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이 조선을 근대화하려다 아깝게 처형된 사람이라는 생각하는 글이 어제 일베에 갔었는데,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공작의 이용대상이었을 뿐이라는 반론글을 올렸더니 삭제되어 버렸음. 국뽕도 아닌데 .... 지우지 마라. 역사는 바로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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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 게이가 올린 위 내용을 보면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이유가 '청으로부터의 독립'때문이라는 내용이 나오지?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것은 일본이 조선을 먹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어. 조선은 청나라가 지배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와 무관한 독립국이다고 해야 일본이 조선을 먹는 게 가능해 지기 때문이지.


일본 공사는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일본의 조선 식민지전략과 일치하기 때문에 적극 돕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이지, 김옥균이 꿈꾼 대로 조선이 근대화해서 부강해지기를 바라는 생각에서 돕겠다고 한 것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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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일본은 조선에 무력시위를 해서 강제 개항을 하게 하면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1조의 내용은 인권팔이들이 늘 쓰는 '조선은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니 뭔가 통수가 예상된다.  

 

7조를 보면 이미 조선의 해안을 측량할 권리를 갖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때 조선의 해군에게 당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선 인근에서의 해전에 대비하겠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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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보면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한 것은 청나라의 영향으로부터 조선을 분리시키겠다는 의도와 군사작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일본의 의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1877년부터 시작된 조선에 대한 문화적 침투 전략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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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듬해인 1877년에 일본의 내무장관과 외무장관은 조선의 식민지 전략을 위해 일본 불교의 진종의 종무원장 겐뇨에게 조선에 불교 포교사를 파견하라고 지시한다.


서구가 기독교 선교사를 통해 식민지에 우호세력을 확보했듯이 서구를 모방한 일본은 불교를 식민지종교로 활용해서 조선내에 우호세력을 확보하고, 일제의 식민지화에 대한 반감을 줄이겠다는 의도였다.

 

일본 불교는 메이지 정부의 폐불훼석 후에 생존을 위해 '존황봉불', '근왕호법'이라는 호국불교의 이념을 갖고 조선의 식민지화 공작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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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일본 불교는 부산에 별원 사찰을 만들고 불교 포교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조선에서 식민지 정책의 공작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섭된 사람이  봉원사의 이동인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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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co.kr/books?id=IBK2BQAAQBAJ&pg=PT36&lpg=PT36&dq=%EA%B9%80%ED%99%8D%EC%A7%91+%EC%8A%B9%EB%A0%A4&source=bl&ots=DFJzJnKkjL&sig=P7_xrqvr9slELNyv04OpFtw_qW8&hl=ko&sa=X&ei=M5aqVOe8LMeMuATY8ID4CQ&ved=0CCwQ6AEwAw#v=onepage&q=%EA%B9%80%ED%99%8D%EC%A7%91%20%EC%8A%B9%EB%A0%A4&f=false

 

이를 연대순으로 보자.


1877년 일본 정부의 식민지 전략을 위해 조선에 포교사 파견을 요구


1877년 8월 일본의 진종은 부산에 별원(사찰)을 세우고 공작에 착수 

 

1878년 6월 봉원사 이동인 스님이 부산의 일본 사찰을 방문하여 포섭공작의 대상이 됨 

 

1879년 여름 이동인 스님은 서울에 올라가 김홍집을 만나고 서구 문물을 보여주면 교육받은 대로 설명하며 개화의 필요성을 얘기한다. 순수했던 김옥균은 혹해서 서구문물의 자료를 더 구해 달라고 요청한다.  

 

1879년 11월 부산의 일본 사찰은 조선 정부의 감시를 피해 이동인 스님을 일본 나가사키로 밀항시킨다.


1880년 4월 이동인 스님은 동경의 동본원사에 머무르며 일본의 정치인들을 만나고 교류하게 된다. 후에 김옥균등 조선 개화파의 스승이 된 '후쿠자와 유기치'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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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불교 진종에서 파견한 부산의 사찰은 주어진 공작임무를 착실히 수행해서, 봉원사의 이동인 스님을 공작원으로 포섭했고, 이동인 스님을 통해 김옥균이라는 중앙정치의 젊은이들을 개화사상으로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했다. 


 그 다음 단계를 위해 조선 정부의 눈길을 피해 이동인 스님을 일본에 보내 일본 주류 정치인들과 교분을 만들어주는 후속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지 않고야 천대 받던 조선의 스님이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들을 소개받고 잘 대우받았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이듬해부터 시작된 일본 정부의 일본 불교를 통한 조선 전복 공작은 짧은 시간에 성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개화파는 일본 불교의 요구를 바로 들어주게 되는데, 이게 그동안 금지되었던 중들의 한양 출입을 허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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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포교승이자 공작원인 사노 스님이 쿠테타 이후 정권 실세인 김홍집에게 조선 승려들의 한양 출입을 허용하도록 요청한 것은 바로 조선 불교 전체를 포섭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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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의 포교승들은 공작원의 사명을 띄고 다녔음을 알 수 있는 것이 가토 스님이 1900년에 본국에 보고한 위의 문건에서 알 수 있다.


'조선의 독립'이 일본 포교승들의 사명임을 언급하고 있고, 구한말 기독교의 급속한 확대가 조선의 식민화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조선의 독립'은 청나라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게 한 후 일본이 잡아먹겠다는 식민지 전략의 다른 표현임을 앞에서 설명했다.


즉,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의 포교승들은 개개인이 위와 같이 일본 정부의 대조선 외교전략의 사명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봉원사 이동인 스님을 포섭해서 김옥균을 포섭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했던 일본의 불교로서는 조선 불교 전체를 포섭할 때에 조선의 식민지화를 훨씬 앞당길 수 있는 일인데, 기독교가 들어가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방해가 되고 있다는 동향을 보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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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처형당하므로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이 조선을 근대화할 기회를 잃었다고 안타깝게 일게이가 기술했었는데, 이 후쿠자와 유키치는 1779년에 일본 불교에 포섭되어 일본에 밀항한 봉원사 이동인 스님이 만났던 정치인이기도 하다.


김옥균등 개화파를 배후에서 조종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에 대해 좋은 뜻을 갖고 있었을까?

 

 그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후원자였다.[4] 당시 그가 조선을 보는 관점은 당시 서양인들이 ‘미개한 야만’을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시선 그대로였다.[19]강화도 조약(1875)를 앞두고는 “스스로 조정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우리의 속국이 된다고 해도 기뻐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다.[19] 그는 1880년부터 파견된 조선의 청년들을 보고 조선의 개혁에 기대를 품게 된다. 특히 자신도 양반 사대부 가문이고 세도가문의 자손이었던 김옥균의 의지와 학식, 양반 사대부가문 출신이면서도 군사학교를 자청하고 노비, 중인 출신 청년들과 함께 훈련을 받는 서재필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의 개혁에 대한 그의 기대는 곧 냉소와 증오로 변하게 된다. ...


그는 "조선국은(…) 미개하므로 이를 유인하고 이끌어야 하며, 그 인민 정말로 완고하고 고리타분하므로 이를 깨우치고(…) 끝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 진보를 도와야 한다."(1882.3)라고 주장하였다.[22] 그는 갑신정변이 터지자 잠수함일본 민병대라도 지원하자고 일본 조정에 건의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된다.

http://ko.wikipedia.org/wiki/%ED%9B%84%EC%BF%A0%EC%9E%90%EC%99%80_%EC%9C%A0%ED%82%A4%EC%B9%98#.EC.A1.B0.EC.84.A0.EC.97.90_.EB.8C.80.ED.95.9C_.EA.B4.80.EC.A0.90

 

조선에 대해서는 동정이나 희망이라곤 없었던 조선을 구제불능의 쓰레기 같은 민족이라고 보던 매우 냉철한 인간이었다.


또한, 강제개화를 시키기 위해 무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1882년에 언급하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1895년 자신의 제자인 김옥균등을 이용한 갑신정변이었다.

 

김옥균등 개화파의 동기는 순수했기에, 일본 정부의 공작에 이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세상물정을 모르던 당시 김옥균등이 포섭되어 ,1882년 일본에 유학을 가서 유키치등에 의해 사상학습을 받고, 1895년 일본 응딩이를 믿고 쿠테타를 일으켰다가 진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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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일본 정부의 비밀공작에 의한 갑신정변은 실패했다. 이것은 외견상 조선의 근대화가 늦추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의 식민지화를 늦추게 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일본에 조종되지 않는 순수한 조선의 계몽,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할 시간을 벌게 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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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이 있던 1895년 20세였던 이승만은 선교사들이 배운 배제학당 영어초급반에 등록하여 영어와 서양문물을 배우기 시작했다.


1897년 7월  졸업할 때에 이승만은 영어로 '조선의 독립'이란 내용으로 대표 연설을 했다. 10년을 배워도 영어로 말을 못하는 일 게이들과 비교되노?


1898년 이승만은 협성회보를 발간했고, 러시아의 이권 요구를 비판하는 논설을 썻다가 4개월만에 폐간된다. 그러자 한국 최초의 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한다.


독립협회에 대한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매일신문은 1년도 안되어 폐간하게 되었다.


이에 빡친 이승만은 1899년 연로한 고종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라는 전단지를 돌리다가 한성감옥에 투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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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42859


이승만은 감옥에서 성경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승만은 전염병으로 감옥에서 죄수들이 하루에 16명이 죽기도 하는 환경에서 자기가 살아남은 것에 대해 사명감을 느낀 것 같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만나고 영향을 미친 이들이 후일 대부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것을 보면 미래의 평생동지를 만난 계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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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일본의 일본의 공작승인 가토 스님이 조선에 기독교가 퍼져 조선의 식민지정책에 장해가 된다고 보고서를 올린 것은 장차 이승만을 필두로 한 독립운동가들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선교사들에 부탁해서 들여온 외국 문물에 대한 책들을 보면서 정리한 한국의 미래에 대한 이승만의 비전은 시장경제, 민주주의, 수출국가에 대한 비전등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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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을 합병한 이듬해인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게 된다.


600여명이 체포되고, 이중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승만도 일제의 요주의 인물이었기에 6개월간 도피생활을 하였다.


선교사들은 조선의 빼어난 인재인 이승만의 안전을 위해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교단 대표로 이승만을 신고하였다.


당시 일본은 영미와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승만을 출국시켜야 했다.


이승만은 일본에서 동경 유학생들에게 일주일간 독립정신에 대한 강연을 하였고, 뜨거운 감동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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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차 세계대전 이후 이승만이 미국에서 파리 강화회담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려 한다는 소식이 실린 신문이 동경의 유학생들에게 전해졌고, 동경의 유학생들은 '이 박사가 먼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결정하여 일어난 사건이 2.8 독립선언이다.


적진의 한 복판인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의 의거는 곧 조선에 전달되었다.


이것이 1919년 3.1운동으로 이어진 것이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고 독립정신이 투철하여 보안이 유지되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축이 되어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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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조선 사람들.


3.1만세운동 이후 6개 정도의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로 임명하였으니 당시에 이승만의 위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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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하와이에서 한인들을 조직하고 의무교육제를 시행한다. 교육만이 부국강병의 길이라는 투철한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와이의 교민들은 수입의 일정부분을 독립자금으로 거두어 상하이 임시정부에 지원하였는데 해방때까지 지원된 돈이 3백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김구가 이승만에게 독립자금을 앙망한 편지가 김구 기념관에도 있다(왜 이승만 기념관은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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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때까지 미국에서 지낸 이승만은 당시 미국에서도 드문 정치학 박사여서 미국에서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식견을 갖고 있었다.


또한 언론인 기질을 이어가  세계 동향을 알리는 잡지사를 운영했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도 알 수 있었다.


1944년 독일에서 해방된 소련의 점령지들이 어떻게 공산화되는 지도 당연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1945년 한국의 해방후에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과 비타협노선을 걷게 된 것이다. 


1899년 한성감옥에서 하루에서 여러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는 가운데에서 꿈꾸었던 부국강병 조선의 미래는 공산주의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


그래서 유일하게 아시아의 공산화로부터 한국을 지켜낸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이승만의 휘하에 모인 것은 이승만이 갖고 있는 독립운동가로서의 경력과 카리스마, 능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소리를 들을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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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한미동맹을 맺어 한국의 안보를 보장받게 되었고, 이후 초등학교 의무교육부터 시작하여 교육을 통한 한국의 발전을 꿈꾼다. 1956년에 원자로를 도입하여 한국의 원전강국의 길을 열었다. 


2002년 전쟁이 끝난 아프가니스탄이나 2004년에 전쟁이 끝난 이라크가 아직도 정신못차리고 헤매고 있는 것을 보면 이승만이 3세계 국가에는 얼마나 과분한 지도자였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수백명의 젊은 인재들을 미국에 보내 유학을 시켜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브레인이 되어 조국 근대화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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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과 일본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고, 미국에 대해서도 공갈을 치면서 배짱을 부리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 권력에 연연해 하지 않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은 자신이 꿈꾸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주의 원칙을 스스로 실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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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긴 뒷돈도 없어 하와이에서 가난한 말년을 지내며 일반 병실에서 임종을 기다리던 이승만은 '죽더라도 조국에 가서 죽어야지'라고 말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 상황을 고려하여 금일봉을 몰래 보내고 귀국허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99년 조선의 미래를 디자인했던 이승만은 1965년 하와이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지금 발전된 한국을 본다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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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김옥균 쿠테타가 성공했으면 조선이 일본에 먹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 일 게이들이 있음  

 

2. 김옥균은 1877년부터 일본 정부가 추진한 조선 식민지화의 공작의 포섭대상이었을 뿐이다.  

 

3. 김옥균의 쿠테타 실패로 조선의 일본병합이 늦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4. 그래서 그사이에 이승만이이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인물로 준비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