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 http://www.ilbe.com/6738513931 일베가는 바람에 수정을 못한다.
잘못된 정보를 올려서 미안하다.
정율성은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했지 중국국가를 작곡한 것은 아니다. (중국국가는 "의용군 행진곡"이다.)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은 1988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군가로 비준되었으며 민중들에게 중국국가 다음가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뉴스에서 7시 소식을 듣고 깜놀해서 바삐 올린거라 팩트체크가 부족했다. 민주화 달게 받겠다.
뉴스가 궁금한 게이는 아래 링크 따라 들어가서 들어봐라
제일 처음 나오는 소식이고 성격급한게이는 20초 부터 보면 된다.
[광주 KBS 뉴스광장 10월 12일자]
http://gwangju.kbs.co.kr/news/news/newsgr/index.html?localDomain=gwangju&seq=T&search_date=2015-10-12&page=1
어쟀든 결자해지라고 이번 기회에 정율성에 대해 정리해서 올려본다.
정율성(郑律成) (1914~1976)
본명은 정부은(郑富恩)으로 항일운동가, 공산주의자, 음악가이다.
조선이었지만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귀하하여 중공에서 살다 죽었다.
그는 1914년 7월 7일(음력) 조선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정 94번에서 10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동이 본관인 정해업이고 어머니는 최영온이다.
현재는 행정 구역 편재상 생가의 주소는 불로동 163번지인데 실제 정확한 고증이 되지 않아 생가를 두고 광주 남구와 하동정씨 종친회가 서로 다른 곳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 때문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두 곳 모두를 추모하는 어리둥절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광주 양림동에는 정율성거리 전시관(일종의 둘레길)이 꾸며져 있으며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정율성 거리에는 정율성의 대표곡인 연안송을 포함하여 여러 곡을 들어볼 수 있는 음향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악보 아래에 위치한 버튼을 누르면 실제로 곡을 들어 볼 수도 있다.
정율성의 아버지 정해업은 수피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정율성을 포함한 그의 자식들은 숭일학교와 수피아 학교를 졸업했다.
정율성의 외가쪽이 당시 엘리트였는데 작은 외삼촌 최영욱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여 미국 켄터키 주립대학 의학부를 나와 에모리 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다. 당시 광주 제중원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고 해방 무렵에는 황금동에서 서석병원을 운영하다가 미군정체제에서 도지사까지 역임한 유지였다.
정율성은 어릴 때 부터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큰 외삼촌 최흥중이 축음기를 사주고 서양 클래식을 들려주는 등 외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광주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후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 이 때문에 화순능주가 생가라는 설도 있다.
1928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신흥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1933년 19세가 되던 해 의열단원이었던 형의 권유로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한다.
1937년 연안의 노신 예술학교에서 작곡과 악기, 성악 등을 공부하게 된다.
1939년 정율성은 중국공산단에 가입하게 되고 이 해에 그 유명한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이되던 해 정율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복귀하게 되고 곧 김일성의 눈에 들게 된다.
정율성에게는 당쉐쑹이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아내를 포함하여 당적을 조선노동당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정율성은 조선노동당 황해도위 선전부장에 임명된다.
(당쉐숭은 저우언라이 총리의 양녀이자 비서였으며 후에 중국 최초의 여성대사로 네델란드와 폴란드에 근무한 바 있다. 당쉐쑹이 중국공산당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와 김일성이 이를 적극 활용하게 되고 큰 신임을 받게 된다.)
1946년 평양의 조선보안대(조선인민군의 전신) 구락부부장(중국의 문화부장)에 임명되고 단원을 편성하고 악곡을 창작 및 지휘하게 된다.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에 취임, 협주단을 꾸린 후 전국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펼쳤으며 김일성은 100명의 합주단원들과 같이 기념촬영을 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는 북한에 머물던 1950년까지 30여곡을 만들었는데 대표곡으로는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 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이 있다.
정율성은 미군기가 공습하는 상황에서도 총성과 포성을 들으며 작곡과 음악활동에 매진했다고 한다.
"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흩날리네(共和國旗幟迎風飄揚)", "조선인민유격대전가’(朝鮮人民遊擊隊戰歌)", "우리는 탱크부대(我們是坦克部隊)", "전사의 맹세(戰士的誓言)" 등 다수의 가곡도 남겼다.
정율성이 작곡한 "조선인민군행진곡"은 이후 북한의 군가가 되는데 세계음악역사상 두 국가의 군가를 작곡하게 되는 전무후무한 사례를 남기게 되었다.
이런 공로로 인해 그는 조선인민회의, 인민위원회, 문예학술총동맹 등으로 부터 4차례 상장과 상금을 받게 되었고 1948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모범 노동자"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 후 정율성은 평양국립대학 작곡부부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선포 1주일 뒤 중국과 북한은 외교관계를 선포하게 되었고 이에 정율성은 "조중우의(朝中友誼)"라는 곡을 만들어 기념했다. 이후 "중공찬양가(歌頌新中國)"를 만들게 된다.
이후 북한에서는 연안파였던 무정(武亭, 1905~1952년)장군의 실권을 시작으로 연안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정율성도 또한 예외는 아니었는데 정율성의 부인이 중국인이기 때문에 인민군의 일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그는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으로 좌천되었으며 정치 실무에서도 배제된다.
이때 정율성과 그의 부인은 중국으로 떠날 결심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주재 중공대사관이 설치된 이후 당쉐쑹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중국귀화를 요구하게 된고 저우언라이는 친필 서신을 김일성에게 전달한다.
1950년 10월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의 허락하에 정율성은 중공으로 떠나게 된다.
이후 정율성은 중국인민지원군에 소속되었고 2개월 뒤 1950년 12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창작조의 성원으로 류바이위(劉白羽) 등 작가 4명과 함께 북한을 찾게 된다. 당시 이들은 중국에서 온 손님으로 조선노동당 중앙의 열열한 환대를 받았다 한다.
1951년 1월 초, 중공지원군은 제3차 작전에 돌입하여 전선을 37도선 이남으로 후퇴시켰고 서울을 점령한 뒤 인천항까지 진군했다.
이때 정율성은 지원군을 따라 서울에 입성, 조선궁정음악 악보중 2부 18집의 고전악보를 찾아내었다.
이후 당쉐쑹은 1996년 방한하여 이 악보를 정부에 기증하였다.
이 시기에 정율성는 중공군의 인민지원군 신분으로
한강 남단의 백운산에서 류바이위와 함께 "백운산을 노래한다(唱歌白雲山)", 웨이웨이(魏巍)와는 당시 "사랑하는 군대, 사랑하는 사람(親愛的軍隊親愛的人)"을 지었다. 또 어우양산쭌(歐陽山尊)과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과 "지원군 십대 찬가(志願軍十贊)"를 썼고, 링쯔펑(凌子風)과는 빠른 선율의 "한강소창(漢江小唱)" 등을 작곡했다. 이 곡들은 현재 단둥(丹東)에 있는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記念館)에 전시되어 있다
1951년 4월 정율성은 중국으로 완전히 돌아오게 된다.
그는 이후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가무단, 중앙악단에 종사하면서 일생동안 모두 400(문화혁명전 360여편)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후 중공 국적을 취한 그는 평생 음악사업에 투신하게 된다.
그러나 1957년 마오쩌뚱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 운동 시 정율성과 당은 심각한 마찰을 빚게 된다.
아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율성은 대약진 운동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밝히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반우투쟁"중에 "우경"으로 몰려 비판의 중심이 되었다. 당은 그를 반당으로 몰아부쳤고 자진탈당을 요구했지만 정율성은 거부한다.
1959년 정율성은 "교훈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곤궁에 처했으며
1962년 당은 그에게 "평범한 반대의견을 냈을 뿐"으로 결론 짓고 공개사과를 하면서 우경문제는 일단락 되는 듯 했다.
그러나 1966년 8월 문화대혁명 시 홍위병들의 협박과 함께 친구들에게 받은 원고가 모두 수색당해 수많은 자료가 유실되고 만다.
그가 남기고 싶어했던 "정강산대합창(井冈山大合唱)"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으며 문화학대라고 탄식했다.
그는 주더(朱德) 총사령관과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겠다고 여러 차례 의견을 표시했고 후야오방(胡耀邦)집에도 자주 가서 불평을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무렵 낚시하는 취미가 생기게 되었다 한다.
정율성은 덩샤오핑을 비판하라는 4인방의 요구에 "반당 4인방"을 위해서는 한곡도 쓰지 않겠다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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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당 4인방이란 문화대혁명기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4명의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을 말한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쿠테타 혐의로 이들 사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1981년 재판결과 다음의 판결이 내려진다.
장칭 (江青):마오쩌뚱의 부인, 사형 구형
왕훙원 (王洪文):종신형 구형
장춘차오 (張春橋):사형 구형
야오원위안 (姚文元):20년형 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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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마오쩌둥의 시가 20수에 곡을 붙이는 것을 완성했지만 발표하지는 못했다.
1976년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후 저우언라이의 생애를 노래하는 추모곡을 준비하던 중
같은해 12월 7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6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시신은 북경 열사공묘에 안장되었다.
2009년 중공 건국 60주년 행사에서 중국 정부는 정율성을 "신중국건국에 공헌한 영웅 100인"에 선정했다.
정율성은 그의 정치행적에도 불구하도 최근들어 항일운동가로서 그리고 훌륭한 음악가로서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특히 정율성의 생가가 있는 광주를 중심으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2005년 광주에서 정율성 국제음악제가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2009년 광주광역시는 그의 생가 주변 233미터 거리를 전시관으로 만들어 그의 이력과 악보 동판, 대표곡들을 들을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2012년 KBS에서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하여 정율성을 주제로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당시 방통위의 여당추천 위원들이 "정율성은 6·25에 참전한 공산주의자로 KBS가 정율성 다큐멘터리를 3차례 내보낸 것은 부적절하다"며 제재 필요성을 주장했다.
광주 MBC에서 정율성 다큐가 방영되었다.
2013년 시진핑 주석이 방한 했을때 한중양국에서 활동한 역사적 인물로 김구와 더불어 정율성을 언급했다.
같은 해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기간에 천안문광장에서 시진핑 주석의 영접을 받을 때 울려 퍼졌던 곡이 정율성이 작곡한 "인민해방군가"이다.
2014년 8월 7일 7일 정율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중국 베이징 북경세기극원에서 열린‘2014 한․중문화교류의 밤’행사가 개최되었다.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지휘 김광복)이 초청되어 정율성 작곡 오페라 ‘마ㅇ부운’연주를 시작으로 관현악 ‘축연무’에 이어 정율성의 동요 ‘평화의 비둘기’, ‘우리는 행복해요’, ‘연안송’을 연주하였다.
[3줄요약]
정율성은 죽을때까지 공산주의자였고
북괴와 김일성에 충성하였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