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은 시민민주주의였나? 동학(민중신학) 민주주의였나?

-이승만의 自由와 조갑제의 自由는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나는 예전부터 일관되게 조갑제기자의 논지는 반공목사님 설교에서는 나올 수 없는 개념이 너무 많고, 민중신학(동학~천도교 개념 끌어쓰는) 개념을 이어서 쓰는 게 대단히 많다고 지적해 왔다.

 

이승만을 옹호한다면 이승만의 인물 숭배가 아니라, ‘기독교적 건국관’의 옹호다. [독립정신]은 교회 甲주의가 아니라, 기독교 시각으로 서구문명을 바라보자는 취지다. 더불어, 한국교회 반공은 교회와 둘도 없이 연결됐다.

 

북한체제 형성기부터 북한 주체사상 형성인 1972년 이전까지, 북한은 모든 형태의 종교를 거부했다. 반면에, 反共은 북한 토지개혁 때 기독교 박해를 전제로 한다.

 

조갑제기자의 반공은 교회와 분리하고, 일본유학사의 담당주체 사무라이가 아니라 조갑제기자 독자 속의 “만화방 사무라이”(장년층 저학력층 속에 존재하는 허구적 이미지. 마치, 서구에 퍼진 한국인 이미지나, 한국에 퍼진 중국의 만만디 이미지 같은 수준)로 공산주의에 각을 세웠다. 사실, 해방공간 교회의 행동주의적 반공은 그 당시의 한국교회 신학이 상당히 진보적이었다는 것에 있지, 일본 사무라이와는 어림반푼어치도 없이 전혀 달랐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교렌즈로 기독교(유신론) 및 헬라사상(서구 무신론)을 보자는 것이다. 이는 이승만의 [독립정신]이 쓰여질 당시의 한국 사회 최대 문화 파워인 ‘동학도’로 바라보자는 것이 전혀 아니다.

 

해방공간에 가령 북한진주영역에서 저항할 때 행동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다분히 ‘기독교사회주의’적인 취향까지를 믿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런 요소는 6.25 이후 한국교회 신앙 성숙도에 따라서 많은 깨달음 속에서 새롭게 기억이 재편성된다.

 

그러나, 조갑제기자는 반공이 교회와 연결되면 안된다는 전제하에서, 떼어내고 자신의 허구적 징기스칸 신화쓰기와 연결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그 신화작법은 대단히 나이브한 수준이며, 그저 한국 고대신화 모델을 대충 얼기 설기 마구 잡이로 세워놓은 수준에 가깝다. 한국인에게 생각을 어떻게 하면 짜짜잔 어떤 지평이 열린다는 것은 ‘후천 개벽’사상 밖에 없고, 역시 ‘동학’ 밖에 없다.

 

조갑제기자의 징기스칸을 빠는 기본 마인드 자체가, 사실은 뼛속깊이 이승만 프레임을 환멸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1956년 이후 평생을 지켜온 기독교적 건국론을 많이 벗어난다. 그 때는 이기붕 영웅화에 덧씌워진 이미지다. 조갑제기자의 이승만 옹호는 그런 인상이 짙은데, 과연 그게 본질의 이승만인지 의문이 든다. 물론, 박정희도 대단히 인기 없던 영웅화 중심의 77-79년의 박정희와 그 이전의 박정희가 다른데, 말기 3년이 진짜라고 보는 것인지도 의문시든다.

 

시민민주주의면 공론장 속에 검증돼야 한다. 동학 민주주의는 異人 메시아의 무당 주술 안에서 통제돼야 한다. 공론장이 있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평등 가치가 국민에 먼저 전제돼야 한다. 그러나, 조갑제기자는 이런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동학도 식의 ‘속풀이 마스터베이션’심리로 달아난다.

 

87년 6월에 보수민주화운동은 시민민주주의로 보았고, 노동계급과 통일전선전술을 짓는 민중신학진영은 사실상 동학 민주주의로 봤다. 리영희 문익환 조동일 등 87년 이후 활약한 좌익 논객들은 동학 교리를 글에 대폭 넣어 썼다.

 

조갑제기자는 반공교회의 보수민주화참여편이었나, 민중교회 편이었나? 정치의 방향성은 의심의 여지 없는 반북이지만, 사고의 틀에서는 어느 쪽인지 한번 따져보자. 다시 말해서, 일베에서 전대협 용어 쓰는 우익 드립(사고는 아직 보수가 안되나 정치로는 우익을 지지한다는)을 본다. 이런 버전 아니냐 하는 의문을 오래전부터 했었다. 이런 드립이 보수 문화 확장에 쥐약 아니었나? 이런 식 사고관이 보수문화 진흥을 원할 턱이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