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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의 이츠키는 사랑스런 소녀였다.

 

큰 눈망울로 소년을 올려다 볼 때, 봄의 선홍빛으로 물오른 두 뺨은 말갛게 빛났다.

 

소년은 열여섯 생에 처음으로 소녀를 사랑했다.

 소년의 이름도 똑같은 이츠키였다.

 

이츠키에게 처음 그것이 왔을 때 소녀는 그 감정이 사랑이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사랑은 모르는 새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지나고 나서야 가슴을 뒤흔들었다.

첫 사랑은 한철 만개한 벚꽃처럼 마음속에 봄을 불러왔다가 빠르게 죽었다.

 

가장 완벽한 사랑이었다.

    

 

 

사랑이 지나가면 저마다의 치유 과정을 겪는다.

추억만 붙들고 살수는 없어서 우리는 사랑을 보내주고 사랑으로부터 보내져온다.

관계가 끝나더라도, 사랑은 언제나 지나온 자리에 남아 우리의 곁을 지킨다.

인정하던 하지 않던, 첫사랑은 우리 연애의 현신이 되어, 눈 내린 새벽 처음 찍힌 발자국처럼 우리 애정의 방향을 정한다.

 

소년이 나이가 들었을 때 소년은 소녀를 닮은 여인을 발견해 사랑을 했고 소녀와 꼭 닮은 여자 역시 그를 사랑했다.

여자는 너의 첫 자리도 내가 채웠었더라면, 하고 생각했다.

    

 

 

히로코의 연인 이츠키는 2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멈추어 있는 그녀와 달리, 점차 사람들은 덤덤하게 남자의 죽음을 보내어 갔다.

3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연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씩씩한 얼굴로 사람들을 맞았다.

어머니를 데려다주고 가는 길에 들른 그의 집에서 졸업 앨범 한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지도 시간이 흘렀고, 그녀를 사랑해주는 시게루 선배도 이젠 곁에 있지만, 그가 너무도 그리워서 그녀는 편지를 띄워 보았다.

무엇보다도 잘 지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헛되게 돌아올 줄 알았던 편지가 그런데, 답장이 오기 시작했다.

잘 지내고 있다고,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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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내 여인의 사랑을 종말 시켜주려고, 선배는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 나서자고 했다.

먼 땅에 사는 이츠키씨는 알고 보니 이름이 같았던 동창생, 그녀와 아주 닮은 여자였다.

 

그가 내게 품었던 사랑의 감정들이 궁금해서 히로코는 추억을 나누어주세요 라고 이츠키에게 부탁한다.

그러다가도 그의 추억이 다 사라져 버릴까봐, 덜컥 두렵고 덜컥 아팠다.

    

 

 

육신이 죽고 없는 자리에 남자는 타인의 기억으로 다시 태어났다.

소녀 이츠키가 소년 이츠키에게 품은 감정은 어렴풋한 것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년은 똑 부러지게 드러내는 일을 잘 하지 못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년과 소녀는 언제나 멀찍이 언제나 가깝게, 서로의 곁에서 맴돌았었다.

 

도서부장 선거를 하다가 소녀가 눈물을 흘리자 소년은 벌떡 일어나 반장의 멱살을 잡았다.

그 애는 그러다가도, 도서실의 일을 돕지 않고 언제나 창가에서 책을 읽었다.

봄  바람이 쏟아져 들어와 커튼이 일렁이는 순간에 그 애는 사라졌다가 햇살처럼 어느새 다시 들어와 있었다.

도서카드에 언제나 첫 이름을 쓰는 장난을 치고는 했었고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소녀는 알지 못했다.

    

 

 

사랑에 막 눈을 뜰 때쯤에 소녀는 친구의 사랑을 소년에게 전달했었다.

소년은 달려와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녀의 얼굴에 봉지를 씌웠다.

다리를 다쳤던 소년이 육상 대회에서 부끄럽게 넘어지자 소녀는 못 본 척 딴청을 피웠다.

그의 첫 실패의 공간을 그의 연인은 사진 찍어 보내어 달라고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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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아버지를 잃었을 때 절묘하게도 소녀는 소년을 잃었다.

일이 생겨서 책을 반납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소년은 다음날 전학을 가고 없었다.

소녀는 너무 화가나 책상위에 올려져 있던 국화 화분을 바닥에 던졌다.

사랑의 기억은 자욱하게 그러나 아프게, 소녀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것이었다.

    

 

 

가을 잠자리가 겨울의 얼음 속에 박제가 되어 간직되고 있듯이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소녀의 사랑도 얼음 속에 갇히게 되었다.

좀처럼 녹지 않던 그녀의 마음이 시려웠는지 그녀의 감기는 떠날 줄을 모른다.

 

폐렴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기억을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그녀는 병원에도 잘 가지 않았다.

사서를 하며 우습게도 어린 시절을 반복해 사는 그녀의 갇혀진 기억은 독소가 되어 결정적 순간 그녀를 위독하게 한다.

풀어지지 못한 사랑의 기억은 언제나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또 아프게 했다.

    

 

죽음의 기억은 연인의 가슴에만 묻히는 것이 아니었다.

멀쩡해 보이던 아버지도, 어머니도, 함께 등산 갔던 선배들도 사실은 마음의 정리를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츠키의 가족들도 아버지가 죽은 순간을 그리며 보내지 못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가 돌아간 순간을 누구는 차가운 눈 속에서, 누구는 뜨거운 불아범 앞에서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손녀를 아들과 똑같이 보낼까봐 할아버지는 하얀 밤을 달리고 또 달린다.

 오래도록 옛날 집을 떠나지 못하던 어머니도 이제는 이사 갈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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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히로코가 후지이 이츠키와 같은 배우라는 것은

첫사랑으로 돌아오는 남자의 회귀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두 여자가 겪고 있는 나란한 과거의 청산에 더 큰 의의가 있다.

 

처음 나레이션이 들려올 때 우리는 혼란스러웠으나, 그녀들은 도플갱어가 아니라 꼭 닮은 두명의 여인일 뿐이었다.

그가 떠났던 산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얗게 내지르는 히로코의 모습은 가슴 아프지만,

생채기가 흰 공기를 맞아 치료되고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그녀의 외침은 공허하지 않다.

 

시게루는 히로코를, 히로코는 연인을 대신해 이츠키를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건지 이제 이츠키는 할아버지와 대화도 곧 잘 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 이름이 같은 아이가 있었어요.. 그냥 그랬어요’ 라고 말하는 이츠키에게

히로코는 정말 그것 뿐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힌트를 준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심었다는 할아버지의 나무는 다 커서 한 줄 한 줄 나이테를 먹는다.

 소년 이츠키는 사라졌어도 기억은 몇 줄의 나이테 속에 차곡히 모여 있는 것이다.

 

그녀를 찾아온 도서부 후배들이 이츠키가 건넸던 책 한권을 다시 건넸다. 후지이 이츠키라고 적힌 도서카드 뒷장에는

소년의 소중한 사랑이,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 그의 진심이 그렇게 있었다.

    

 

 

편지로 인해서 떠나오고 편지로 인해서 불러일으킨 사랑의 기억은

우리의 마음속에도 소복히 쌓여 추억으로 녹아든다.

세상에 너와 나만 남아 예쁘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건 더할 수 없는 축복이지만,

사람은 언제까지나 기억의 역사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유일한 존재가 되지 못함을 아파하지 말고 기억 속 한그루 나무로 남는 것에 행복하자고 이와이 슌지는 말하고 있다.

 떠나보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떠나온 그 자리에

사랑의 역사는 언제나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