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대통령의 암살로 계기로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좌우합작진영간의 피흘리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이미 대다수가 북한공산당에게 포섭당한 직후인지라 어수선한 시국에서 당연히 암살계획은 세웠을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을 무장투쟁으로 한지라 사람죽이는건 어렵지 않았을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6.25남침을 일으키기전부터 말이다 이것이 김일성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빨치산100만이라는 주장을 믿고 오판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것이 지금의 민주화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즉 반미 친북노선을 이때부터 추구하였으며 이로인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으며 이승만대통령은
이족속들에 의해서 하야했야했다 이승만대통령이 충분히 제지할수도 있었으나 다수가 좌우합작을
주장하는마당에 12년동안의 대통령직을 수행함에 있어 지쳤기 때문이다 이기붕부통령은 나름애국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투표함바꿔치기라는 주장으로 아들에의해서 살해당하였다 이것이 후일에 대북정책으로 가시화하여
북한핵무기개발까지 이어졌으며 그로인하여 6.25때보다 더참혹한 현실을 앞두고 있는것이다
'이승만 암살' 위기일발 사진 뉴욕서 첫 공개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권총 암살을 당할 뻔 했던 순간을 포착한 희귀사진이 20일 뉴욕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뉴욕한국일보에 따르면 이 사진은 뉴저지에 거주하는 김태진 국제지도수집가협회(IMCoS) 한국 대표가 소장한 '대한민국 방첩대(CIC) 사진첩'에 수록된 것으로 1952년 6월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열린 '6·25 2주기 기념식' 연단에서 연설하는 이 대통령의 바로 뒤쪽에서 한 중년 남성이 권총으로 저격하려는 모습이 생생히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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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서 유시태라는 이 남성은 연단 뒤 귀빈석에서 뛰어나와 왼손에 쥔 권총을 하늘 쪽으로 들었다가 이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채 연설 원고를 읽고 있으며, 호위하는 헌병 역시 앞을 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헌병 바로 옆에는 사진기자로 보이는 남성이 이 대통령의 연설을 촬영하고 있어 역시 저격 시도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의 연설이 시작되자 귀빈석을 박차고 나온 유시태는 불과 3m 떨어진 거리에서 두 차례 격발했으나 불발, 현장에서 체포됐고 이 전 대통령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는 이 사건 외에도 1948년과 1954년 등 3차례 있었지만 법정 사진 외에 저격 순간의 장면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대통령 저격이라는 역사의 현장이 담긴데다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앞에서 포착한 대단히 희귀한 사료로 눈길을 끌고 있다.
사진 아래엔 영어로 "암살을 시도한 남성의 이름은 유시태로 이 전 대통령을 저격(Snipe)하려 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당시 김시현 민주국민당 의원이 이끌던 12인의 반정부 조직이 이번 사건을 주도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부산 충무로에서 벌어진 이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은 일제 하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출신인 유시태(당시 63세)가 김시현(당시 70세) 민주국민당 의원과 공모한 것이다. 유시태는 김 의원의 양복을 빌려 입고 의원 신분증을 보여주고 귀빈석에 착석할 수 있었다.
사진이 수록된 사진첩은 붉은색 노리개가 달렸고 표지엔 육군방첩대의 영문 로고(ROKA CIC)와 함께 달을 배경으로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이 음각 형태로 새겨지는 등 고급스럽게 제작됐다.
당시 김창룡 육군 방첩대장은 사진첩을 각각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공개된 것은 김태진씨가 런던의 한 고서화 전문점에서 구입했다.
사진첩엔 당시 인천 시장이 간첩으로 몰려 끌려가는 장면 등 여타 희귀 사진들과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1952년의 육군 방첩대 활동상을 다룬 것들이 수록됐다.
김씨는 "6·25 전쟁과 간첩 활동 등으로 혼란했던 격동기의 모습들이 사진들에 잘 나타나 있다"고 전했다. 김태진씨는 이 사진첩을 오는 6월 한국 코베이 경매에 출품할 예정이다.
한편, 유시태(1890∼1965)와 김시현(1883∼1966)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상하이 등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10여 년의 옥고를 치렀던 애국지사들이었다. 유시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진, 예산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921년 의열단에 가입해 투쟁자금 모집을 담당했다.
김시현은 1923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폭탄을 반입했다가 사전에 체포돼 12년형이 선고되는 등 일제에 의해 세 차례나 복역했다. 해방 후 민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김구 선생 암살 배후이자 독재를 휘두른 이승만에 대해 극단적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김시현은 재판에서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민생 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 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라고 질타했다.
그는 “(6·25)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 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라며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53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 1960년 4·19혁명 후 과도정부에서 시국사범 제1호로 석방되었다. 유시태는 "그때 권총이 발사됐더라면 수많은 학생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그것이 한이다"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
robin@newsis.com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합당하여 1949년 2월 18일에 발족하였다.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으로 재출범할 때까지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에 대한 견제, 대결 구실을 지속한 한국 정당사의 최초의 야당이다.
연원 및 변천
민주국민당은 한국민주당의 주도하에 탄생된 정당으로 한민당이 제헌의원 선거에서 예상 밖의 패배를 맛본 데다가 초대 내각의 구성 과정에서 소외당하자 이승만에 대한 한민당의 반감이 작용한 결과 결성된 정당이다.
또한, 한민당은 미군정에서 집권당과도 같은 위치에 있어 미군정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가 수립된 뒤 일반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종래의 당명을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민당의 위원장인 김성수(金性洙)가 1948년 말부터 대한국민당의 지청천(池靑天),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서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해온 신익희(申翼熙) 등과 의견의 일치를 봄으로써, 한국민주당에서 ‘민주’라는 글자를, 대한국민당에서 ‘국민’이라는 글자를 따서 민주국민당으로 1949년 2월 10일 새롭게 출발시켰다.
한민당은 내각 책임제 헌법 초안을 대통령 중심제로 고침으로써 이승만의 출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그것이 충족되지 않자, 즉각적으로 국회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반대세력의 규합으로 반발을 나타내었다. 이에 의하여 결성된 민국당이 제일 처음 착수하여야 하였던 과제는 헌법을 애초의 상태, 즉 내각책임제로 환원하는 문제였다.
민국당은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을 국가의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고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50년 1월 27일 민국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무소속 일부와 제휴하고 개헌을 추진, 같은 해 3월 14일 표결에 붙였으나 부결되어 기대한 바를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민국당의 헌법개정 노력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회 내외에서 정당결성을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여, 한국 정당 사상 최초의 여당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당(自由黨)이 결성되었다. 이로써 한국 정당사는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 제한하려는 민국당과 대통령의 권한을 유지, 강화하려는 자유당 사이에 정당 차원의 대립 투쟁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국당 초기에 나타난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헌법개정 노력은 정부의 권력남용 방지와 국민의 기본권보장이라는 민주적 차원으로 승화되었다.
민국당은 창당 때 4명의 최고위원(김성수·백남훈·신익희·지대순)을 선출하여 합의제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후일 보다 능률적인 당운영을 위하여 위원장제를 채택하여 위원장에 신익희, 부위원장에 김도연(金度演)·이영준(李榮俊), 고문에 백남훈(白南薰)·서상일(徐相日)·조병옥(趙炳玉)을 각각 선출하였다. 민국당이 한민당을 계승한 정당인만큼 당의 강령과 정책은 과거 한민당의 강령과 정책을 답습한 면도 있으나, 한민당 때보다 발전한 면을 엿보였다.
즉, 강령에서 밝힌 민족의 권리확보, 자유경제의 확립, 민족문화의 앙양으로 세계문화에의 공헌, 세계평화의 수립 등과 같이 구체성이 결여되었던 한민당 강령의 답습은 보수정당의 속성의 지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다 “특수계급의 독재를 부인하고 만민평등의 민주정치 실현을 기함.”, “경제적 기회균등을 원칙으로 자주경제의 수립을 기함.”이라는 구절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진일보한 것이라 하겠다.
당의 기구면에서 민국당은 대의원회·중앙집행위원회·중앙상무위원회·중앙감찰위원회·최고위원회를 두고 운영하였고, 당의 실질적인 영수인 김성수는 부통령 선거에 출마, 여당 세력을 대표하는 이갑성(李甲成)을 누르고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통령직 자체가 별로 실권이 없는 자리인 데다가 이승만과의 견해 차이로 1952년 5월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승만의 권력남용 방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과정에서 민국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저지하고자 다른 야당과 연합하여 호헌구국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원외투쟁을 전개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결국 저지하지는 못하였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정권유지에 위협을 느껴 민국당을 탄압하였으며, 그 결과 민국당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70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5명의 당선자밖에 내지 못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자유당은 원내 과반수를 훨씬 상회하는 의석 수인 114석을 획득하여 의정사상 처음으로 여당이 지배하는 국회를 성립시켰다. 이것을 바탕으로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규정을 삭제하여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고, 대통령 공석 때 부통령에로의 권력의 자동이양을 확보하기 위한 개헌안을 1954년 9월 8일 제출하였다. 이 개헌안은 9월 27일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로 통과되었으며, 이로써 이승만의 3기 집권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헌법개정안이 이처럼 변칙적으로 통과되자 민국당은 무소속과 대책을 협의하여 1954년 11월 30일 ‘호헌동지회’를 결성하고, 이를 모태로 하여 신당촉진위원회를 구성, 신당결성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신당운동은 정·부통령선거에 대한 이해관계로 인선에 난항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955년 9월 18일 결실을 맺어 민주당(民主黨)이 결성되었다. 이로써 민국당은 독재를 부인하고 민주정치를 실현한다는 당의 사명을 민주당에 이양하고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민주당이 지금의 새밑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주국민당 [民主國民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남훈
백남훈(白南薰, 1885년 11월 03일 ~ )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다.
학력[편집]
- 일본동경명치학원졸업
- 일본조도전대학정경과졸업
경력[편집]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유학자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김경중과 장흥 고씨는 인촌 위로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병사를 하였다.[3] 따라서 그가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들을 낳기를 갈망하여, 유교를 하는 집안임에도 어떤 중의 말을 따라 고창군 흥덕(興德)의 소요암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4] 생모 장흥고씨의 꿈에 개천에서 한뼘이나 되는 새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치마폭으로 잡아 가지고 언덕에 올라와보니 길이가 석자나 되어보이는 잉어였다고 한다.[4]
유년기에 큰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가계상 비변랑공파(備邊郞公派)에 속하는데[5] 비변랑공 김익서(金翼瑞)[6][7] 는 하서 김인후의 5대손이었다.[8]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역시 김인후의 후손으로 먼 일족이었다.
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9]
그의 가계는 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이주한 이래, 전라남도 장성군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 뒤 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정씨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10]
처가에 정착한 김요협은 김성수의 할아버지였다. 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선공감감역 등을 지냈으며, 처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력을 형성하였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인촌 김성수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라 한다.[10] 감역으로 시작하여 참봉, 봉사, 도사, 별제, 주부 등의 경관직을 지내고[10] 화순군수, 진안군수, 군위군수 등을 지냈으며,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1200석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협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 석을 물려주었으나 이재에 능한 김경중은 형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게 되었다 한다.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과 김경중 역시 관직에 진출하여 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
생애 초기[편집]
신익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익희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출생 1894년 6월 9일
조선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사망 1956년 5월 5일 (63세)
대한민국 충청남도~전라북도 (기차 안) 사인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 거주지
조선 경기도 광주,
대한제국 한성부→
일본 제국 도쿄 시→
일본 제국 한성부→
중화민국 상하이→난징→쓰촨 성 충칭→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종로6가 낙산장(駱山莊)국적 조선,
대한제국,
중화민국,
대한민국 별칭 자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해후(海候), 별칭은 왕방평(王邦平)·왕해공(王海公), 왕방우, 임방호(壬邦乎) 학력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직업 교육자, 군인, 정치가, 독립운동가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부인 해영 이승희, 해화 김순이, 중국 여성 사씨(정인) 자녀 아들 신하균, 딸 신정완, 딸 신씨(요절)[1] 부모 아버지 신단, 어머니 풍양조씨, 전주이씨, 어머니(생모) 정경랑 친척 큰아버지 신식(申植), 이복형 신보희(申輔熙)·신규희(申揆熙)·신필희(申弼熙)·신정희(申庭熙), 친형 이름 미상(출생직후 요절), 신재희(申宰熙), 조카 신정균, 조카 신해균, 종손 신창현, 사돈 이시영 웹사이트 해공신익희 기념사업회
신익희(申翼熙, 1894년 6월 9일 ~ 1956년 5월 5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중국의 군인으로도 있었다. 일본 유학 후 귀국,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정 초대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지냈고, 영어 학원의 강사와 아편 장수로도 활동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하고, 1945년 2월에는 임정 내무부 산하 경위대를 조직했다. 1945년 12월 귀국 후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였으며 독립촉성국민회, 반탁운동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북한에 백의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 2대, 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48년 7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직을 계승했다. 건국 초기에는 이승만을 지지하여 친이승만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활동했으나, 이승만의 전제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껴 탈당, 민국당 창당에 참여했다.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였으며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선거 유세중 열차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미군정기의 한국의 정치결사단체인 백의사와 정치공작대의 지휘자이기도 했다.
교육 계몽에 뜻을 두어 대학 설립운동을 추진했으며,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며, 초대 학장을 지냈다. 본관은 평산으로 자(字)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 해후(海候). 별칭으로는 중국에 체류 중 사용한 가명인 왕방평(王邦平)[2] 또는 왕해공(王海公)[3], 왕방우(王邦牛), 임방호(壬邦乎) 등이 있다. 경기도 광주시 출신.
| 신익희 | |
|---|---|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 |
| 출생 | 1894년 6월 9일 |
| 사망 | 1956년 5월 5일 (63세) |
| 사인 |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 |
| 거주지 | |
| 국적 | 조선, |
| 별칭 | 자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해후(海候), 별칭은 왕방평(王邦平)·왕해공(王海公), 왕방우, 임방호(壬邦乎) |
| 학력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
| 직업 | 교육자, 군인, 정치가, 독립운동가 |
| 종교 | 유교(성리학) |
| 배우자 | 부인 해영 이승희, 해화 김순이, 중국 여성 사씨(정인) |
| 자녀 | 아들 신하균, 딸 신정완, 딸 신씨(요절)[1] |
| 부모 | 아버지 신단, 어머니 풍양조씨, 전주이씨, 어머니(생모) 정경랑 |
| 친척 | 큰아버지 신식(申植), 이복형 신보희(申輔熙)·신규희(申揆熙)·신필희(申弼熙)·신정희(申庭熙), 친형 이름 미상(출생직후 요절), 신재희(申宰熙), 조카 신정균, 조카 신해균, 종손 신창현, 사돈 이시영 |
| 웹사이트 | 해공신익희 기념사업회 |
신익희(申翼熙, 1894년 6월 9일 ~ 1956년 5월 5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중국의 군인으로도 있었다. 일본 유학 후 귀국,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정 초대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지냈고, 영어 학원의 강사와 아편 장수로도 활동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하고, 1945년 2월에는 임정 내무부 산하 경위대를 조직했다. 1945년 12월 귀국 후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였으며 독립촉성국민회, 반탁운동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북한에 백의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 2대, 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48년 7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직을 계승했다. 건국 초기에는 이승만을 지지하여 친이승만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활동했으나, 이승만의 전제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껴 탈당, 민국당 창당에 참여했다.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였으며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선거 유세중 열차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미군정기의 한국의 정치결사단체인 백의사와 정치공작대의 지휘자이기도 했다.
교육 계몽에 뜻을 두어 대학 설립운동을 추진했으며,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며, 초대 학장을 지냈다. 본관은 평산으로 자(字)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 해후(海候). 별칭으로는 중국에 체류 중 사용한 가명인 왕방평(王邦平)[2] 또는 왕해공(王海公)[3], 왕방우(王邦牛), 임방호(壬邦乎) 등이 있다. 경기도 광주시 출신.
출생과 가계[편집]
해공 신익희는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 초월면 서하리 사마루(社村)의 소론계 명문가 출신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신익희의 출생연대는 불명확하여 1892년생 설과 1894년생 설이 통용되고 있다.
신익희는 문희공파로 자헌대부 장례원경을 지낸 신단(申檀)과 그의 넷째 부인 동래 정씨 정경랑(鄭敬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단은 판서와 장례원경을 지낸 인물로 고향에서는 신판서로 불렸다. 신익희의 선조는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의 후손으로, 인조반정의 공신 신경희의 동생 신경연(申景禋)의 9대손이었다. 또한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역시 신익희의 가문 사람으로, 그의 13대 방조인 신명화(申命和)의 딸이었다. 그의 집안은 9대 방조 신경진이 서인에 가담하면서 서인이었다가, 뒤에 노소 분당때는 소론에 가담하여 이후 소론계열이었으나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은 관계로 노론 벽파가 승리하고, 세도 시대가 되었으나 관직에 계속 있을 수 있었다.
아버지 신단은 첫 부인에게서 보희를 얻었으나 첫 부인은 일찍 사망하여 두 번 재혼하였다. 두 번째 부인 역시 요절하고, 세 번째 부인 전주이씨에게서 규희, 필희, 정희와 딸 1명을 두고, 정경랑에게서는 요절한 아들과 재희, 익희를 두었다.
어머니 동래 정씨 정경랑은 1867년 경남 김해에서 아전인 정태조의 딸로 태어나 경기도 양평에서 성장한 후, 경기도 광주의 신단에게 시집갔다. 신단은 아들로는 신보희(申輔熙)·신규희(申揆熙)·신필희(申弼熙)·신정희(申庭熙)·이름 미상·신재희(申宰熙)·신익희 등 7형제와 1녀를 두었고, 신익희는 이중 여섯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이었다.[4] 어머니 정경랑은 김해의 향리였던 정태조(鄭太朝)의 딸로, 아버지는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오빠 1인이 있었다. 그는 뒤에 한성으로 올라와 이집, 저집에 의탁하여 생계를 이어가다가 판서 신단의 집에 거처하게 되었고, 그의 넷째 부인이 되었다. 정경랑은 신단에게 시집와 첫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요절했고, 둘째 아들로 신재희를 두고, 이어 셋째 아들로 신익희를 두었다. 신재희는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었으나 뒤에 동생이 독립운동가라 하여 핍박을 받자 역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배다른 형 중 큰형 신보희는 큰아버지 신식의 양자로 출계하였으나, 결혼 직후 사망했다. 이로서 둘째 이복형인 신규희가 장남이 되었는데, 그는 어린 시절 신익희에게 한학과 천자문, 명심보감 등을 가르쳤다. 친형인 신재희의 부인은 경주 이씨로, 형수 경주 이씨는 이조판서 이유원의 딸이자 이회영, 이시영 7형제[5] 이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김도연 (1894년)
| 김도연 金度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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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94년 6월 16일 |
| 사망 | 1967년 7월 19일 |
| 사인 | 병사 |
| 거주지 | |
| 국적 | |
| 별칭 | 호는 상산(常山) |
| 학력 |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박사 |
| 직업 | 독립운동가, 교육인, 정치인 |
| 배우자 | 노광임 |
| 자녀 | 아들 김병대(金秉大), 김병국(金秉國) |
| 부모 | 아버지 김종원(金鍾遠), 어머니 초계 정씨(草溪鄭氏) |
| 웹사이트 | 상산 김도연 기념사업회 |
김도연(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9년 2·8 독립선언 당시 1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이다. 유학 후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한민당 창설에 참여하였고,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제1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 입법선거 때에는 서대문구에 한민당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경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이후 제헌(서대문, 한국민주당), 제3대(서대문갑, 민주국민당), 제4대(서대문갑, 민주당), 제5대(서대문갑, 민주당), 제6대(전국, 자유민주당), 제7대(전국, 신민당)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민주당 창설에 참여하여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제2공화국 당시 국무총리에 두 번 지명되었으나 인준부결되었고, 군사 정권에서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다. 제1공화국 당시 한민당 출신 유일한 초대 내각 입각자이기도 하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호는 상산(常山)이다.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이영준 (1896년)
이영준(李榮俊, 1896년 서울 ~ 1968년 8월 18일[1])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초대, 제3대, 제4대, 제5대,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약력[편집]
- 대구인남학교졸업
- 대구계성고등보통학교졸업
- 경기도소학교교원시험합격
- 경성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획득
-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교수
-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피부비뇨기과학연구
- 동아일보 고문
-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교장 및 사장
- 1948년 5월 10일 : 제헌 국회의원(동대문을)
- 제5대민의원부의장
- 민주당 중앙당 간사장
- 민중당 서울 제4지구당 위원장
- 국회부의장
-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서상일
서상일(徐相日, 1886년 7월 9일 - 1962년 4월 18일, 대구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정치가이다. 제1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호 동암(東菴). 대구시 출생.
생애[편집]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하고, 총무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48년 5월 초대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1]
54년 호헌동지회에도 참석하였으며 이때 박기출, 장택상 등과 함께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가를 적극 찬성하였으나 조병옥, 김준연, 장면, 박순천의 반대로 무산되자 호헌동지회를 탈퇴했다.
56년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다.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으나 서상일이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었다.[2]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 이 회의에 참석한 진보당추진위 대표들에게 협박·공갈·회유를 했고, 대회장에는 폭력단이 난입해 테러를 자행했다.[2]
56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 양보의 뜻을 밝히고 신익희에게 부통령 후보는 중요하지 않으니 양보해달라는 의사를 전했다.[3] 신익희는 고려해 보겠다고 했으나 민주당 측은 부통령 후보도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야당 단일화 협상은 5월로 이어졌는데 서상일은 후보 단일화 문제를 놓고 조봉암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좋은 결론을 심사숙고하려 했다. 조봉암, 서상일 등은 종반전에 들어갈 때 정부통령 후보를 양보하는 것에 합의했다. 정부통령 선거야 말로 조봉암이 진보당추진위의 정치이념과 정책을 선전할 절호의 기회였고, 초반전 사퇴는 이런 좋은 기회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3] 고 판단했다. 이후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 운동을 추진했으나 조봉암과 의견충돌로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62년에 사망했다.
조병옥
| 조병옥 | |
|---|---|
| 출생 | 1894년 5월 21일 |
| 사망 | 1960년 2월 15일 (67세) |
| 사인 | 병사[1] |
| 국적 | 조선, |
| 별칭 | 호 유석(維石) |
| 학력 | 와이오밍 대학교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박사[2] |
| 직업 | 독립운동가, 경찰관, 정치가 |
| 종교 | 개신교 |
| 배우자 | 노정면(盧禎冕) |
| 자녀 | 조윤형, 조순형 등 3남 2녀 |
| 부모 | 아버지 독립운동가 조인원(趙仁元), 어머니 남양홍씨 |
| 친척 | 동생 독립운동가 조병호(趙炳鎬) |
조병옥(趙炳玉, 1894년 5월 21일 충청남도 천안 ~ 1960년 2월 15일 미국)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이다. 일제 강점기 초반 도미유학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안창호에게 감화되어 그의 흥사단과 수양동지회, 국민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뒤 태평양 전쟁 무렵 수양동우회 사건 등으로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해방 정국에서는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 뒤 미군정의 경찰총수를 지냈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대표단, 내무부 장관 등을 거친 뒤 이승만과 결별했다.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에서 활동하였으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입당, 신익희·윤보선·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동하였다. 1950년 대한민국의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선거유세 중 병으로 미국 워싱턴 D. C.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급서하였다. 제1공화국 후반 여야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장택상, 이기붕 등과 수시로 만나 회담, 절충을 주도하였으며, 기자들이나 강경투쟁을 요청하는 야당인사들에게 하던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은 회자화되었다. 본관은 한양,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유석(維石)이다.
미국 국무성에서 이승만을 제거하려 하자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과 조병옥을 꼽았다.[67] 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욕을 더 먹더라도 자기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67]
권위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담배를 피운 유일한 장관은 조병옥뿐이었다. 이승만은 국무회의 주재 시 국무위원들의 흡연을 금지하였고, 회의 중 담배를 피우는 조병옥에게도 흡연하지 말라고 여러번 경고를 주었다. 그러나 조병옥은 태연히 회의장에서 담배를 피웠다.
한편 민주국민당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윤보선은 철저하게 야심을 감추었지만 조병옥은 윤보선이 크게 드러날 것이라면서 그의 속에 뭔가 있다고 하였다.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권력욕을 드러냈다
미국 뉴욕에서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광주노씨 노병선(盧炳善)의 딸 노정면과 결혼하였으며 노정면은 진명여고와 뉴욕의 드류 학원을 졸업했다. 5남매가 있으며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윤형과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지낸 조순형이 그의 아들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