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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각, 붉은 가로등이 비추는 차안. 젖은 거리를 달리다 바퀴는 미끄러지고, 남자는 황급히 핸들을 돌리지만 맞은편 차선의 차와 충돌한다.

앞 유리로 튀어나와 처박힌 상대편 운전자를 발견하고 저쪽 차안을 넘겨보는데, 조수석에 앉아있던 여자의 옷 사이로 갑자기, 젖가슴이 드러난다.

죽음 충동의 욕구와 성 욕구를 현대 배연기관의 정수, 자동차의 충돌과 함께 묘사한 크로넨버그의 영화 <크래쉬1996>는 자극적이다.

 

그의 작품들이 품고 있는 호기심, 육체중심주의와 기계적 상호작용에 대한 탐구는 이 영화를 통해, 아주 본격적이고 심층적인 프로이트의 레벨로 끌어올려진다.

그의 가장 영예로운 작품 <데드 링거1988>에서 드러난 부분과 분신에 의한 지배는, 하나의 대상, 완전한 인간으로써 합쳐지며 진정한 스스로의 실현과 싸우게 된다. 영화가 가진 성적긴장, 리비도와 타나토스의 자극적인 어그러짐 때문에 헐리웃 상업예술의 계단을 차근차근히 밟아온 노련한 작가, 핀처의 <파이트 클럽1999>은, 

왠지 모르게 캐나다의 아방가르드 감독을 떠올리게 한다.

 

    

 

광고와 뮤직비디오, 다큐멘터리와 조지 루카스의 프로덕션을 두루 거친 핀처의 영화는 어느 미운점 하나 찾아볼 수 없도록 매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으나,

결코 여타 감독들처럼 도덕적으로 태만하고자 하지 않아 인상 깊은 것이다.

<파이트 클럽>과 <밀레니엄>,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그는 현대인들의 착각과 환영을

기만적이고, 현혹적인 세상의 매커니즘 속에서 이해하고, 또 들추어내었다.

그의 대표작이 된 <소셜 네트워크> 덕분에 우리는 실리콘 밸리식 경영 신화의 이면을 엿보고, 스티브 잡스라는 시대정신 아래 깊어진 함정을 발견한다.

<파이트 클럽>이 주던 말기 자본주의적 환멸은 전통 관료제로부터 탈피된 대안기업을 통해 해결되는듯 보이다가 주춤하며,

여전히 관객에게 유효한 감상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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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유한한 존재,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악취 나는 고기 덩어리로 땅에 묻혀 흙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숙명적 유한성을 마주한 인간은 삶이 갖는 의미와 진실을 오롯이 혼자서 마주해야할 운명에 놓인다.

헌데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글로컬리제이션, 세계의 통합은, 개인에게 간편한 삶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를 소외시키고, 넘치는 생의 에너지를 누그러뜨린다.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바라본 세상도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첫 장면 세상의 멸망과 자기의 종말 앞에 섰던 인간은 바로 다음 장면, 고환이 거세된 남자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는 관료제와 기업화된 세상 속에서 불안을 느끼고, 잠을 설치고, 대량 생산된 가구 산업 속에서 특별함의 환영을 꿈꾼다.

혹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병원엘 가보고 약에도 의존해 보고, 요람 속에서 무감각해진 삶은 자극을 찾아 헤메기 시작한다.

그는 진정 남성성이 거세된 사람들, 고환암 환자들의 모임으로 그리고 다른 암으로, 다른 사람들의 고통 속으로 찾아들며,

스스로의 권태를 극복하려 든다. 그의 시간은 째깍 째깍, 빠르게 흐른다.

    

 

 

대안으로 만들어낸 대체 자아, 타일러의 이데올로기는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다.

소비문화는 노예적 산물, 오늘날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완전히 주관화된 믿음이다.

그는 현대 사회에 불필요해 제거된 지방을 사람들의 욕실에 다시 올려놓고, 지루한 일상의 무한궤도에 빠진 사람들을 불러내어 흠씬 두들겨 팬다.

삶의 가장자리에 살아가는 아나키스트, 자본 사회의 해체주의자는 어떤 사회적 역할도 거부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인다.

 

허나 동시에 그는 부적응자이자 아웃캐스트, 제물을 갈구하는 폭력주의자.

 파이트 클럽을 통제하며 부계적 권위의 회복을 주장하는 그는 천덕꾸러기 아들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때 삶에 의미를 주었던 최종적 권위들, 신, 국가, 이념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는 우습게도 원시적 의미의 회귀를 주장한다.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며 괴의한 즐거움과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 우리 삶의 지루한 측면에 대한 반항심일지 모른다.

허나 이들 규모의 확장은 즐거움보다 두려움이 되어 돌아온다. 이들은 극단적 의미의 행위예술가, 테러리스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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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암 환자들의 모임에서 얻어간 것은 여성적 해방이다. 공감, 눈물, 모든 희망을 잃은 연대.

매일 밤 어머니의 품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의 동굴 속 힘센 짐승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영화 속 여성성도 어딘가 비틀린 모습, 젖가슴이 큰 남자 밥 또는 한줄기 생기마저도 없는 말라가 전부다.

 

말라 역시 소비문화의 매혹 뒤 안에 놓인 소외된 여자라, 매일 밤 커피, 도넛, 지루함의 해방을 찾아 병든 자들의 모임으로 찾아든다.

둘러앉은 맞은편에 검게, 자욱히 앉아있는 말라는 남자의 해방을 거울처럼 비추고 고발한다.

신자유주의 속 페미니즘도 위협을 받기는 마찬가지, 진정한 의미에서 영혼의 쌍둥이는 타일러가 아니라 말라가 되어야 할것이다.

남자가 타일러에게로 기대며 그는 폭력이라는 해방구로 에너지를 집중하고, 부분의 지배에 녹아든다.

 

‘나는 잭의 뇌에요, 내가 없으면 잭의 심장과 호흡은 정지되죠. 난 질의 젖꼭지에요... 난 잭의 대장이에요...’

자신이 아닌 당신의 부분에게 결정권을 넘기는 순간 당신은 담대해지고, 당신은 자유로워진다.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트 클럽에 들어와 싸움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는 남자들의 싸움은 이기는데 의의가 있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파괴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것은 강대한 에너지로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가장 원초적인 충동이어서 분출을 요구한다. 

 

타일러의 목적은 죽음을 통한 생생한 삶의 회복,

경찰보다 한발 앞서 말라의 자살을 구한 타일러에게 화가 나서 남자는 말라에게 화를 낸다.

그의 성적 충동은 말라를 필요로 하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 뛰는 말라의 존재는 정신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궤도를 이탈한 그의 삶을 사람들은 경멸로 쳐다보고 남자는 자기 모순의 해결이라는 과제 앞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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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리더가 되었을 때, 고의적인 상처, 고의적인 파괴가 드러난 공동체가 되었을 때 영화는 위험한 수위로 넘어간다.

테러리스트를 세뇌하는 우두머리 수컷이 되어, 그는 사회로부터 받아온 공황의 표출법을 몸소 두들겨 맞으며 보여준다.

불특정 다수에게 싸움을 걸고 위세를 확장해 가는 파이트 클럽은 더 이상 제한된 비밀의 조직이 아니다.

 

폭력은 바깥으로 드러났을 때 산불이 번지듯 아주 무섭게 번져나간다.

파이트 클럽의 아버지가 된 타일러는 이제 지원자를 모아 기능하는 군대를 창조하고, 극단적 허무주의는 조직적 밴달리즘을 만나 세력으로 확장된다.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혁명에 휘말리도록 만들고, 평안한 삶을 제멋대로 뒤헤집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일탈은 사회적인 혼란이 되고, 정의를 규정할 수 없는 파시스트의 편집증으로 변모한다.

남자는 타일러에게 자신을 온전히 뺏긴 미치광이가 아니어서 이제 두려움에 빠진다.

불처럼 번져간 혁명과 폭력은 이제 그의 손을 벗어나서, 익명이라는 이름 아래 무자비한 힘이 된다.

진정한 남성성의 회복은 개인의 신체를 벗어나서, 정치적인 차원의 싸움으로 번진다.

    

 

 

우리는 우리 선조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스쳐오고 많은 땅들을 지나온다.

막대한 인파속에 인간은 순식간에 익명이 되고 대량사회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는다.

 

영화가 지속적으로 남근상에 대한 갈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거세되고 있는 남성적 가치들과 남성 정체성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헌데 진정으로, 우리 사회의 남성성이 거세되고 있다는 명제는 사실이 아니다.

 정돈되고 숨죽인, 그러나 무지막지한 위상으로 이 사회에 우뚝 선 남성성이 바로 관료제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여 이들의 싸움은 남성의 대표자가 아니라 비주류의 대표가 된다.

 

이들은 결국 ‘사회 불만 세력’에 다름 아닐 운명에 놓인다.

타일러는 ‘네 꿈을 쫓아라’라는 자본주의 정신을 교묘하게 비틀어 익명의 남성들에게 주입하고,

미달된 개인의 성취를 네오 파시즘적 집단사고로 대체시킨다.

‘집착하지 말고, 내버려 둬’ 라는 그의 모토는 목적을 가진 행위 집단이 되어 기이한 폭력으로 변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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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빠지면서 본능의 발현, 존재의 천명은 보다 강력한 욕구로 등장한다.

‘진정한 당신의 모습을 찾으세요’라는 자본주의적 명제는 변화무쌍한 사회 앞에 공허한 울림이 되기 쉽다.

무한히 놓인 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불안에 놓인다.

영화 속 이름한번 불리지 않는 주인공의 혼란은 이 시대 사람들의 것을 대변하기도 한다.

 

<파이트 클럽>은 우리가 경험하는 무수한 모순들에 대하여 깊이 탐구하고, 현대인의 강박을 아나키즘의 폭발과 분출로 시원하게 쓸어내린다.

죽음이라는 공허가 기다리는 삶의 허무를 적극적인 파괴 행위로써 상쇄시키며 관객은 전율을 느낀다.

 

허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성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정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본능과 전율도 자신의 일부로 남아야 한다.

불만족에 의해 발현한 자아는 노예적인 상황에 놓인 자신을 구원하는 동시에 미치광이 상태의 혼란으로 인간을 내몬다.

총구를 머리에 가져다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잭의 결단으로 세상은 무너지지만, 그의 존재는 이 세계에 남는다.

고통스러운 해방 끝에 말라의 이름을 엄마라고 잘못 부르는 그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진정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임을 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