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정환(方定煥, 1899.11.9 ~ 1931.7.23)
호는 소파(小波)
잔잔한 물결과 같이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이지만 끊임없이 바꾸겠다는 의지를 표현해.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어물과 미곡을 매매하던 방경주란 사람의 장남으로
어릴때 우연히 삼촌따라 학교에 간것이 우연이 되서 보성소학교에 입학하게돼.
거기서 어리닝 토론 연설회인 [소년입지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해
그러면서 보통학교와 공장을 전전하며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한 여러 글을 접하면서
19살 되던해에 천도교 3대교주였던 손병희의 3째딸과 결혼하면서 사위가 돼.
그 후 20세에 장인이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진학을 하고
1년뒤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신문으로는 최초로 보도한
조선독립신문을 동료와 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피검되어
1주일간 갖은 고문을 받그 풀려나게 돼.
그 뒤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대학에서 아동심리와 아동문학을 공부하고
안데르센동화, 그림동화, 아라비안나이트 등을 직접 번역하여 집필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해
그뒤 1923년, 25살에 소년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색동회]를 조직함은 물론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도록 서울에 연락했는데
조선소년운동협회 주도하에 잘 실시되었어.
이 날 <어른에게 드리는 글>, <어린 동무에게 주는 말>, <어린이날의 약속> 등 12만장에 달하는 전단을 배포해
그 뒤로는 이에 영향을 받아 각 지에 자생적으로 시작된 어린이-청소년 운동을 통합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아동에 관한 여러 학문을 공부해.
하지만 너무 열성적으로 활동한 나머지 1931년에 과로와 비만 거기다가 엄청난 애연가였던 탓에
건강이 악화되어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었으며 거기에 결정적으로 동아일보의 신동아창간으로 인해
개벽사의 판매조직이 와해되면서 스트레스가 겹쳐 화병으로 33세가 되던 해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자신을 데리러왔으니 가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아.
지나치게 상하관념을 강조하던 잘못된 유교관념에서 어린 아이들은 약자가 될수밖에 없었기에
방정환은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어.
친일파라는 소문이 있지만 실은 그냥 일본의 문학가 이와야 사자나미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을 호로 썼다는 소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령 진짜 존경해서 그랬어도 개인으로서 어떤 인물을 존경한것이 친일과 바로 연결되는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리고 방정환은 개인적으로도, 일제의 검열 때문에 많은 글들이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어.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냐는 의견도 많은데,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진보주의자로 보는게 맞을거야.
아이들에게 인권의 개념을 도입한 것부터 시작해서, 핵가족, 단추를 쓰는 개량한복, 양성평등론, ‘딸 있어도 학교에 안 보내겠소'와 같은
대안 교육의 주장 등에서 진보적인 측면이 드러나거든.
그의 동료였던 백조의 동인(카프로 이어짐)이나 일본 유학 시절의 김찬(후의 자생적 공산조직 화요회의 수장이 됨) 등도 사회주의자가 많았지만
다만 어디까지나 친숙했단 거지, 직접적으로 활동을 했다는 의미는 아니야.
일화로는
본래 몸이 상당히 허약하였기에 장인인 손병희가 보약을 많이 먹였고 그로 인해 살이 쪄버렸는데 너무나도 뚱뚱해서 맞는 허리띠가 없었고
택시를 탔는데 너무 무거워서(...) 택시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야기 하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서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감옥에 갔을 당시 죄수들에게 얘기를 너무 재밌게 해줘서
(슬픈 이야기를 하면, 몰래 듣던 간수들도 눈물 흘릴 정도) 나중에 석방될때 다른 죄수들(+간수들)이 못 가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입장으로써 존경하는 위인들중에 한분이야.
사실 아침에 썼어야했는데 어제 친구들 만나서 놀다가 늦잠자고 이제 써서 늦은 감이 있지만,
게이들도 연휴 마무리 잘하고, 어린 아이들을 지켜주고 보듬어줄수있는 민주시민이 되었으면 좋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