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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한다.
'미국은 지정학적 위치가 너무도 뛰어나고 유리하다.'
'그들은 주변에 적국이없다. 그래서 강해진것뿐이다.'
맞는말이지만,
당시엔 아니었다.
오늘날의 강대국은 단순히 요행이 아닌..
선조들의 목숨을건 피비린내나는 혈투와 노력에 의해 쌓아올려져온것이다.
# 1. 독립전쟁 시대
미합중국의 탄생은 동부 해안지대에 위치한 당시 13개주들을 구성으로 시작되었다.
본국 (영국)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있는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였기에
멀리떨어져있는 미국인들은 유리하기도했지만 동시에 불리하기도 했다.
바로 영국이 해양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유럽내에서도 항상 최고수준의 해군력을 유지해온 막강한 해양강국이었으며,
해외에서도 전쟁을 지속할수있으며 보급로를 유지가능한 몇안되는 제국을 상대로
갓 독립선언을 한 13개주의 오합지졸 민병대가 전쟁을 치뤄야만 했었다.
당시 독립선언을 한 미합중국은 영토가 모조리 해안을 접한 형태였으며,
이렇게 항구가 모조리 노출된것은 미국에있어 최대의약점으로 작용하게된다.
영국해군이 자랑하는 막강한 전열함의 화포를 통한 지원포격과
다수의 선박을 동원한 상륙작전을 저지할만한 전력이
식민지국가 미국에게는 존재하지않았으며,
당시 최대규모의 거점항구중 하나였던 뉴욕항 일대를 초전부터 영국군에게 점령당하는등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된다.
뉴욕항을 비롯해 해안거점을 확보한 영국군은 원정전쟁의 최대문제인 보급로가 해결되었고,
거칠것없이 물자와 병력이 들어오며 본국으로부터 지속적인 지원을 받을수있게되었다.
하지만 새로 문을연 대륙회의와 미합중국에겐 계속해서 난제가 요구되었다.
독립국가의 시장경제와 질서를 유지해야하는 '경제' 문제에 직면하게된것이었다.
영국과의 결별을 선언한 대륙회의는 이제 파운드화가 아닌 새로운 독자통화
'대륙달러' 를 발행하지만 화폐위조의 방지에 실패하면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더욱이 당시 본국과의 교역이 사실상 무역의 전부였던 식민국가 미국에겐 더이상 기대할만한 추가수입원이 존재하지않았다.
다닥다닥 국가들끼리 붙어있는 유럽과 달리 아메리카엔
미국과 교역해줄 국가자체가 존재하지않았던것이다..
경제는 대륙달러의 위폐난립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며 전비를 지출해야만하지만,
더이상 무역을 통한 추가수입은 존재하지않는다.
유럽으로부터 멀고도 먼 아메리카대륙에서 홀로 독립전쟁을 수행중인
신흥 미합중국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버린것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초기 대륙육군 (컨티넨탈 아미)은 변변한 화기는 커녕
기본적인 피복류와 식료품등의 기초적 보급품조차 몇주간
구할수없을정도로 경제적으로 피폐해져갔다.
때문에 당시 유럽에서 미합중국과 대륙회의의 반란은
'누가 이기느냐' 는 이미 관건이 아니었고,
요는 '영국이 얼마나 빨리 이길수있느냐' 가 관건인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했다.
그 누구도 일개 식민지 독립국이었던 미합중국의 승리를 일말도 기대하지않았고,
미국에 대한 지원의사를 표명하지않았다.
어차피 영국이 이길게 뻔한 전쟁에서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돈만버리고 훗날 보복을 당하고싶었던이는 없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것은 사람 스스로의 힘이다.
그들은 레드코트의 막강한 전투력에 굴복하지않고
철저하게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며
영국군의 보급품을 탈취하고,
영국군의 대포를 노획하며,
영국인들로부터 빼앗은 물자를 전력으로삼아 싸우는 처절한 전쟁을 계속했다.
악랄할정도로 집요한 보급품약탈행위로 인해 영국군은 훗날 이 기간을 '보급전쟁' 이라고 명명한
개전초기 당시 뉴저지 북부에서 영국군이 대륙육군이 3달에걸쳐 펼친 게릴라공세로 인해
비정규전으로 피해를입은 병력은 지역총원 1만명중 1000여명가량이 사살되거나 부상당했다.
해안지대에 이어 강유역를 점령해 북부와 남부를 완전히 따로 고립시키고,
왕당파의 숫자가 적지않았던 남부로 진군하며 조기종전을 이끌려했던
영국군은 목숨을걸고 게릴라를 펼쳐오는 대륙군에게 계속해서 발목을 잡히며
전황은 점점 진흙탕싸움처럼 질질끌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777년말, 전황을 뒤집는 승전보가 울려펴진다.
그동안 대륙군의 승리는 소규모의 전투나 기습, 게릴라등의 전과정도뿐이었고
야전에서 정규전에 돌입할때마다 처참한 결과로 패주하는 약체의 모습뿐이었다.
때문에 유럽의 어느 국가들도 미국의승리를 기대하지않았다.
하지만 드디어 그 약체 미국이 야전에서 영국군을 꺾은것이었다.
바로 사라토가 전투였다.
영국군의 존 버고인이 이끌던 8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회전 이후 반수인 4000명수준으로 격감시켜버린
실로 역사적인 승전은 대륙군에게 닥쳤던 최대의 위기를 최대의 전환점으로 일거에 전황을 뒤집어버렸으며,
뿐만아니라 정규전에서 영국군이 일개 식민지 민병대에 패전했다는 소식은 너무도 인상깊었기에
사라토가 전투의 승전소식은 유럽전역에도 보도되면서 큰 화제가된다.
[+ 훗날 미해군의 항공모함의 이름에도 사라토가 라는 이름이 붙는다. (CV-60 사라토가) ]
이제 미국독립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전쟁은 마침내 『국제전』 으로 돌입하게된것이었다.
미국은 식민지 독립국가가 지배국가를 상대로 격퇴할수있다는 힘과 가능성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새로운 스폰서를 맞이하게되는데,
바로 영국과의 철천지 원수, 프랑스였다.
이때 미합중국은 단순히 총칼만쓰는 실제전쟁뿐만아니라
무대커튼 너머의 뒷막싸움이라 할수있는, 외교전에도 돌입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을 일찌감치 1776년부터 대륙의회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해
프랑스의 미국에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는등
뒷무대에서도 치밀한 물밑작업을 행하고있었던것이다.
미합중국의 가능성과 영국을 견제하며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프랑스는
마침내 1778년 2월에 미합중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다음달인 1778년 3월에 미국독립전쟁에 참전을 선언,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제 미국인들은 홀로 싸우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미국인들에게 최초의 동맹군이 생긴것이었다.
프랑스의 참전으로 인해 미국의 독립전쟁은 더이상
식민지배국과 식민지간의 반란,소요사태가 아닌
'국제전쟁' 으로 성격이 바뀌며 큰 사건으로 발전했고,
프랑스의 미합중국에 대한 막대한 차관과 원조는 피폐해져가던
대륙의회의 살림을 회생시킨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다.
뿐만아니라 프랑스와 교역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전시경제체제하에서 다시 통상수입을 얻을수있게되었다.
이때 독립전쟁당시의 대륙육군은 강제징발하는 '징병제'가아닌 자원입대를 받는 '모병제' 였고,
제대까지 복무기간은 불과 단 1년에 불과했다.
따라서 77년다음해였던 78년에 병력충원이 이뤄지지않으면 서서히 병력자체가 제대하고 없어서
독립전쟁 수행자체가 불가능해질수도있는 참담한 상황이었던것이다.
하지만 급박한상황에도 그들은 '자유'를 강조하며 절대로 시민들을 강제로 징집하지않았으며,
전쟁기간중에 대륙육군병사들의 월급이 늦게지급될때마다 항의시위가 일어날때에도
최대한 빨리 예산을 만들어내 군대의 사기를 신경쓰는 민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이는 결코 과장이아닌 실제 정사에 기록된 사실들이며,
극한상황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도리를 지키려는 미국인들의 일면을 느낄수있다.]
때마침 역사적인 승리인 사라토가 승전이후 대륙육군에 자원입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워싱턴과 대륙군 수뇌는 전쟁기간 내내 최대약점이자 골칫거리였던 병력의열세마저 뒤집고
독립전쟁 후기에 이르러서는 영국군을 총병력규모로 완전히 압도하기에 이른다.
매번 해전에서 자국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던 영국군을 손보고싶어서
단단히 벼르고있었던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약 2배에가까운 함선을 동원해
당시로썬 귀중한 대함(大艦) 전열함만해도 무려 28대를 동원해
체서피크만에서 격돌, 압도적인 숫적우위에 의해 승리한다.
미국에있어 최대의 골칫거리였던 영국군의 해상전력도 프랑스에의해 산산조각이 난것이었다.
이제 개전초기에 미국이 감수해야했던 모든 불리함은 역전되었다.
사라토가의 승전이후 유럽으로부터 독일과 프랑스계 군사고문들이 파견되면서
야전에서 맞닥뜨릴때마다 총성에 기겁해 멋대로 대열을 이탈해 패주하기바쁘던
오합지졸 민병은 군사고문들에의해 유럽식 정규군교리로 철저히 재교육되었다.
이제 그들은 영국군과의 라인배틀에서 도망가지않는다.
이제 그들은 프랑스해군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당당하게 화력전을 펼칠수있다.
이제 그들은 보급품이없어 헤진옷과 굶주린배를 쥐어잡는 거지민병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대군을 앞세워 덤벼오던 영국군보다 더한 물량을 앞세워 규모로 압도할수있게되었다.
미국-프랑스 연합군 약 16000명과 영국군 약 7000명이 격돌한
요크타운에서 격돌, 지상전에서도 마침내 영국군은 마지막남은 주력이 완전히 패배한다.
또한 해상은 프랑스해군에 의해 차단당하면서 영국군의 퇴로조차 사라졌다.
이제 더이상 영국군이 할수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그들은 결코 상상할수없었던, 최고로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했다.
일개 식민지 민병대와 시작했던 전쟁에서 대영제국이 패배한것이었다.
독립전쟁 당시,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전혀 유리하지않았다.
애초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의 지리정보는 주둔하고있었던 영국군측도 꿰고있었으며,
보급과 중화기, 병력 모든측면에서 미합중국의 대륙육군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뿐만아니라 개전초기에 일찌감치 거대항구거점을 잃고 시작했다.
아메리카에서 홀로 싸워낸 미국인들의 피비린내나는 투쟁이 마침내 지정학적 특성을 유리하게 만든것이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노력은 독립전쟁 이후에도 계속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이 자연의 축복만으로 성장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 그들에게있어서 축복이었던것은 지정학적 위치의 덕이아닌,
자유를 위해 싸웠던 위대한 선조들이 있었기때문이 아닐까.
-다음편에 계속-
ps. 이 글은 '미국의 지정학적 위치' 를 중심으로 가볍게 풀어나가는 글이기에
필요이상으로 자세한수준의 전쟁사를 모두 기술하지않고있음.
중간에 생략되거나 언급이 되지않은 내용도 적지않기에, 해당 전쟁사에 관해서
자세하게 알고싶은사람의 경우 아래의 참고문헌란의 사이트들을 방문해 읽어보길바람.
참고문헌
위키피디아
리그베다 위키
네이버캐스트
주워들은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