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2-1탄. 마지막 백제 부흥기의 서막 - 무왕의 등극과 신라의 남방진출

http://www.ilbe.com/2684290733










군사적 관점으로 본 백제 멸망사를 쓰던 게이야.


사실 2-1탄 쓰고 바로 2-2탄으로 넘어가야 됬는데, 자료 수집이 여의치 않고 노잼인거 같아 잠시 연재를 중단하고 유럽으로 시선을 돌려 18c~19c 프랑스를 중심으로 본 전쟁사에 대해 써볼까해ㅇㅇ


이번글은 돈때문에 촉발된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로 나타난 혁명전쟁 초반부를 알아볼께ㅋ


자세하게 살펴볼테니 다소 지루하겠지만 이해 바라盧...ㅋ
























1.jpg



다들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 원인에 대해 알고 있을거야.


세계사 시간에 졸았다고 해도 or 고등학교때 이과였던 게이들이라도 얼핏 들었겠지만, 지금의 자유주의가 있게한 크나큰 사건이야ㅇㅇ


자유를 위해 일어난 사건으로 포장했지만 사실 돈 때문에 일어난 세계사에 큰 파란을 몰고온 혁명이지.





2.jpg


전국 삼부회(États généraux)



촉발 원인은 국가 재정이 파탄날 지경에 이르자, 당시 국채란 개념이 없던 시기이므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세수를 늘리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100년만에 삼부회(États généraux)를 소집한것이 문제가 되었어. 


※ 국채란 개념은 있었지만... 이건 밑에서 간략하게 설명할께ㅋ



하지만, 이러한 삼부회의 소집은 당시의 문제가 아니라 약 100년전, 어느 한 인물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100년전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살았던 시대로 넘어가보자ㅋ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약 100년전,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통치하고 있었어.



3.gif



루이 14세는 L'ete, c'est moi , '짐이 곧 국가이니라' 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가 알듯이 루이 14세는 근대 유럽에서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드는 기초를 닦았지. 


4.jpg



일단,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화려한 궁정 생활로, 프랑스 뿐만 아니라 온 유럽, 나아가 먼 훗날 전 세계가 찬란한 프랑스 문화에 대해 하악거리게 만들었으며, 또한 프랑스가 침공받은 일도 없는데 줄기차게 여기저기 전쟁터에 끼어들어 프랑스의 권익을 지켰어.


문제는 단지 권익이라고 뛰어든 전쟁이 그닥 이익이 없다고 해야 정답이겠지만..ㅋ




5.jpg



권익을 위해 뛰어든 전쟁만 해도 네덜란드 전쟁, 플랑드르 전쟁, 에스파냐 계승권 전쟁, 아우구스부르크 동맹 전쟁 등등 수많은 전쟁에 프랑스가 개입하여 프랑스 주변에 다른 강대국이 생기지 못하도록 하였어.




6.jpg


(간지가 뭔지 보여주는 리슐리외 추기경 - 라로쉘 공성전)



특히 라인강 너머 現 독일에 위치했던 신성로마제국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지 못하고 자잘한 소공국들로 나뉘어 100년 넘게 지리멸절한 것은 리슐리외 - 루이 13세 , 마자랭 - 루이 14세 콤비가 대를 이어가며 부단히 간섭한 결과라고 할 정도였지.


이 찰떡궁합의 콤비 덕택에 온 유럽이 프랑스 = 유럽의 강대국이자 문화선진국으로 인식하게 되었어.


하지만, 이러한 영광은 거져 얻은게 아니였어.




7.jpg


(미국 독립 전쟁 中 프랑스 해군과 영국 해군이 맞 붙은 세인트 키츠 해전)


루이 14세는 화려하게 살다 영광만을 남기고 갔지만 프랑스 부르봉 왕가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려야 했으며, 루이 14세의 영향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루이 16세 또한 영국 견제라는 목적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도 아낌없는 지원을 했는데, 가뜩이나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막대한 양의 군비가 지출된 결과, 루이 16세의 왕정은 재정 파탄에 이르게 되었어.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국채의 기준이 애매모호 했으며, 채권 또한 개념이 정착하여 싹트던 시기였으므로, 당시 국가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세수를 늘리는 방안밖에는 없었어.  


사실 국채라는 개념이 있었으며, 프랑스 또한 70년전 이러한 국채를 발행한 적이 있지만, 똥망한 예가 있어서 세수를 늘리는 방안밖에 없었다고 해야 정답이야.


이건 나중에 외전으로 설명해볼께ㅋ




2.jpg


무튼, 세금을 늘리기 위해 소집한 삼부회에서 제3의 계급에 속해있던 신흥 계급, 부르주아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진 것은 밀게이들 또한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어떻게 보면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도 돈이야.


대혁명의 씨앗이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구축에 의해 흥청망청 국가 재정을 써서 일어난 최악의 시나리오였지.



 


혹시 루이 16세의 삼부회 소집이 당시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루이 16세가 결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이들이 있을거 같아서 일단 매끄럽게 넘어가기 위해 삼부회 소집의 원인이 되는 사건을 한번 살펴보고 넘어가보자ㅋ









혹시 밀게이들 중 La Journee de Tuiles 라는 말 들어봤盧...?


사학과 다니는 게이들 중에서도 서양사학 공부하는 애들도 얼핏 들어봤거나, 못들어본 게이들도 있을거야.




8.jpg


직역하자면, 기왓장의 날 or 벽돌의 날 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인데, 이 La Journee de Tuiles 사건은 1788년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에서 이러난 사건을 뜻해ㅇㅇ


어떤 사람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전 불안정한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자는 이 사건을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사건이지.


대체적으로 필자가 프랑스에서 공부할때, 현지인들은 La Journee de Tuiles 사건을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으로 보는 편이더라ㅇㅇ





9.jpg


(원숭이에게 쳐맞쳐맞 하고 있는 대영제국 황태자!?)



혹시 프랑스 왕위계승자의 칭호에 대해 들어본적 있盧? 여러 밀게이들이 알듯이, 영국 왕위계승자의 칭호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로 우리나라말로 직역하면 웨일즈 대공이지? (Prince 라는 단어가 왕자가 아닌 대공을 뜻함ㅇㅇ)


프랑스 왕위계승자의 칭호는 도핀(Dauphin de France)으로서 정식명칭은 비에누아의 도핀(Dauphin de Viennois)이야ㅇㅇ


※Dauphin을 불어식 발음으로 읽으면 도우~퍼(dofɛ̃)로 발음이 돼ㅇㅇ; Dauphin de Viennois을 직역하면 빈의 도핀이란 뜻인데, 이는 부르봉 왕가의 시조를 거슬러 올라가야 돼ㅇㅇ; 부르봉 왕가의 시조는 앙리 4세로 나바르 왕국의 시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직계조상이 오스트리아계이기 때문에 비에누아(Viennois)라는 단어가 붙은건데, 여기까지 아는 사람은 드물더라고;; 즉,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편함 ^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이 도피네(Dauphiné) 지방의 중심도시가 바로 그르노블(Grenoble)이거든.


이 La Journee de Tuiles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과 마찬가지로 국가 재정파탄이 원인이였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이러한 소동이 일어났지만 이사건이 유명한것은 제일 먼저 행동에 나섰다는것이였지ㅇㅇ



10.PNG


브리안( Étienne Charles de Loménie de Brienne, 1727.10.09 ~ 1794.02.16 )



이 사건의 발단은 루이 16세의 재정 장관이자 툴롱의 대주교인 브리안( Étienne Charles de Loménie de Brienne )추기경이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여하려 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도시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어.


이러한 세금 부과와 더불어 당시 흉년이어서 빵값이 폭등했기에 불만이 쌓여갔고, 더욱이 특권계층인 교회와 귀족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특권행사에 전혀 지장이 없었기에 불만은 더욱더 극에 달했어.



11.jpg


칼론 (Charles Alexandre de Calonne, 1734.01.20 ~ 1802.10.30)



첩첩산중이라, 특권계층은 자신들에게 과세하려는 것을 반대했고, 특권계층에 대한 과세를 지지했던 칼론 자작(Charles Alexandre de Calonne) 은 1787년 사임했고, 과세를 반대하는 브리안 추기경이 재정 장관이 되면서 불만이 폭발 직전에 다다르게 되었지ㅇㅇ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1788년 6월 브리안 대주교의 새로운 세금부여에 대해서 도핀 지방의 대표들이 그르노블(Grenoble)에 모여서 회의를 하기로 결정하는데, 이에 대해 중앙정부는 군대를 파견하면서 걷잡을수 없게 되었어.

 





1788년 6월 7일 진압군이 그르노블(Grenoble)에 도착해서 사람들을 거리에서 내몰게 되는데. 몇몇 자료들에서는 군대가 의회를 해산하기 위해 의원들을 몰아내기 위한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해ㅇㅇ


8.jpg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진압에 반발하여 예수회 대학 근처의 건물 지붕으로 올라가서 거리에 있는 군대를 향해 지붕 기왓장&벽돌을 던졌지 (그래서 이 날의 이름이 기왓장의 날...이라 부르게 된거지ㅇㅇ;)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진압군은 그르노블에서 물러나야했어.


이러한 시민들의 봉기에 진압군 사령관은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당황했으며, 결국 중심도시인 그르노블이 아닌 다른 외각지인 비지유(Vizille)에서 도피네 지방의 의회를 소집하는것에 동의했으며, 1788년 6월 21일 비지유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구성된 회의가 개최하게 되었지ㅇㅇ


이곳에서 사람들은 삼부회(GeÉtats Généraux)를 개최할것을 요구했으며, 개인에 대한 투표권을 요구하게 되면서, 우리가 아는 루이 16세의 삼부회 소집 칙령이 전국 각지에 퍼지게 되었어.




12.jpg



루이 16세의 칙령이 전국에 하달되고 1789년 5월 5일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개최 되었지만, 이 삼부회 소집으로 인해 구제도 (앙시엥 레지므-Ancien régime)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들어나면서, 당시 성장하던 제 3계급의 한 일파인 부르주아 계급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터진게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지ㅇㅇ;


전 인구의 98%를 차지하는 제 3계급들이 삼부회 소집으로 결정된 전체 세금의 95%를 부과받았는데, 당시 프랑스 경제의 92%를 차지하던 제 1~2 계급들은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으니 얼마나 빡치겠盧?





사실 제 1~2 계급들이 이러한 세금부과에 대해 다 찬성한건 아니야ㅇㅇ;


13.jpg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Princede Benevento, 1754–1838)



대표적으로 제 1계급인 성직자들의 중 오툉(Autun)의 주교였던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Princede Benevento)은 부족한 국가 재정을 충당시키기 위해 당시 가장 많은 재산을 축적하던 교회와 귀족들이 발벗고 나서서 자신들의 자산을 국가에 귀속시키자는 주장을 하였다가 삼부회 회의 도중 파면 당하는등 곳곳에 나름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걱정하던 인물들이 있었지만, 다들 알다싶이 루이 16세가 소집한 삼부회는 인구 대비가 아닌 각 계급의 숫자가 똑같이 300명씩이였으며, 제 1~2 계급은 1인당 2표씩 행사한다는 등의 투표 & 토의방식 때문에 제 3 계급의 의원과 제 1~2계급 사이에 심각한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지ㅇㅇ



14.jpg



뭐 5월 5일에 시작했던 삼부회가 서로간의 반목의 골이 깊어지다 결국 다음달인 6월 17일, 부결심의에 반대한 제 3계급의 미라보(Honoré Gabriel Victor Rigueti Conte de Mirabeau), 시에예스(Emmanuel-Joseph Sieyès)등의 일부가 반발하며 테니스장에서 국민의회를 발족하고, 이를 묵과할 수 없던 궁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기 위해 진압군을 집결시키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지ㅇㅇ;


뭐 이 뒤의 상황은 익히 알고 있을거니 패스~ㅋ






무튼 혁명에 성공(?)해서 삼부회를 대신해서 들어선 국민의회는 좌파빨갱이 같은 방안을 내놓았는데, 앞서 언급한  오툉의 주교였던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Princede Benevento)의 생각이였어. 즉, 교회 및 귀족의 토지 자산을 몰수하여 그것으로 메꾸자는 것이었지.


※이 탈레랑을 기억해둬ㅇㅇ;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 풍운아로서 프랑스 정계에 등장시키는데 큰 힘을 보탠 조력자이거든ㅋ





15.jpg


( 당시 발행된 아시냐(Assignat) 지폐 )



이렇게 국가가 몰수한 토지를 담보로, 1789년 12월 5% 이자의 공채를 발행하는데, 경제학 시간에서도 배우는 유명한 아시냐 (Assignat) 지폐야. 


이 아시냐 지폐는 처음에 채권이었으나, 나중에는 0% 금리의 지폐로 쓰이게 되었는데,  보통 돈은 태환지폐(兌換紙幣-Le papier monnaie convertible)라고 해서, 금과 바꿀 수 있는 증서같은 것이었는데 반해 아시냐 지폐는 살짝 개념을 바꿔서 토지와 바꿀 수 있는 증서였지.


굳이 말하자면 태환(土)지폐라고 할까나...?ㅋ







무튼, 아시냐(assignât)지폐는, 정부가 강제로 지정or 할당한 (assigned-assigner) 돈으로서, 돈이라기 보단 강매한 채권형식이라고 보는게 정확할듯해ㅇㅇ


여기까지만 해도 어이없는데, 이미 파탄난 경제로 인해 돈이 궁해진 국민의회는 이듬해인 1790년부터는 국유화로 몰수한 토지의 총 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아시냐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다들 알다싶이 결과는 뭐다 ?? 












 ☆★욧시!!★☆ ☆★시즌!!★☆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일어난것도 큰 문제였는데, 더더욱 문제를 크게 만든건 국민의회의 다음 타자였던 국민공회였어.


즉, 국민공회가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잡는답시고 생필품 가격 상한제를 강제하자, 생필품이 시장에서 싹 사라지고 암시장에서만 거래되는 등, 나비효과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수차례의 폭 to the 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지.



16.jpg

 

결국 아시냐(Assignat) 지폐는 가뜩이나 혁명으로 어수선한 프랑스 사회를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고 7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는데, 더더욱 웃긴건 퇴장할 때 국민공회가 이 지폐를 액면가의 3.33%에 해당하는 토지와 교환해주는데, 그 비율이 개막장이였어ㅋ





무려 투자 손실율 96.67%  !!!





더군다나 투자한 것도 아닌 강매한 결과가 저런거니... 참ㅋㅋㅋㅋ

 

무튼, 부르봉 왕가와 마찬가지로 국민공회 또한 개막장의 경제적 상황을 연출하면서 가뜩이나 혁명때문에 불안하던 프랑스 정국이 요동치게 되었어.







당시 프랑스 내부의 상황을 설명하느라 뒤로 넘어와 버렸盧....ㅋ


일단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있던 1792년 4월로 가보자ㅋ  










17.jpg


프란츠 2세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1세)



이전해인 1791년 6월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가 앙뚜아네트의 친오빠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헝가리의 왕,오스트리아 대공인 레오폴트 2세에게 도망치려고 하다가 바렌느(Varennes)에서 혁명군에게 발각되어 유폐 된 후, 그 뒤를 이어 1792년 3월에 등극한 프란츠 2세(훗날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가 자신의 고모가 유폐된것과 프랑스의 혁명 열기가 전 유럽에 퍼질까봐 두려워하여 프로이센,영국,러시아 그리고 프랑스 왕당파등을 규합하여 국민공회를 공격하려하자, 국민공회는 1792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선빵ㅋ)을 하며 역사책에 적혀있는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어ㅇㅇ





18.jpg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프랑스의 정치가였던 당통(Georges Jacques Danton)은 프랑스의 국경에 대해서 자연경계(바다 ~ 라인강~알프스산맥~피레네산맥)이 경계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이 자연 경계야 말로 프랑스 본연의 영토를 한정지어주는 것이며, 외국이 차지한 이 자연 경계 안의 영토를 프랑스가 되찾는것은 프랑스의 주권을 지키는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했어. 



19.jpg


당통이 주장한 프랑스 영역

( 라인강의 기준이 어디냐에 따라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 )



이 주장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사람들은 프랑스의 전쟁은 영토확장이 목적이 아니라 프랑스의 주권을 지키는 행위로 생각했지ㅇㅇ





반면 다른 군주국들은 프랑스의 혁명정신이 다른 유럽국가로 번져서 혁명을 연쇄적으로 일으키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하게 되었다고 위에서 언급했지? 즉, 혁명의 열기를 막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전쟁도 불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두가지 생각은 혁명전쟁이 오랜기간 지속되게 된 원인이 되었어ㅇㅇ




 








잠시 시간을 거슬러 1년전으로 돌아가서 오스트리아에 선빵을 날리기 위해 프랑스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면, 국민공회는 독일(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에 대한 방어로 군대를 세개로 나누었고, 이 세방면에는 각각 뛰어난 장군들을 배치했는데 다음과 같아ㅇㅇ






21.jpg


로샹보(Jean-Baptiste Donatien de Vimeur, comte de Rochambeau)




북부 방면군에는 로샹보(Jean-Baptiste Donatien de Vimeur, comte de Rochambeau)가 발랑시엔(Valenciennes)에 그의 사령부를 두고, 3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었으며, 로샹보 휘하에는 다르빌(Darville), 비롱(Armand Louis de Gontaut)백작 ,델베그(Dellveg),다몽(Damon) 등이 지휘관으로 있었어ㅇㅇ





22.jpg


라파예트 후작(Marie-Joseph-Paul-Roch-Yves-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 Fayette)



라파예트 후작(Marie-Joseph-Paul-Roch-Yves-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 Fayette)은 중앙 방면군을 지휘했으며,사령부를 메츠(Metz)에 두었고 20,000명의 군사를 이끌었으며, 그의 휘하에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 벨레몽트(Bellemont) , 크릴롱(Crillon) 등이 있었지.






23.jpg


뤼크네르 백작(Nikolaus, Count Luckner)



반면 50,000명이 주둔한 라인 방면군은 뤼크네르(Nikolaus, Count Luckner)백작이 지휘했는데(現 원수), 그는 독일 출신으로 란다우(Landau)에서 스위스까지의 넓은 전선에서 지휘했고, 여기에 베르티에(Berthier) , 라메트(Ramette) , 테오발 딜롱 등이 휘하에 있었어. 





이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아ㅇㅇ





20(2) 복사.jpg




이러한 배치가 끝난후, 혁명전쟁의 첫번째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이 3개 방면군은 뒤무리에(Charles François Dumouriez)와 칼레르만(François-Christophe Kellermann duc de Valmy)부대로 재편되었으며. 첫 전투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저지 주(Low Countries-윗짤의 네덜란드 부근의 주황색과 그 바로 윗 부분)들을 침공하면서 시작됬어. 




24.jpg


뒤무리에(Charles François Dumouriez)



이곳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으로  계획은 뒤무리에(Charles François Dumouriez) 장군이 계획했지만, 휘하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라파예트 후작(Marie-Joseph-Paul-Roch-Yves-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 Fayette)와 로샹보 백작(Jean-Baptiste Donatien de Vimeur, comte de Rochambeau) 그리고 뤼크네르 백작(Nikolaus, Count Luckner)는 각각 다른 목적으로 전투에 임했지ㅇㅇ;



25.jpg


작스-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레데릭 요시아스(Prince Frederick Josias of Saxe-Coburg-Saalfeld)



당시 뒤무리에의 북부 국방군을 막기 위해 파견된 오스트리아 장군은 작스-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인 요시아스(Prince Frederick Josias of Saxe-Coburg-Saalfeld)인데, 당시 콜로뉴(Cologne) 지방에서 42,000명을 이끌고 와, 뒤무리에가 자신의 휘하 장군들에게 나누어준 부대 사이로 파고 드는 전략을 취했어ㅇㅇ



 



당시 뤼크네르(Nikolaus, Count Luckner) 휘하 부대 중 하나를 맡은 테오발 딜롱(Théobald Dillon)장군은 4월 29일 10개의 기병 대대를 포함한 7,500명과 대포 36문을 이끌고 릴(Lille)에서 투르네(Tournai)를 향해 이동중이었는데, 이때 요시아스 공작(Prince Frederick Josia) 휘하 장군이였던 하펜노우트(Johann Peter Beaulieu) 백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 5,000명 & 대포 18문과 라망(Laman) 근처에서  마주쳤고, 오스트리아 군의 출현에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어. 



26.jpg



딜롱(Théobald Dillon)장군은 병사들을 다시 모아서 전열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실패했으며, 전 군이 패닉상태에 빠지며, 400명의 사상자를 내며 간신히 릴(Lille)의 성문까지 도망쳤지만, 하펜노우트 백작의 오스트리아 군은 단지 30명만 전사했지;

 

딜롱 장군이 릴(Lille)로 돌아왔을때, 이러한 추태에 그의 병사들은 장군을 "반역자(traître)"라고 비난하고 살해했고, 릴(Lille)의 시민들은 그의 시신을 모욕했는데, 공병대의 베르토이 중령 역시 같은 운명이었고, 다른 살아남은 장교들은 "귀족(aristocrate)"이라 조롱당했어.


아무리 군 커리어가 화려한 장군이라도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국민군을 지휘한다면 이런 결과가 나타날거라는 예견이 사실이 된 전투라는게 지배적인 의견이야. 훈련받지 못한 징집군이 오스트리아 정규군에게 학살 당하는건 당연한 이치이지 않盧ㅇㅇ;







같은날 딜롱을 지원하기 위해 온 로샹보 휘하의 비롱(Armand Louis de Gontaut)이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몽스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에노주(Henegouwen 州)의 끼에브항(Quiévrain)를 손쉽게 장악했으며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몽스(Mons)에 도착했어. 


27.jpg



하지만 몽스는 오스트리아 군에 의해서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으며, 비롱 장군은 몽스를 공격하기전 딜롱 장군이 투르네(Tournai)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후 다섯시가 될 무렵 그의 우익은 요시아스(Prince Frederick Josias) 휘하의 오스트리아 군에 의해서 공격당했어ㅇㅇ; 


이 공격은 성공적이어서, 비롱 장군의 두개 기병연대는 오후 10시 경 비롱의 명령 없이 진지를 이탈해서 퇴각했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비롱은 서둘러 퇴각을 막기 위해 홀로 기병 연대를 따라갔지만, 기병 연대는 너무나 빨리 퇴각했기에 진지에서 거의 3마일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겨우 따라잡을수 있었지ㅇㅇ;


연대원들이 모두가 배신자가 되었다고 외치치며 비롱은 병사들을 설득했고, 40~5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비롱의 설득에 따라 다시 진지로 돌아갔지만, 진지로 돌아가지 않았던 이들은 곧장 비롱의 직속 상관인 로샹보 백작(Jean-Baptiste Donatien de Vimeur, comte de Rochambeau)이 있는 발랑시엔으로 가서 '오스트리아 군에 설득당한 비롱이 군대 전체를 데리고 배신'했다고 허위사실로 고발했어ㅇㅇ; 






28.jpg



비롱은 다음날인 4월 30일, 딜롱(Théobald Dillon)군의 패배소식을 들었고 끼에브항(Quiévrain)을 계속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나누어 그곳에 주둔시켰지만, 비롱은 적에 대항하는 모든 시도를 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보충병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기에 끼에브항(Quiévrain)을 포기해야만했지;; 


결국 비롱이 오스트리아군의 포위를 염려해 퇴각을 결심하고, 프랑스 군이 떠나자마자 끼에브항(Quiévrain) 및 에노주(Henegouwen 州)는 요시아스의 오스트리아 군에 의해 점령당했어ㅇㅇ 


비롱군은 진지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최대한 발랑시엔(Valenciennes)으로 도주했는데, 결국 프랑스 군은 수많은 병사를 적의 칼끝 뿐만 아니라 퇴각 도중 굶주림과 피로로 잃었어ㅇㅇ;



29.jpg




세번째 공격은 샤를(Carl) 후작 지휘 아래 14,000 명의 보병과 250마리의 말이 동원되었는데, 샤를 후작은 뷔르네(Veurne)로 진격했으며, 플레미시(Flemish)지방을 점령할뻔 했으나 전투를 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플레미시의 도시들이 이미 요시아스 공작의 오스트리아군에 성문을 열어줬기 때문이었지;;


공성전을 벌일 각오로 도시를 포위하려고 하였지만, 연계 작전들이 다 실패로 끝나면서 프랑스군은  됭케르크(Dunkerque)로 후퇴 할 수 밖에 없었어.


 






결국 뒤무리에의 몽스(Mons)와 릴(Lille)에서의 실패는 프랑스 군에 큰 치명상을 안겼을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에 대해서도 큰 치명상을 안겼는데, 귀족 장군들의 연이은 실패는 국민들이 귀족들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쳐다보게 했으며, 이것은 루이 16세 부부의 불행한 운명을 더욱더 확고하게 만들게 되어버린 전쟁이 되었으며, 이는 혁명군이 희대의 풍운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이어지는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어ㅇㅇ














다음글은 무너지는 북부 방면군과 라파예트의 처절한 방어전에 대해서 써볼께ㅇㅇ


좋은 밤 보내라 게이들아ㅋ















이글을 쓰는데 참고한 문헌


Bernadotte: the first phase (1763-1799) (1914,Barton)

History of the wars of the French Revolution : From the Breaking out of the War in 1792, to the restoration of a General Peace in 1815(E. Baines 1817)

Bertaud, Jean-Paul. The Army of the French Revolution: From Citizen-Soldiers to Instrument of Power (1988), a major French study

Black, Jeremy. British Foreign Policy in an Age of Revolutions, 1783–93 (1994)

Blanning, T. C. W.. The French Revolutionary Wars, 1787–1801. (1996) excerpt and text search

Bryant, Arthur. Years of Endurance 1793-1802 (1942);on Britain

Connelly, Owen. The wars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1792–1815 (2006)

Crawley, C. W., ed. The New Cambridge Modern History, Vol. 9: War and Peace in an Age of Upheaval, 1793-1830 (1965), comprehensive global coverage by experts


Doughty, Robert, and Ira Gruber, eds. Warfare in the Western World: volume 1: Military operations from 1600 to 1871 (1996) pp 173-94

Dupuy, Trevor N. and Dupuy, R. Ernest. The Harper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2nd ed. 1970) pp 678-93

Esdaile, Charles. The French Wars 1792-1815 (2002) 113pp excerpt and text search, ch 1

Forrest, Alan. Soldiers of the French Revolution (1989)

Forrest, Alan. "French Revolutionary Wars (1792–1802)" in Gordon Martel, ed. The Encyclopedia of War (2012).

Fremont-Barnes, Gregory. The French Revolutionary Wars (Essential Histories) (2013) excerpt and text search

Gardiner, Robert. Fleet Battle And Blockade: The French Revolutionary War 1793-1797 (2006), naval excerpt and text search

Griffith, Paddy. The Art of War of Revolutionary France, 1789-1802 (1998) excerpt and text search; military topics, but not a battle history

Knight, Roger. Britain Against Napoleon: The Organisation of Victory, 1793-1815 (2013)

Lavery, Brian. Nelson's Navy, Revised and Updated: The Ships, Men, and Organization, 1793-1815 (2nd ed. 2012)

Lefebvre, Georges. The French Revolution Volume II: from 1793 to 1799 (1964).

Lynn, John A. The Bayonets Of The Republic: Motivation And Tactics In The Army Of Revolutionary France, 1791-94 (1984)

Rodger, A.B. The War of the Second Coalition: 1798 to 1801, a strategic commentary (1964)

Ross, Steven T. Quest for Victory; French Military Strategy, 1792-1799 (1973)

Ross, Steven T. European Diplomatic History, 1789-1815: France Against Europe (1969)

Rothenberg, Gunther E. Napoleon's Great Adversaries: The Archduke Charles and the Austrian Army 1792-1814 (1982)

Rothenberg, Gunther E. "The Origins, Causes, and Extension of the Wars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 (1988) 18#4 pp. 771-793 in JSTOR


Schroeder, Paul W.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s 1763-1848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advanced diplomatic history; pp 100-230 online

Schneid, Frederick C.: The French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 European History Online, Mainz: Institute of European History, 2011, retrieved: 29 June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