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2008.03.11.644호. 진화는 미국영화의 전통이다 - 할리우드 영화에 대처하는 새로운 사유 훈련법 2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연속특집2 ◎ 지금 미국영화에 무슨 일이? - 전영객잔
진화는 미국영화의 전통이다
● 할리우드 영화에 대처하는 새로운 사유 훈련법 2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나는 코언 형제와 반대 방향으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었다. 나는 지금 보았다. 라고 쓰지 않고 읽었다. 라고 썼다. 코언 형제는 원작을 읽은 다음 각색을 하고 영화를 만들었고, 나는 그 영화를 본 다음 소설을 찾아서 읽었다.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언 형제가 잘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코언 형제의 컴필레이션 같은 세계. 무엇보다 추격전의 스피드. 길 잃은 고속도로 위의 유령 같은 드라이브. 간결한 총격전. 음산한 복도의 소실점. 세트장과도 같은 평면적 풍경들. 장르의 기호들 사이의 유머. 그 기호들의 틈 사이로 스며든 욕망의 거래. 그 거래에 이끌려 들어온 종이로 만든 것 같은(pulp) 인물들. 인상과 성질. 그 사이에 끼어드는 시청각적 기호들의 내기. 재빨리 뛰어든 다음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힘의 방향. 그러나 문득 그 안에서 내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예술의 기호들을 다를 때 잘 알고 있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변덕이 심하고 그 안에서 끈기 있게 지치지 않으면서 이미 만들어낸 공식을 바꾸고 그 안에서 새로운 방법론의 가능성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나는 코언 형제 영화들의 구도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영화 중에서 어느 것도 놓친 적이 없다. 장르는 그들의 경기장이고, 코언 형제는 그 안에서 각종 경기의 선수가 되었다. <블러드 심플>에서 <레이디 킬러>까지, 때로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밀로스 크로싱><파고>), 때로는 실패하였다(<참을 수 없는 사랑>), 가끔은 허장성세를 부리기도 하였고(<바톤 핑크><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가끔은 지나치게 멀리 나아갔다(<위대한 레보스키>), 혹은 정말 장르에만 몰두하기도 하였다(<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다른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지는 이야기, 동일한 상황, 인물들의 반복, 그런데 그 삼각형의 매듭을 다른 방식으로 묶어놓았다. 마치 짐 자무시가 <데드맨>에서 문득 서부극 안에서 명상의 시간으로 이끌듯이 코언 형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하드보일드에 대한 사색을 요구한다. 말 그대로 장르 안에서의 사유, 무언가 그 안에 드러낸 것만큼이나 무언가를 잘 숨겼으며(두개의 '무언가'를 놓고 거의 종잡을 수 없는 신의 진행), 갑자기 결정적인 순간에 빈칸을 제시하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무언가 불안정하고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서로 이질적인 신들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마무리 지어 졌다. 오늘날 현대영화의 숨바꼭질의 대가들. 코언 형제는 갑자기 이 명단에 합류하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변장을 한 '멀홀랜드 드라이브'이다. 내가 망연자실해진 것은 그걸 코언 형제가 장르 안에서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영화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장르 안에서 한쪽에서 규칙을 놓고 게일을 벌이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사색의 공간, 명상의 시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능력들의 관계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들은 우리에게 판단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상상력이 지성과 결합하고, 그 안에서 신의 구성에 대한 반성적 대응과 신의 진행에 대한 규정적 식별을 명령한다. 그냥 간단하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왜 이런 형식은 장르가 되었는가. 라고 묻는 대신 왜 이런 장르의 형식이 존재하는가. 라고 질문한다. 그래서 코언 형제는 여기서 장르의 경기를 하는 대신 장르를 견뎌야 하는 세상의 과정을 고통스럽게 물어본다. <파고>는 그것을 바라보는 기분이 음산하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것을 생각하는 과정이 음산하다. 기분과 과정, 물론 둘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질문하는 방법을 바꾸어야한다. 말하자면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물음.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 코언 형제는 현대영화라는 사건 속에서 새로운 함수를 만들어내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구성하는 세 개의 함수, 텍사스 지도위에 그려지는 인물들의 동선, 모스의 곡선, 안톤 쉬거의 직선, 보안관 벨의 접선, 그 사이에서 이루어진 이야기의 선형, 혹은 돈 가방의 선, 돈 가방이라는 기호, 그 사이를 채우는 장르의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힘의 방향. 그 선을 따라 새로운 구도를 그려내는 조형. 그러나 코언 형제는 이들의 함수를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그들 모두가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거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전체의 균형이 어느 순간 일종의 혼란처럼 장르의 약속, 경기의 규칙, 함수의 예상 가능한 답을 일시에 무효화시킨다. 도대체 무엇이 변수였을까? 그렇게 해서 코언 형제는 무엇을 얻은 것일까? 아니, 차라리 그것을 일시에 무너뜨린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돈 가방의 선? 안톤 쉬거의 동전? 모스의 물병? 보안관 벨의 보이스 오버? 말하자면 코언 형제는 장르 안에서 인물들 사이의 새로운 함수, 그것을 성립시키는 변수, 원인을 이끄는 신의 진행방식의 단절, 그 단절을 연결하는 새로운 조화를 끌어냈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미국영화가 자기를 만들어 낸(서로 다른 예술양식의) 장르 안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진화의 한 방법론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사려 깊으며, 독창적인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이미 앙드레 바쟁은 미국영화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들 스스로 영화의 시스템을 발명한 다음 그 안에서 진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화는 미국영화의 전통이다.
하드보일드에 대한 사색을 요구하는 코언 형제
진화에 관한 약간의 우회, 오마주의 실화, 그리고 독후감은 지금 미국영화의 세 가지 작가주의이다. 혹은 작가주의가 강박관념의 표현이라는 유머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이 세계의 경향은 절망의 히스테리이다. 자아에게는 너무나 괴로운 억압 혹은 실망의 방어. 미국영화 감독의 비극은 존 포드, 히치콕, 하워드혹스, 오슨웰스, 라울월시 혹은 할리우드 시대의 프리츠랑 '이후' 그들을 넘어서는 것이 어떻게 해서도 불가능하다는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운 자포자기에서 온 것이다. 그 무거운 짐을 떠넘기기 위한 알리바이로서의 삼각형. 1970년대 이후 모든 미국영화는 결국 오마주이다. 물론 그 명단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오즈, 장르누아르, 구로사와, 브레송, 펠리니, 안토니오니, 누벨바그, 쇼브러더스 기타 등등. 역설적으로 세계 영화사는 미국영화로 수렴되고 있다. 그 안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안으로, 영화 바깥으로 나온 다음 마주하는 것은 사건이라는 황량한 세상이다. 수많은 사건들, 영화 같은 사건들, 영화와 현실을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사건들, 이를테면 9.11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훔치거나, 넋을 잃거나, 매혹되어 그 안으로 들어가서 그 사건 안의 인물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미국영화가 얼마나 실화에 매혹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난 십년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의 명단을 그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다음 독후감의 영화들이 있다. 물론 베스트셀러들, 그런 다음 고전들, 그리고 각자의 서재, 베냐민의 인용의 인용, "모든 책은 제각기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이 세 가지 경향은 지난해 칸영화제에 동시에 초대되었다. 오마주, 쿠엔텐 타란티노는 1970년대 동시상영 극장영화 프로그램에서 '발굴'한 듯한 두 편의 중편을 만들었다. <그라인드 하우스>, 두 편의 실화, 데이비드 핀처는 연쇄살인범 '조디악'을 따라가면서 1970년대를 장르 안에 구기거나 오려 넣는다. <조디악>, 구스반산트는 공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놓고 성장소설처럼 다룬다. <파라노이드 파크>, 그리고 독후감, 코언형제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읽은 다음 영화로 찍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 세 개의 경향 중에서 가장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독후감의 영화(들)이다(그리고 오마주와 실화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독후감 영화'란 장르가 출현하고 있다?
나는 지금 미국영화의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독후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차라리 독후감 영화라는 하나의 장르가 출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단지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데 그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은 다음 그것을 영화로 옮기는 각색과정에서 갑자기 영화를 만드는 새로운 방법이 출몰하고 있다. 물론 할리우드는 오랫동안 소설을 빌려서 영화를 찍었다. 유럽영화들도 소설에 가끔 의지하였다. 하지만 점점 더 미국영화는 소설을 읽는데 몰두하고 있다. 아니, 이보다 더 열심히 소설을 읽는 영화들은 없다. <버라이어티>통계에 의하면 2004년 미국영화 중 27%가 원작을 각색한 영화였다(그리고 22%가 만화, 게임, 희곡, 텔레비전, 리메이크, 속편,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단편들이었다. 나는 좀더 최신 통계자료를 얻지 못했다). 지금 독후감 영화들이 이전과 다른 것은 소설을 버리고 이야기를 빌려오는 대신 이야기를 내버려둔 채 소설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문체, 그 안에서 활동하는 주인공의 공간, 그 활동이 통과하는 시간, 그 주변 인물들의 동선, 그들이 던지는 시선, 인물들 사이의 제스처, 이야기 안에서의 행동에 모든 노력을 집중한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로 옮겼느냐가 아니라 소설과 영화 사이의 경계를 어디서 그을 것인가에 있다. 이 유별한 독서는 미국영화가 소설을 게임이나 만화, 미드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기 때문에 생겨난 태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독후감 영화란 단지 소설과의 관계만을 자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각색은 다른 장르에 대한 태도 일 뿐만 아니라 전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국영화의 각색을 생각하는 것은 소설을 경유하여 이야기와 인물, 사건을 다루는 태도에 대한 비평적 판단일 뿐만 아니라 전략에 대한 분석이 되기도 할 것이다. 물론 많은 미국영화들은 각색으로 원작을 망쳐놓는다(라고 흔히 문학평론가들은 투덜거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평론가들은 원작을 읽지 않는다). 그러나 이 태도가 모두 단조롭거나 평면적인 것은 아니다. 혹은 그들의 전략이 언제나 둔하게 전투를 수행하지 않는다.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경계를 놓고 하나의 세계에서 두개의 규칙이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두개의 벡터, 두개의 계열, 그 안에서 활동하는 전략의 태도.
말하자면 내가 선택한 반대의 방향은 코언 형제의 작업을 역순으로 쫓아가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본 다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읽은 책은 코맥 매카시의 원본이 아니라 임재서가 옮긴 사피엔스 판본이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되도록 원문 그대로 옮겼으나 일부 문장이나 대사의 경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구두점을 추가하거나 변경했음을 밝힌 다"고 했다. 그 말을 고스란히 믿고 읽었다(내가 여기서 인용하는 매카시의 문장은 모두 임재서의 번역 판본이다). 나는 이전에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는데 책날개의 소개에 의하면 어니스트 허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허먼 멜빌에 비교되곤 하며,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에 의하면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 필립 로스와 함께 당대 최고의 미국 작가"라고 한다. 앞의 소개는 믿기 어렵지만, 해럴드 블룸의 평가는 내가 감히 나설 입장이 되지 못한다. 해럴드 불룸은 폴 드망을 대부로 하는 예일 '해체주의' 마피아 그룹의 저프리 하트만, J.힐리스 밀러와 함께 신비평에 가장 강력한 도전자 중 한명이었으며, <영향의 불안>과<오독(誤讀)의 지도>는 내가 비평을 쓰기 시작했을 때 교과서 중 하나였다(이 두권의 책을 추천 해준 사람은 전영객잔에 함께 글을 쓰는 김소영이다(. 물론 코언 형제가 해럴드 블룸의 추천을 받아서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인터뷰에 의하면 출판되기 전에 매키시가 프린트한 판본을 '직접'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코맥 매카시의 원작을 논하기 위해서 이 들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문학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능력을 훨씬 넘어선 일이다.
한 문장씩 읽어나가듯 산문적으로 숏 진행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산만하게 진행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시작하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러나 그게 보안관 벨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기까지 28분이나 기다려야 한다(영화 전체의 4분의 1). 텍사스의 여명이 밝아오는 장면이 끝난 다음 이야기의 첫 시작은 안톤 쉬거가 젊은 경관에게 붙잡혀 경찰서로 실려 오는 신이다. 이 경관은 전화 통화를 마친 다음 안톤 쉬거에게 목 졸려 죽는다. 그런 다름 신은 모스에게로 옮겨간다. 모스는 사냥 도중에 마약 밀매업자들의 시체와 버려진 돈 가방을 발견한 다음 그걸 들고 그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피를 흘리면서 거의 죽어가는 사내가 물을 달라고 했던 하소연이 생각나 한밤중에 일어나 생수 병을 들고 다시 현장에 간다. 여기서 운 없게도 여기에 막 도착한 다른 밀매업자의 트럭과 마주치고 가까스로 그들에게서 벗어난다. 안톤 쉬거가 이 근처 편의점에 도착해서 주인과 동전 내기를 한 다음 그를 살려주고 떠난다. 그는 한밤중에 현장에 도착해서 안내자들을 죽인다. 다음날 아침 보안관 벨은 그의 조수와 함께 '비로소'현장에 도착한다. 그런데 여기까지 본 다음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영화가 시작 할 때 보안관 벨이 말한 독백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아니, 그것도 거짓말이다. 물론 근사하게 주석을 단 다음 심오한 척하면서 '노인처럼' 탄식을 늘어놓고는 세상이 끔찍해졌다고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영화에서 신의 진행은 그런 설명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는 사람이 "모스의 돈 가방에 동일시하게" 될지언정 (김소영 "미국영화엔 피가 마르지 않아", <씨네21> 2- 642호) '노인' 보안관 벨에게 동일감을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만일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 영화의 줄거리를 전혀 쫓아갈 수 없는 자리에 간다. 그런데 단 한순간이라도 당신은 이야기의 동선 바깥으로 나간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28분 만에 보안관 벨이 등장했을 때 영화가 마침내 시작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장르의 기호들의 활동, 기호들의 교육에 따른 자동적인 반응. 지레짐작의 함정,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마치 중심이 없는 것처럼 계속 여기서 저기로, 다시 저기서 여기로 옮겨가면서 진행된다. 나는 그게 결국 하나의 자리로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그 틈은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게 보안관 벨과 살인자 안톤 쉬거, 그리고 돈 가방을 들고 도망가는 모스 세 명의 신 사이에 마치 서로 어떤 간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멀어져갔다. 그들은 각자의 신 안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간격을 유지 할 때에만 평화스러웠고, 그들의 신이 서로 겹쳐지기라도 하면 즉각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대신 차라리 서로의 신이 서로 겹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지경으로까지 끌고 갔다. 코언 형제는 이 세 명의 신을 단 한번도 겹쳐놓지 않았다. 심지어 모스와 안톤 쉬거 조차 영화 전체에서 마치 그 절반을 자르듯이 정확하게 중간에 4분30초 동안 대화하듯이 멕시코 국경 근처의 이글패스 작은 거리의 아즈텍극장 앞에서 한밤중에 총격전을 나눈 다음 두 번 다시 그들의 신은 겹쳐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다시 절반이 진행된 다음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에서 불현듯 영화가 끝났다. 두 번째 보았을 때 간격의 문제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순서를 뒤섞인 순서 사이의 그 간격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좀더 이상한 것은 이 영화는 코언 형제 영화 중에서 예외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시종일관 산문적으로 숏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장르의 기호들 때문에 처음 볼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다시 보면서 대부분의 숏을 가시적으로 진행하는 대신, 그래서 숏 안의 자율적인 리듬, 공간적 블록들, 그 안에서의 방향의 이동, 그 자체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카메라의 운동대신 하나의 숏이 하나의 문장에 대응하듯이 가독적으로 찍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메라는 대부분 거의 움직이지 않고 편집에 의존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인물이 움직일 때 그 동선을 따라서만 카메라는 이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조용한 리듬 안에서 놀랄 만큼 많은 숏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코언 형제는 편집이 자아낼 수 있는 놀라운 숏을 제공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반대로 찍혔다. 코언 형제는 영화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장면조차 거의 의도적으로 한 문장씩 읽어나가듯이 서술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놀라운 순간은 모두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코언 형제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영화에서 곤란함을 야기하는지를 드러낸다. 음악의 도움은 전혀 빌리지 않았으며, 할 수 있는 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사에 집중하도록 배려하였다. 행여 숏의 진행에 눈을 뺏길까봐 종종 중복 숏까지도 그 사이에 끼워 넣고 있었다. 심지어 대사를 따라 화면을 주고받으면서(숏-리버스숏) 진행하는 친절함까지 베풀고 있다. 만일 한 장소에서 장면을 여기서 저기로 건너뛰면 앰비언트로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마치 소음의 일관성이라고 부를 만큼 정교하게 이어 붙였다. 나는 이렇게 소설처럼 진행되는 코언 형제 영화를 달리 알지 못한다. 일단 장면이 시작되면 마치 문장을 쓰듯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게 너무 꼼꼼해서 무슨 필사본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 다음 문득 코언 형제가 이전에는 단 한번도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엘 형제의 열 두 번째 영화이다.
노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맨 처음으로 말하자면 이야기의 출발점, 처음에 누가 번역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상한 번역이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은 아일랜드 작가 윌리엄 버틀러 에이츠가 1926년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쓴 시 <비잔티움으로의 향해>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그 시 구절의 첫 문장은 "저것은 늙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로 시작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전혀 다른 뜻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프랑스 제목은 <아니요, 거기는 노인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Non, ce pays n`est pas pour le vieil homme)이다. 코언 형제는 원저의 제목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다. 그리고 매카시는 자기 소설의 제목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밝히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할 때 그러면 노인들은 어디로 가야하느냐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에이츠의 시는 간단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저것(That)과 이것(This) 사이에서 단지 장소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 시를 노래하는 이의 자리가 시 전체를 교한 시킨다. 그 사이에서 현재형과 미래형으로 이루어진 이 노래의 주인이 이미 바다를 건너(have sailed) 비잔티움에 왔노라(have come)라고 현재완료로 노래할 때, 이미 도착해버린 자가 가리키는 저것은 이미 떠나온 나라이다. 두개의 이미,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바다, 비잔티움이 예술의 이상향인지, 아니면 에이츠의 죽음을 눈앞에 둔 송가인지는 내 판단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바다가 사막이 되었을 때, 나는 코언 형제가 매혹된 것은 매카시의 소설이 아니라 텍사스 사막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지금 누가 미국의 풍경을 가장 잘 그려내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코언 형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은 텍사스에서 시작해서 (<블러드심플>), 콜로라도(<아리조나 유괴사건>), 국경 근처의 미네소타(<파고>), 로스앤젤레스(<바톤핑크><위대한 레보스키>), 미시시피(<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레이디 킬러>)를 떠돈 다음 다시 첫 번째 영화를 찍은 맨 처음의 자리 텍사스로 돌아왔다. 텍사스 사막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향해하는 노인 앞에 놓인 바다이다. 에이츠가 생명의 기원으로 바라본 바다로부터 죽음으로 가득 찬 텍사스 모래사막으로의 이전, 그 어떤 생명도 없고, 가루처럼 흩날리는 모래알의 풍경화, 푸른 하늘을 떠도는 스산한 바람, 그 위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하이웨이의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소실점, 그걸 한껏 벌려놓은 시네마스코프, 말하자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텍사스 사막을 가로지르는 항해'이다. 그 항해는 피와 죽음, 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때 향해하는 노인은 누구인가? 돈 가방을 들고 텍사스로 가로질러 멕시코 국경을 지난 다음 되돌아왔다가 시체로 발견되는 모스인가? 그를 따라 텍사스를 여행하는 안톤 쉬거 인가? 아니면 모스와 안톤 쉬거를 따라 그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중인 보안관 벨인가?
수수께끼, 코언 형제는 제목은 그대로 두었지만 이 시는 영화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영화서두에도 나오지 않고, 끝난 다음에도 자막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영화에서 누구도 예이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읽을 때 예이츠의 시는 수수께끼이자 안내자가 되지만, 코언 형제 영화를 볼 때 매카시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제목은 난처한 질문이 된다. 과연 몇 명이나 코언 형제의 영화를 본 다음 매카시의 소설을 읽지 않고도 예이츠의 시를 떠올렸을까? 그런데 많은 해설들은 예이츠의 시를 읽으면 매카시의 소설이 술술 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썼다. 정말 그 말을 믿어도 될까? 예이츠의 시 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인 텍스트를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교양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하고 매카시는 소설의 맨 앞부분에 둔 것일까? 반대로 코언 형제는 예이츠의 시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예이츠의 시를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주제를 선택한 것일까? 이상한 제목, 노인은 보안관 벨을 가리키는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늙은 아내인가? 보안관 벨이 찾아가는 아저씨인가? 그런데 그 아저씨는 누구인가? 혹은 보안관 벨 속의 돌아가신 아버지인가? 아니면 그들 모두인가?
각색 과정에서의 코언 형제의 선택
나는 소설을 영호로 옮겨오면서 바뀐 세부적인 묘사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코언 형제는 소설을 각색하면서 몇몇 대목에서 약간의 설정을 추가(하거나 삭제)하였다. 이를테면 모스가 마약 밀거래 현장에 생수 병을 들고 다시 찾아갔다가 그 자리에 나타난 또 다른 무리의 트럭과 마주해서 도망칠 때 두 가시를 바꾸었다. 소설은 모스가 한밤중인 1시6분에 일어난 다음 30분 뒤에 도착했고, 그런 다음 그가 쫓기면서 "강가 평지로 내려왔을 때 동쪽 하늘은 희미한 빛의 물결이 비춰왔다. 이날 밤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 시간대를 막 동녘이 밝아오는 매직 아워 시간대로 옮겨놓았다. 매카시는 총격을 피해 강물에 뛰어든 다음 모스가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1장을 끝낸다. 그러나 코언 형제는 약간의 유머를 더해서 강물에 뛰어든 모스를 사나운 개가 끝까지 추적해오는 장면을 심술궂게 추가했다. 아마도 코언 형제의 익살을 다룰 다른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건 여기서 내 목표가 아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해석해야 할 숏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이 거의 끝날 때 난데없이 출몰한다. 이 추적의 신 거의 마지막에 이 신의 진행과 관계없이 들어온 단 하나의 숏, 갑자기 신 전체의 리듬을 이중으로 만들어놓는 신기한 원근법, 모스는 마약 밀매업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해가 중천에 뜬 다음 계속에 걸터앉아서 상처에 박힌 가시를 뽑아낸다(두개의 숏의 순서),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자동차 한대가 지나간다. 모스는 개의치 않고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맨다. 다음 숏은 한적한 길가 편의점에 안톤 쉬거가 물건을 사러 들어온 다음 가게 주인의 말실수에 무시무시한 동전내기를 하는 신의 첫 시작이다. 그러므로 인서트처럼 자리한 롱숏의 자동차 한대는 안톤 쉬거가 타고 온 차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인서트는 숏의 낭비이다. 좀더 교과서처럼 말하면 모스를 보여준 다음 - 멀리 자동차가 보이고('브리지'숏)- 편의점 가게를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인 활용이다. 그러나 코언 형제는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톤 쉬거는 계속 자동차를 바꿔 타고 이곳에 오고 있기 때문에 이 롱숏만 보고 그것이 안톤 쉬거의 자동차라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무 멀어서 자동차 모습을 잘 알 수도 없다. 다음 숏은 편의점의 마스터 숏이고 자동차가 도착하는 장면이 아니라 그 앞에 자동차자 서 있는 장면을 찍었기 때문에 먼저 보는 것은 장소의 전환이다. 그런 다음 안톤 쉬거가 편의점 안에서 물건을 계산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신의 끝은 안톤 쉬거가 화면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가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편의점 주인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 차가 안톤 쉬거가 타고 온 차라는 어떤 확인의 숏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언 형제는 모스가 자동차를 보는 장면을 '브리지'가 아니라 '인서트'로 배열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신과 숏의 집합은 이런 방식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신의 숏 일부가 저 신의 일부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서고 하나의 통일된 유지적 관계를 의도적으로 맺지 않는 방식으로 숏의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신 안에서 종종 숏들은 마치 다른 신 안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빠져나오거나 건너간다. 그래서 신 안에서 서로 다른 함수관계의 방향을 따라 이어지는 다른 신의 숏이 각자의 곡선을 그으면서 자기의 동선을 따라 움직일 때 두개의 신은 접히는 대신 각자의 신 안에 서로 다른 자리에 놓인 숏들이 불길하게 공명하기 시작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각색에 대해서 항상 인용되는 조엘 코언의 유머. "에단이 키보드를 두들기는 동안 나는 그저 책을 들고 서 있기만 했지요."하지만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소문과 달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각색하기에 매우 까다로운 구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냥 줄거리를 요약해서 장면을 발췌하듯이 찍기에는 친절하게 쓰여 졌다. 아마도 <말타의 매>이후 하드보일드 소설을 영화가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몇몇 대목은 마치 시나리오 트리트먼트처럼 진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영화로 옮길 때 전체에 드리워진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이 이야기를 방해한다. 이 소설은 13개의 장으로 나뉘어져있다. 매번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장이 시작되면 맨 앞부분에 보안관 벨의 긴 독백이 있다. 그걸 다 읽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사건이 진행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보안관 벨의 독백을 방해하는 것은 안톤 쉬거와 모스 사이의 추격전이고, 그들을 쫓느라 자꾸만 보안관 벨의 독백이 끊긴다. 보안관 벨은 차기 보안관 선거에 나갈 생각이 없으며, 이제는 이 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돈 가방을 들로 도망치는 모스는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안톤 쉬거는 거의 돈 가방에 자석처럼 끌리면서 그걸 의뢰인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쫓아간다. 매우 건조하게 쓰여 진 이 소설은 지금 벌어지는 사건을 기록하듯이 진행한다. 독백은 사건을 중단하듯이 중얼거린다. 문제는 이 독백이 지금 진행되는 돈 가방의 추적으로부터 너무 느슨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독백이 없었다면 매카시의 소설은 유령처럼 따라오는 연쇄 살인범과 그에게 쫓기는 한 남자. 그리고 사건을 추적하는 보안관 벨의 단조로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코언 형제는 약간 재치를 부렸다. 영화 처음 시작에 보안관 벨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사용한 다음 나머지 독백들은 영화사방에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 옮겼다. 물론 대폭 축소되거나 삭제되었다. 그런 다음 전체적인 수선의 배열을 바꿔나갔다. 맨 처음 보안관 벨의 독백만 소설과 영화가 서로 완전히 겹친 다음 그들은 점점 그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하나의 길이 두개의 길로 갈린 다음 점점 멀어지듯이, 아니 차라리 하나의 집에 두개의 층이 있는 것처럼.
각색의 변곡선1. 모스와 안톤 쉬거의 이글호텔 총격전
소설과 영화에서 가장 다른 대목은 세 군데이다. 그 세 군데의 대복을 생각한 다음 이야기 안에서 소설로부터 코언 형제의 각색이 만들어내는 변곡선을 따라 가볼 생각이다.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이야기의 곡선이라고 생각한다. 그 첫 번째 곡선. 모스가 새벽 1시45분경에 멕시코 국경주변 이글패스의 이글호텔에 들어온 다음 안톤쉬거와 마주치는 대목이다.(<씨네21> 제642호, "간결하고 대담한 묘사 그대로"). 안톤 쉬거는 4시 37분에 이글호텔을 찾아왔고, 모스는 그걸 알아차리고 방 안에서 기다린다(120쪽_137쪽). "그때, 값비싼 타조가죽 부츠가 문간에 나타났다. 빳빳하게 다림질한 청바지가 보였다.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영화에서 안톤 쉬거는 문 바깥에서 산소호흡기로 문 열쇠구멍을 날려버리고 모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총을 쏜다. 그런 다음 모스는 재빨리 창문으로 도망친다. 첫 번째 의문, 왜 코언 형제는 모스와 안톤 쉬거가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차를 들이받고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마치 세트장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것처럼 단 한명도 보이지 않는 거리. 호텔 바깥으로 빠져나온 모스는 우연히 길에 들어선 차 한대에 올라타지만 그 즉시 운전하던 사내는 쉬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오로지 두 사람 사이의 총격전. 코언 형제는 이걸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안에 들어가서 찍은 것처럼 연출했다. 한밤중에 벌어지는 이 총격전을 모스와 안톤 쉬거를 거리에서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난데없는 일이 벌어진다. 모스가 트럭 뒤에 숨어 있다가 안톤 쉬거를 쏜 다음 다가갔을 때 마치 유령처럼 그는 사라져 버린다. 잘 기억해 둘 것, 틀림없이 총에 맞았고, 그런 다음 안톤 쉬거는 자동차 뒤에 숨었다. 모스는 총을 들고 자동차에 다가간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고 밤이긴 하지만 도망친다면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피를 흘린 흔적은 있지만 그러나 안톤 쉬거는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을 매우 신기하게 처리되어있다. 모스는 자동차 뒤에서 안톤 쉬거를 찾아내지 못한다. 라는 표현보다는 핏자국을 쫓아가던 모스 앞에서 안톤 쉬거는 골목 저편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도대체 어떻게? 모스는 이 사라짐 앞에서 망연자실해 한다. 그런 다음 모스는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그러나 매카시의 소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모스는 안톤 쉬거를 방에 세워놓은 다음 재빨리 호텔 바깥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쉬거의 총을 맞았고, 그런 다음 모스는 아즈텍 극장 앞거리로 도망친다. 그때 그 앞에 차가 나타나 모스를 향해 총을 쏘고 그들과 총격전이 벌어진다. "차에서 내린 두 남자가 차도를 건너오고 있었다. 한명이 소구경 기관총을 쏘았고, 모그는 그들을 향해 산탄총을 두 번 발사하고는 성큼 뛰어갔다." 그러나 모스는 이들과 더 이상 총격전을 하지 않는다. "모스가 그란데 거리에 닿았을 때는 그의 등 뒤에서 총격전의 아수라장이 벌어 졌"기 때문이다. 쉬거는 모스 대신 이들을 모두 처치하고, 그 사이에 모스는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그러나 매카시의 소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모스는 안톤 쉬거를 방에 세워놓은 다음 재빨리 호텔 바깥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쉬거의 총을 맞았고, 그런 다음 모스는 아즈텍 극장 앞거리로 도망친다. 그때 그 앞에 차가 나타나 모스를 향해 총을 쏘고 그들과 총격전이 벌어진다. "차에서 내린 두 남자가 차도를 건너오고 있었다. 한명이 소구경 기관총을 쏘았고, 모스는 그들을 향해 산탄총을 두 번 발사하고는 성큼 뛰어갔다." 그러나 모스는 이들과 더 이상 총격전을 하지 않는다. "모스가 그란데 거리에 닿았을 때는 그의 등 뒤에서 총격전의 아수라장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쉬거는 모스대신 이들을 모두 처치하고, 그사이에 모스는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매카시는 이걸 두개의 시점으로 완전히 나누었다. 사건은 하나인데, 앞의 절반은 모스를 따라 총격전을 벌이고 그런 다음 그를 따라 다음날 아침 멕시코 국경을 넘어서 피에드라스 네그라스 공원에 갈 때까지 따라간다(소설에서는 늙은 청소부를 만나고, 영화에서는 노래하는 4인조 밴드를 만난다. 하지만 "피에 젖은 지폐 뭉치를 꺼내 거기서 100달러를 건네"주면서 병원에 데려가 달라는 건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모스가 자리를 떠난 다음 안톤 쉬거가 마주친 "거리의 사내들은 체인코트를 입고 테니스 화를 신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만나기 어려운 부류로 보였다. 쉬거는 뒷걸음질로 절뚝거리며 계단을 올라 현관으로 물러섰고 권총을 난간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다음 쉬거는 두 사내를 모두 죽인다.
둘 사이의 공통점. 모스와 안톤 쉬거가 마주친다. 그런 다음 재빨리 그들을 다시 떼어낸다. 다른 점. 소설을 본 것처럼 말하자면 모스와 안톤 쉬거는 서로 마주 보았고, 반대로 영화를 읽은 것처럼 말하자면 모스와 안톤 쉬거는 서로를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좀더 까다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나는 모스의 모텔 방에서 안톤 쉬거가 문을 열었는가(소설), 열지 않았는가(영화)라는 질문보다 그 둘이 아즈텍 극장 앞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대목이 훨씬 이상하다. 매카시는 이 대목을 관점주의라고 할 만한 방법으로 잘라냈다. 하나의 사건인데 의도적으로 모스의 자리에서 사건을 한번 기술한다. 그런 다음 바로 안톤 쉬거에로 연결하지 않고 모스를 멕시코까지 데려다 놓은 다음 다시 되돌아와서 안톤 쉬거의 자리에서 같은 사건을 반복한다. 그런 다음 4장을 끝낸다. 왜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마치 다른 두개의 사건처럼 다투려는 것일까? 코언 형제는 여기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만 가져온다. 그런 다음 아즈텍 극장 앞에서 모스와 안톤 쉬거의 총격전으로 진행한다. 이때 코언 형제는 모텔 바깥에 나가서 총격전을 진행하는데도 그 둘을 마주치게 만들지 않는다. 정말 신기하게도 두 사람의 투 숏이 단 하나도 없다(구태여 말해야 한다면 모스가 총을 쏠 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총구와 차 뒤로 숨기 위해 몸을 날리는 안톤 쉬거를 보여주는 1초미만의 단 한 개의 숏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을 한 프레임에 잡은 적이 없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은 총알의 동선이고, 그런 다음 서로의 핏자국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모스가 안톤 쉬거를 볼 때(시점 숏) 정면으로 보지 않고 자동차 보닛의 곡선에 비쳐서 굴곡지어진 왜곡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왜 모스와 안톤 쉬거를 한 프레임에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만일 이 진행이 앞에서 지적한 이 신 안에서 활동하는 저 신의 숏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의심스러운 편집의 조형. 말하자면 이것이 코언 형제가 매카시의 소설을 읽는 독후감의 방식이 아닐까?
각색의 변곡선2_ 모스가 죽은 장면
의심을 좀더 부추기는 두 번째 곡선. 소설을 읽은 다음 아, 영화를 본 내가 완전히 오해했구나, 라는 걸 깨달은 대목은 모스가 죽은 장면이다. 영화는 간단하게 처리했다. 모스는 데저트 샌즈 모텔에서 아내를 기다린다. 주변을 산책하는데 풀장 앞에 앉아있던 노란 티셔츠에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말을 건다. "내 방에 맥주가 있는데." 그러자 모스가 대답한다. "아내가 오기로 해서요." 몇 마디가 더 오간다. 그런 다음 짧은 페이드아웃이 있다. 보안관 벨이 도착하고 모스가 죽은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피투성이의 사내가 대낮 거리에서 기어가고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밤이 되자 모텔에 모스의 아내가 택시를 타고 도착한다. 현장에 있던 보안관 벨이 미안하다는 듯이 모자를 벗는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직감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다음 장면은 시체 부검 실에서 시체를 내려다보는 보안관 벨이다. 아무 의심 없이 보았다. 안톤 쉬거는 찾아와서 모스와 수영복 여자를 죽였고, 그런 다음 돈가방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소설은 이 대목이 완전히 다르다. 소설의 8자인데, 코언 형제는 사실상 이 대목을 모두 버렸다. 첫 시작은 물론 보안관 벨의 독백이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조금 앞으로 갈 필요가 있다. 모스의 아내기 어머니와 함께 집을 떠난 다음 그 집에 안톤 쉬거가 찾아온다(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에 모스의 아내 칼라 진을 죽이기 위해서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 어머니의 집에서 청구서와 우편물, 통화내역을 뒤진다. 그 시간에 모스는 모텔을 떠돌다가 78년형 포드 픽업트럭을 산 다음 그곳을 떠난다. 그런데 근처 진입로에서 열여덟 살 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히치 하이커 소녀를 태운다(그러나 사실은 열 네 살이다). 그리고 아내와 만나기로 한 엘패소로 향한다. 매카시는 모스와 소녀 사이의 이야기로 한 장 전체를 할애한다. 함께 치즈버거와 으깬 감자와 육즙 소스를 곁들인 쇠고기 샌드위치를 먹고, 그런 다음 모스는 소녀에게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이냐고 물은 다음 이유 없이 100달러 지폐 열장을 준다. 그런 다음 더 여행을 함께하고, 스테이크를 먹고, 함께 모텔에 머물지만 각자 따로 방을 잡는다. 그리고 충고한다. "네가 더 조심을 하기 바랄 뿐이지, 엘패소에 도착하면 너를 버스정류장에 내려줄 거다. 이제 넌 돈도 있으니 차를 얻어 탈 필요가 없어." 모스는 소녀에게 함께 마지막 맥주를 자기 방에서 마시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소녀가 질문한다. "근데 아직 마음을 안 바꾸셨어요?" 모스가 대답한다. "바꾸지 않아, 일단 옳은 일을 해야지." 소녀가 말한다. "어떤 영화에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세상에는 훌륭한 세일즈맨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벌써 물건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모스가 말한다. "그래, 너는 좀 늦었어. 나는 이미 샀거든, 그리고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해." (모스는) 통로를 걸어가서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모스가 나오는 대목의 끝이다. 그런 다음 보안관 벨은 연락을 받고 벨흔의 모텔에 도착한다. 현장 검증을 한 부관 말에 따르면 "멕시코인이 먼저 쐈다는군, 그자가 여자를 방에서 억지로 끌어낼 때 다른 남자가 총을 들고 나왔지만, 이미 멕시코 인이 총을 여자 머리에 겨누고 있어서 그 남자가 자기 총을 내려놓았다는 거야. 그러자마자 멕시코 인이 여자를 떠밀고는 총을 쏘고 몸을 돌려 남자를 쏘았지. 남자는 바로 저기 117호실 앞에 서 있었어. 빌어먹을 기관총으로 쏘아댔다는군. 이 친구에 따르면 그는 계단에 쓰러지고는 다시 자기 총을 집어 멕시코인을 쏘았대. 어떻게 그랬는지 나는 모르겠어. 그는 엉망으로 총에 맞았거든. 저기 길에 핏자국보이지. 우리는 정말 빨리 도착했어. 약 7분 정도. 여자애는 즉사했지."(260쪽)
세 가지 환기, 하나. 모스를 죽인 건 안톤 쉬거가 아니다. 매카시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코언 형제는 이걸 모호하게 그냥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보안관 벨이 사건 현장 모텔을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을 때 거기 안톤 쉬거의 숏이 있기 때문에 그게 안톤 쉬거라고 생각한다(나는 안톤 쉬거가 있었다. 라고 썼다). 설정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결국 모스가 죽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결론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언 형제는 단지 경제성의 이유로 바꾼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나는 보안관 벨이 사건 현장에 되돌아왔을 때 다시 다룰 것이다. 둘. 모스는 영화 중간에 (마치 소설속의 소녀처럼) 히치하이킹을 한다. 모스가 델리오의 모텔에 머물면서 환풍기에 돈 가방을 숨겼다가 다른 방에서 (안톤 쉬거의 총격전 소리가 들리자) 모텔을 도망치듯이 떠날 때의 대목이다(그런 다음 멕시코 국경 근처의 이글패스로 간다). 그때 모스가 올라 탄 차를 운전하던 '노인' 흑인 운전사는 모스에게 충고하듯이 말한다. "무모한 짓일세, 아무리 젊어도 그렇지, 히치하이킹 하는 거, 위험해." 그런데 이 말을 매카시의 소설에서는 모스가 소녀에게 한다. 충고를 말하는 것과 듣는 것. 소설에서 모스는 시험에 든 자신으로부터 다시 원래의 이야기에로 되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만일 모스가 소녀와 눈이 맞아 캘리포니아로 갔다면 그는 이 매듭 바깥으로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스는 도덕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결과는 장르를 지킨 것이 된다. 그런 다음 장르의 규칙에 따라 총에 맞아 죽는다. 소설의 아이러니. 영화는 반대의 자리에서 모스를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가 일깨워준다. 무모한 짓일세, 아무리 젊어도 그렇지, 하드보일드 장르 안으로 들어오는 거, 위험해. 모스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긴 여행 끝에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셋. 매카시는 모스의 동선을 이 추격전 바깥으로 거의 끌어냈다. 그런 다음 장르의 규칙 바깥에서 모스를 처리했기 때문에 갑자기 이 문제를 이야기 바깥에서 설명을 요구하도록 만든다. 선택이라고 생각한 운명. 혹은 운명의 도덕적 시험. 하드보일드라는 우주의 법. 나쁜 결말 대신 더 나쁜 결말. 그러나 코언 형제는 그럴 생각이 없다. 영화는 여기서 원작과 장르 사이에서 기묘하게 거리를 유지한다. 말하자면 장르의 진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지워나가는 과정에서 코언 형제는 문득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매카시가 소설을 유지시키던 하드보일드의 장르 기호들의 일부마저 지워나가자 갑자기 이야기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신 이 이야기가 전체 이야기의 일부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상할 정도로 인과관계가 모호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군다. 왜 그게 가능해진 것일까? 그건 이야기를 전체 이야기의 일부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불합리성은 전체 이야기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전제처럼 주어진다. 코언 형제는 단지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진행하는 신 진행 자체를 불합리하게 만든다. 매번 신이 시작 할 때마다 이야기가 새로 시작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정말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가정을 해야만 진행을 쫓아갈 수 있기 때문에 갖는 착시효과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소설과 영화 모두 보는 사람을 갑자기 멍하게 만드는 대목은 그 뒤에 바로 이어진다. 현장을 떠난 보안관 벨이 새벽 1시 넘어서 다시 현장 모텔로 돌아온다. 그 뒤에 바로 이어진다. 현장을 떠난 보안관 벨이 새벽 1시 넘어서 다시 현장 모텔로 돌아온다. 소설은 안톤 쉬거가 "덮개를 탁자에 내려놓고 통풍구 안에 손을 넣어 가방을 끌어내고 내려와서는 창가로 가서 주차장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벨트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문을 열고 나가 등 뒤로 문을 닫은 다음 몸을 굽혀 테이프를 통과하고는 트럭으로 가서 올라탔다." 그런 다음 보안관 벨의 자리에서 텅 빈 모텔 방을 다시 한번 묘사한다. 논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게 찍히지 않았다. 보안관 벨이 사건 현장에 도착한다. 숏의 순서. 그런 다음 방문을 열기 전에 (아마도 안톤 쉬거가 "날려버린") 열쇠구멍 뚫린 시커먼 구멍을 바라본다. 구멍 뚫린 자리에 무언가 비쳐 보인다. 어둠 속에 안톤 쉬거가 서 있다. 이 세 개의 숏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런 다음 보안관 벨- 어둠 속에 서 있는 안톤 쉬거- 열쇠 구멍으로 순서를 바꾸었다. 보안관 벨은 - 총을 꺼내들고 - 문을 연다(3개의 숏, 이하 문장 사이의 줄은 숏의 전환 표시이다). 방 안에서 문을 연 보안관 벨의 마스터 숏을 찍었고- 보안관 벨의 얼굴- 의 상대 숏은 자기 그림자이다. 보안관 벨의 얼굴 - 에 이어 발을 보여준다. 발아래 바닥에 아마도 사전 당시에 묻었을 피가 배어있다-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림자와 보안관 벨이 하나가 된다 - 그런 다음 욕실에 들어가 불을 켠다- 아무도 없는 욕실- 보안관 벨은 안도의 한숨을 쉰 다음 침상에 앉는다(이때 보안관 벨의 그림자를 찍은 장면과 같은 위치인데 벽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 여기서 길을 잃는다. 그런 다음 어리둥절해진 상태로 마지막 신을 보게 된다. 대 부분 그런 다음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보안관 벨이 아내와 나누는 꿈에 관한 대화를 듣게 된다. 이게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설명하지 않고 그냥 무언가 매우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한 다음 재빨리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을 끝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이 영화가 설명이 될까? 고작해야 코언 형제가 이상한 헤어스타일의 사내가 벌이는 추격전을 찍는 것만으로 만족했을까? 그렇다면 왜 보안관 벨과의 대결장면은 그냥 버렸을까?
안톤 쉬거는 유령처럼 사라져버렸다. 당신이 환기할 장면, 모스라 이글패스의 아즈텍 극장 앞에서 실종은 사실상 동일한 사라짐이다. 물리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이 불가사의하게 텅 빈 자리는, 여기서 문제는 마주침이 아니라 분산이 아니었을까 라는 불안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보안 관 벨은 침대에 걸터앉은 다음 문득 고개를 돌려 통풍구를 본다. 그 구멍은 너무 작아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런데 누군가 그 통풍구의 나사를 풀고 통풍창을 떼어놓았다(소설은 모스가 숨겨놓은 가방을 안톤 쉬거가 가져가기 위해 여는 대목을 일일이 설명했다). 이 장면이 성립되려면 셋 중 하나이다. 하나는 이 방에 있던 안톤 쉬거가 통풍창을 떼어놓았다(소설은 모스가 숨겨놓은 가방을 안톤 쉬거가 가져가기 위해 여는 대목을 일일이 설명했다). 이 장면이 성립되려면 셋 중 하나이다. 하나는 이 방에 있던 안톤 쉬거가 통풍창을 통해서 달아난 것이다. 그러나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안톤 쉬거가 이 방에 있었던 엇은 단지 보안관 벨의 환상이었단 셈이다. 그림자가 그런 생각을 부추긴다. 마지막 하나는 좀 까다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두 사람이 모텔에 있던 시간대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교차편집을 한 것은 일종의 트릭이다. 그러나 이 신의 마지막 숏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보안관 밸이 열린 통풍창을 본다. 바닥에는 통풍창을 여느라 흩어진 나사와 함께 동전이 놓여있다. 동전? 게다가 동전을 앞면이다. 안톤 쉬거가 편의점 주인과 한 동전내기를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냥 동전의 기호가 약속한 규칙에 따르면 안톤 쉬거는 동전의 앞면이 나오자 보안관 벨에게 기회를 주고 떠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하려면 보안관 벨이 여기에 왔을 때 안톤 쉬거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해야만 성립된다. 그런데 앞면을 선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안톤 쉬거는 항상 선택을 상대방에게 맡긴다. 만나지 않은 보안관 벨이 선택할 수 있는가? 핵심은 코언 형제가 우리에게 대답이 아니라 선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와 동전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각색의 변곡선3_마지막 장면
세 번째 곡선, 매카시의 소설은 9장에서 거의 곡예를 부린다. 보안관 벨의 독백이 끝나고 나면 안톤 쉬거는 돈 가방을 들고 주인에게 찾아간다. 영화에서 웰즈를 보낸 사무실이 아니다. 이미 그 사무실에도 찾아가 (영화에서처럼 이미) 안톤 쉬거는 웰즈의 의뢰인을 죽인 다음이다. 말하자면 이 돈을 찾아야 하는 두 명이 있었다. 한쪽을 웰즈를 보냈고, 다른 한쪽은 안톤 쉬거를 보낸 것이다. 그런 다음 3월의 어느 날로 옮겨간다. 모스 아내의 할머니(영화에서는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다. 그녀가 집에 돌아와서 2층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톤 쉬거를 만난다. 여기까지는 영화와 거의 동일하게 진행된다. 다만 소설은 2층 방의 전등을 켜야 할 만큼 어두운 저녁이고 , 영화는 오후의 어느 때이다.
먼저 영화, 보안관 벨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아저씨를 찾아가 대화를 한다.-안톤 쉬거는 장례식 날 모스의 아내를 찾아와 그녀를 죽인다. 그런 다음 집을 나서서 세 블록 떨러진 교차로 에서 안톤 쉬거는 교통사고를 당하나.- 그는 거기서 마친 두 명의 소년에게 돈을 주고 자기를 못 본 걸로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안톤 쉬거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 보안관 벨을 아내와 어젯밤에 꾼 두 대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다음 소설. (나는 바로 위의 문장을 복사하기로 붙인 다음 서로 다른 대목들을 고쳐 쓰는 방식으로 수정했다.) 9장 시작. 안톤 쉬거는 돈 가방을 들고 사무실에 찾아가 돌려준다. 장례식 날 모스의 아내를 찾아와 그녀를 죽인다. 그런 다음 집을 나서서 세 블록 떨어진 교차로에서 안톤 쉬거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는 거기서 마주친 두 명의 소년에게 돈을 주고 자기를 못 본 걸로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안톤 쉬거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보안관 벨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아저씨를 찾아가 대화를 한다. 9장 끝. 10장 시작. 그런 다름 다시 한번 모스가 죽은 모텔을 찾아간다. 거기서 (처음으로 자기에게 죽은 딸이 있었다는 말을 하면서) 딸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두 개의 탄피를 줍는다(그러나 동전 이야기는 없다). 집에 돌아온 보안관 벨에게 전화가 온다. 교통사고에 관한 것이며, 그 차에 타고 있었던 아이들을 이야기한다. 잠깐, 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 영화에서는 그저 우연처럼 길을 가던 자동차가 교차로에서 나와 안톤 쉬거의 차를 들이받았고, 그런 다음 그 자리에서 운전수 사내는 목이 꺾인 채 죽었다. 그러나 소설은 교통사고의 경위를 보고한다."그 사고에서 소년 둘이 죽었지. 다른 차량의 운전자는 아직 찾지 못했지. (...) 세 명의 소년이 티고 있었지. 마리화나를 돌려 피우고 교차로를 시속 60마일로 달려가다가 트럭에 탄 친구를 냅다 받아버린 거지."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이 소년들이 누구인지 떠오를 수밖에 없다. 훨씬 앞, 영화의 중간, 소설에서는 128쪽. 모스는 안톤 쉬거와 이글패스의 아즈텍 극장 앞에서 총격전을 벌인 다음 난데없이 나타난 두 명의 사내와 다시 총격전을 벌인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멕시코 국경을 넘으면서 "모스는 다리 중간쯤에서 이쪽으로 돌아오는 젊은 패거리를 만났다. 열여덟쯤으로 보이는 네 명의 젊은이들이었는데 약간 술에 취해있었다. 그는 가방을 보도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100달러 지폐뭉치를 꺼냈다". 그런 다음 소설은 영화와 똑같이 진행된다. 그런데 그들과 헤어진 다음 이상한 대목이 나온다."모스는 코트 단추를 채우고 돈을 안주머니에 넣고 가방을 어깨에 메고 서류가방을 들었다. 너희들 계속 걸어야 할 거야. 그는 말했다. 두 번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세 명 밖에 없었다. 그는 손 꿈 치로 눈을 훔쳤다. 네 번째 소년이 어디 있는지 보려고 했다. 순간 처음부터 네 번째 소년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관없어. 그가 말했다. 한발씩 앞으로 옮기기만 하면 돼." 매카시는 여기서 모스가 마주친 세 명의 소년을 공을 들여 기억시킨다. 그러나 코언 형제는 앞에 모스와 마주친 세 명의 소년은 남겨놓았지만 안톤 쉬거의 차를 들이받는 세 명의 소년은 지워버렸다. 그렇다면 왜 앞의 세 명의 소년을 남겨놓은 것일까? 코언 형제는 마치 안톤 쉬거가 모스와 똑같은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피를 흘리면서 거리의 소년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거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소설은 그런 다음 11장에서 보안관 벨이 모스의 아버지를 만나서 길게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날이 보안관으로서 "집무실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이라는 것을 환기한다. 소설은 덧붙이듯이 "이제 마지막 한마디만 더 하고 입을 다물겠다"고 이 사건에 대한 마무리를 한다. 경찰관을 죽이고 차를 불태운 멕시코인이 붙잡히고 그를 위해서 보안관 벨은 범인이 아니라는 마지막 증언을 하지만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알게 된다. 친절하게 번역자는 이 멕시코인이 범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보안관 벨은 이 사로고 안톤 쉬거가 저지른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멕시코인을 위해서 증언했지만 이것은 벨의 판단착오일 것이다"라고 주를 달았다. 마지막 12장은 막 아침에 깨어나 아내에게 들려줄 꿈을 떠올린다. 그건 이 영화에서 아침 식탁에서 보안관 벨이 아내레게 들려주는 두개의 꿈 이야기이다.
세 개의 마지막. 예이츠의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리스의 금 세공사가/ 황제의 졸음을 깨우기 위해/ 황금을 두들기고 황금유약을 발라 만든 형상./ 혹은 황금나뭇가지에 세워두어 비잔티움의 고관대작들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노래해준/ 형상만을 취하리라." 코맥 매카시의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두개의 꿈 이야기를 한 다음)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코언 형제의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아침 식탁에 앉아 보안관 벨은 아내에게 두개의 꿈 이야기를 한다. 아내는 말없이 이야기를 듣는다. 카메라는 멈춰 서 있고. 숏은 간단하게 나눠 찍었다. 이상한 건 마지막의 마지막이다. 보안관 벨은 꿈 이야기를 마치면서 말 한다. "그러나 (잠에서) 깼지."그냥 여기서 끝나도 된다. 그런데 아내를 보여준다. 아무 표정 없이 남편을 본다. 그 표정에서 어떤 마음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다음 다시 보안관 벨의 숏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아무 말이 없는 보안관 벨을 보여준다. 침묵. 난처함. 잠에서 깨어난 자의 얼굴. 그때 창문 바깥에 기괴하게 비틀린 나무와 그 곁에 비스듬히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왜 코언 형제는 마지막에 보안관 벨의 침묵의 숏을 찍는 것이 중요했을까 이 마지막 숏을 이 신의 첫 번째 숏과 같은 거리, 같은 자리에서 찍혔다. 두 가지 생각함 점. 소설은 이 마지막 대목과 안톤 쉬거가 교통사고를 당한 다음 거리 저편으로 사라지는 대목 하이에 33쪽을 읽어야 하지만 영화는 안톤 쉬거가 거리 저편으로 사라지는 숏을 보안관 벨의 아침식사 장면과 디졸브로 연결했다. 이 영화에서 디졸브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디졸브 앞의 디졸브는 안톤 쉬거가 모텔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다음 방에 보안관 벨이 혼자 앉아 있다가 (좀더 정확하게는 보안관 벨이 바라보는 통풍구 나사와 앞면 동전의 숏 다음에 )고양이와 함께 사는 아저씨를 찾아갈 때 사용하였다. 이 두개의 디졸브는 서로 용도가 다르다. 디졸브는 두개의 신의 시간을 접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를 다른 하나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이때 접혀 들어가는 신은 이 위에 얹어놓은 신의 주관적인 시간적 경험의 일부가 된다. 여기서 앞의 디졸브는 시간의 경과를 보여준다. 문제는 뒤의 디졸브이다. 거리로 사라져가는 안톤 쉬거의 등을 왜 보안관 벨이 알리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설명의 다른 판본. 아침식사 신의 첫 숏에서 마지막 숏과 같은 거리. 같은 구도로 보안관 벨이 물끄러미 화면 왼쪽을 보고 있다. 좀더 정확하게 화면 왼쪽 바깥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 숏을 보면 아내는 맞은편에서 커피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니까 보안관 벨은 여기서 안톤 쉬거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 두개의 신은 서로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그렇게 연결하였다. 내가 망연자실해 한 것은 그 다음 보안관 벨과 아내가 대화를 나눌 때이다. 코언 형제는 이 대화 장면을 아내는 45도 각도의 상상선 위치에 앉히고 보안관 벨은 정면을 바라보게 앉혔다. 두 사람의 투 숏을 보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도 그렇게 찍었다. 그래서 보안관 벨이 내내 하는 이야기는 아내가 아니라 마치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말 그대로 독백. 그런 다음 그는 난처하다는 듯이 침묵을 지킨다. 그때 창문 밖으로 두 그루의 나무가 보인다.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 이리저리 기형적으로 뒤틀린 채 서있는 나무. 이때 이 두 그루의 나무는 두개의 꿈에 대한 대구처럼 보인다. 두개의 꿈 이야기. "둘인데 둘 다 아버지가 나왔어. 내가 스무 살이나 더 먹었더군. 내 기억엔 나보다 덜 젊으시니까. 처음 건 가물가물한데 마을에서 만났더니 돈을 주셨어. 근데 잃어버렸지. 두 번 째 는 옛날로 돌아 간 거야. 밤에 말을 타고 산길을 달렸지. 좁은 오솔길을 말이야. 춥고 땅엔 눈까지 쌓였는데 아버지가 말을 타고 날 그냥 앞질러 가시는 거야. 담요를 두른 채 머릴 숙이고 계시더군. 지나가실 때 횃불 드신 건 봤지. 그땐 뿔 속에 불을 밝히고 다녔잖아. 불빛이 뿔에 비치는데 달빛 같았어, 꿈이지만 먼저 서둘러 가셔서 어둡고 추운 곳에 불울 밝히고 계실 거란 걸 알았어. 내가 도착하면 날 맞으시려고. 그러다 깼지."
보안관이라는 트라우마. 미국이라는 증후. 서부극의 종언
두개의 꿈에 관한 첫 번째 가설. 그냥 보안관 벨이 하는 아버지의 꿈 이야기로 듣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을 점점 더 나빠지고 노인들은 살기 힘드니 이제 아버지가 계시는 저곳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이제까지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나? 두 번째 가설. 이때 아버지가 실제의 아버지기 아니라 벨이라는 보안관의 자리에 대한 법의 출몰이라며? 스무 살이나 어린 아버지. 그러므로 만일 첫 번째 꿈을 모스와 연결시키고, 두 번째 꿈을 보안관 벨이 거의 마주칠 뻔한 모텔에서의 안톤 쉬거의 장면과 연결시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 번째 가설.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내내 불합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말했다. 무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섞고 있으며, 모스와 안톤 쉬거는 계속해서 각자의 동선을 따라간다. 보안관 벨은 모스와 안톤 쉬거 그 둘 중 누구도 만나지 못한다. 그 안에서 나는 기계적인 도식을 적용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해보고 싶다. 왜 아무것도 아닌 아버지에 대한 두개의 꿈 이야기가 문득 우리로 하여금 이야기 바깥의 그 무언가를 호명하도록 이끄는가? 영화의 첫 장면은 아침의 여명이다. 그런 다음 이 이야기 전체를 꿈의 진행으로 놓고 마지막 디졸브로 이어놓은 다음 보안관 벨이 그날 밤에 나쁜 꿈을 꾸었다면? 그런 다음 그 두 명의 등장인물을 놓고 흐릿해져가는 하드보일드 한 꿈 이야기를 두개의 아버지 이야기로 떠올린다면? 보안관이라는 트라우마. 미국이라는 증후. 서부극의 종언. 노인은 바다를 건너 비잔티움에 갈 수 있을까? 아니, 그 누가 사막을 항해하는 그들에게 '지나간(of what is past). 지나가고 있는(passing). 혹은 다가올(or to come)' 이 참혹한 하드보일드를 노래해줄 것인가? (두 번째 유격훈련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