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올린걸 자기전에 살짝 맛폰으로 고치려다가 똥망해서 새로 재업했음....ㅠㅠㅠ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1탄. 관산성 전투. 과연 신라의 뒷통수인가?

http://www.ilbe.com/1990768533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2탄. 백제와 대가야 그리고 왜(倭)의 삼각동맹과 신라의 한성 점령

http://www.ilbe.com/2041803634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3탄. 복수전의 서막 - 관산성 전투의 초기 상황

http://www.ilbe.com/2163761455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4탄. 신라판 300인 굴산성 전투와 핏골전투

http://www.ilbe.com/2177508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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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탄. 백제의 영웅왕, 구천에서 지다.

http://www.ilbe.com/218209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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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탄 마지막편. 백골산 전투, 삼한의 판도를 바꾸다.

http://www.ilbe.com/2187510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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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외전. 대가야의 멸망과 왜왕 킨메이의 분노에 찬 절규

http://www.ilbe.com/2283414259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외전.삼국시대 각국의 방어구에 관하여 - 고구려편

http://www.ilbe.com/2288592474












기다린게이들이 있나 모르겠盧


간절히 바래왔던 시험의 합격으로 인해 한동안 이것저것 놀기 바빠 준비하느라 똥을 싸지 못한점 미안하盧;


빵빵히 쌓인 똥을 싸기 위해차기작을 고심하다가 바로 의자왕으로 넘어가는것 보다는 그의 아비인 무왕의 對 신라전을 서술하고 넘어가야 될거 같아서 이번시리즈는 무왕 치세 전반에 걸친 백제군의 공격과 이를 맞받아치는 신라의 움직임에 대해 서술해 볼께ㅋ





굵고 긴 똥을 싸기 전에 가끔 내 댓글의 답글로 얼마나 길어지는데 이렇게 뜸들이냐고 물어보는 게이들이 있어서 한번 정리해 보고 넘어가볼께ㅋㅋㅋ;;


이편을 포함해서 앞으로 쓸 시리즈를 제 5탄까지 염두하고 있어.





이번시리즈인 2탄은 무왕 치세 전반에 걸친 백제 마지막의 부흥기에 대해서 서술할까해ㅇㅇ

사실 바로 의자왕치세로 넘어가고 싶었지만, 무왕의 존재감이 가히 크기에 어쩔수 없이 간단하게 무왕 치세의 전투를 써볼까해ㅇㅇ;


시리즈 제 1탄이였던 관산성 전투처럼 자세하게 쓰면 몇갑절 늘어나겠盧... 댓글로 자세하게 쓸지 간단하게 쓸지 조언 좀 해줘라ㅋㅋ;




제 3탄은 의자왕 초,중반의 치세에 나타나는 백재의 파상공세에 대해 서술하면서 

일반적으로 지탄받는 신라의 외세개입에 대해 아주 잘못된 시각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신라를 매우 쉴드칠거야ㅇㅇ;




제 4탄은 의자왕 말기의 백제 멸망에 대해 써보려고 하고 있어.

가끔 유동닉으로 헛소리 지껄이면서 팩트랍시고 출처도 불분명한 선동자료 들먹이는 노땅이 보여서 한-중-일 사학자들의 논문을 바탕으로 아주 자세하게 멸망 당시 백제의 군사력과 방어전략에 대해서 소상히 써볼 계획이야.


이 또한 분탕홍어인 왈도할배가 황산벌 전투의 백제군 5000명으로 백제 총병력 5천설을 주장하는걸 개박살 내버릴거야ㅇㅇ




제 5탄은 백제 멸망의 하이라이트인 백제 부흥운동에 대해서 아주 심도있게 살펴보려고해. 

부흥운동이 얼마나 격렬하게 일어났으며, 국정교과서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아주 통렬하게 까면서,  당시 나당연합군과 백제,왜,고구려군의 전투를 관산성 전투 시리즈처럼 세세하게 서술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지에 대해 알아볼께.



막상 적어보니 올해안으로 다 쓸지도 미지수구먼....ㅋㅋㅋ;;;;


무튼 밀게의 역게화를 막기 위해 시리즈를 다 마친후 전부 삭제할테니 미워하지 말아줘라;













그럼 시리즈 제 2-1탄인 백제 무왕의 등극과 무왕 등극 이전 신라의 남부진출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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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가 멸망하면서 문주왕(文周王)이 목협만치의 권유로 웅진성으로 천도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이 세가지 계열로 나뉘는데 백제 귀족들은 크게 한성백제귀족, 초기 마한계 귀족, 후기 마한계귀족으로 나뉘어ㅇㅇ


그중 잘나가는 8개가문을 일컬어 대성팔족이라 하는데, 이 대성팔족(大姓八族)이 드라마 계백에서 나오는 사택(沙宅)가문의 이야기야.


사실 그 이전부터 대성팔족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서에 나오지만, 본격적으로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건 문주왕 치세부터이며, 한성백제 시절에는 백제 양대 가문인 해씨와 진씨의 시절이였지.





일단 자주 언급할 대성팔족의 주요 씨족에 대해서 한번 집고 넘어가는게 좋을거같아ㅇㅇ



대성팔족에 대해서는 네이버나 기타 여러 인터넷 사전에서는 백제 후기의 대표적 8개 가문이라고 지칭하는데, 사실 역사적으로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때부터 대성팔족에 대한 언급이 나와있어.



대성팔족이란 단어를 쓰지 않지만 대성팔족의 주요 가문들 중 몇몇이 보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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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사학계에서는 대성팔족의 근원을 근초고왕 이전부터 내려져온 백제 고위 귀족이라고 추론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후기 대성팔족에 해씨와 진씨가 나오며, 기타 고서기에는 대성팔족 중 상당수가 근초고왕 치세부터 역사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하거든ㅋ




이 대성팔족(大姓八族)은 역사서마다 다 각기 다른 성씨가 언급되는데, 그중 수씨,정씨,묘씨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중국의 역사서인 통전을 가장 정확하다고 한,중역사가들은 인정하고 있어






결국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을 정리해서 합리적으로 대성팔족의 성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아.



사(沙)씨 : 사씨는 중국의 단일성으로 표현한것이고, 결국 한국의 성씨로 표현하면 사택씨야. 


이 사택씨가 처음으로 역사서에 등장하는건 근초고왕의 마한정벌전인데, 인물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건 근구수왕 치세에 나와.


근구수왕의 남방정벌전(마한&신라) 당시 정벌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목라근자와 같이 남방경락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의 인물이 '사사노궤'이며, 형제인지, 사촌인지는 불분명한 '사지비궤'란 인물이 신라를 공격하여야 하는데, 신라의 미인계(?)에 농락당하여 당시 우방국이였던 가라국(아마 대가야 or 상,하문부족)을 공격하여 그 왕과 고위관료를 내쫒은 일이 벌어져 근구수왕이 자살을 종용하여 가문이 한번 몰락한 전례가 있어.


결국 한성백제시절에는 힘을 못썼지만, 결국 백제의 수도가 웅진으로 옮기면서 활발히 등용되는 가문이야.


백제 후기를 빼고 가장 유명한 사택가문 인물은 서기 488~490년의 고구려 정벌때 고구려군을 육지로 끌여들여 포위작전으로 고구려군을 괴멸시킨 '사법명'이란 인물이야. 이 사법명을 기점으로 사택가문이 세를 넓히게 되었다고 사학계에서는 추론하고 있어.


사(思)씨를 이 사(沙)씨와 동일한 가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한,중,일 역사서에 딱 한차례만 언급된 가문일 뿐만 아니라 기록에 나타나는 서기 484년 중국의 남조국가인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려다가 실패하는 기록을 근거로, 갑자기 갑툭튀하여 내법좌평이란 자리에 올라 사신으로 파견될 일이 없다는 걸 근거로 이 사(思)씨를 사(沙)씨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꽤나 가능성이 높은 설이야.


사(斯)씨또한 사(沙)씨와 동일한 가문으로 보는 견해(음운상 같다고..)도 있지만, 필자는 다르게 보는데, 그 이유로는 이 사씨가 반걸양에서 간첩으로 대활약을 벌이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근초고왕 치세를 제외하고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점을 근거로 근초고왕 당시 마한계 귀족들을 활발히 등용하였을때 등장한 마한계 귀족으로 필자는 추론하고 있어.


그 이후로는 뭐 다들 알다싶이 성왕이 전사하고 태자 여창이 위덕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사택가문의 일가독재시대를 맞이하게 되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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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택가문은 사비성 인근의 부여군 은산면에 거점을 두고 있는 사비계통의 귀족가문이야.







연(燕)씨 : 연씨는 시조가 불분명해. 하지만 기록상 첫번째로 등장하는건 해구의 난때 해구를 돕다가 폭망한 은솔 연신(燕信)의 기록이 있어ㅋㅋ;


그 후 연돌이 서기 490년 9월 달솔로 등용되면서 대성팔족으로서의 첫 등장을 알렸으며, 서기 497년 5월 병관좌평으로 승진하면서 연씨가문을 대표적 귀족가문으로 올라가게 되었지.


이 연씨에 대해서는 크게 비중을 두는 편이 아니지만, 사택가문과 마찬가지로 사비계통의 귀족세력이였어.


세력 근거지는 필자의 능력이 미천하여 못찼겠盧...







해(解)씨 : 사실 대성팔족에 들어가긴 하나, 동성왕 이후로부터는 2등가문으로 추락하게 되는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이야.


사실 해씨는 진씨와 같이 백제의 양대가문이였는데, 전지왕이 왕으로 등극할때 큰 힘을 보태 정권을 잡았으며, 목씨가문이 구이신왕과 팔수부인을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려다가 해씨에게 진압당하는 기록이 있어. 하지만 455년 반란으로 인해 해씨가문이 거의 멸족 할 뻔 했지만, 한산대전(장수왕의 한성공략)에서 기록이 나오는걸 보면 개로왕 치세에도 어느정도 가문의 기세가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할거 같盧...


문주왕과 삼근왕을 옹립하는데 해씨가문이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쳤다고 하나... 동성왕 치세부터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다가 성왕치세에 한번 등장하는걸 보면 클라스가 떨어졌다고 보는편이 맞을듯해.


또한 역사서의 기록을 면밀이 교차검증을 하면 꽤나 흥미로운 점을 접할 수 있는데, 사실 백제왕의 성씨는 고씨, 후대에는 부여씨로 불리웠다고 하나, 온조왕과 사반왕까지 백제왕들의 성씨는 해씨라고 보는 견해도 있어. 그 이유로는 삼국사기 기사들이 당시의 상황과는 약간 어긋나는 시간이 있으며, 이를 4갑자나 3갑자,1갑자로 당겼거나 아니면 목지국에서 벌어진 일을 그대로 차용해서 기사로 썼다는 점이라는데.... 이점은 학계에서도 명확하게 뭐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잘 모르겠다;


아마 서기 190년대를 기점으로 임진강 이남 ~ 한강 이북에 세력을 잡을때는 해씨로 분류하고, 그 이후 석촌동 고분지(몽촌토성)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는 부여씨(고씨)로 개명해서 해씨와 거리를 둔 것이라고 생각을 하나... 뭐라 명확하게 설명을 못하겠다; 미안하盧....


이 해씨는 관산성 전투 후반부인 백골산 전투에서 많은 수가 전사하는걸로 기록된걸 볼 때, 친왕파 귀족으로 추론되고 있어ㅇㅇ


유명한 해씨가문의 인물로는 해신,해충,해구,해례곤,전자왕의 2비인 해씨들,개로왕의 비,비유왕의 비 등이 있어.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해씨가문은 한성계통의 백제 귀족가문이자 대륙 즉, 온조와 비류를 따라 내려온 부여(동부여)계의 귀족가문이야.


또한 후기 웅진,사비백제 시절 친왕파의 대표적인 가문이기도 하지ㅋ








진(眞)씨 : 진씨는 해씨와 마찬가지로 부여계의 한성계통 백제 귀족가문이지만 부여계는 아니라고 비정되고 있고, 백제 초기 양대 가문중 하나야.


이 진씨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건 근초고왕의 외척가문이 되면서 부터인데, 근구수왕과 침류왕 모두 진씨와 혼인으로 왕권강화를 한점을 근거로 근초고왕 이전부터 강대한 가문중 하나였다고 추론 할 수 있어


하지만 서기 406년 1월을 기점으로 해씨에게 권력을 빼앗기게 되고 그 이후 전지왕의 즉위로 거의 2등 가문으로 밀려나버리면서 삐딱한 테크를 타가가 그 후 첩례를 지원을 하여 개망테크를 타게 되버렸지ㅇㅇ;


그 이후 역사서에 등장 안하지만, 한산대전(장수왕의 한성공략)을 겪었음에도 어느정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추론하고 있어.


서기 478년에 일어난 해구,연신의 난을 진압하면서 다시 상승세를 타는듯 하였지만 초기 마한계 귀족들인 웅진세력에 밀려 웅진,사비 백제때는 결국 2등가문으로 전락하게 되버리며, 관산성 전투의 마지막인 백골산 전투에서 이 진씨들의 상당수가 전사하면서 2등 가문으로 확정이 되버렸지.


진씨의 방계 가문으로는 진모(眞牟)씨,조미(祖彌)씨,저미(姐彌)씨가 있으며, 해씨와 마찬가지로 후기 웅진,사비백제 시절의 대표적인 친왕파 가문이지ㅇㅇ








국(國)씨 : 국씨에 대해서 사학계는 복성으로 고이(古爾)씨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개연성이 높다는 이유를 들고 있어.


자세한건 잘 모르겠지만 고이씨라고 비정을 한다면 이 국씨는 한성계통의 귀족가문으로 볼 수 있으며, 기록상 유명한 인물로는 서기 475년 9월과 서기 487년에 활약한 고이만년과 고이해를 들수 있어.


고이만년은 알다싶이 한산대전에서의 배신자이며, 고이해는 영군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을 막았던 백제장수야ㅋ


사실 고이만년으로 인해 고이씨는 백제의 반역 가문으로 낙인이 찍히지만, 그 이후 고이해의 활약으로 고구려 수군의 상륙작전을 6번이나 막아내면서 당시 구국의 가문으로 칭송받고 결국 인정받아 왕조의 인정을 받았어ㅇㅇ


그 이후로는 자세한 이야기를 모르겠盧... 뭐 결국 수서나 중국역사서에 후기 대성팔족 중 하나로 적혀있으니 고이해의 대활약으로 후기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볼 수있겠盧...









목(木)씨 :시조가 불분명한 가문이지만 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목씨 가문의 인물은 목라근자야.


이 목라근자는 서기 369년의 마한을 정벌하기위한 남방공략전과 서기 382년 사지비궤가 난을 아주 손쉽게 진압하면서 백제 최고의 장수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어. 하지만 그의 아들인 목만치가 구이신왕과 팔수부인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고, 팔수부인과 소라넷을 찍다가 정권을 되찾으려는 해씨들의 쿠데타로 실각해버렸지..;;;;;


하지만 멸문지화를 당하지는 않았는지, 서기 455년 9월의 정변에 참전해서 명예회복을 하고, 개로왕때에는 국상or대좌평인 '목협만치'가 왕자 문주를 안전하게 도피시키고 웅진으로 천도시키면서 웅진백제시절 가장 큰 가문으로 발전하게 되었어.


※참고로 목협만치와 함께 개로왕의 심복중 하나인 조미가문(진씨의 방계가문)의 조미걸취는 목협만치와 함께 태자 문주를 안전하게 도피시키는데 일등 공신이였지만 목협만치와 다르게 해씨가문에 의해 먼저 제거되었어; 그 이유로는 한산대전의 결과, 조미가문의 본가인 진씨의 기반이 약해지면서 해씨의 공격을 받아 제거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ㅇㅇ


천안시의 이동.jpg



관산성 전투시리즈 1-5탄에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설명할때 나온 천안(現 목천)이 웅진 백제시절에는 최전방 요충지 역활을 하였기 때문에 목씨는 원래부터 한성 백제의 후방의 물자공급 및 병력 충원지 역활에서 더 업그레이드 되어 웅진 백제 시절에는 강력한 군사호족(귀족)으로 발전하게 되었어.


하지만 문주왕과 삼근왕 치세에 해씨가문의 견제로 다시한번 가문이 멸족할뻔 하였지만, 서기 490년에 '목간나'가 고구려의1~2차 상륙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다시한번 가문의 세를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


이후 이 목씨에서 방계가문이 등장하는데 그 가문이 바로 기(紀)씨인데, 이 기씨는 현재 우리나라에 없는 성씨이며, 통일신라-조선조 까지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아. 멸문지화를 당한것도 아닌데 없을리가 만무하잖盧?


※현재 우리나라의 기씨로 유명한 사람은 기레기이지만, 이 기씨는 한자로 기(紀)가 아닌 기(奇)씨이며 행주 기씨라고 불리우는데, 기(奇)씨의 유래는 우리나라의 성씨 중 가장 고대의 성씨로서 시조는 무려 기우성(奇友誠)으로 기자(箕子) 48대손이라고 행주기씨보에 나와 있어. 즉, 행주 기씨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의 후손이란 뜻이며, 고조선에서부터 내려온 유래깊은 가문이지.... 가문에 먹칠하는 기레기 out!




이 기(紀)씨를 흔적을 조사하면 뜻밖에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기(紀)씨의 기록이 바로 헤이안 시대의 일왕 고닌덴노 6년인 서기 815년에 편찬된 일본 고대 성씨의 근원과 가문의 내력을 적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등장해.


즉,일본 고대 호족으로 되어 있단 소리이며, 이는 일본 고대사회는 죠몬인이 일으킨 문명이 아닌 한반도 도래인이 일궈낸 문명이란 아주 강력한 증거가 되지 않盧? 


이러한 이유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가 목협만치와 같은 인물이란 설도 나왔지지만(동성왕을 기점으로 한 일왕가의 백제 혈통교체설의 근간),이건 요즘 들어서 부정되고 있어ㅇㅇ;


※목만치와 목협만치를 동일인물로 비정한다면, 목협만치의 당시 나이는 100세가 넘는 당시로서는 장수(長壽) 중의 장수급이므로 말이 안되는거지ㅇㅇ; 하지만 이에대해 반론이 있는데, 바로 일본서기의 2~3갑자 인상설이야ㅇㅇ. 다른말로 이주인상갑설이라고 하는 용어인데, 이는 일부 한-일 사학자들이 들고나온 이론인데, 현 주류 한-일 사학자들은 이 견해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어ㅇㅇ;


목씨는 앞서 설명했듯이 現목천을 기점으로 한 웅진계통의 귀족이야. 즉, 초기 마한계 귀족이란 이야기이지ㅋ 또한 관산성 전투 당시 친왕파 세력 중 하나였어.





※협씨 : 이 협씨는 목(木)씨와 같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데, 그 이유로는 목씨가문의 중흥기를 이끈 목협만치의 협자와 같다는 점을 근거로 사실 목씨가문은 복성으로 목협씨라고 부른다라고 하는데... 얼핏보면 맞는말 같아.


또한 중국측에서 이 목협씨를 목씨와 협씨라는 두개의 다른 성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여러모로 볼때, 협씨의 성을 가진 인물이 기록에 전무하다는 점을 근거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러므로 목씨(목협씨)라고 보는게 타당할듯 싶盧...ㅋ










백(苩)씨 : 사비,웅진에 걸친 귀족세력이라고 지칭되며, 동성왕 치세에 위사좌평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한 가잠성의 축조와 탄현의 방비를 맡았다는 기록을 볼때, 사비보다는 웅진계통의 귀족일 확률이 높다고 추론 할 수 있어.



※동성왕 치세의 위사좌평인 백씨가문의 사람이 가잠성과 탄현의 방비를 맡았다는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면 가잠성의 위치비정에 아주 좋은 근거가 될 수 있어.


왜냐하면 당시 백제의 지역방위시스템(?)은 지역의 호족들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를 근거로 가잠성의 위치로 요즘 학계에서 대두되는 경기도 안성설을 부정할 수 있어.  가잠성의 위치는 4~5가지로 나뉘지만 가장 개연성이 높은 지역은 바로 경기도 안성, 충청북도 괴산이야. 그러므로 탄현의 위치와 당시 백제 지역방위시스템(?)을 연결하면 탄현과 가장 가까운 지역은 경기도 안성이 아닌 충북 괴산이므로, 가잠성의 위치는 충북 괴산일 가능성이 높아ㅇㅇ; 


또한 경기도 안성지역의 삼국시대 산성 모두 집수시설이 발견되었으므로 경기도 안성의 가잠성 설에 대해 필자는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결국 백씨가문의 세력 근거지는 탄현과 충북 괴산의 중간지점인 충북 청주일거라고 필자는 가정할께ㅇㅇ



즉, 웅진백제 시절에는 꽤나 잘나갔다는 집안으로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무령왕의 친위정변인지, 백가의 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둘중 하나의 사건으로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뻔 했다는게 흥미로워ㅇㅇ


그이후 성왕 전사 이후 귀족세력이 득세하면서 대성팔족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지ㅋ







여러 중국사서에 적힌 순서를 바탕으로 본다면, 당시 백제는 사씨가 주도적인 귀족세력으로서 나머지 가문과 함께 백제왕과 정국을 쥐고 흔들었다고 볼 수 있어.




무튼 이러한 귀족들의 권력투쟁을 확고하게 잡지 못한 역대 왕들은 비로소 제 24대 어라하인 동성왕(東城王) 치세에 간신히 왕권을 수습하였지만, 동성왕의 의문스러운 사망으로 다시한번 흔들리는걸 둘째 아들이였던 무령왕(武寧王)이 사비성으로 천도하면서 신권을 억누르는 계기가 되었지.


그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聖王)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태자인 여창(餘昌)이 위덕왕(威德王)으로 등극하게 되면서 휘청거릴뻔 했지만, 위덕왕은 그 아비의 그 아들이란 이야기 처럼 성왕보다는 덜하지만 카리스마 넘치게 왕권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며 신권을 억눌렸어. 하지만 치세 말기부터 대성팔족(大姓八族)의 발언권이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결국 신권이 왕권을 넘어버리는 사태로 비화되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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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후기 왕조 계보와 활약한 장수들




백제왕의 계보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위덕왕 이래로 제 30대 어라하인 무왕(武王) 이전의 백제 왕들의 재위기간을 살펴보면 짧다는걸 느낄거야.


이점을 근거로 강력한 신권으로 인해 역대 왕들이 암살당하거나, 의문사 했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신빙성이 있다만.. 증거가 없지ㅋ;


이러한 불안정한 왕위 계승 속에서 무왕이 등극하게 되는데, 이 무왕의 출생에는 여러가지 많은 비밀이 있어.








다들 무왕 이야기를 한번씩 들었을텐데, 그 중 서동요라는 노래는 필히 들었을거야ㅇㅇ


일단 간단하게 삼국유사가 전하는 서동요와 여러가지 야사, 삼국사기 기록을 복습하면서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한번 파헤쳐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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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化公主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薯童房乙

夜矣 卯乙 抱遣 去如


선화공주님은

몰래 사귀어

맛둥 도련님을

에 몰래 안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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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나는 한국 최초의 4구체 향가.....




이 무슨 음탕한 김치년이란 말인가!?


서동요를 보면 마치 선화공주가 마 장수인 여장(무왕)을 사모하여 밤마다 떡치러 몰래 들린다는 이야기로 들려.



하지만 진평왕의 셋째딸이자 미모와 지혜를 겸비한 선화공주가 한낮 마장수인 여장에게 홀린듯 밤마다 떡을 칠리가 만무하지 않盧...?!








백제 제 30대 어라하로 등극하는 무왕의 이름은 여장(餘璋)으로서 그 출신배경이 아주 독특해ㅇㅇ;


삼국유사에 의하면 여장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의 용과 정을 통해 여장을 낳았다고 전해지고 있어.


여장의 어릴때 이름이 바로 서동으로,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걸 보면 어릴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였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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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사비유적정보지도를 중심으로 복원한 당시 사비성의 모습




근데 전해지는 이야기를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이면을 볼 수 있는데,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적혀있어.


남쪽 못가이므로 5부중 남부에 살았다고 추론 할수 있겠지?


고고학자들이 부여시 전반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는데, 전해지는 사비성 모습을 보면 이 못가 바로 위가 사비왕궁이 위치하고 있어.






그러므로 여장의 어미는 결국 못의 용(백제 왕)과의 불륜으로 태어난 서자인 가능성이 매우 높아.


왜냐하면 '과부'라는 단어를 살짝 살펴보면, 지아비를 잃은 여인이란 뜻인건 다들 알잖아?


왕의 총애를 잃어서 쫒겨났던가 or 정비의 시기를 받아 쫒겨나간 후궁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론 할 수 있어.






전자의 경우의 총애를 잃고 쫒겨났다고 본다면 사비도성, 특히 왕궁과 가까운 남쪽에 살 수 없었을테니 아마 후자인 정비의 시기를 받아 쫒겨나서 왕의 보살핌으로 궁궐 가까이에 살고 있었을거란 추론이 가능해.


그러지 않고서야 한낮 불륜으로 잉태된 서자출신의 마 장수가 어찌 제 30대 어라하로 등극할수 있겠盧? 다 혈통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지ㅋㅋ;


서동요를 배경으로 설명하면 이렇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경우인데... 이건 밑에서 서술해볼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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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튼, 장성한 여장(이하 서동)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가 그리 미인이 아닐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풀발기 한 나머지 머리를 깍고 서라벌로 향하게 되었어. 동네 꼬마들에게 공짜로 마를 뿌리는데,돈내지 않는 조건으로 서동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꼬마들에게 서동은 위에 언급한 서동요를 불러 달라고 요구하고, 결국 이러한 망칙한 노래는 삽시간만에 서라벌 곳곳에 퍼지게 되었고 결국 몇일이 지나자 궁궐까지 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다들 알테지만...


이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고관대작들은 길길이 날뛰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체고조넘인 왕의 딸이 한낮 미천한 마장수와 포풍 쎼크쓰를 하다니 용납할수 없었던 거지ㅇㅇ;;


뭐 그 이후로는 다들 알다싶이 진평왕이 마지못해 딸을 유배시키고 그 과정에서 서동이 유괴 자작극을 펼쳐 선화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아 어쩌구 저쩌구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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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삼국유사가 전하는 이야기를 보면 서동이 진평왕(眞平王)의 신임을 얻어 백제 30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단 스토리인데, 이건 현재 밝혀진 바로는 98% 구라야.


무왕(武王)이 진짜 서동인가? 하는 의문이 주된 요인인데,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헛점이 보여.





삼국사기에는 여장(餘璋)을 법왕(法王)의 아들로 확실하게 못박아 버리고 있으며, 무왕의 아내가 되는 선화공주는 삼국유사에서만 나오지 삼국사기와 여러 고사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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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의 덕만,천명공주




실제로 진평왕에게는 두딸이 있었는데 하나는 우리가 익히 아는 선덕여왕(善德女王)으로 즉위하는 덕만(德曼)공주, 다른 한명은 용춘(龍春)에게 시집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등극하는 김춘추(金春秋)를 낳는 천명(天明)공주 뿐이야. 결국 정사를 기준으로 보면 셋째딸인 선화공주는 없다는 소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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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판




또한 선화공주가 허구인 사실에 대해서 강력한 근거가 되는 지표가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되었는데, 알다싶이 미륵사지는 선화공주의 청으로 무왕이 전북 익산에 건립한 백제 최고의 사찰 중 하나로 알려져 내려왔지만,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판에서는 이 미륵사지의 창건자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무왕의 왕후가 기해년(서기 639년)에 지은것'이라고 떡하니 적혀있었어.


즉, 선화공주는 무왕의 정비가 아니였단 소리이며, 허구의 인물이란 소리이지.





그럼 백제와 신라간의 혈통관계는 결국 구라이며, 아무련 연결고리가 없는건가? 라고 묻겠지만 난 백제와 신라 즉, 무왕과 신라 공주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엄밀히 말해서 '있었다'라고 말하고 싶어.


단지 '선화공주'라는 허구의 인물이 아닌, 베일에 감춰진 여인이 있었다고 보는편이야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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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산 맹약 장소




그 이유는 서기 665년인 문무왕 5년에 작성된 취리산 회맹문의 기록에 의한것인데....


회맹문에 따르면 당이 웅진도독인 부여융의 아버지인 의자왕을 성토하는 구절 가운데 "친인(親姻)과 화목하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있어.


여기서 친인(親姻)이라 함은 무왕의 인척인 신라를 가르키는 문구야.



이는 서맹문에서 백제와 신라의 사이를 "혼인으로서 약속하고"라고 한데서도 뒷받침되지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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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에서 작성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에 따르면, 의자왕의 실정을 거론하면서 "동쪽으로 친인(親姻)을 정벌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여기서'친(親)'이 사친이효(事親以孝)에 잘 나타나듯이 '부모'의 뜻이 담겨 있어ㅇㅇ


결국 "동쪽으로 부모인 이웃나라를 정벌했다"는 해석이 되는거지;;






그럼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 생각은 이래. 서동요를 100% 다 받아들이는건 아니고 선화공주의 이야기만 빼면 될거 같아.


선화공주를 실존한 인물로 가정한다면, 무왕이 선화공주와 정분이 났다는 사실을 안 신라조정은 길길이 격분하였지만, 서동이 법왕(法王)의 아들인 사실을 알고 선화공주와 결혼시켰어. 이러한 가능성이 낮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서동은 어찌어찌 해서 신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다고 추론 할 수 있어.


또한 선화공주를 허구의 인물로 가정한다면, 러브스토리를 빼고 정치,외교적으로 담백하게 생각하면 결국 '무왕과 방계의 신라 공주 or 신라 유력호족의 딸과 결혼을 통한 정략결혼'이라고 볼 수 있지. 실제로 무왕이 결혼을 했다고 가정하는 서기 579년 ~ 600년 사이의 21년간은 백제와 신라 사이가 평화기에 접어들었을 무렵이거든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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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선화공주가 진짜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면 무왕 치세에 나타나는 對 신라전은 사실상 좀 아귀가 맞지 않아.


진평왕의 딸과 결혼한 무왕에게 진평왕은 최대의 정치적 은인이자 우방일텐데, 즉위 이후 무왕이 신라에게 취한 태도는 매우 적대적이라 도저히 인척관계로 볼 수 없기 때문이지. 국가간의 관계에 가족을 끌여들이는건 좀 어불성설이지만, 장인의 나라와 그렇게 혈투를 벌였다고는 볼 수 없어.


결국 선화공주를 신라의 방계 공주나 유력 귀족의 딸로 본다면, 진평왕을 상대로 즉위하자마자 무왕이 공세적으로 나선것을 어느정도 이해 할수 있을거라 봐.


따져봐야 처삼촌 & 처사촌 or 신라 유력 귀족의 딸이므로 이정도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이러한 유추는 책계왕(責稽王) 시절 아내로 맞아들인 여인이 대방군 태수의 딸이여서 고구려가 대방군을 공격할때 도운점을 좀 아리송하지만 근거로 들고 싶어.


즉, 국가간의 관계에 혈연정책을 끌여들였다면, 결국 무왕이 과연 장인의 나라인 신라를 그리 공격했을까? 하는 소리이지ㅇㅇ;





또한 다른 관점에서 분석한 설도 있는데, 이 서동을 무왕이 아닌 동성왕(東城王)으로 보는 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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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역사스페셜 서동설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편에서 다루웠는데, 동성왕의 어릴적 이름이 모대,모도로 서동의 우리말 음인 맛동과 흡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주장하며, 일본의 마나노장자 설화와 서동설화가 거의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도 제시하고 있으나... 지금까지의 통론과는 아주 상반되는 견해라서 아직까지 뭐라고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구만;;






그럼 삼국유사의 서동요는 무엇때문에 실린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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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시리즈 내내 설명하겠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한 신라의 정치적 공세라고 규정하고 싶어.


즉, 의자왕 치세의 對 신라전을 국가간의 혈투가 아닌 폐륜의 행동으로 보게끔 하여 백제 멸망의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는데,이모의 나라를 공격하여 많은 백성들을 죽였으며, 또한 외가 육촌의 사위와 딸(김춘추의 딸과 사위)을 쳐죽인 폐륜왕을 정벌한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지.


결국 이러한 소문을 내어 입에 입으로 전승된 결과, 고려시대에 이러한 이야기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어. 


이점에 대해서는 본시리즈 중반쯤 백제와 신라의 정보전에 관하여 설명할때 아주 자세하게 서술해 볼께ㅇㅇ











선화공주에 대한 정리는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문제는 무왕의 출생의 비밀이야.


삼국사기에서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로 못박아 놨지만, 이는 한,중,일 삼국의 기록에 비교하면 삼국사기에서만 그리 비정한다는것이 문제이지ㅇㅇ;


필자도 사실 무왕을 법왕의 아들로서 생각하였지만, 요근래 중국의 사서들을 찾아보고 법왕의 아들이 아닌, 위덕왕의 아들이였던 부여관(夫餘寬)의 아들인거 같아. 만약 법왕의 아들이라면 서동요를 억지로 끼워맞추면 생기는 여러가지 허점을 부여관의 아들이라면 단박에 메울수 있지ㅇㅇ


즉, 왕자시절엔 법왕의 눈을 피해 불우하게 보내다 왕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불우한 청년시절이 서동요에서 나타나는 '마장수 서동'의 케이스와 얼추 맞아 떨어진다는것이지ㅇㅇ



게이 생각이 그런것 일뿐 근거는? 이러는 밀게이들이 있겠지?




중국의 사서인 후주서(後周書)와 풍속통(風俗通), 만성통보(萬姓統譜), 성보(姓譜)에 의하면 백제 무왕의 생부는 부여관(夫餘寬)이라고 하는데, 이는 19세기 학자인 이규경(李圭景)이 자신의 저서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중국 사서인 풍속통,만성통보,성보를 인용하여 기록하였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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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國王夫餘寬生璋, 號帶方郡王。

生義慈, 唐拜帶方郡王金紫光祿大夫。

生隆, 熊州都督隆。生文宣, 司膳卿左衛大將軍樂浪郡公。

此見《萬姓統譜》又《姓譜》


백제국왕 부여관이 장을 낳고 호는 대방군왕이다. 

그가 의자를 낳으니 당나라로부터 대방군왕, 금자광록대부를 받았다. 

그는 융을 낳으니 웅주도독이고, 그는 문선을 낳으니 사선경 좌위대장군 낙랑군공에 봉해졌다. 

이는 만성통보 또는 성보에 기사되어있다."



또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 제2권 천지편의 지리류 인종편에"부여,부유변증설(夫餘,鳧臾辨證說)'이라 언급하였다.


- 위키백과 진이왕 편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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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의자왕 등극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던 중 의자가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을때 뜬금없이 '대방군왕'이란 칭호를 받고 의아했었는데,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이 맞다면, 할아버지인 부여관의 칭호를 물려 받았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매끄럽게 연결이 돼!



하지만 부여관이 백제군왕이라고 표현된것을 보면 이해가 안갈거야


법왕과 혜왕의 이름이 관(寬)이 아니기에 위덕왕-혜왕-법왕 사이에 숨겨진 왕이 있는건가? 라고 의구심이 들겠지만, 이는 무왕이 왕이 되고 나서 추증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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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우치 가문의 영지



이는, 조선 정종(定宗)때 무로마치 막부의 거대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인 오우치 요시히로(大内 義弘)가 자신이 성명왕(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琳聖太子)의 후손이라는것을 확인, 입증해달라는 공문을 정종 1년인 서기 1398년 7월 정식으로 서한을 보낼때 같이 보낸 가문의 족보를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과 도요타(豊田) 가문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도요타 가문의 족보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족보에 나오는 진이왕(부여관)을 후주서와 퐁속통 등의 중국사서가 당시 어떤 사서를 통해 그대로 차용한건 아닐까?










결국 종합해서 살펴보자면, 위덕왕의 아들이였던 부여관(夫餘寬)의 아들로 출생한 부여장(夫餘璋)은 혜왕과 법왕의 등극으로 인해 눈치밥을 먹으며 살다가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최고 귀족 중 하나인 사택(沙宅)가문의 적덕(積德)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신라의 유력귀족의 딸 or 신라 왕조 방계의 공주와 결혼하였다고 보는게 좋을거 같盧....





그럼 무왕의 두 여인의 결혼 순서는 어찌 될까?





서동요를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선화공주(?)가 무왕의 첫번째 부인이 되며,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의 두번째 부인이 되지 않겠盧?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애매한것이 사택지적비에는 분명 무왕의 정비는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어;











이걸 어찌 생각해야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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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이 백제 제 30대 어라하로 등극한 후 2년동안 신라와 백제는 소강상태였으며, 또한 무왕 치세 중반부에 백제와 신라는 치열했던 전쟁을 잠시 멈추고 한동안 소강상태로 접어든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추론한다면, 무왕은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황에서 백제 무왕으로서 등극하였다고 가정을 한다면 가장 먼저 당시 귀족 중 강대했던 집안인 사택가문과 연을 맺어야 되었을거야.


결국 무왕의 첫번째 부인이자 정비는 사택적덕의 딸이며, 왕으로서 등극한 후 바로 or 치세 중반기쯤 신라와의 전쟁을 잠시 소강상태로 만들기 위해 마치 동성왕의 나제동맹처럼 신라 왕조의 방계가문의 공주와 정략 결혼을 하였다고 보면 좋을거 같盧.....








정리하자면 무왕의 정비는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 무왕의 후비로는 신라의 고위 귀족의 딸 or 방계 공주이였을거라 추론 할 수 있을거같아ㅇㅇ


뭐... 내 개인적인 추측이 매우 다분히 들어갔지만 말야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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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왕으로서 등극하기 위해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하나인 사택가문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서 등극하였기 때문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선 자신의 능력을 보여야만 했어.


군주가 절대왕권을 휘두르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 전쟁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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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聖王)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위덕왕은 신라의 정복군주인 진흥왕의 노도와 같은 공격을 가까스로 막는 모습을 보여.


그렇지만 그 아비의 그 아들이라고 위덕왕 또한 성왕보다는 못하지만 군사적 감각이 있었던 만큼, 날카로운 비수를 신라의 옆구리에 찌르는 상황도 연출되지만, 사실 위덕왕 치세 말기부터 무왕 이전까지 백제는 신라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양상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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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산 전투 후반부 상황도



백골산 전투에서 백제 주력군이 김무력의 신주군단에게 괴멸되면서, 백제는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지방의 지원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고, 결국 병부령 이사부(異斯夫)의 쾌속같은 진격으로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가 속절없이 멸망해버리면서 가야는 신라에게 복속당해버리게 되었어.



※참고로 가야를 연맹체로 보는 견해는 최근들어 부정되고 있으며 연맹체가 아닌 제국(諸國) 즉, 각기 다른 나라로 보는 견해로 바뀌고 있다고 해ㅇㅇ; 결국 끈끈한 혈맹으로서의 연맹체가 아닌 서로 각기 다른 소국끼리 뭉쳐있던 국가(?)라고 보는 편이 더 알맞다! 라고 사학계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는거지ㅋ




아랫짤을 보면서 신라의 파상공세를 한번 살펴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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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반(554~567) 당시 삼국의 영토



신라의 맹공으로 백제는 충청도 지역인 청주,증평,청원과 전라도 지역인 광양,여수,남원,임실 지역을 빼앗기는 등의 수세에 몰린 형국이 보일거야.


고구려 또한 북한산성 이북의 고구려 영토를 거의 빼앗긴 모습과,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남부를 모조리 빼앗겼지ㅇㅇ





사실 진흥왕 개인의 능력과 당시 신라군 장수들의 능력도 출중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타고 났다고 봐야 될거같아.


백제의 경우에는 위덕왕 치세 말기부터 자행된 귀족들의 파행과 고구려의 북부전선의 안정화의 영향으로 신라가 때를 잡아 빼앗았다고 봐야 정확할듯해.


※참고로 이 지도는 다들 고딩때 많이 봤겠지만, 바로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진흥왕 치세의 신라 강역도야. 근데 웃긴건 왈도할배가 이걸 바탕으로 7세기까지 이러한 영토를 신라가 복속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게시물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개소리라고 말 할 수 있어. 왜냐하면 하슬라(現 강릉) 위쪽이였던 비열홀주는 신라가 점령한지 10년남짓만에 고구려가 다시 되찾으며, 앞으로도 서술하겠지만 백제 무왕치세인 신라의 진평왕~선덕여왕 시절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매우 압박하여 신라의 영토가 위의 지도와 아주 상이하게 달라지거든ㅇㅇ; 뭐... 후대의 예시가 아닌 무왕이 왕으로서 등극한 서기 600년, 즉 7세기 초반에 이미 고구려군이 하슬라을 코앞에서 압박하고 있었어ㅇㅇ
















무튼, 무왕이 왕으로서 등극한지 2년 뒤인 서기 602년


불안한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게 되는데, 그 첫 전투는 현재 전라남도 남원,함양 일대의 아막성 전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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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아막성 전투의 주체는 무왕이 아닌 위덕왕 이후 백제 정국을 주도하던 귀족들에 의해 전투가 주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아무리 강대한 귀족세력이였던 사택가문을 등에 엎고 왕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아막성 전투 당시 참전했던 백제군 40,000명을 사택가문에서 지원했을리가 만무하고, 또한 무왕과 사택가문이 정국을 쥐고 있었다고 사택씨 1개 가문보다 나머지 대성팔족 7개의 가문의 역량이 높았기 때문에 억지로 강요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고는 생각 할 수 없지 않겠盧?


아막성 전투의 주도세력이 무왕과 사택가문이 아닌 귀족세력들이였냐에 대한 내 생각은 2가지야.






첫번째. 백제군 4만이 대패하면서 생기는 백제사회의 인적,물적 손실과 이에 따른 사회적 혼란 야기를 살펴볼때, 무왕과 사택가문이 직접 개전을 주장하여 참전했더라면, 이는 심각한 왕권약화 및 지지기반이였던 외척가문의 몰락을 초래하는건 식견있는 밀게이들이라면 단박에 알아차릴거야ㅇㅇ



두번째. 아막성 전투에서 백제가 대패하면서 일어나는 무왕의 절대왕권 구축은 사실상 첫번째를 근거로 말이 안되며, 무왕이 절대왕권을 구축하는데 지지기반이 되었던 친왕파 귀족들의 정계 등장이 아막성 전투를 기점으로 나타나는 점을 근거로 전쟁의 주체는 무왕과 사택가문이 아닌 백제 귀족세력이였다고 생각할수 있어.





결국 필자의 주장은 백제 무왕 치세 첫번째 전투인 아막성 전투의 주체는 무왕과 사택가문이 아닌 백제 귀족세력들이였다는거지ㅋ;


조금 부족한 근거이겠지만 천천히 글을 서술하면서 중간중간마다 왜 그랬는지 설명을 가미해 볼께!












아막성 전투를 바로 들어가기 앞서 아막성 전투의 시,공간적 배경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야 될거같아.


뜬금없이 첫번째 시리즈였던 성왕의 관산성 전투에서 무왕의 아막성 전투 연결은 시간적으로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을거 같지 않盧?


간보는게 아니라... 역사는 물 흐르듯 이해를 해야 하며, 군사적 관점 또한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연동을 해야 좋지 않을까? 하는거니 이해바란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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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전반 고구려 20대 태왕인 장수왕의 충격과 공포의 남진정책에 크게 피해입은 백제와 밟혀 죽기 일보 직전이였던 신라는 긴밀한 공조관계를 맺고 나제동맹을 맺었지만, 서기 552~553년 신라가 금현성과 도살성 탈취, 한성지역 점령을 계기로 걷잡을수 없이 파국의 형태를 띄며 적대적 관계로 돌아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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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로간의 불신으로 촉발된 적대적 관계로 인해 서로가 철천지 원수가 되버렸던 상황에서 서기 554년 백제의 영웅왕이였던 성왕은 태자 여창을 앞세워 신라에 대한 피의 보복을 감행하기 위해 당시 신라군의 허브(HUB)였던 삼년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現 충북 옥천 삼성산에 위치한 관산성을 총공격하면서 초반 승기를 잡았으나, 신라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결국 고착상태로 전황이 이어졌으며, 관산성 바로 밑에 흐르던 서화천의 구천(구진베루)에서 삼년산군 중,하급 기병 장교였던 고간 도도의 습격에 한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되었지.


성왕의 죽음으로 인해 백제 연합군은 붕괴, 태자 여창이 이끄던 백제 주력군 3만은 백골산에서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이끈 신주군단 1만의 후방 급습과 이에 호응한 거칠부의 신라군 4만의 군세에 의해 괴멸당하면서 당시 삼국의 세력판도가 뒤집어져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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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성왕의 격문에 호응하여 국운을 걸고 출정을 한 대가야와 가야연맹(現 가야 제국으로 부름)은 구천 전투(관산성 인근 말머리고개)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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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의 죽음 이후 연합군의 구천 전투 전개도(?)


결국 이 괴멸적인 타격으로 인해 서기 562년 신라의 병부령이였던 이사부(異斯夫)의 전격전에 의해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차근차근 영역을 확장시켜 결국 서기 565년 고대 한반도의 4국 중 하나였던 가야연맹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버리고, 그 자리에 신라는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가야 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백제-왜(倭)세력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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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6세기 중엽 이후에 신라와 백제는 갑작스럽게 적대적인 관계로 재설정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필자가 쓴 관산성 전투 시리즈를 읽어왔던 밀게이들이라면, 백제 동성왕 시절부터 나제동맹이 삐걱거렸다는걸 기억 할 수 있을거야ㅇㅇ;


무튼,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어렵게 재탈취한 고토(古土) 한성 지역을 불과 2년만에 혈맹관계였던 신라에게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영웅이였던 성왕마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백제의 적대적인 감정은 극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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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양국의 군사적 긴장감은 모든 접경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양국의 군사적 긴장감은 7세기에 들어와 크게 고조되기 시작했어.


이후 서기 600년 백제 제 30대 어라하로 등극한 무왕 원년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백제와 신라, 양국은 국운을 걸고 처절한 군사적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지ㅇㅇ;


이러한 군사적 공방 속에서 특히 주목되는 지역은 現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일대를 놓고 서기 602년인 무왕 2년에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전투를 벌인 아막성 전투이며, 이 아막성 전투를 기점으로 60년간의 처절했던 전쟁의 막이 올랐어.




이 전투는 그 이전의 양국간의 전장이였던 지금의 경기도 및 충청북도 일대를 벗어나 소백산맥 남부지역, 즉 지금의 전라북도 동부 지역에서 벌어진 최초의 군사적 충돌이였으며, 특히 백제의 경우, 무왕이 즉위한 후 처음으로 수행한 정치적 활동이자 對 신라전이야.







뜬금 없겠지만 잠시 백제의 시각에서 벗어나 당시 신라의 시각에서 살펴보면서 아막성 전투가 일어나게 된 시,공간적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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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년 당시 삼(사)국의 영토



신라는 6세기 중반에 한강유역을 확보를 하므로서 상당한 경제적 이익과 아울러 향후 對중국 관계에서 독자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어. 특히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신라는 한강유역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공고히 함은 물론이고 법흥왕 이래로 추진해 왔던 가야지역 진출을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 시킬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지ㅇㅇ;


이에 대해 3가지의 사료를 바탕으로 한번 설명해 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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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年 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16년(서기 555년) 봄 정월,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眞興王 16年 1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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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의 연도를 한번 봐봐ㅇㅇ


555년이면 관산성 전투의 1년후인데, 신라가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했다는 기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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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년 당시 가야 세력권과 신라의 완산주




비사벌은 現 경상남도 창녕으로 비정되는 곳인데, 완산주 설치의 성격에 대해서 당시 신라의 주(州) 설치는 대개 공격적인 의미보다는 지역방어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볼수 있어. 이는 관산성 전투 시리즈 막판인 백골산 전투에서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金武力)에 대해 설명할때 생략했던 이야기인데, 신라의 주(州) 시스템은 향후 점령지 지배활동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스템으로서, 점령지를 영구 영토화 시키는 전략이라고 간단해서 설명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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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력 일러스트(?)



김무력(金武力)은 금관가야 왕족 출신으로서 신라에 복속된 가야계의 구심점 역활을 하던 인물인데, 그가 신주(新州)의 군주로 임명되면서 꽤 많은 수의 가야인들이 한성지역으로 이주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불안정한 점령지의 상황을 잠재우는 역활을 했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주민들로 하여금 원주민들을 눌러버리는 형태라고 할수 있겠盧...ㅋ



무튼, 당시 주(州)가 군사주둔지로서의 정(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듯이, 완산주 설치는 가야지역에 대한 군사 전진기지의 구축 및 영구영토화 작업의 일환으로 보는게 타당하지 않겠盧?


즉, 신라는 555년 창녕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가야 지역 진출을 준비하였다고 보는게 좋을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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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554년 당시 신라 신주의 영역

(대략 이정도라고 생각해줘라. 557년 북한산주 설치를 통해 555~557년 사이나 그 이전에 한성 북부의 고구려 영역을 신라가 가져갔을수도 있어ㅇㅇ)





그러나 신라는 곧바로 가야 지역에 대한 진출을 도모하지 않고, 일단 새롭게 확보한 한강 유역(新州)에 대한 경영에 치중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신라에 있어서 한강 유역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컸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해ㅇㅇ


※이 시기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보면 555년 10월 진흥왕의 북한산 순행, 556년 7월 비열홀주 설치, 557년 국원소경 및 감문주 설치, 북한산주 설치 등의 기사가 있어. 이는 신라가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를 통해 한강 유역의 안정적 확보 및 실질적인 지배권 확립을 도모하였다고 볼 수 있지ㅋ



신라는 555~558년에 걸친 일련의 한강유역 경영을 마치고 나서야 본격적인 대가야 병합에 착수하였다고 볼 수 있어.


그럼 다음 기록을 한번 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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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年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23년(서기 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이 부장이 되었다.

사다함이 5천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공격하며 전단문에 들어가 흰기를 세우니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眞興王 23年 9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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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가야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에 대한 기록이야.


한강 유역을 어느정도 안정화 시킨 이후 신라가 562년 이사부의 명을 받을 받은 사다함(斯多含)의 진공(進攻)으로 반란을 제압하고 그 지역을 병합하였다고 볼 수 있지.


물론 사료상의 '가야의 반란(亂)'이라는 표현을 놓고, 신라의 실질적인 가야 복속 시기를 562년 9월로 보는 견해와 그 이전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지만, 어찌되었건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완전하게 장악한 시기를 562년 9월로 볼 수 있지 않겠盧?


필자는 562년 9월의 대가야 함락을 신라의 가야 연맹 전체 복속이라기 보단 당시 맹주였던 대가야만의 복속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므로 그걸 표현한게 바로 밑의 짤이야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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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연맹의 붕괴와 소국들의 멸망 시기(서기 562년 9월 당시)

(소가야의 멸망시기는 필자의 개인적인 추측이며, 진주 고령가야의 복속시기에 대해서는 필자도 예측을 못하겠음;;)



무튼 다음 기록은 바로 윗 기록의 3년뒤의 기록인데 한번 살펴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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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六年 九月 廢完山州 置大耶州

23년(서기 565년) 9월,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를 설치 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眞興王 26年 9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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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를 살펴보면 대가야가 멸망한지 3년 후, 비사벌에 있던 완산주를 폐지하고, 대야주를 설치했단 기록인데, 대야주는 現 경상남도 합천으로, 신라가 이곳을 주치(州治)로 삼은 것은 교통로상의 중요한 요충지라는 점 뿐만 아니라 대가야의 맹주였던 가라국의 고토(古土)인 고령 지역을 견제하려는 목적 때문이였어.


※ 참고로 우리가 익히 아는 5가야 or 6가야는 하나의 소국이 아닌 여러개의 소국들이 뭉쳐있던 제국(際國)이였고, 대가야의 여러 소국 중 가라국이 대가야 제국(際國)의 맹주였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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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년 9월 당시 백제-가야-신라의 영역과 대야주의 위치



또한 대야주의 설치는 가야 지역을 장악한 신라가 이후 예상되는 백제와의 분쟁이나 백제방면으로의 진공을 염두에 둔 군사 전진기지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수 있지 않盧?


이와 같이 신라는 한강 유역 및 가야 지역 확보를 통해 인적,물적 기반을 새롭게 획득 할 수 있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백제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어.









길게 서술하였盧;; 간략하게 핵심적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아.





신라는 555년 비사벌(現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였으며, 562년 대가야를 병합한 후 565년 완산주를 폐지하고,

 대야주(現 합천)를 설치함으로서 가야 지역에 대한 통치 기반을 마련하였다.




어떠盧? 좀 정리가 되盧? 정리가 되었다는 전제하에 다시 쭉 이어가 볼께ㅋ







 주목할 점은 신라가 창녕 지역에서 합천지역으로 주치(州治)를 이동시켰다는 점인데, 이는 그만큼 낙동강 이서지성(以西地城)에 대한 복속 및 장악이 어느정도 안정화되었던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어.


당시 신라의 가야 지역 장악 과정과 시기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양상을 알 수 없어서 고민하던 차, 고고학적으로 접근하면 뭐가 나올까? 하고 뒤져봤는데 뜻밖의 수확을 거둘수 있었盧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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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각고배(短脚高杯)



이 지역을 살펴보면, 합천 삼가고분군, 합천 창리고분군, 합천 저포리 E지구 고분군, 진주 수정봉 및 옥정고분군, 사천 월성리고분군, 남원 두락리고분군, 남원 봉대리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신라의 단각고배(短脚高杯)를 통해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낙동강 이서(以西)의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여 지배했던 흔적을 간헐적으로나마 살펴 볼 수 있었어ㅇㅇ



한편, 신라가 가야 지역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신라와 백제 사이에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었는데, 즉 양국 간의 완충지대 역활을 했던 낙동강 이서(以西)의 가야 지역이 신라 행정구역이였던 하주(下州)에 편입되므로서, 양국의 국경이 맞닿게 된 것이였지ㅇㅇ


이때 신라의 통치구역은 대체로 소백산맥 일대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으로 파악 되는데, 그 결과 지금의 경기도, 충청북도 일대에서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양의 접경은 남원,운봉일대의 소백산맥 남부지역까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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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양국은 이 지역에서 소백산맥이라는 자연 경계를 방어물로 삼아 대치했을거라고 필자도 그렇고 밀게이들 또한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지 않盧?ㅋ





그렇다면, 아막성 전투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일대에 신라가 진출한 시기는 언제일까?



일단 대가야를 공격하여 병합했던 562년에서 아막성 전투가 발발한 602년 사이로 정리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다시 그 시기를 좀더 좁혀본다면, 대야주 설치시기인 565년을 전후로 한 시점에서 운봉 지역으로의 진출이 이루워지지 않았을까? 라고 필자는 감히 추측해 보는데 밀게이들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盧ㅋ








무튼, 가야 지역을 둘러싼 영역화 작업이 백제와 신라에 의해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던 6세기 초의 정황에서도 살펴볼수 있듯이,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신라는 백제와의 영토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을거야ㅇㅇ


특히, 기존의 가야 영역 중에서도 최전방에 해당되는 지역부터 장악하고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거라 생각하는데, 그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이 바로 운봉 지역이지. 어떠盧? 꽤나 연계성을 가지지 않盧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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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운봉지역은 대야주 설치 시기를 전후로 하여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감히 추론해 볼께ㅇㅇ;






내 추론에 대한 근거는 이 일대의 고고학적 양상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장수, 임실, 남원 서부지역과 달리 운봉 지역에서는 6세기 중엽까지도 고령 양식의 대가야 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다가 이어서 신라 토기로 대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는 이 지역이 계속 가야계 세력 권역으로 남아있다가 신라에 병합된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盧?


특히, 최근에 조사된 남원시 운봉읍 아영면 봉대리 2호분에서는 신라의 단각고배가 출토되어,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운봉지역까지 진출했던 흔적을 엿볼수 있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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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운봉일대의 고분군 분포도

(남원시의 척문리,초촌리고분군은 백제계 고분군)




또한 운봉고원에는 5세기 이후의 가야계 고분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두락리고분군, 월산리고분군,건지리고분군 등이 그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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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가장 규모가 큰 두락리고분군에서는 가야의 수장묘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원통형기대가 두락리 1호분에서 출토된 바 있고, 은장의 소환두대도가 두락리 4호분에서 출토되기도 하는 등, 운봉고원 내에서의 큰 위상을 보여주고 있지ㅇㅇ;


이를 통해 운봉고원의 가야세력은 두락리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라 판단 할 수 있어.




갑자기 뜬금없이 가야 이야기를 해? 라고 반문하겠지ㅋㅋ?;;


고고학적으로도 뜬금없는 사실이 튀어나오는데, 앞서 전술한 바와 같이, 이 두락리고분군 2호분에서 신라 계통의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던 일이 있었어.


다른 고분 석실들은 다 수혈식 석곽묘인 반해 이 2호분은 횡혈식 석실구조로 조성되었으며, 석실 내에서는 신라약식의 단각 유개고배편과 청동제 대금구가 발견되어, 이 지역과 신라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확인 할 수 있었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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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진식대금구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단각고배와 함께 출토된 청동제 대금구로, 소위 '황룡사형 대금구(皇龍寺型 帶金具)'라고 하는것인데, 대체로 7세기 전반 경 신라의 중앙과 지방 유력자의 무덤에 한정 부장되는 물품이야.


이를 통해 두락리 2호분은 7세기를 중심연대로 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볼수 있으며, 운봉고원 일대에 분포한 세력은 대가야 멸망 이후에도 한동안 원래의 지위를 유지했던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지ㅋ


필자인 내가 계속 짤에 가야의 영역을 나타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야. 까먹었을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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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후반의 가야 소국 범위(완산주 폐지와 대야주의 탄생)


(운봉지역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가야의 소국이였던 낙로국이 있는데, 

필자는 이 낙로국 또한 백제와의 완충지역으로서 복속시키되 운봉지역의 가야 세력처럼 소위 부용화 정책을 했을거라 감히 추측해볼께ㅇㅇ)




따라서 신라는 대가야 병합 이후 소백산맥 일대의 운봉 지역까지 진출하여,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였지만, 곧바로 운봉 지역의 토착세력을 분해, 해체하기 보다는 일단 그 세력을 인정하는 지배 형태를 취했던 것으로 볼 수 있어ㅇㅇ


이는 가야를 병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과 백제와의 접경이였던 운봉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급속한 변화 대신 토착세력을 통해 그 지역을 안정적으로 영유,지배하고 그 지역의 인적,물적인 기반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해ㅇㅇ


마치 백제의 부용화(附庸化) 정책과 비슷한 양상이지 않盧ㅋ









이번에도 길게 설명한거 같盧.....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는 6세기 중엽 이후 대가야를 병합하고 소백산맥을 넘어 운봉 지역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신라의 운봉 지역으로의 진출은 단순히 영토 확장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現 전라북도 동부지역인 남원,장수,임실 방면으로의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어ㅇㅇ



지역 이름만 쓰면 어디인지 헷갈려 할 수도 있으니, 짤로 한번 나타내볼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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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現 행정구역을 일일이 다 아는게 아니니 너그러이 이해바란다...ㅋ;;




하지만, 565년 대야주 설치 이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적극적인 진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의 혼란스러웠던 정치상황 때문인 것으로 추론 할 수 있어.


대외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진흥왕은 대내적인 정비에 눈을 돌려 566년 왕자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고, 황룡사, 실제사 등의 사찰을 완공하는 등 왕권의 안정화를 도모하였으며, 진흥왕 29년인 서기 568년에 건립된 마운령순수비에서는 진흥왕 스스로 제왕이라고 칭할 정도로 당시 신라의 왕권은 절정에 이르렀다는걸 볼 수 있지만...... 서기 572년인 진흥왕 33년에 동륜태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알력이 표출되었고, 혼란스러운 신라 내부의 정치상왕은 진지왕,진평왕 초기까지 이어졌어ㅇㅇ;



이러한 가운데 신라와 백제의 군사적 충돌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 들었는데, 진지왕 재위 시에 있었던 577년 578년 이 두차례의 교전을 제외하면, 양국간의 대규모 전쟁이나 빈번한 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어.


이시기에 해당되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백제는 주로 對중국 관계에 치중하면서, 내치(內治)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신라 또한 579년 진평왕이 어린나이로 제 26대 신라왕으로 등극하면서, 일련의 관제정비 정책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어.


결국 이 시기 신라,백제 양국은 군사적 충돌보다는 상호방어전선을 구축한 가운데 대내적인 안정을 추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지ㅇㅇ









하지만, 이러한 안정기도 얼마못가게 되었는데, 진평왕 등극초기 실시했던 관제정비가 실효를 거두고 대내적으로 안정을 이룩하게 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는데, 관리들의 인사업무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586)를 위시하여 공부(貢賦)를 맡는 주부(調府-584), 의례와 외교를 담당하는 예부(禮部-586) 등 신라의 일급 중앙행정관서의 정비는 진평왕 6년(서기 584) 건복(建福)으로의 개원(改元)과 함꼐 시작된 왕의 친정(親政)으로 인해 더욱 박차를 가한 것으로 보여져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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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진흥왕-진평왕 치세의 중앙 행정조직 개편안

(간단하게 도식화 한것이니 태클 걸지말아줘라...ㅋ; 자세하게 쓰자면 개스압이니..ㅠㅠ)



그리하여 진평왕 집권 초반부터 대대적으로 단행된 관제정비가 진평왕 13년인 서기 591년에 일단락 되면서, 강력한 왕권을 구사 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어.



또한 진흥왕대에 고구려와 맺은 밀약(密約)을 통해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 신라의 북방전선은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특히 6세기 후반에는 신라와 고구려간의 무력충돌 기사가 보이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양국이 적극적으로 연맹을 맺고 돕는 관계까지는 아니지만, 피차간의 충돌을 자제했던것으로 볼 수 있어ㅇㅇ



※6세기 중반 비열홀주(現 강원도 북부-함경북도 남부)로 신라군이 들어가 아래와 같은 짤의 형태를 보이지만, 568년 10월에 비열홀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한 기사를 볼때, 얼마안가 고구려에게 다시 복속당하였고, 또한 하슬라주 인근까지 고구려군이 남하한 형태의 지도를 나타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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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후반 ~ 7세기 초반(568~602) 당시 삼국의 영토와 진격루트





반면 이 시기에 고구려의 백제 공격 기사가 2차례 보이는데, 이는 6세기 후반 삼국 관계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는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가야 마저 멸망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 백제를 고립상태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ㅇㅇ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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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는 550~560년대에 공격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추진하여, 한강 유역 및 가야 지역을 장악하고 對백제 전선(前線)에서 우위를 확보하였음.



2. 신라는 진흥왕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세력의 알력과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570~580년대에는 왕권의 안정과 광역화된 영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대내정비 정책에 치중하였으며, 백제는 내치(內治)와 對중국 외교에 힘을 쓰면서, 양국은 당시 군사적 충돌을 자제하고 방어전선을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3. 이후 신라는 590년대에 접어 들면서 그간 추진해왔던 대내정비 및 왕권강화 정책을 통해 체제 안정화를 이룩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북방전선의 안정을 토대로 백제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하였으며, 이에 호응하듯 고구려 또한 2차례에 걸쳐 백제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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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盧? 한번에 윤곽이 잡히지? 당시의 국제정세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이겠盧?


아래의 짤이 당시 국제정세를 나타낸거야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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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대해서 너무 주저리 나열해서 백제의 상황에 대해서 잘 파악이 안될거야ㅇㅇ


이번에는 당시 백제의 국내 정세에 대해 살펴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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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聖王)의 뒤를 이은 태자 여창(餘昌)은 위덕왕(威德王)으로 등극하였지만, 관산성 전투의 패전 및 성왕의 죽음으로 야기된 왕권의 약화와 정국의 혼란을 등극 초기 잡아내야 되는 막중한 책임에 눌려 있었어.


문제는 관산성 전투 당시 친왕파 세력이였던 진씨 가문과 해씨가문의 좌평들과 귀족들이 대부분 전사하므로서, 집권 초기 위덕왕의 정치적 기반은 약했던 것으로 추론 할 수 있어. 따라서 이 시기의 귀족세력들은 위덕왕의 정치적 약세를 이용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갔던 것으로 보이지만, 위덕왕 치세 전반을 살펴보면'그아비의 그아들'이라는 말 처럼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의 유지를 받들어 성왕의 정책을 계승하고, 전쟁과 대외관계를 강화시켜 흔들렸던 왕권을 바로 잡았어



하지만.... 이 왕권 강화도 위덕왕 초,중반에 제대로 돌아갔고, 위덕왕 치세 말기 노령의 위덕왕이 건강으로 인해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걸 빌미로 귀족세력들은 다음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왕자 여아좌(餘阿左-혹은 여옥좌)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고(여기서 사신은 사신이 아닌 現 주일대사로 이해하면 편해), 위덕왕의 동생인 여계(餘季)를 다음왕위에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혜왕(惠王)인데, 이는 결론적으로 위덕왕의 왕권강화가 실패하였음을 시사하지ㅇㅇ


※ 누구처럼 사신을 볼모로 이해하고 왜(倭)가 당시 백제,신라보다 강려크한 국가라고 국까짓하는데, 왜(倭)가 한반도 국가를 능가하게 되는건 무로마치 막부시기부터 현격하게 차이난다... -_-; 누구말하는지는 xx할배는 알겠지? 당시 사신은 볼모가 아닌 파견 대사로 한-일 사학계가 2008년에 결론을 내렸는데, 일개 아마추어 따위가 사학계의 정론을 개무시하고 역사 운운하는게 참 웃기盧...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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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백제는 고질적인 내부문제인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로 전환되버렸고, 이와 같은 귀족세력의 정국 운영으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어.


게다가 598년 위덕왕 사후에 동생인 여계가 뒤를 이어 혜왕으로 등극했으나, 재위 2년만에 사망하였고, 그 뒤를 이은 법왕(法王) 또한 재위 2년만에 사망하였는데, 혜왕과 법왕의 단명(短命)은 그동안 정국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귀족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것으로 추정되고 있어ㅇㅇ


※혜왕과 법왕을 싸잡아 이야기 한거 같지만, 사실 혜왕은 등극 당시 70세의 고령의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사망은 노령으로 인한 자연사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ㅇㅇ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위덕왕의 손자였던 무왕이 지지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사택가문과 연합하여 즉위하였고, 이는 당시 백제 최고위 귀족들이였던 대성 팔족의 나머지 가문들의 견제를 받으며, 당시 백제는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을것으로 추론이 가능해ㅇㅇ











총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서기 590년대에 들어와 신라는 대내적,대외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對백제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고, 아울러 백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하였으며, 더욱이 당시 혼란스러웠던 백제 국내 정세는 신라의 군사적 진출 시도를 자극했다고 추론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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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양국의 군사적 긴장감은 7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가 운봉 지역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서(以西)지역 진출을 시도하면서 다시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어.




























너무 주저리주저리 쓴거 같盧......ㅋ


다 쓰고 보니 군사적 관점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해지게 '군사적'관점이 매우 낮네ㅋㅋㅋㅋㅋ;; 다음편은 확실히 군사적 관점이 들어가니 이해바라盧...ㅋ




오늘 저녁에는 신라의 남부진출로 인해 촉발된 60년간의 치열했던 전쟁의 서막인 아막성 전투의 발발 원인과 정확한 전개 과정을 파헤쳐 볼께!


발기찬 오전시간 보내라ㅋ











5줄요약



1.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 아닌 위덕왕의 아들인 부여관(夫餘寬)의 아들로서, 혜왕-법왕 치세동안 눈칫밥 먹고 자라다가 대성팔족 중 가장 강력했던 사택가문과의 혼인으로 백제 제 30대 어라하로 등극하였음.


2. 서동요에 나타나는 선화공주는 사실상 신라 왕조의 방계가문의 공주 or 유력귀족집안의 딸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정략결혼일 가능성이 높다.


3.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는 새로 차지한 한성지역의 점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경영하였으며, 가야지방의 지배권 확립을 위해 現 창녕인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여 향후 가야 지역 진공 준비를 하였음.


4. 새로 획득한 신주(한성지역)을 공고히 하였으며, 고구려와의 밀약으로 북방 전선이 안정화 된 신라는 진평왕 등극 초반, 중앙행정체계를 개편하면서 내치(內治)에 주력하였으며, 백제 또한 중국과의 외교와 내치를 통하여 양국간의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음.



5. 진평왕 초기 중앙행정체계 개편이 결실을 거두면서, 신라는 가야 전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소백산맥을 경계로 백제와의 대치상태가 고조되었음.


하지만 백제는 위덕왕이 끝내 왕권강화에 실패하자 혜왕-법왕 치세에 이르러 귀족 중심의 정치체계가 구축되면서 심각한 왕권약화가 일어났으며, 무왕 2년까지 지속되면서 신라의 가야 지역 지배권 확립을 눈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음.









(이글을 쓰는데 참고한 문헌,논문 목록은 아막성 전투가 끝나는 글에서 쓸께ㅋ)