향을 정립했다. 그들은 우선 주요 활동지역에서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교 무렵부터 김원봉과 김성숙 등이 활동하고 있던 광동에서 김성숙이 주도하여 1927년 5월 8일에 광동촉성회를 조직했다. 또한 당시 무한에도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전개한 ‘反革命淸黨運動’(상해쿠데타)을 피해 모여든 의열단원들이 많았는데, 박건웅을 중심으로 무한촉성회가 조직되었다.註 486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이는 결국 의열단이 1926년 겨울에 결의한 ‘혁명정당 전환’ 방침을 사실화하면서, 이와 함께 1927년에 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이 나온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의열단은<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라는 발표문을 통해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정당’을 제안하였다.註 490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그러다가 1930년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무렵,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1929년 봄 이래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註 492 그러다가 1931년 9월에 일제의 만주침공을 접하면서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남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의열단 활동은 김원봉이 남경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한 일과 한일래와 박건웅이 중심이 되어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한 일로 나타났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맺어진 인연을 최대한 살려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中韓合作에 관한 建議>,<韓國革命의 現狀과 本團의 策略>,<朝鮮義烈團의 政治決意案> 등을 제출하고, 그 결과 장개석의 결재를 얻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었다.註 493 이 학교의 설립목적은 청년간부들에게 항일투쟁정신을 계승시키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시켜 한국의 절대독립을 달성하고 중국의 목표인 만주국 탈환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기까지 3기에 걸쳐 모두 125명의 청년간부들을 배출했다.
의열단이 전개한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되다가 일단 실패한 민족협동전선체 구성에 관한 노력이었다. 1932년 10월 이래로 구체화된 이 활동은 의열단을 비롯하여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신한독립당 등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를 결성하고, 뒤이어 11월 10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註 494 이로써 1926년 이후 상해 등 중국본토지역에서 추진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한 단계 나아가 장차 ‘대동단결체’를 조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의열단의 위치에서 볼 때, 이러한 결실은 1926년 겨울에 광주에서 열린 의열단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와 1927년 5월에 발표한<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선언>등으로 시작하여 1935년 7월 5일에 성립되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연결되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은 당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문제와는 관계없이 다른 독립운동정당과 동일한 자격과 위치에서 제 역할을 발휘했다.
註 481
金榮範,≪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창작과비평사, 1997), 141쪽.
註 482
김희곤,≪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지식산업사, 1995), 250쪽.
註 483
水野直樹,<黃埔軍官學校と朝鮮の解放運動>(≪朝鮮民族運動史硏究≫6, 1989), 63쪽.
註 484
水野直樹, 위의 글, 59쪽에서 재인용.
註 485
朴泰遠,≪若山과 義烈團≫(백양당, 1947), 206쪽.
註 486
梶村樹秀,<1940年代 中國の抗日鬪爭>(≪三千里≫31, 1982), 102쪽.
註 487
韓相禱,≪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문학과지성사, 1994), 223쪽.
註 488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340∼341쪽.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註 490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102∼104쪽.
註 491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5), 704쪽.
註 492
坪江汕二,≪鮮民族運動秘史≫(東京:日刊勞動通信社, 1959), 65쪽.
註 493
군사간부학교 운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韓相禱, 앞의 책, 255∼296쪽.
金榮範, 앞의 책, 299∼316쪽.
註 494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473∼474쪽.
의열단의 대표인 김원봉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註 482...........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안광천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註 487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全國代表大會宣言>註 488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註 489 ..........
註 489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註 491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4210883&position=0#483_comment
이 선언은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살하는 경제제도의 소멸’을 원칙으로 하는 대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의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성 기업의 국가경영, 소득세의 누진율 적용, 노동운동의 자유보장,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직업교육·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였다.註 115
백의사 염동진 단장은 남조선을 적화시키려고하는 빨갱이김원봉의 국군준비대를 김두한을 보내 토벌시킴.
남조선을 적화시키려는 빨갱이김원봉의 조선민청 전위별동부대 역시 김두한을 보내 토벌시킴.
김원봉 역시 백의사 대원 김두한의 테러대상이었다. 김원봉은 똥통 밑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바로 북괴로 도주했다.
이 사건을 들은 김구는 김두한을 불러서 "김원봉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이미 좌익이다." 라고 하면서 등을 툭툭 하며 김두한을 칭찬했다.
============빨갱이킬러 김두한의 증언들============================================================
"그때 당시 백범 김구 선생 같은 분과 설렁탕 한 그릇 먹으면 우리 청년에게는 최대의 영광이거든요.다 잡수시더니 날더러 하는 말이 ‘자네, 내가 들으니까 한천동의 김 박사 댁을 어떻게 했다는 소리가 들리고, 또 김원봉 집을 어떻게 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건가?’ 웃으시면서 이렇게 점잖게 물으세요. 그러니 참 곤란할 거 아니예요. 지시는 이박사 쪽에서 몰래 받은 것인데. 하기는 김원봉은 좌우 합작에서는 백범 선생 계통이란 말이에요. 백범 선생이 좌우 합작을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사실은 아시다시피 지금 중국이 새빨개진 거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어요. 나도 이박사한테 들은 게 있으니까. ‘좌우 합작이 있다가는 도저히 우리나라 수립이 어려워서 본의는 아니지만 사실 죽일 수는 없고 죽이는 척만 한 겁니다. 용서하십시오. 본의는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서……’ 그랬더니 백범 선생은 ‘그러나 죽이면 안 되네. 우리가 어쨌든 독립이 됐으니까 될 수 있으면 화해를 하고 용서해 주고 서로 보호해야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돼’ 이렇게 톡톡 두들겨 주세요.
그러면서 ‘김원봉 집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하고 물으세요. 또 곤란하다 말입니다.그래서 ‘사실상 김원봉이가 좌우 합작에 나온다니까 나오지 못하게 위협하기 위해서 그 정도로 했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백범 선생은 ‘자네가 그러는 바람에 김원봉이가 이북으로 갔단 말이야. 이북으로…… , 그저께 저녁에 이북으로 떠났어. 개성을 떠나 가지고 이북에 가서 방송에 나왔단 말이야. 그 사람(김원봉)이 사실상 중국에 있을 때부터 좌경이야. 우익은 아니지만 민족주의자이고 좌익인데…"
-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7&r_serial=03
"그뿐 아니라 김규식 박사 대신 대한임시정부 계통에서 김원봉이 나오려는 것을 내가 습격을 했잖아요. 신문에 굉장히 크게 났습니다. 김원봉은 의혈단 단장으로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의혈단 단장 김원봉 장군, 그때는 장군이거든요. 그는 대한임시정부의 군사부장으로 왔는데 그 유명한 김원봉 씨가 똥통 밑에 숨어 있다가 나왔다고 신문이 그때 굉장했어요. 그런데 김원봉 씨는 이북으로 튀어 버렸단 말이야. 여기 있으면 죽으니까. 장사 있나? 총질하면 가는 건데. 그러니까 이박사가 대단히 애썼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장택상 씨가 잠자코만 있었으면 꽝, 해 버리는 건데 자꾸 죽이지 말라고 해서 혼만 냈습니다’고 했어요.그런데 당시 서울에는 어떤 단체가 있었으냐 하면, 함경남북도하고 평안남북도하고 황해도 일부에서 공산당한테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고 학살당한 이북 5도 동포가 모여서 만든 ‘백의사’라는 단체가 있었어요"-백의사 대원 김두한의 증언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7&r_serial=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