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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스 로건과 제임스 프랭코의 <더 인터뷰> 상영을 앞둔 북한이 미 행정부를 향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유일에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 독재가 지배하는 미지의 공간은 이미 사샤 바론 코헨의 <독재자>, <팀 아메리카>등의 영화에서

극단의 만화화, 풍자화를 거친바 있지만, 이를 문제 삼아 무자비한 대응을 경고 받은 것은 <007 어나더데이> 이후 처음에 가깝다.

미국 대중에게 프로 약쟁이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 세스 로건의 독재자 코미디가 얼마나한 무게감을 가질지는 뚜렷하지 않은 일인데,

김정은은 왜 또 한 번 불바다를 예고하고 있는가.

 

 젊은 세대인 김정은이 영화와 그 이미지 파급의 영향력에 대하여 예민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악당, 독재자가 주도하는 질서아래 미디어라는 것은 통제된 사회가 주로 그렇듯

껍데기뿐인 기쁨과 계획된 즐거움의 연속이기 마련이어서, 김정은의 우려는 세계 여론을 향한 것보다도 자국민의 사상혼란에 우선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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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북한 미디어는 붕괴 전 소련의 조작적이고 우롱적인 미디어 풍토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주창한 바 있듯이 예술은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믿어져서,

소비에트 영화는 언제나 관객의 태도 개선 수단으로 사용될 운명에 놓이기 일쑤였다.

 

조셉 스탈린 역시도 뮤지컬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1940년대 전성기를 맞은 헐리우드 뮤지컬을 사랑하면서도 이의 자유분방함을 두려워해

집단 농장이라는 뜻의 콜호스(Kolkhoz) 뮤지컬 시리즈를 창출, 노동의 성취와 승리로 대중을 선동하려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집단의 노력과 성취를 다루는, 잘 짜여지고 연습된 정제된 모습으로 등장해 관객의 사회적, 정치적 태도에 영향을 미치도록 기대되는 것들이었다.

 

전후 파시즘이 완전히 물러가고 나서야 동유럽권의 영화학교 졸업생들이 이러한 통제적 예술과 정치적 공포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검열을 피해서 관점을 은폐하고는 했지만 외국 관객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 관객에게 이는 더할 수 없는 흥미를 가져다준다.

프랑스 전통의 깊은 영향을 받은 폴란드 감독들, 아그네츠카 홀란트와 로만 폴란스키

그리고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이 가진 도덕적 관심사들 역시도 신비롭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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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안이던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가 보여주던 공격성, 그리고 사실성은 <Amator 카메라광>을 통해 주목받으며

사회주의리얼리즘에 대한 도전과 직면하게 되었다.

<Przypadek 우연한 사건><No End 끝은 없다>가 상영을 제한당하고 나서 제작된 <Dekalog 십계>,

그중 장편 개봉된 살인하지 말라-<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간통하지 말라-<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등이 드러낸 도덕적 딜레마로

키에슬로프스키의 관심이 옮겨간 것이 탄압적 타의에 의한 결과물인지, 개인적 성숙에 의한 것인지

명백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는 일이다.

 

허나 세피아톤으로 비춰진 도시 바르샤바, 도처에 놓인 삭막함과 고독은 키에슬로프스키가 도시와 인간,

그리고 좀 더 원초적인 무엇으로 다가가고자 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여

진정 예술이 하는 일, 관객이 삶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효용을 가진다.

 

두 개의 살인을 다루는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가지는 것보다 좀 더 깊은 존재론을 다루기에 흥미로운데,

이 역시 도덕적인 명확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에 가까운 성질의 것이어서 더욱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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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기반을 프랑스로 옮긴 키에슬로프스키의 관심사는 영화에서 드러나듯 또 한 번 전환을 맞게 되는데,

이번에 그의 관심은 다소 형이상학적인 대상과 탐구로 옮겨간다.

<베로니크의 이중생활>에서 그는 진정 시적인 영역으로 진입한다.

 

영화는 폴란드에 사는 베로니카(Weronika)와 프랑스에 사는 베로니크(Veronique)의 삶을 오가는데,

 이는 마치 도시괴담이 되어버린 도플갱어를 연상시키는 것이어서 다소 황당하게 다가온다.

허나 독일의 대문호 괴테역시 또 다른 자신을 목격하고 마음의 안정을 받은 적 있노라 주장했던가,

또 다른 내가 세상 어디에 살고 있어 서로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자체만으로 지극히 매력적인 것이다.

 

분신에 대한 묘사는 그 초끈 이론적인 설명이전에, 주로 악마적 자신, 지킬 앤 하이드식 내적 선과 악의 대척 구도로 다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센세이션 <블랙 스완>에서 연약한 발레리나는 욕망으로부터 발현한 이중적 자신에게 사로잡히기도 했다.

 

반면 <베로니크의 이중생활>에서 가상 밖의 분신, 다른 개체로서의 자신에 대한 본격적인 응시는

이성적인 해석 내지 이해를 불허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불가지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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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태어나 서로 다른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세상과 우주에 대해 배우며 자라온 두 여인은 아주 놀랄 만큼 비슷한 모습으로 성장한다.

 뛰어난 음악적 기질과 심장의 병까지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아름다운 두 여자는 서로의 존재에 대하여 알지 못하나

아주 미세한 직감으로, 스스로가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어릴 적 거꾸로 하늘을 바라보던 베로니카(Weronika)가 유리구슬 속 뒤집힌 세상을 바라보다 크라카우에 도착하는데,

세상은 기묘하게 왜곡된 형상으로 등장한다.

친구의 리허설에 갔다가 오디션 제의를 받는 그녀가 마치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처럼 신나게 거리를 지나다가,

시위대의 혼란 속에서 운명처럼, 자신의 분신을 바라본다.

 

오디션과 함께 그녀의 심장 문제도 전조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쓰러질 듯 위태롭게 길가에 앉은 그녀를 또 한 번 기이한 현실이 스친다.

그녀의 커리어는 점차 성공적으로 흐르는데, 옛 연인이 그녀를 방문해와 베로니카는 고민과 불안에 놓인다.

 허나 공연 무대에 솔로로 서게 된, 직업을 선택한 그녀의 세상이 장송곡처럼 흐르다가 갑자기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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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다른 곳에는 베로니크(Veronique)가 숨 쉬고 있다.

베로니카가 죽었을 때, 베로니크도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아마도 같은 운명을 맞으리라 예측되던 베로니크가 직관을 따라 노래를 그만두겠다는 의지의 선택을 내리면서,

포개지며 이어지던 삶은 새로운 정체성을 맞는다.

이때 영화는 장을 달리해 음악 선생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베로니크, 반쪽의 삶으로 이동한다.

 

넋 놓고 바라보는 아이들과 달리 인형 뒤 인형술사의 반영을 응시하다 돌아가는 베로니크의 뒤로

머플러의 긴 가닥이 끌릴 때,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이를 포착한다.

 

우리는 일련의 장면을 통해 베로니크의 연결이 사라졌음을 알지만, 알 수 없는 상대로부터 전화와 소포를 받아든 그녀가

아버지에게 사랑에 빠졌노라 고백하는 장면이 베로니카(Weronika)의 고백과 나란히 놓인다.

 

향기 한 방울 뒤에 놓인 가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듯이 한 가닥 실 넘어 세상도 무한히 신비로운 것이다.

재능을 포기한 그녀가 갈망한 선, 그리고 헨젤의 빵조각처럼 보내어진 단서들이 차곡차곡 모여 의미에 대한 기대로 변모하는 이쯤

집 앞으로 한 장의 테이프가 도착한다.

 

베로니카(Weronika)의 녹음테이프인 것으로 보이는 테이프를 듣고 베로니크가 그 연결고리의 실체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가 염두하지 못한 끈 장-피에르가 그녀의 집 앞에 등장했다 사라졌을 때처럼,

신비의 이면에 존재한 것은 베로니크가 상상한 실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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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수 없어 나비가 되는 알렉산드르의 인형이 베로니크를 사로잡고, 베로니크의 삶이 가진 양면성이 알렉산드르를 이끌었지만

알렉산드르의 조작적이고, 기만적인 방식으로 베로니크의 좌절은 수치감이 되어 그녀를 도망치게 만든다.

 

베로니카의 죽음으로 불가결해진 단절 때문에 그녀의 수명을 연장시켰던 선험적 직관은 이번에 여인을 기만한다.

 왜 자신을 선택했냐고 묻는 베로니크의 질문에 알렉산드르가 모르겠다고 대답해서

베로니크의 삶은 무작위의 선택과 맹목적 힘이 낳는 우연의 세계로 던져진다.

 

베로니카(Weronika)의 삶이 마치 거꾸로 맺힌 상처럼, 한가지 선택을 실험해 주었을 때 

베로니크(Veronique)는 다른 선택을 내려 생존할 수 있었다.

 직관이 만일 다른 우주에서 오는 신비한 것이라면, 그 가상이 사라진 현실은 어떤 운명을 맞을 것인가.

 

상징 뒤의 실체를 찾아 헤맨 관객을 좌절시키면서 알렉산드르가 벌인 추리게임은 관객과 키에슬로프스키의 것으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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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유일한 방법은 그 선택이 내린 결과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다.

알렉산드르가 선택으로 갈라지는 베로니크의 삶을 드러내고 그녀의 손으로 직접 마리오네트 인형을 움직이도록 했을 때

베로니크는 연인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간다.

 

이제 그녀 앞에 놓인 것은 무수한 확률과 불확실의 연속, 궁극의 자유다.

삶의 진실을 알아버린 베로니크가 아버지의 보호아래 숨어들어가야 할지, 실체를 껴안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할 때

차안의 그녀가 손을 뻗어 나무를 짚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선택에 따른 불안과 책임은 인간의 숙명, 직관이 끝난 곳에는 고독이 남는다.

허나 우리가 암묵적 추론, 명확하지 않은 전제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여정은 진실을 향한 여행이 되고, 대상은 스스로를 생각하고 체험하는 유일의 존재가 된다.

 

<베로니크의 이중생활> 베로니카와 베로니크의 삶이 가진 연속성, 내려진 선택 바깥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응시는

영화 문학의 선형 서사를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위에 입체화하고,

홀로 놓인 존재에 대한 위로를 건넨다.

 

빛과 소리 음악이 어우러지는 키에슬로프스키의 프랑스 영화가

결정적 측면의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우리 삶 앞에 꺼내어 놓는다.

 

 

 

 

힘드노.. 코미디 하나만 추천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