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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이라는 영화를 알고 있는가?

 

아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말고.

 IMDB 닷컴 top250 리스트를 읽다가 <Il buono, Il bruto, Il cattivo>라는 이름이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낯선 느낌을 받아본 사람도 간혹 있을 것 같다.

국내 유명 감독이 오마쥬 하였다가 밍숭맹숭 하다는 평을 면치 못했던 그 명작.

스파게티 웨스턴, 세르지오 레오네 전설적인 무법자 3부작의 첫 작품은,

오늘날 중국의 그것과도 비슷한 일본의 자국화, 그리고 낭만화를 통해

<석양의 무법자>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사실 서부영화라 하면 요즘의 스타워즈 세대들, 힙스터로 대표되는 뉴웨이브 세대들에게는 특별히 친숙하거나 인기 있는 장르는 아닐 수 있다.

공통된 향수, 기억 감정을 공유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도 웨스턴의 로망은 사실 어안이 벙벙한 것.

제임스 쿠퍼 <대평원>, 프란시스 파크만의 <오레건 통로> 같은 문학 작품들에서 출발했던 그 계보는,

코엔 형제의 <true grit>이나 <3:10 to Yuma>, <장고> 같은 영화들을 거치며 오늘날의 관객에게 그 잔영을 선사하고는 한다.

 

 카우보이, 총잡이가 등장하고, 거친 벌판에 놓인 선명한 선과 악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낭만, 일순간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인 두 인간을 보는 긴장은

애호가들에게 시대에 대한 짙은 로망을 선사하기도, 때로 타 문화권의 영화팬들에게 어느 장면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하는지 모르겠는

컨텍스트의 혼란을 안겨주기도 했다.

 

허나 존 포드의 <추적자>를 필두로 50년대와 60년대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던 서부영화의 시각적 스펙터클은,

미국 초기 시대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오늘날의 무비메이커들에게 너무도 매력적인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무수하게 뻗어나갔던 영화의 어떤 장르들 중에서도 가장 미국적이고, 오래도록 맥을 이어온 것이기에

그들 스스로에게 웨스턴이란 어쩌면 가장 특별한 신비감을 주는 무엇일 것이다.

 

일본에 사무라이, 영국에게 흑기사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멋진 놈, 카우보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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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오드리 햅번을 출연시켰던 <The Unforgiven>이 인디언에 대한 신화, 대자연과 수호신으로 출발하는 유기적 자연에 대한 죄의식을 담고 있었다면,

<Unforgiven용서받지 못한 자>는 보다 더 서부다운영화로 등장한다.

 

 족보주의자들의 말마따나 총 10편의 웨스턴 영화, 그중 다섯 편의 서부 고전에 출연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존재만으로 영화는 장르의 재료를 충분히 하는 것이나

나쁜 놈, 좋은 놈, 보안관과 창녀가 등장하는 서부극의 클리셰는 스스로의 아이콘에 의해 해체되었다가 재조립되며

이전의 장르와는 다른 정체성을 띄게 된다.

 

초반 못나고 못난 카우보이에 의해 저질러진 잔악스러운 폭력은 복수극에 으레 등장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의 단초인 동시에

현실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힘, 혼돈과 무질서가 남기는 자상에 대해 말하며 영화의 운을 뗀다.

 

 

개척된 그곳은 이전의 영화들에서 보아온 공간, 단순한 정의가 지배하는 낭만의 공간이 아니다.

선주민의 살육으로 비워진 광대한 평원은 질서를 세우려는 자와 건달들로 들어차게 되어서, 보안관의 권한이라는 것은 초법적인 것이 되었다.

 

보안관 리틀 빌이 여인의 얼굴을 난자한 카우보이를 보상을 받고 풀어주기로 하자 마담 앨리스는 여인의 억울함을 풀기위해,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카우보이와 동료의 목에 현상금을 건다.

 

돼지 농장을 하는 전직 총잡이 윌리엄 머니에게 이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그의 전설에 대해 들은 호기로운 청년, 스코필드 키드가 방문하면서다.

 

자꾸만 돼지를 놓쳐버리는 반백의 아버지는 청년의 말처럼 악명 높은 살인자의 모습과는 쉬이 겹치지 않는 것이나

자꾸만 병드는 가축들 때문에, 그리고 아직 어린 아이들 때문에 전설 속 그대는 오래된 파트너를 찾아간다.

 

살인자로 복귀하려는 그들이 여인이 당한 폭력에 사족을 더 얹어 전달하는 것이 가책의 무게를 덜기 위함인지 돈을 타내기 위한 명분인지 알 길이 없다.

<석양의 무법자>에서 이스트우드의 캐릭터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는

투명한 선의 존재가 아니라 어쩌다보니 정의의 편에 서게 된, 조금은 가여운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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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지불하러 온 카우보이들 중 하나가 여인 딜라일라에게 사과의 뜻을 비추며 선악의 구도는 더 불투명해진다.

 

어찌 세상에 물처럼 투명하고, 먹처럼 까맣기만 한 것이 존재할 수 있으랴.

동요하는 창녀들 사이로 앨리스가 나서 카우보이들을 내쳐버린다.

 

첫 장면 마치 전설처럼 적혀진 머니의 이야기는 그의 가장 악독한 면을 담는 것이었고,

스코필드 키드가 들은 소문도 신화속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머니의 실체를 바라보는 관객은 뱃속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연습 사격하는 총알은 자꾸만 빗나가고 말에 올라타는 것도 쉽지 않은 머니가 보안관 리틀 빌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장면 때문에

정의는 잠시 머니의 편으로 옮겨간다.

 

영화 속 법의 존재는 친절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은 무자비한 것이어서,

관객은 권력과 굴종만의 관계를 읽어낼 뿐 그것이 갖는 대의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기다리던 총격전이 시작되어도 우리 편과 적들의 편, 감정적인 유리는 발생하지 못하고,

사과하던 청년이 총알을 맞으며 사태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파트너 네드는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전설에 흥분하던 청년은 살인이 남기는 흉터를 마주한다.

 

 

집으로 가던 네드가 보안관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다 죽은 사실을 듣게 되면서 머니가 휘말린 폭력의 소용돌이는 머니 자신의 것으로 옮겨간다.

‘This time, It’s personal.’이라는 유명한 프레이즈처럼, 그가 위스키를 들어 마시고 지켜온 선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머니의 복수는 서부극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허나 이번에, 복수는 결코 달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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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이 주는 생생한 색깔, 스펙터클과 흥분은 관객을 압도하려는 영화산업의 효자 장르였다.

미국의 장려한 풍경들은 친숙함 또는 외경을 주었고,

<하이 눈>식 무법자는 오늘날 인물의 기이함과 서부적 폭력에 대한 환상을 낳게 되었다.

 

허나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때로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화 속 차용된 대체된 현실은 가상의 것이나, 이미지가 주는 힘이라는 것은 너무 강렬해서

개조된 현실은 종종 실제의 그것을 압도한다.

현실의 그것을 마주하기에는 너무도 두려운 일인데도, 우리는 가상화된 폭력에서 한발 물러난 뒤,

그것에 응원하고 박수치며 흥분한다.

 

60년대 서부극에서 총연 뒤로 사라졌던 정의의 사도는 영웅인 듯 등장하여 악당으로 사라진다.

오늘날 폭력을 매력적인 알력으로 미화하는 영화들이 그 비판을 면치 못하듯, 서부영화는 그 주인공에 의해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훗날 <그랜 토리노>로 화면 밖으로 사라진 이스트우드는 전설로 남지만 그는 결코 연기속에 머무려는 인간이 아니었다.

해체된 캐릭터는 다시 모여 전혀 새롭거나 진정 평범한 인간을 구성하며 이전의 작품들과 관객의 의식을 헤집는다.

요즘 세대에게 수퍼히어로를 해체한 놀란이 있었다면 이전 세대에게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