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1일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 습격이었다.

 

 5월 21일 12시경에 APC(군대에서 사용하는 장갑차)등 차량 9대를 앞세운 무장시위대가 총기를 난사하며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당시 광주교도소를 경비하고 있던 31사단 96연대 2대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겼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을 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전 교사는 이러한 북한의 지령에 비추어 광주교도소의 습격이 제5열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21일 16시 30분경에 당시 전남대에서 시위대의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던 3공수여단을 광주교도소로 긴급 출동시켰다(김순현 전교사 작전참모 검찰 심문조서).

1920 분경, 광주교도소에 출동한 3공수여단 병력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교도소 주변에서 방어용 바리케이트 설치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때 교도소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시위대가 3공수여단 병력에게 기습총격을 가하여 민간인 2명이 사망하였다. 

5월 22일, 오전 9시경에는 2 1/2톤 차량에 LMG를 장치한 무장 시위대 6명이 광주교도소를 총격 기습하여 상호간에 총격전이 일어났고, 10시 20분경에는 소방차를 탑승한 무장시위대 10여명이 교도소에 총격을 가해왔다. 

5 월23일 10시 20분경에도 소방차에 탑승한 4명의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교도소를 경비하던 3공수여단에게 전원 체포되었고, 19시경에도 무장시위대가 계엄군에 총격을 가하면서 교도소를 습격하여 상호 총격전이 벌어져 계엄군 1명이 부상하고 무장시위대 1명이 사망하였다.

광주교도소에 대한 무장시위대의 무력공격은 5월 21일을 전후하여 6차례나 감행되었는데 광주교도소에는 당시에 간첩 및 좌익수 170여명을 포함하여 2,700여명의 복역수가 수용되어 있었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 진술(1996.7.11. 5.18사건 제1심 22차 공판)

문: 전교사 특전 상황일지에 의하면 광주사태 당시에 광주교도소에는 사상범이 120명, 강력범이 300여 명 등 2,640명의 수용자가 수용되어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광주교도소는 국가주요보안목표이었지요. 

답: 예

문: 광주교도소에 무장시위대가 습격을 한다면 계엄군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격퇴해야 되지 않습니까.

답: 예

문: 무장시위대가 5. 21.부터 5. 22. 어간에 전후 6차례에 걸쳐서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답: 예 

문: 그리고 총격전이 벌어져서 피아간에 사상자가 발생한 사실도 알고 있나요 

답: 예

문: 교도소의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3공수여단 12대대 작전병의 수기에 의하면 무장시위대들이 고속버스, 소방차, 트럭 등에 탑승하고 엘엠지-30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계엄군이 방어하고 있던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였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받았나요

답: 예, 그렇게 보고 받았습니다.

문: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이 설사 민주화 요구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지요. 

답: 예 

문: 김순현 장군의 제1회 검찰 진술조서에 의하면 북괴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을 시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을 무전기를 통하여 수차 들었기 때문에 5. 21.에 공수부대를 교도소에 배치한 것이다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답: 저는 그 내용을 모르는 사실입니다. 


 

1982년 육군본부 / 1985년 안기부 자료 및 부연 설명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5.18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의 96-103에는 1980년 당시의 부검 결과가 정리돼 있다. 필자는 이를 여러 번 세어가면서 총상 사망자 116명 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이 M16 이외의 총으로 사살됐다는 통계를 만들었고, 이는 1982년 육군본부가 작성한 “계엄사” 의 통계 72%와도 거의 일치한다.  

 

위 안기부 통계는 5월의 더운 일기에 시체는 썩어가고 있고, 전라도의 유지들과 의사들, 군의관들이 총 동원되어 썩어가는 시체를 붙잡고 공동으로 조사한 결론이다. M16의 충상은 타 총상에 비해 독특하다. 들어간 자리는 볼펜 끝과 같이 작고 뚫고 나간 자리는 컵의 크기로 넓다. 따라서 안기부 자료의 기타총상은 M16이 아니라 무기고 총상이다.  

 [출처 -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


 

 

 

 

1995년 검찰조사 결과 및 부연설명


반면 1995년에 있었던 검찰조사는 허무맹랑하다!!  당시 조사관들은 유족들에게 구두로 조사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이 M-16으로 죽었나 아닌가 하고...  물론 상당수 유족들은 돈을 더 받기 위해서 M-16에 맞아서 죽었다고 허위진술을 했다!!  시체장사를 한 것이다!!!

 

하단은 그 조사결과이다!  어처구니 없다!  단지 돈 많이 받고자 하는 유족상대로 구두 조사만 했다!!


1995 년 검찰 조사결과는 민간사망자 166명 중 165명에 대해 사인을 분류했다. 165명중 총상은 80%에 해당하는 131명, 자상 4, 타박사 18, 차량사 12로 단순화됐다. 총상 131명 중 74%가 M-16 총상, 나머지 26%에 해당하는 35명이 카빈총상(26명) 및 기타총상(9명)으로 분류돼 있다. 기타총들은 M1, AR, 기관총 등 칼빈과 기타총들은 시민군이 소유한 것었고 아울러 일부 시민군들도 M-16을 보유하고 있었다,  계엄군에게는 오직 M-16만 있었다.

 

 



ps - 광주사태는 반드시 재조사해야 합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임산부를 살해하고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다.' 등등의 해괴하고, 자극적인 유언비어들에게 많은 광주/목포 철없고,순진한 젊은이/청소년 등이 속아서

-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처럼 -  -어리거나 사회불만자들이 많이 참가한 광주사태 -

 

사실 처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7여단이었고, 7여단의 주둔지는 전북 금마, 여단 병력의 40%는 호남출신이었다. 즉, 유언비어는 모두가 거짓이었고, 고도의 심리전 전술로 작성-유포된 것들이었다.

 

사실 광주사태 그들중 적지않은 수는 자신들이 과실/고의로 서로 쏘아 죽이거나 다친것입니다.... 학력/경제력 등의 사유로 군면제자나 아직 나이가 어려 군대에 입대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참가를 했다고 합니다...
더우기 교도소를 해방시키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수의 광주/목포 시민들이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고, 자식들은 공무원/공사/공기업/정부산하기관 등에 엄청난 가산점을 받고 있지요....  

아울러 보상금도 2002년도 서해교전 당시 전사한 국군(해군)보다도 훨씬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과실/고의로 시민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힌 사람들은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북한 공작원들의 개입여부도 확실하게 조사해야 합니다.




참고로 -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는 계엄하에서 조선대/전남대에 합법적인 주둔을 하기 위해 진입한 계엄군에게 일부 불순분자(대학생들로 추정됨)들이 불법적으로 돌/화염병 등을 이용해 계엄군을 무참히 공격함으로써 발생되었다.. 

- 당시 합법적인 계엄하에서 서울/부산/대구/대전/인천 등등에 모두 계엄군이 투입되었고,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 오직 광주만 큰 충돌이 있었다..  이 충돌은 유언비어로 인해 점점 더 악화되었다..







요약 - (1)1995년 광주사태 재조사시 검찰은 구두조사만 해서 돈을 더 받을 욕심에 상당수 사람들이 m-16에 맞았다고 증언했다. 


         (2) 수 많은 사람들이 천문학적인 보상금과 국가유공자가 되어서 자신 또는 자식들이 공무원/공사/공기업/공공기관에 취업되었다.


         (3) 광주사태는 다시 재조사/재조명되어야 한다...    - 진실에 가깝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