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나 역시 내가 여기서 왜 매질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소.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를 집어먹기 위해 자기들끼리 벌인 전쟁이었소. 여기에 왜 조선인들이 끼어들어 러시아를 도와야 한단 말이오? 나는 칙명을 내린 황제의 뜻이 궁금해졌소.

초주검이 되어 뤼순 길바닥에 버려진 나를, 길을 가던 러시아정교 신부 한 분이 거두어주었소. 주교를 따라다니며 죽은 병사들에게 성사를 내려주는 일을 하던 신부였소. 랴오양의 성당에서 서서히 몸과 마음을 회복했소. 성당 일을 거들어주며 바깥소식을 들었소. 러일전쟁에 대해 일본군은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백인 국가를 물리쳤다며 자랑스러워하고, 러시아군은 비록 졌지만 명예로운 패배였다고 선전하는 꼴을 보려니 기가 찼소.”

손님은 주인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거의 마시지 않은 차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주인은 말을 이었다.

“랴오양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나는 조선 여론이 황제는 탓하지 않고 박제순과 이완용 등을 오적이라 하여 비난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소. 조선은 군주전제국 아니오? 왜 조선인들은 황제의 책임은 눈감아 주면서 다섯 대신만 욕하는 거요? 대한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 황제를 섬기라는 뜻이오? 대저 대의라는 게 다 그렇더이다. 나는 먼 데 있는 대의는 믿지 않기로 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